범본 금강경

제15 持經功德分

동산/혜산방 2011. 11. 18. 15:00

本文(15 持經功德分)

67) 또 실로 수부티야, 어떤 사람이 아침에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치고(희사에 해당함) 낯에도 마찬가지로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치며 저녁에도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친다고 하자.

이렇게 해 백 천억 나유타라는 많은 겁 동안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친다고 하더라도 이 법문을 듣고 이를 비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앞의 경우보다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이 더 많은 복덕을 쌓게 될 것이다.

하물며 이 법문을 쓰고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독하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이 법문은 사의할 수 없는 것이며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수부티야, 이 법문은 최상의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사람을 위하고 가장 수승한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여래가 설한 것이다.

또 이 법문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독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낸다고 하자. 그러면 수부티야, 여래는 그들을 붓다의 지적능력으로써 알며 여래는 그들을 붓다의 눈으로써 본다. 그들은 여래가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수부티야, 그 유정들은 누구나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아서 갖출 것이다. 사의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무량한 복덕을 쌓아서 갖출 것이다. 수부티야, 이 유정들은 모두 깨달음을 그 어깨에 짊어진 자들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하열한 것을 신해하는 유정들은 이러한 법문을 들을 수 없다. 또 자아의 견해를 지닌 자. 유정의 견해를 지닌 자. 영혼의 견해를 지진 자. 개인의 견해를 지닌 자도 이 법문을 들을 수 없다. 또 보살의 서원을 세우지 않은 사람도 이 법문을 들을 수 없고 받들 수 없고 간직할 수 없고 외울 수 없고 해득할 수 없으니 그러한 경우는 없는 것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실로 어느 곳이든 이 경전이 설해지는 땅과 지역이 있다면 그곳은 천신들과 인간과 아수라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공양을 올려야 할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공손히 절해야 할 곳.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올려야 할 곳이 될 것이다. 그 땅과 지역은 탑 묘와 같은 곳이 될 것이다.”

67) [15장 지경공덕분]

 

本文

67) 또 실로 수부티야, 어떤 사람이 아침에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치고(희사에 해당함) 낯에도 마찬가지로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치며 저녁에도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친다고 하자.

이렇게 해 백 천억 나유타라는 많은 겁 동안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친다고 하더라도 이 법문을 듣고 이를 비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앞의 경우보다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이 더 많은 복덕을 쌓게 될 것이다.

하물며 이 법문을 쓰고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독하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바친다는 말은 육신공양을 할 때는 이를 보시라고 하지 않고 바친다는 말 즉 parityaga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제14離相寂滅分에서도 희사(parityaga)라고 표현하고 있는 단어로서 이것은 완전한 보시라는 뜻을 가진 용어이다.

따라서 바친다는 단어를 사용하므로 써 이제부터는 그 단계가 無生法忍證得8지보살의 단계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음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단계에서 법문을 쓰고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독하고 널리 드러내는 방법과 순서를 적은 경전취급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경전취급 은 아래와 같은 방법에 의해서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경전의 내용으로서 佛子라면 經典을 부처님 보듯 받들어야 할 것이다.

 

경전 취급 방법

1. srnoti (sru, to hear): 듣는다.

2. na pratiksipati (ksip. to throw): 내 팽개치지 말 것. 방기하지 말 것.(구마라집 스님은 이것을 不易 즉 거슬려서는 안 된다. 라고 번역하고 있음)

3. likhati (likh, to scratch): 긁다 이므로 쓰다 寫經을 말하는 것임.

4. uydgrhnati(grah, to seize): 움켜쥐다 이므로(執着意味) 받들다.

5. dharayati(Caus. dhr. to hold): 간직하다.

6. vacayati( Caus. vac, to speak): 외우다.(자꾸 말 하다의 뜻이므로 외우다가 됨)

7. paryavapnoti (ap. to obtain): 획득하다. 얻다. 이므로 解得하다. 완전히 理解하다.

8. parebhlyo vistarena bhasate(bhas, to speak): 남들을 위해 널리 이야기 해 줌.

9. parebhyo vistarena desayati(Caus. dis, to point): 남들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核心指摘해 주는 것.

10. parebhyo vistarena samprakasayati(Caus. ksa, to appear, make show) : 남들조차도 그 理解完全하게 되도록 이야기 해주는 것.

 

이것이 經典을 쓰고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독하며 나아가 널리 爲他人說 하는 방법과 순서이다.

이것은 경전을 취급하는 방법을 설하는 經典에서도 이순서는 그대로 유지됨을 알아야 한다.

 

 

本文

또한 실로 수부티야, 이 법문은 사의할 수 없는 것이며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수부티야, 이 법문은 최상의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사람을 위하고 가장 수승한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여래가 설한 것이다.

또 이 법문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독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낸다고 하자. 그러면 수부티야, 여래는 그들을 붓다의 지적능력으로써 알며 여래는 그들을 붓다의 눈으로써 본다. 그들은 여래가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수부티야, 그 유정들은 누구나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아서 갖출 것이다. 사의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무량한 복덕을 쌓아서 갖출 것이다. 수부티야, 이 유정들은 모두 깨달음을 그 어깨에 짊어진 자들이다.

라는 위 법문을 살펴보면 대상방법공덕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1). 대상(지송과 위타인설의) : 法門

2). 방법(지송과 위타인설의) : 경전취급방법 10가지 (앞에서의 경전취급방법 내용)

3). 공덕(지송과 위타인설의) : (1). 이름이 남는다. (부처님이 알아보아 줌)

(2). 무량복덕.

(3). 깨달음을 그 어깨에 짊어 짐.

 

여기서 먼저 대상인 이 法門은 어떠한 法門인가?

1). 思議할 수 없고. 比較할 수 없음.

2). 보살승에 나아가 서있는 자를 위한 법문( 최첨단의 법문)이며 가장 수승한 보살승에 나아가 서있는 자를 위한 법문(최신이며 최상승의 법문).

 

思議할 수 없으며 比較할 수 없다는 것은?

思議할 수 없다는 것不可思議라는 뜻으로 본래 法性이란 識別이나 思惟(사유)를 통하여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智慧로서만 가능한 것으로서 不可思議法門이기 때문에 思議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思惟란 속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로서 설명하려면 否定論理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法性否定論理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는 不思議法門이기 때문에 이야기로 하자면 否定論理뿐인 것이며 그래서 金剛經은 모두 否定論理로만 되어있는 것이다.

 

不可思議原語acintyo 로서 cint(선택)cit()에서 온 말로서 마음의 作用을 뜻하는 단어이다. 마음이란 실체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作用으로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의 作用이란 선택(選擇)하는 作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acintyo란 마음의 作用 선택작용(選擇作用)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은 선택작용이 끝난 것을 의미하며 마음選擇作用이 끝났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마음마음 이 아니려면 對象合一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이다.

對象合一하였다는 것청정한 한마음을 얻은 것이므로 이미 法性契合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比較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원어가 atulyo로서 tulyo는 잰다. 재다 의뜻으로서 흔들 리다.意味가 다분한 單語이다. 그러므로 atulyo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마음이 선택하지 않고 즉 선택작용이 끝나고 흔들리지 않을 때를 말하므로 바로 法性合一世界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法門識別이나 思惟하여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法門이 아니며 다른 것과 견주고 비교해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그런 法門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法性般若心經에서는 空性 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原典에서는 반야바라밀다 로 표기되는 것이다.

 

菩薩乘에 나아가 서있는 자를 위하고 가장 殊勝菩薩乘에 나아가 서있는 자를 위함이란?

 

漢譯에서 爲發大乘者 爲發最上乘者agrayana sresthayana로서 agra란 첨단부분(풀끝이나 바늘 끝)이란 뜻으로 大乘이라는 말은 없으며 意譯하면 최신 또는 최첨단의 불교를 접수한 사람이란 뜻이며 srestha란 가장 殊勝. 가장 잘 익은. 잘 영근 이란 뜻으로서 최첨단(最尖端)이면서도 가장 세련된 最高佛敎 수승(殊勝)佛敎라는 뜻으로 쓰인 단어이다.

 

따라서 최첨단(最尖端)佛敎이며 가장 殊勝最高佛敎에 나아가 서있는 보살승을 위한 법문이란 뜻이 되는 것이다.

 

功德부분에서

1). 부처님이 알아보아준다는 말은 경전에 이름이 남는다는 뜻으로서 經典에 이름이 남는 比丘敎理的으로 큰 잘못을 한 比丘와 그 깨달음이 탁월하였든 위대한 比丘임을 참작하여야 할 것이다.

 

2). 思議할 수 없고 比較할 수 없고 測量할 수 없는 無量福德을 쌓아서 갖출 것이라는 말은 반야바라밀다法門思議할 수 없고 比較할 수 없으며 최첨단이며 最新의 최상승의 法門이므로 福德도 이에 比喩하여 걸맞게 설명한 것이다.

 

3). 다른 품과는 특이하게 이 유정들은 모두 깨달음을 그 어깨에 짊어진 자들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漢譯경전에서는 이를 如是人等 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邈三菩提 라고 하고 있으나 原典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있으며 그 原語sarve te Subhute, sattvah samamsena bodhim dharayisyanti.” 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수보리라는 호칭을 빼면 sarve te sattvah (그 모든 有情들은) bodhim(깨달음을)(그냥 깨달음이라고 했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다.) dharayisyanti (간직할 것이다.) 라는 뜻으로서 그냥 그 모든 유정들은 깨달음을 간직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 간직하는 방법이 samamsena로서 여기서 samamsena가 번역상의 문제로 남게 된다. sama같은 이란 뜻이고 amsa分量. 수준. 정도 의 뜻이며 ena 으로 이다.

 

그러므로 같은 分量으로. 또는 같은 水準으로. 또는 같은 定度 의 뜻 이므로 그 모든 有情들은 같은 정도 또는 같은 수준의 깨달음을 간직할 것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하는데 이를 漢譯에서는 如來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어깨에 짊어질 것이다.” 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번역가 Conze 는 이를 All these beings, O Subhuti, will equally remember the Bodhi (the highest Buddha-knowledge). 라고 번역하므로 서 그 모든 유정들이 부처님이 깨달은 것과 같은 정도의 깨달음을 기억할 것이다(“간직할 것 이다.”기억할 것이라고 번역).” 라고 번역하고 있다.

 

漢譯에서는 如來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질 것이다. 라는 말은 如來와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부담할 것이다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도 있는 반면에 콘즈(Conze)如來의 깨달음과 같은 定度 또는 같은 水準의 깨달음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 부분은 다른 과 다르게 특별하게 제15持經功德分에만 있는 부분이므로 비교분석이 어렵다.

-* 나는 콘즈(Conze)의 번역에 한결 마음이 동하는 느낌을 갖는다.” *-

 

本文

왜냐하면 수부티야, 하열한 것을 신해하는 유정들은 이러한 법문을 들을 수 없다. 또 자아의 견해를 지닌 자. 유정의 견해를 지닌 자. 영혼의 견해를 지진 자. 개인의 견해를 지닌 자도 이 법문을 들을 수 없다. 또 보살의 서원을 세우지 않은 사람도 이 법문을 들을 수 없고 받들 수 없고 간직할 수 없고 외울 수 없고 해득할 수 없으니 그러한 경우는 없는 것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실로 어느 곳이든 이 경전이 설해지는 땅과 지역이 있다면 그곳은 천신들과 인간과 아수라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공양을 올려야 할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공손히 절해야 할 곳.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올려야 할 곳이 될 것이다. 그 땅과 지역은 탑 묘와 같은 곳이 될 것이다.”

 

위 단락에서 하열(下劣)한 것을 信解하는 漢譯에서는 小法者로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제14離相寂滅分 에서는 信解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제17究竟無我分에서는 通達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그 原語는 모두 adhimukti(원형)로서 같은 내용을 3가지로 번역하고 있어서 같은 내용임을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佛敎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2개의 단어가 마음()이다. 그 중에서 마음이라는 單語를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單語adhimukti이다.

 

adhimukti선택경향성이 가미된 것으로서 선택의 경향성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말로 하면 쏠림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그렇게 선택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움직이고 선택이 굳어진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쏠림이란 선택이 경향성을 띤 것으로 일종의 버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란 완전한 어떤 實體가 아니라 선택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쏠림에 의한 것도 아니고 운명적으로 그렇게 결정된 것도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최초에 자기 자신의 선택이 있었던 것이다.

최초에 자신이 선택한 것을 시간이 갈수록 경향성이 붙어서 그렇게 선택하게 되는 것이 쏠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나도 모르게 쏠린다고 하지만 오래전에 네가 그렇게 선택했기 때문에 여러 번 선택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경향성을 나타낸 것이라는 부처님의 이론인 것이다.

 

이 경향성은 자신의 선택에서 찾아야지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를 모두 살펴야 찾아낼 수 있는 이론인 것이다.

 

희랍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내가 만약에 나를 창조했다면 나는 完全해야하고 내가 完全知識을 가졌다고 自覺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현재 完全知識도 없고 自覺도 할 수 없으니 다른 그 누가 創造한 것이다. 創造者이라고 한 것뿐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理論은 지금 現時點에서 보면 옳다고 할 수 있지만 太初로부터 現在까지라는 긴 시간으로 본다면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지금 이 순간을 끊어놓고 보면 부실하고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이지 긴 시간을 놓고 볼 때 처음부터 부실하고 불완전했다면 그것은 따져볼 필요도 없이 부실하고 불완전 한 것이기 때문에 따져볼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태초부터 불완전한 것이라면 불완전한 진행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완전할 필요조차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人間의 마음은 최초에는 매우 完全하고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말하면 마음으로서 완전한 것이라면 틀릴 수 있는 自由가 있는 것이라야 하는데 틀릴 수 있다는 것은 선택을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意志는 잘못선택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自由意志具備하고 있었기 때문에 착각하고 잘못 선택하여 누 을 두고 잘못 선택하므로 서 그 傾向性이 굳어져서 부실하고 不完全하게 된 것이라는 理論이다.

 

그러므로 煩惱란 좋은 것의 選擇이 무력하게 된 것이 煩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 선택하도록 경향성이 되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성을 가진 마음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修行인 것이다. 道理를 모르고는 修行을 아무리 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하열(下劣)이란 小乘을 뜻하며 한 것이란 arayana(첨단의) sresthayana(가장 수승한)이라고 표현되는 大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大乘에서 보는 3종의 惡人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1). 하열한 것[(小乘)信解하는 ].

2). 四相의 나쁜 見解를 지닌 .

3). 보살의 誓願을 세우지 않은 .( 原典에는 誓願이 아니라 보살과 관련된 약속을 지니지 않는 로 되어있음.)

 

따라서

adhimukti(쏠림,志向) 가 나오는 품에서 나타내는 것은

반야바라밀다법문(14품의 소식) - 四相을 지니지 않음.

수승한 보살승(15품의 소식) - 보살의 약속을 지키는 것.

究竟無我의 가르침(17품의 소식)

으로 정리할 수 있다.

 

信解(adhimukti)가 나오는 품을 비교하여 다시 한 번 깊이 분석 볼 필요가 있다.

 

 

信解에 관한 분석문건

 

[14. 離相寂滅分] na mama Bhagavan duskaram yad aham imam dharmaparyayam bhasyamanam avakalpayamy adhimucye.

 

世尊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不足爲難,

 

그러나 세존이시여 이 법문이 설해질 때 제가 그것을 분별하고 신해하는(쏠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다.

 

[15. 持經功德分]

na hi sakyam subhute yam dharmaparyayo hinadhimuktikaih1) sattvaih srotum natmadrstikair na sattvadrstikair na jivadrstikair na pudgaladrstikaih. nabodhisattvapratijnaih2) sattvaih sakyam ayam dharmaparyayah srotum vodgrahitum va dharayitum va vacayitum va paryavaptum va. nedam sthanam vidyate.

 

樂小法者,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則於此經, 不能聽受讀誦爲人解說,

 

왜냐하면 수부티야, 하열한 것을 신해하는(하열한 것에 쏠리는) 유정들은 이러한 법문을 들을 수 없다. 자아의 견해를 지닌 자. 유정의 견해를 지닌 자. 영혼의 견해를 지닌 자. 개인의 견해를 지닌 자도 이 법문을 들을 수 없다. 또 보살의 서원을 세우지 않은 사람도 이 법문을 들을 수 없고 받을 수 없고 간직할 수 없고 외울 수 없고 解得할 수 없으니3) 그러한 경우는 없는 것이다.4)

 

[17. 究竟無我分] yah subhute bodhisattvo niratmano dharma niratmano dharma iti adhimucyate, sa tathagatenarhata samyaksambuddhena bodhisattvo mahasattva iti akhyatah.

 

若菩薩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부티야, 만일 보살이 諸法에는 自我가 없다. 諸法에는 自我가 없다신해한다면(자연스럽게 쏠린다면) 如來 應供 正等覺者는 그를 보살마하살이라고 칭한다.

 

1) adhimukti

hinadhimuttika hinadhimuttikehi sadhim samsandanti samenti 〮⋯kalyanadhimuttika kalyanadhimuttikehi sadhim samsandanti samenti [열신해경 s.14.14 Hinadhimuttikasutta]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은 사왓티 시의 제타와나 숲에 있는 아나카핀디카 장자가 바친 승원에서 지내셨다. 그곳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중생들은 계층에 입각해 함께 흐르고 함께 간다. 열등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은 열등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과 함께 흐르고 함께 간다. 그리고 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은 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과 함께 흐르고 함께 간다.

비구들아. 과거에도 중생들은 계층에 입각해 함께 흐르고 함께 갔으니, 열등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은 열등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과 함께 흐르고 함께 갔고 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은 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과 함께 흐르고 함께 갔다.

비구들아, 미래에도 중생들은 계층에 입각해 함께 흐르고 함께 갈 것이니, 열등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은 열등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과 함께 흐르고 함께 갈 것이고 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은 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과 함께 흐르고 함께 갈 것이다.

비구들아. 현재에도 중생들은 계층에 입각해 함께 흐르고 함께 가니, 열등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은 열등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과 함께 흐르고 함께 가고 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은 한 것에 쏠리는 중생들과 함께 흐르고 함께 간다.” 부처님은 이렇게 설하셨고 흡족해진 比丘들은 부처님의 말씀에 매우 기뻐했다.

 

2) pratijna : to admit, promise something, confirm, affirm, answer; assert; discuss; recignise, learn. satyam(엄숙히. 진실로) pratijanati(서약하다. 약속하다),= he promises solemnly,로서 원(, pranidhana)과는 원어에 있어 다소 차이가 난다.

 

3) 세 종류의 사람이 소개된다. 하열한 것을 신해하는 자. 아견 등(四相)을 지닌 자. 보살의 서원을 세우지 않은 자. 이들은 이 반야바라밀다 법문을 들을 수도 없다.

 

4) 세 종류의 惡人은 이 법문을 들을 수도 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모습이다. 부처님이 이 세 종류의 사람을 얼마나 경계했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原典에는 반야바라밀다 法門을 들을 수 없는 자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비하여 漢譯에서는 菩薩誓願을 세우지 않은 사람을 생략하고 2가지만을 번역하여 놓음으로 誓願으로 번역한 것인지 約束으로 번역한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誓願이란 믿음(자신감)다짐(결심)바람(소망)을 나타내는 用語라면 約束은 그보다는 낮은 단계인데 여기서는 최소한의 條件이므로 誓願까지는 안가더라도 최소한 하열한 것(小乘)에는 쏠리지 않고 四相에 쏠리지 않으며 菩薩約束은 지킬 것이라는 決心 정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條件으로 보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니

 

1. 하열한 것에 마음이 쏠리지는 않을 것.

2. 四相에 떨어지지 않을 것.

3. 보살의 약속을 지키는 것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쏠리는 것.

 

이런 3가지 조건을 가져야 반야바라밀다 법문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제17구경무아분의 제법에는 자아가 없다. 라고 자연스럽게 마음이 쏠리는 자를 여래는 보살마하살이라고 칭한다.” 라는 대목에 연결되는 것이다.

 

本文

또한 실로 수부티야. 실로 어느 곳이든 이 경전이 설해지는 땅과 지역이 있다면 그곳은 천신들과 인간과 아수라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공양을 올려야 할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공손히 절해야 할 곳.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올려야 할 곳이 될 것이다. 그 땅과 지역은 탑 묘와 같은 곳이 될 것이다.”

 

印度西歐言語는 존칭이 없다. 따라서 최고의 예우를 표하기 위해서 用語를 많이 만들어 내었는데 위 내용에서 공손히 절해야 할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최고의 예절을 표하는 내용인 것이다.

 

sakkatabbo(존경하고): sat(존재) -kr 상대방의 무시 감을 배제한 것. 무시하지 말라는 것과 同義語.

garukatabbo(존중하고): garu(무거움) -kr 상대방에 대한 중량감을 느껴 주는 것.

manetabbo(공경하고): 우러러 보는 것.

 

우리의 언어는 상대방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양한다는 말의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印度 人들의 표현은 그 차이가 명확하게 다름을 原語에서는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공양 받아야 할 만하다는 것공손히 절해야 한다는 것印度 人들이 가장 높은 단계의 最上의 예우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理解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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