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文(제16. 能淨業障分)
68) “그런데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들이 이와 같은 경전들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득하고 근본적으로 사유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낼지라도 그들은 천대받을 수 있으니 아주 천대받을 수 있다.69)
왜냐하면 수부티야, 그 사람들은 전생에서부터 악취에 태어나게 하는 부정한 업을 지었으나 현세에서 그렇게 천대받음으로써 비로소 전생의 부정한 업에서 벗어나 붓다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왜냐하면 수부티야, 나는 잘 알고 있는 것이 있으니 과거세 아승지 겁에 더욱더 아승지 겁에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훨씬 이전에, 84 억 천 나유타의 붓다가 계셨다. 나는 이 붓다들을 공양해 기쁘게 해 드렸으니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수부티야, 이처럼 나는 많은 붓다를 기쁘게 해 드리며 한 번도 거역하는 일이 없었지만 후세에 나중 500세에 바른 법이 소멸하는 시기가 전개될 때 이와 같은 경전들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수부티야, 전자의 생긴 복덕은 이 생긴 복덕의 백분이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70) 천분의 일에도. 백 천분의 일에도. 백 억분의 일에도. 백 천 억분의 일에도. 백 천 억 나유타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숫자로도 산수로도 계산으로도 비유로도 비슷함으로도 견줄 수 없는 것이다.
또 수부티야, 만일 양가의 아들딸들이 어느 정도 복덕을 쌓았으며 또 그것을 어느 정도 자신의 것으로 하였는가에 대해 내가 설한다면 그 유정은 내 말을 듣고서는 미치고 의기소침하고 마음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실로 수부티야, 여래가 설한 이 법문은 사의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과보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니 궁금해 질 것이다.”
68) [제16장 능정업장분)
69) 대승에 대한 핍박을 연상해야 한다.
70) 이 부분에 있어 구마라집의 번역본은 어조사 ‘於’ 자의 사용에 있어 다소 의아스러운 것이 있다. 즉 일반적인 이 어조사의 용법에 입각하는 한 금강경 수지 독송 공덕보다 제불 승사공양 공덕이 더 큰 것이 되어 문맥을 흩트리게 된다.
그러나 범본이나 티베트 본에는 이 부분이 분명히 되어 있으니 본 번역과 같이 되어 있는 것이다.(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 不及一 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68) “그런데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들이 이와 같은 경전들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득하고 근본적으로 사유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낼지라도 그들은 천대받을 수 있으니 아주 천대받을 수 있다.69)
왜냐하면 수부티야, 그 사람들은 전생에서부터 악취에 태어나게 하는 부정한 업을 지었으나 현세에서 그렇게 천대받음으로써 비로소 전생의 부정한 업에서 벗어나 붓다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함경은 엄격한 自作 自受的인 因果法을 가르친 것에 비해서 대승경전은 파격적인 業報의 理論을 가르친 것이다.(제16능정업장분에도 나옴)
이 둘 사이의 갭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이장에서 얻어야할 내용이다.
먼저 존경과 존중에 대한 인도사람의 인식과 업보에 관한 경전상의 인식을 알 필요가 있어 다음의 자료를 소개한다.
존경과 존중과 관련하여(참고문건)
제12 존중정교분의 내용과 통합하여 요약하면 반야바라밀다 법문이 설해지는 곳은
① 塔廟와 같고(caityabhutah. [12] [15])
② 부처님이 계시고(sasta viharati[12])
③ 여러 聖衆이 계신 곳이니(anyataranyataro va vijnagurusthaniyah[12])
天神과 人間과 阿修羅의 善趣 중(sadeva-manusasurasya lokasya)에서
① 공양 받을만하고(pujaniyah[15])
② 공손히 인사 받을만하고(vandaniyah[15])
③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받을만하고(pradaksiniyah[15])
④ 꽃과 향의 장엄을 받을만한 곳이다(以諸華香, 而散其處[15])(漢譯經典에만 있는 대목).
사실 초기불전에는 부처님을 대할 때 부처님과 의 親疎관계에 의해 여러 가지 예법이 소개된다.
“살라 마을의 바라문 거사들은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왔고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 공손히 절하고(abhivadetva(최고의 의례)) 한쪽에 앉았고 어떤 사람은 함께 인사를 나누고 정중히 안부를 여쭌 뒤(sammodaniyam katham saraniyam vitisaretva) 한쪽에 앉았고 어떤 사람은 부처님을 향해 합장을 올린 뒤(anjalim panametva) 한쪽에 앉았고 어떤 사람은 부처님 가까이서 이름과 성을 아뢴 뒤(namagottam savetva) 한쪽에 앉았고 어떤 사람은 침묵한 채(tunhibhuto) 한쪽에 앉았다.「M.1.41 Saleyyakasutta」”
그리고 공양과 관련해 初期佛典은 僧團에 대한 공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부처님의 제자 승단은 길에 잘 들었고 길에 곧게 들었고 理致에 입각해 길에 들었고 반듯하게 길에 들었으니 부처님의 弟子僧團은 곧 네 쌍 여덟 무리의 사람들로서(초기불전에서 보면 부처님 당시의 제자승단을 이야기 할 때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공물을 받을 자격이 있고(ahuneyyo) 봉양 받을 자격이 있고(pahuneyyo) 보시물을 받을 자격이 있고(dakkhineyyo) 합장배례를 받을 자격이 있고(anjalikaraniyyo) 더 이상 없는 世間의 福田이다.’ 「D.3.1.§1과 §8 pathikasutta」
그리고 일반적으로 공경을 뜻하는 상용구는 다음과 같다.
“사문 고타마는 우리들의 손님이고 손님에 대해 우리는 존경하고(sakkatabbo) 존중하고(garukatabbo) 공경하고(manetabbo) 공양해야 한다(pujetabbo).” 「M.2.45 Cankisutta」
윤회 도중에 지은 부처님의 빛
이 대목에서는 부처님이 만나야만 되었던 보상해야할 열 두 경우(輪回 도중에 지은 열두 가지 빚으로 여겨진다)를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제16능정업장분의 내용에 대한 설명으로서 惡趣에 떨어질 業을 천대받음으로서 상쇄한다는 내용에 대한 설명임)
(1) 천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전생에 아직 부처가 아니었을 때 무날리(Munali)라는 이름의 술주정꾼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수라비(Surabhi)라는 이름의 벽지불에 대해 심한 말로 욕을 했다. “이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쾌락에 탐닉하는 破戒者이다.”라고. 이러한 惡한 口業으로 말미암아 그는 地獄으로 再生했다.
그리고 부처님으로서의 최후의 삶에 순다리에 의해 공개적으로 욕을 당하게 되었다. 순다리는 女性 步行沙門으로서 그녀는 부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의심받게 했다.
(2) 두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전생에 아직 부처가 아니었을 때 삽바비부(Sabbabhibhu)라는 이름의 벽지불 밑에서 난다(Nanda)라는 이름의 제자로 있었다. 그는 자기 스승을 느슨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고 욕했다. 이러한 口業으로 말미암아 그는 地獄으로 再生하여 십 만년 동안을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人間으로 여러 번 再生할 때에도 그는 잘못했다고 부당하게 욕을 먹었다. 나아가 부처님으로서의 마지막 삶에서는 친차마나( 또는 친차마나위카)라는 불량한 여인으로부터 임신을 시켰다는 욕을 공개적으로 듣게 되었다.
(3) 세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前生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었을 때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박식한 바라문 스승이었으니 그 명성이 매우 높았다. 그가 마하와나 숲에서 500명의 弟子들에게 베다를 가르치고 있을 때인데 그와 그 弟子들이 그때 비마(Bhima)라는 이름의 거룩한 沙門이 神通力으로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광경에 고무되는 대신 菩薩은 弟子들에게 “저 沙門은 쾌락에 탐닉하는 위선자이다.”라고 말했다. 弟子들은 스승의 말을 믿었고 비마(Bhima)沙門이 탁발을 하는 동안 그 善한 修行者에 대한 나쁜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그 500명의 弟子들은 부처님의 比丘 弟子로 재생했다. 前生에 바라문 스승의 500弟子로 있을 때 善한 修行者를 험담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들은 以生에서 여성 步行沙門 순다라를 殺害했다는 잘못된 혐의를 받게 되었다.
사실은 그 步行沙門들이 계획적으로 순다리를 殺害하여 부처님제자가 다니는 길에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제자들이 의심을 받았고 부처님 弟子들에 대한 욕은 결국 부처님 자체에 대한 욕이 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4) 네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前生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었을 때 異服同生을 탐욕 때문에 殺害했다. 그는 동생을 산골짜기에 던진 뒤 둥근 돌로 쳐 죽였다. 그 惡業으로 인해 부처님은 自身의 最後의 삶에서 자신의 生命을 노리는 데와닷타의 陰謀에 희생물이 되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결코 殺害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데와닷타가 언덕에서 거대한 둥근 돌을 굴렸을 때 바윗돌 파편에 큰 발가락이 맞았고 그것이 안으로 곪는 타박상이 되었다.
(5) 다섯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前生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었을 때 무뢰한이었다. 길거리에서 한 벽지불을 만났는데 그는 장난을 치고 싶어서 그 거룩한 인물에게 돌을 던졌다. 그 惡業으로 부처님은 데와닷타가 부터님을 殺害하라고 보낸 한 무리의 궁사(弓師)들에 의해 공격받게 되었던 것이다.
(6) 여섯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前生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었을 때 코끼리 부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탁발 중인 한 벽지불을 자기 코끼리로 위협하되 마치 그 거룩한 사람을 깔아뭉갤 듯이 했다.
이러한 잘못된 行動 때문에 부처님은 라자가하에서 데와닷타가 부처님을 깔아뭉개기 위해 보낸 날라기리(Nalagiri)라는 술 먹은 코끼리에 의해 위협을 받았던 것이다.
(7) 일곱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前生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었을 때 君主였던 적이 있다. 그는 王의 교만(驕慢)함으로 한 罪人에 대해 적절한 결과를 생각하지도 않은 채 몸소 창으로 罪人을 찔러 죽였다.
이 惡業은 그를 오랜 기간 동안 地獄에 태어나 살게 되었고 最後의 삶에서는 유명한 의사 지와카에 의해 큰 발가락이 칼로 갈리는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그 상처는 데와닷타의 邪惡한 陰謀에 의해 야기된 파편에 맞아서 생긴 것이다.)
(8) 여덟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前生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었을 때 漁父의 가족이었던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친족들이 물고기를 잡아 상처내고 죽이는 것을 즐거이 바라보곤 했다.(자신이 직접 죽인 것은 아니다.)
그 惡業으로 그는 부처님으로서의 자신의 마지막 삶에 자주 頭痛을 겪었다.(그리고 자신의 親族들은 사캬 族으로 再生하여 위타투바에게 학살당했다.)
(9) 아홉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푸싸 부처님 在世 時에 人間으로 再生해 있었는데 푸싸 부처님의 比丘 弟子들에게 “당신들은 쌀이 아니라 보리만을 먹을 것이다.”라고 욕한 적이 있다.
그 욕이 結果를 불러들였으니 부처님은 최후의 삶에 (바라문이 초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웨란자(Veranja) 바라문 마을에서의 한 安居期間을 내내 보리로 만든 음식만을 먹고살아야만 했다.
(10) 열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前生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었을 때 격투선수였던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상대 선수의 등을 부러뜨렸다. 그 惡業의 果報로 부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삶에서 자주 등의 苦痛을 겼었다.
(11) 열한 번째 악업의 과보
부처님은 前生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었을 때 外科 醫師였던 적이 있다. 그때 그는 治療費를 아까워하는 한 富者의 아들에게 고의로 설사를 야기하는 藥을 處方한 적이 있다.
이 惡業의 결과로 부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삶에서 涅槃에 들기 전에 피를 배변하는 심각한 이질(痢疾)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다.
(12) 열두 번째 악업의 과보
보살은 조티팔라(Jotipala)라는 이름의 바라문으로 再生한 적이 있었다. 그는 카싸파 부처님에 대해서 불경스런 언급을 했으니 “어떻게 이 머리 깎은 修行者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단 말인가? 완전한 깨달음이란 얼마나 드문 것인데!” 라고 말했다.
그 不敬스러운 말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더디게 만드는 結果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다른 菩薩들은 며칠 또는 몇 달 만에 깨달음을 얻었는데 고타마 菩薩만 6년 동안 眞理를 찾아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 열두 가지가 菩薩일 적에 저지른 큰 실수로서 부처님이 스스로 언급한 것들이다.《쿳다카 니카야》 《테라파다나(Therapadana)》 39 《아와타팔라(Avataphala) 왁가》10 《풉바캄마필로티카(Pubbakammapilotika)붓다 아파다나》를 참조하라.
우리가 제16 能淨業障分을 읽으면 먼저 題目에서부터 問題가 발생한다. 먼저 業障을 淨化한다는 뜻에서 業障이란 中國식표현으로서 業을 나쁜 쪽으로만 표현된 것으로서 業의 障碍라는 뜻이다. 그러나 業이란 고유명사로서 善業도 있고 惡業도 있으니 業障이란 표현은 무리가 있다.
또 가장 잘못 理解하게 되는 부분이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輕賤故, 先世罪業則爲消滅, 의 부분이며 이어서 생각이 미치지 못하여 생략하는 부분이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다.
말하자면 金剛經을 受持 讀誦만 하면 三惡趣에 떨어질 先世罪業이 즉시 消滅한다고 잘못 해석되도록 되어있는 부분과 免三惡趣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定向菩提가 부처님의 진정한 뜻이라는 것을 놓치는 일이다.
金剛經은 受持 讀誦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爲他人說을 해야 하는 것으로 原典에는 그 어느 대목에도 爲他人說의 대목이 생략된 것은 없다.
따라서 漢譯金剛經을 읽을 때 주의 할 점은 金剛經 受持 讀誦의 말 뒤에 반드시 爲他人說이 붙어있는 것으로 읽어야 정확하게 읽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 爲他人說 대신에 廣爲人說 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뜻에 가장 가까운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金剛經 受持 讀誦과 廣爲人說 만하면 三惡趣에 떨어질 惡業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천대를 받는 것으로 善趣에 나아갈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까지 한다는 것이 과연 因果應報의 原理에 맞는 말일까 하는 것을 어떤 原理에 의해서 合理的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또 아래에서 증명이 되겠지만 이 原理에 입각해서 천도제의 경우 目的이 문제가 아니라 方法이 문제라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천도된다는 자체가 문제라는 것도 極端이요 현재의 천도제의 방법이 정당하다는 것도 極端인 것이라는 中道의 原理가 필요하다.
다음 문건을 참고해 보자.
Ⅰ. 金剛經 <16>能淨業障分 - 1
api tu ye te subhute kulaputra va kuladuhitaro veman evamrupan sutrantan udgrahisyanti dharayisyanti vacayisyanti paryavapsyanti yonisas ca manasikarisyanti parebhyas ca vistarena samprakasayisyanti, te paribhuta bhavisyanti, suparibhutas ca bhavisyanti. tat kasya hetoh? yani ca tesam subhute sattvanam paurva janmikany asubhani karmani krtany apayasamvartaniyani, drsta eva dharme taya partbhutataya tani paurvajanmikany asubhani karmani ksapayisyanti, buddhabodhim canuprapsyanti.
復次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輕賤故, 先世罪業則爲消滅,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그런데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들이 이와 같은 경전들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득하고 근본적으로 사유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낼지라도 그들은 천대받을 수 있으니 아주 천대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그 사람들은 전생에서부터 악취에 태어나게 하는(應墮惡道) 부정한 업을 지었으나 현세에서 그렇게 천대받음으로써 비로소 전생의 부정한 業에서 벗어나 붓다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Ⅱ. 문제제기- 어느 사람의 궁금증(불교 사이트에 올린 어느 불자의 문제제기 내용이다.)
한국의 불자들에게는 “業障消滅”이 큰 화두인 것 같습니다. 이번 生에 지은 罪는 물론이고 多怯 生에 걸쳐서 살아오면서 알고도 지은 罪 모르고도 지은 罪. 그런 業들이 모두 消滅된다는 그 業障消滅의 방법으로 염불도 하고 주문도 하고 大乘經典을 수없이 반복해서 讀誦하기도 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염불을 하거나 주문을 외거나 大乘經典을 독송한다고 내가 過去에 지어놓은 業이 그렇게 먼지 날아가듯이 消滅된다고 하면 엄연히 말해서 因果의 道理와는 모순되는 것이 아닌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하루 중에 몇 시간 내어서 간절히 염불을 하거나 독송을 하거나 다라니 외우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솔직히 그 정도의 노력으로 적은 것도 아니고 無量劫에 지은 罪가 눈 녹듯 다 사라진다면(大乘經典에 그런 표현들이 많더군요) 세상에 罪짓는 일 무서워할 필요가 뭐가 있으며 힘든 輪回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까요.
흔히들 하는 말로 基督敎에선 일주일 내내 나쁜 짓하다가 일요일 날 교회 가서 회개기도 한번하면 다 없어진다는 말에 비웃는 것과 무슨 다른 점이 있나요?
또 아무리 나쁜 짓을 하고 죽어도 자손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조금의 양심과 佛心이 있어서 유명하신 큰스님들 모셔놓고 천도제 지내고 돌아가신 분 이름으로 佛事 많이 하고 하면 다 天上에 태어난다는 식이라면 대체 이게 因果의 道理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因果應報 自作自受 이런 말에 이렇게 예외가 많다면 엄연히 말해서 因果應報가 아니지 않습니까. 金剛經 독송 千讀이 그리 쉬운 일도 아니지만 맘먹으면 못할 것도 없는 것이고 하루 종일 염불하거나 다라니 외우는 것도 사지 멀쩡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하다못해 이 세상에는 殺人罪를 지으면 감옥에 가서 살면서 모범수가 되어 감형을 받아도 적어도 수십 년은 죄 값을 치루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因果의 道理에는 大乘經典 독송 몇 회나. 염불 다라니. 절 몇 회. 물론 간절한 마음이 중요하다. 참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정도 간절한 마음과 그 정도의 염불 독송 진언수행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모든 罪가 싹 消滅되어 없어진다고 하니 수긍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요 불공성취여래. 금강견강소복괴산 불. 뭐 이런 부처님들 말고 고타마 싯달타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분께서 業障이 消滅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지 그렇게 적혀있는 經典이 있는지(大乘經典 除外)입니다. 있다면 어느 經典인지 자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여야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受持讀誦과 廣爲人說의 功能 (1)
1. 佛子의 目的은 이 生에서건 다음 生에서건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免三惡趣요 두 번째는 定向菩提(앞으로의 삶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2. 그 방법을 초기불교에서는 發心과 持戒 둘로 요약한다.<<팔리 대반열반경>>
3. 大乘 金剛經에서는 반야바라밀다 法門을 受持 讀誦하고 廣爲人說할 것(과 爲人輕賤)의 要件을 제시한다. 그런데 3항의 條件이 훨씬 2항보다 어렵다.
그것은 이 경우(3항)의 福德이 2항의 福德과는 비교가 아니 되게 크다는 것으로 理解하면 어떨까?
金剛經은 그것을 無量福德이라고 표현한다. 無量福德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免三惡趣 하고 定向菩提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초기불교적인 發心 持戒만으로 충분하다.(잉여복덕이 존재함)
4. 따라서 他人도 免三惡趣하고 定向菩提하게 해주는 法으로서 3항을 理解하는 것은 어떨까?(잉여복덕은 어디에 쓸 것인가의 문제를 천도라는 장치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천도(遷度)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5. ㉮ 惡趣 再生 業 ⇒ 惡趣 再生 報//
㉯ 金剛經 受持讀誦 廣爲人說 ⇒ 가장 驚異로운 것. 淸淨한 한마음. 無量福德.
6. 業報輪回의 기본 원리인 버릇의 理論을 적용하면 惡趣再生 業에 의한 惡趣再生의 버릇은 金剛經 受持讀誦 廣爲人說하는 활동의 버릇에 比하면 아주 弱한 것으로 약한 나쁜 버릇은 즉시 消滅한다.
그러나 他人과의 關係가 남아있기 때문에 賤待받는 정도의 果報는 돌아온다는 식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이 오히려 초기불교의 敎理에 철저히 입각한 모습이라고 볼만한 부분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前生에 지은 惡業 12가지는 이생에서도 마무리를 짓고 떠나셨던 것으로《아파다나 비유경》에 설해지고 있다.
(善趣와 惡趣의 구별은 내 생각으로는 주변 구성원이 호응 배척하는 정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볼만하다. 주변 구성원이 모두 호응하면 天上. 호응하는 쪽이 많으면 人間 또는 阿修羅. 모두 배척하면 地獄. 대개 배척하면 畜生. 배척하는 쪽이 많으면 餓鬼 정도로 둘 수 있다. 그럴 때 주변 구성원의 호응과 배척은 전적으로 당사자의 버릇에서 갈린다.
좋은 버릇이 많거나 강할수록 주변 構成員의 呼應정도는 높아가고 나쁜 버릇이 많거나 강할수록 주변 구성원의 배척정도가 심해지는 構造이다.
그럴 때 주변 구성원의 호응 정도를 범 生命體 차원에서 무차별적이고 최상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金剛經 受持 讀誦 廣爲人說에 의한 버릇이지 않겠는가?)
7.[受持讀誦 廣爲人說]<제14이상적멸분> = [청정한 한마음]<제6정신희유분>에 해당하거니와 이는 바로 버릇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열쇠와 같은 등식이다. 어차피 버릇은 마음에 해당한다.
나쁜 버릇이 多生劫來 하는 동안 惡業의 結果物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金剛經 受持讀誦, 廣爲人說을 바탕으로 [청정한 한마음]이 성취된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惡한 버릇의 淨化 내지는 최소한 모든 惡한 버릇의 통제에 해당한다.
<6>정신희유분에 “聞是章句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14> 이상적멸분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 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廣爲人說), 則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두 문장은 같은 결론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모두 아시고 無量福德을 얻는다는 結論이다. 그런데 그 前提條件이 하나는 이 법문을 듣고 淸淨한 한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법문을 受持 讀誦하고 廣爲人說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한마음을 일으키는 것] = [受持 讀誦 廣爲人說]이 되는 것이다.
8. 發心과 持戒가 免三惡趣를 보증한다는 부처님 대반열반경의 법문은 철저히 初期佛敎的이다.
9.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因緣 있는 者의 죽음과 관련해서 그의 천도(遷度)가 어떻게 제16 能淨業障分에 의해 誘導될 수 있는지 까지 보고자 한다.
Ⅳ. 受持讀誦과 廣爲人說의 功能 (2)
1. 앞서도 말했듯이 業은
첫째. 罪業이든 善業이든 아니 煩惱이든 善根이든 결국 버릇의 문제이고 버릇은 견고히 고착된 경향(傾向)이나 성향(性向)이라고 할만하다.
둘째. 他人과의 關係가 문제이니 근본적으로 業은 外 行動이고 바깥의 六境들이라는 他人의 반응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2. 그 중 나쁜 버릇을 一時에 제거할 수 있다(버릇을 제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마지막 버릇이 제거되는 순간은 언제나 ‘一時’ 이다.)면 그것이 바로 業障消滅이니 罪業消滅이니 하는 표현의 근거가 될 수 있다.
3. 이미 예류에 대한 부처님의 표현을 보면 부서지지 않는 信心[= 發心]과 持戒를 확인하는 순간 三惡趣에 떨어질 惡業은 消滅한 것으로 표현된다.
4. 그러나 부처님도 12가지 前生의 빚을 成佛한 이후에라도 갚고 가시는 것을 볼 때 어떤 경우라도 惡業의 殘餘物마저 다하는 것은 아니니 三惡趣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지라도 金剛經의 표현대로 하자면 賤待를 받는다든지 하는 今生의 惡果는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5. 그 이유는 他人과의 關係가 남아 있으니 내가 아무리 罪業의 버릇을 消滅시켰다 하더라도 業報의 한 축인 他人의 반응은 同類의 범위 안에서 아직 남아 있기에 당연하다.
6. 그러므로 金剛經의 이야기는 初期佛敎의 精神을 참으로 잘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반야바라밀다 법문을 受持 讀誦하고 廣爲人說 함으로서 세 가지 특징적인 果報를 획득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니 ① 가장 경이로운 것을 얻게 되고 ② 淸淨한 한마음을 얻게 되고 ③ 無量福德을 얻게 된다고 한다.
[①<12>존중정교 분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가장 驚異로운 것)”
② <Ⅲ-7> 참조
③ <13>여법수지 분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無量; aprameyam asamkhyeyam)"]
7. 이중 ② 淸淨한 한마음을 얻는다는 말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청정한 버릇의 형성을 意味한다고 볼만하다. 淸淨한 마음버릇이 成就되므로 그동안의 罪業的 버릇은 모두 消滅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살필 것은 어떻게 金剛經의 受持 讀誦 廣爲人說을 가지고 淸淨한 한마음이 형성될 수 있느냐이다. 여기서도 그렇고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주의할 것은 廣爲人說의 중요성이다. 제대로 된 바람직한 버릇의 형성은 廣爲人說이 이루어지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8. 그런 의미에서 漢譯 金剛經에 廣爲人說이라는 표현이 불규칙하게 나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梵本과의 비교를 통해 漢譯은 受持 讀誦만 나와도 그 뒤에 廣爲人說이라는 말이 붙는 것으로 항상 연결해서 생각해야 된다.
[대부분 수지 및 受持 讀誦과 廣爲人說 혹은 爲他人說, 爲人解說등이 결합해 쓰이는데 이 <16>능정업장분과 <8>의법출생 분 <12>존중정교 분 <14>이상 적멸분 등에서 受持 또는 受持 讀誦만 언급되고 廣爲人說쪽은 아니 나오나 실제 梵本을 보면 모든 경우에 廣爲人說이 붙어 나오므로 언제나 함께 고려해야 한다.]
9. 생각해 보자. 남에게 반야바라밀다 법문을 說하는 정도가 되려면 스스로는 얼마나 受持 讀誦했겠는가?
남을 지도하려면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은 그것과 관련해 境地에 올라야 되니 그것은 버릇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지도하려면 자신은 자전거와 관련해 기술이 익혀져 버릇이 되어 있어야 한다.(기술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그 기술이 버릇으로 발휘되고 실현되는 정도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金剛經 精神(궁극적으로는 금강경사상)에 버릇이 들어있어 그 버릇이면 이제 罪業의 버릇은 消滅되고 만다. 기술이라는 버릇이 없다면 틀림없다는 부서지지 않는 믿음(사실 절대적인 믿음은 능숙한 기술적 버릇과 동전의 양면관계이다.)이라도 있어야 남에게 그것 해보라고 권하고 전할 수 있다. 결국 한마음의 淸淨함을 짐작하게 한다.
10. 그런데 자신은 淸淨한 한마음이라도 피해 받은 남(상대방)은 그 대가를 갚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일단 淸淨한 버릇을 가진 자는 그 주위 구성원들이 基本的으로 好意的으로 대할 可能性이 크다. 그래서 피해 받은 當事者도 그 반응에 상당히 수정을 가할 개연성이 있다.
나아가 반야바라밀다 법문을 眞心으로 說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을 들으니 화가 더 날 수도 있으나 그 진정성(眞情性)이 느껴진다면 이 사람이 나에게 혹여 잘못한 것이 있다하더라도 웬만큼 理解해주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 개연성도 크다.
11. 그런데 初期佛典<<다난자니 경; M.2.47 Dhananjanisutta>>에는 祖上을 핑계로 非法行을 범한다면 오리려 三惡趣에 떨어진다는 경고가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三惡趣를 면하고 梵天에 再生하려면 四無量心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이 뒤따른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祖上을 전제로 한 正法行이란 四無量心을 갖추는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四無量心은 모든 存在에 대해 慈[분노 제거, ref. 합송 경] 悲[해치려는 뜻 제거] 喜[불쾌함 제거] 捨[탐착 제거] 네 가지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存在는 空間的으로 모든 지역에 거주하는 存在뿐만 아니라 時間的으로 先亡 父母와 같은 祖上을 포함시켜도 된다. 왜냐면 祖上이라 해도 결국 나름의 果報를 받아 어떤 境界에서든가 再生해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티로쿳타 경; 소니카야, 소송경 中》을 보게 되면 因緣있는 祖上 중 아귀영가(餓鬼靈駕)가 자신의 집 담벼락 밖에서도 서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만날 수 있다.
12. 그런데 金剛經<16>능정업장분의 말씀. 곧 반야바라밀다 법문의 受持 讀誦과 廣爲人說 중 廣爲人說을 잊지 말라고 강조했는데 이 대목에서 특별히 강조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parebhyas ca vistarena samprakasayisyanti.” 곧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내어”야 한다는 표현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복수로 쓴 것에 주의하라. 複數는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단수 복수 구별의 버릇이 없는 우리나라 言衆에게는 복수 사용의 의미가 크게 와 닿지 않지만 이는 참으로 중요한 문법적 장치이다.)
나아가 ‘널리’라는 표현을 부처님은 꼭 쓰고 있거니와 이는 “반야바라밀다 법문을 자세히 분별하라”는 뜻도 있으나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내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곧 반야바라밀다 법문을 受持 讀誦하고 아울러 祖上을 비롯한 모든 生命體를 대상으로 널리‘’ 廣爲人說(<15>지경공덕 분에서는 廣爲人說로 번역되어 있음)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널리(vostarena)’라는 표현에서 초기불교의 四無量心을 연결시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13. 부처님은 四無量心을 강조하셨다. 전문적인 修行者의 四禪法보다 우위에 두었을 정도다. 왜 그러셨을까? 이 四無量心은 (祖上을 포함해서)시방의 모든 存在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지니게 하는 功能을 지닌다.
내가 웃으면 남도 웃고 남이 울면 나도 슬픈 경우가 人之常情이잖은가? 餓鬼가 되었든 畜生이 되었든 하다못해 植物이라도 좋은 음악과 좋은 표현에 좋게 반응하지 않겠는가?
-어디는 된장에도 첼로를 연주해 들려주고 누룩에다 클래식을 들려주어 술 빚는데 효과를 나름대로 보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14. 그런데 四無量心에 입각해 널리 설하는 것(곧 廣爲人說)이 因緣 있는 者이든 없는 者이든 주변 存在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도 四無量心을 지니고 반야바라밀다 法門의 功德을 가지기 시작한다면 바로 버릇의 淨化로 연결되니 그것이 바로 罪業消滅의 시작이자 完成 아니겠는가?
15. 만일 초기불교의 四無量心보다도 더 强한 버릇 淨化의 能力을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더 强한 罪業 淨化 消滅의 功能을 발휘할 것은 당연하다.
그럴 때 그 방법이 바로 金剛經 법문을 因緣 있는 者의 罪業消滅에 목표점을 두고 누군가 受持 讀誦 하고 ‘널리’ 廣爲人說하는 것이니 그 功能이 이미 ③無量福德(6항의 ③번)을 生成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도 强한 罪業 淨化의 결과를 잉태하지 않겠는가!
16. 사실 四無量心의 慈悲喜捨는 諸法이 空함을 哲見하는 반야바라밀다 法門을 바탕에 둘 때 가장 强力하게 발생한다.
“초기불교의 四無量心은 業說에 바탕을 둔다. 善의 正義가 공동체 전체의 利益을 전제하기 때문에 我執의 흔적이 있어 기실은 無量하기 어렵다. 我執이 我執임을 알고 그 我執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無量心이 된다. 초기불교는 거기까지 가라는 제안의 성격이 强하다.
그럴 때 我執의 제거는 초기불교의 八正道와 같은 修行을 통해서 可能하지만 그 窮極의 完成은 반야바라밀다 法門에 이르러야 한다.”
그야말로 微細 煩惱까지 다 사라진 境地는 반야바라밀다 法門이기 때문이다. 그 道理를 스스로 受持 讀誦 하고 널리 廣爲人說하여 듣게 하고 깨닫게 해야 한다. 그럴 때 四無量心이 확보되니 이는 大乘의 四無量心이라고 부를만하여 가히 大慈. 大悲. 大喜. 大捨가 성취된다.
17. 金剛經은 現在的 부촉과 功能을 설하는 대표적인 經이다. 이는 阿彌陀 經 등이 死後에 초점을 두는 것과 비교할만하다. 영가(靈駕)는 사실 現在的 存在이다. 이미 나름의 果報를 받았기 때문에 時間的인 격차가 空間的인 차이로 이미 환치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時間을 거슬러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空間的 差異를 넘어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좋은 기운을 지금 이 순간 널리 펼쳐야 한다.
그야말로 空間的인 差別을 넘어서서 東西南北 上下 사유를 다 포함하고 그 속의 모든 生命體를 다 포함하여 영향을 미치려면 我執 또는 微細 煩惱마저 완전히 除去할 것이 前提된다. 그것은 金剛經과 반야바라밀다 法門이 아니면 어렵다.
18. 결국 반야바라밀다 法門을 發心 持戒에 입각해 스스로 受持 讀誦 하고 四無量心에 입각해 널리 廣爲人說해야 한다. 그러면 因緣 있는 영가(靈駕)에게 까지 반드시 그 전파력이 보장된다.
이를 도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金剛經의 受持 讀誦 廣爲人說 → 내 자신의 罪業淨化 + 靈駕에 영향을 미침 → 靈駕의 心性淨化 → 靈駕의 罪業消滅 → 薦度(천도)의 성취 |
우리가 제16품 능정업장분을 공부하면서 金剛經을 受持 讀誦하고 廣爲人說 하더라도 若爲人輕賤한다면 그로 인해서 先世罪業則爲消滅이라는 대목과 제15품 持經功德分에서 “이 법문을 듣고 이를 비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福德이 無量하다”는 대목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 2가지 경우는 서로 상반되는 입장으로서 우리가 이 法門을 經說 하는 것을 만나더라도 誹謗하지 말라는 가르침과 하나는 우리가 이 法門을 經說 할 경우 남이 나를 비방하드라도 輕賤 받음으로서 나의 罪業의 잔여분(남이 피해 받은 만큼의 부분)이 消滅한다고 생각하라는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
물론 金剛經이 교설 되던 시기는 小乘과 大乘의 반목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설명일 수 있지만 이를 現代的인 시각으로 본다면 종교적인 관용을 실천하라는 부처님의 메시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어느 기자의 기고문을 참고해 보자.
관용의 의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도 종교 문제가 로마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다. 특히 그리스 - 로마로 이어지는 전통 신앙과 유대교를 모태로 하는 기독교 사이의 경쟁은 종교와 문화의 충돌을 넘어 종교와 인간사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기독교가 승리하는 과정이 로마제국의 붕괴와 맞물리게 되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멸망원인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도 ‘배교자’ 율리아누스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가 일신교의 폐해를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라고 했었다. 일신교인 기독교에서는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진 자는 ‘이교’나 ‘이단’이 된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인데 일신교인 기독교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다. 다른 신앙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신앙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력이 미미했던 제국의 전성기는 다문화. 다종교. 다민족의 보편제국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제국 말기에 이르러 기독교의 광범위한 침투는 관용과 개방으로 일관하여 30만이 넘는 신을 가졌던 로마인을 바꾸어 놓았고 결국 보편 제국의 성격을 잃게 했다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가 지배하는 중세 1000년과 고대 그리스 - 로마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를 생각해 본다면 기독교로 인한 보편제국의 상실은 시간의 횡적 흐름이 인류의 진보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저자가 일신교와 다신교 사회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 로마神처럼 인간을 보좌해주고 수호해주는 神이든 기독교에서처럼 인간을 인도 하고 구원을 주는 존재이든 절대자는 현대에 와서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같은 신앙을 갖지 않을뿐더러 적어도 다른 종교를 용인하는 다신교도가 아니라는데 있다.
모든 인간이 전성기의 로마인처럼 혹은 적어도 15. 16세기 투르크만 같았어도 종교로 대립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이르러서도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분쟁은 전쟁으로까지 인식되기도 한다.
유럽, 아메리카대륙. 오세아니아의 기독교(구교와 신교를 합해서)와 중동. 북. 중부 아프리카. 소아시아에서 중국과 인도의 접경지역까지의 이슬람. 각각 10억이 넘는 인구간의 대립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종교간 혹은 종파 간 대립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다.
종교간.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갈등은 우리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축구대표감독의 ‘하나님께 감사한다.’라는 말에 비 기독교인들이 흥분하고 우상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있는 단군상의 목이 떨어져 나간다. 학교 교정을 거닐다 ‘예수님을 믿느냐’라고 하며 접근하는 사람 때문에 불쾌해지기도 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의 신경질적인 적대감에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로마가 다신교사회 즉 믿는 神이 여럿이 아니라 타인의 종교에 관대한 사회였던 이유를 단지 인간을 보조하고 수호했던 올림푸스의 神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을까. 물론 기독교의 神을 생각해 본다면 주요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신교 사회였지만 그리스인의 신앙을 제재하지 않았던 오스만투르크가 있었다. 항복해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로도스의 그리스인들이 결국 항복을 택한 사실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로마가 다신교사회로 보편제국을 이루며 번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시 “관용”이다.
일례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내란을 막고 국가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설명은 종교를 믿음의 문제임에 앞서 사회. 정치적인 문제로 보는 비 기독교인의 관점에 가장 충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관점이 남는다.
“관용”은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므로 그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비 기독교로서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을 지지한다손 치더라도 기독교의 시각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거나 덮어놓고 ‘그건 너희들 시각에 불과하다’라고 한다면 이미 일신교도에겐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없다고 말할 자격이 없어져 버린다.
적어도 우리사회에 있어서 종교 갈등은 바로 남에게 요구하는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는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즉 자신의 신앙을 존중해 달라고 하면서 남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거나 남에게 관용의 태도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타종교에 전혀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관용”이라는 미덕이 너무나 부족한 게 아닐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종교는 때론 한 사람의 전부가 된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마따나 모든 사람은 각각의 스타일 즉 그것을 포기하면 이미 그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종교는 한 신도의 스타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일신교도에게 어떻게 당신만 진리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신교도가 ‘나의 신만이 진리이다’라는 명제를 포기한다면 이미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대로 일신교는 자신만의 진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진리는 삶에 관철되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일신교도에게 종교는 현실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종교를 믿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신교도의 바로 이러한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종교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계할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어떤 믿음을 가질지에 대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 자유는 그 누구에게도 침해되거나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 자유 중에 단연 으뜸은 바로 종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종교는 고도화된 사유체계이다. 종교의 자유로운 선택과 선택한 종교에 대한 타인의 이해와 배려는 인권보장의 기본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바로 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한 로마 전통신앙과 기독교의 본질적인 차이는 지금 우리사회의 종교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서로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했다면 이제 “관용”이 남았다. 기독교인인 축구대표 감독의 언행도 그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며 ‘예수를 믿으라.’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교회 사람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남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이래야만 축구대표 감독과 신념 있는 교인의 존재와 인격을 존중할 수 있다. 또 절에 다니고 단군 상을 세우는 것도 단지 나와 다른 신앙을 가졌을 뿐이며 ‘믿음이 없는 자에게 지옥을!’이 아닌 ‘그들에게도 축복을’ 이라 기도해야 비 기독교인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생각과 믿음이 다르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일신교인 기독교의 폐해로 로마가 멸망하고 중세 암흑시대를 가져왔다는 따위의 논리는 지금 우리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문제는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게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관용이 없던 시대가 어떠했는지 만 기억하면 되지 않을까. 누가 무슨 종교를 믿느냐. 그 종교의 속성은 어떠하냐는 다분히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위대한 보편제국을 이룩했던 고대 로마인의 “관용”이란 미덕에서 우리는 종교 갈등을 넘어 사회화합과 번영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 까.
이상의 글에서 그 결론을 보면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대중을 위한 매스컴에 실리는 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一神敎의 思想에서 다른 宗敎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宗敎를 포기해야 한다는 문제이므로 관용으로 자신의 宗敎를 포기하기는 거의 不可能한 것이다.
그렇다고 佛敎人 보고 宗敎를 포기하라고 할 수 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佛敎는 소멸하고 一神敎로 改宗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宗敎에서 관용이란 내 것은 기본으로 남겨두고 상대방을 인정하라는 것인데 그리되면 그것은 가식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밖에는 될 수가 없다.
우리는 日常生活에서 어떤 사람이 분명히 잘못된 일을 강력히 주장할 때 속으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싸우기 싫어서 그래 맞는다고 할 때가 많다. 그러면 이것이 관용인가. 그 내용은 타협인가. 포기인가. 항복인가. 자비인가. 진정한 관용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인가.
이 문제의 해답이 佛敎에는 있다. 그 해답은 金剛經의 시각으로 본다면 반야바라밀다. 즉 法性의 次元에서 보아야 할 문제인 것이다. 반야부 경전은 涅槃과 生死를 부정함으로서 비로소 반야바라밀다 즉 法性의 次元에서만이 해결되는 것이다. 이 次元에서는 佛敎라는 宗敎도 부정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부정된다.
따라서 서로의 宗敎를 부정하면 모든 宗敎는 하나의 수단이며 法性의 次元에서는 모두 같다는 시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도 laksana의 相으로 보는 시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에 가서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내가 金剛經 강설 법문을 듣고 비방하지 않으면 無量福德이 있다는 가르침과 내가 金剛經을 受持 讀誦하고 廣爲人說 할 때 다른 사람이 나를 輕賤하더라도 나의 과거세業 중에서 殘餘 業障(業은 外 行動이므로 他人에게 남아있는 나에 대한 좋지 않은 記憶 즉 남이 피해 받은 만큼의 기억)이 소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라는 부처님가르침의 결론은 모든 것을 法性의 次元에서 보아야 한다는 부처님의 뜻이라고 생각된다.
앞에 있는 사례에 이어 종교적인 관용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초기불교의 자료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 다음 문건을 참고해 보기로 한다.
종교적 관용에 관한 참고문건
Ⅰ. 다종교사회에서의 비판의 문제점
붓다는 당시에 도덕부정론자로 알려진 푸라나 카싸파(Purana- kassapa)등에게 “作用이 있는데도 作用이 없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며 그들을 무작용론 자(無作用論者)로 비판한다.
그렇지만 오히려 불교를 무작용론 또는 허무론(虛無論)이라고 공격하는 경향을 만날 수 있다. “사문 고타마는 무작용론 자로서 무작용으로 법을 설하고 무작용으로 比丘들을 인도한다.” “사문 고타마는 허무론자이다. 衆生들의 斷滅과 消滅과 없어짐을 주장한다.”
붓다는 스스로 “진리의 보호”를 주장했는데 그 방법으로 “①신앙 ②성향 ③전통 ④양상에 대한 사색 ⑤견해에 입각해 선정 속에 들어서 지속하는 것” 이 다섯으로 眞理를 주장하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붓다의 지적은 분명 온당하다. 문제는 그 지적을 불교 아닌 다른 종교에만 적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 고타마 붓다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사랑할 줄 알고 他人의 마음에 대해 알아내는 能力을 갖춘 比丘라면 如來(고타마 붓다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로 眞理를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았는지 어떤지를 識別하기 위해 마땅히 조사를 행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붓다의 주문은 자신조차 비판하라는 선언으로 보이거니와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비판도 허용하겠다는 것은 眞理를 보호하려는 그의 입장에 一貫性이 있음을 보여준다.
Ⅱ. 진정한 종교의 판단기준
[수밧다의 질문]
행각사문 수밧다는 붓다가 계신 곳으로 왔다. 붓다와 함께 앉은 수밧다는 붓다께 여쭈었다. “고타마시여. 사문 또는 바라문으로서 승단을 지니고 집단을 지니고 집단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고 명예롭고 가르침을 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하다고 尊敬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곧 푸라나 카싸파. 막칼리 고살라 아지타 케사캄발라. 파쿠다 캇차야나. 산자야 벨라풋타. 니간타 나타풋타 등입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自身들의 주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입니까. 또는 모두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또는 일부는 알고 일부는 모르는 것입니까.”
[붓다의 가르침]
“됐다. 수밧다야. ‘그들 모두가 지신들의 주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인가. 모두가 잘 모르고 있는 것인가. 또는 일부는 알고 일부는 모르는 것인가.’하는 질문은 그만 두어라. 수밧다야. 너에게 법을 설하겠다. 그것을 듣고 잘 사유하여라. 내가 설하겠다.”
“예. 붓다시여”
[진정한 종교의 조건]
“수밧다야. 거룩한 여덟 가지 길(八支聖道 = 八正道)이 存在하지 않는 敎法과 戒律에는 沙門이 存在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두 번째 사문도 존재하지 않고 세 번째 사문도 존재하지 않고 네 번째 사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밧다야. 거룩한 여덟 가지 길이 존재하는 敎法과 戒律에는 沙門이 存在한다. 그곳에 두 번째 사문도 존재하고 세 번째 사문도 존재하고 네 번째 사문도 존재한다.”
Ⅲ. 팔정도와 진정한 종교
위의 경설에서 언급하는 네 가지 沙門이란 어떤 개별 종교에 관계없는 진정한 종교인을 뜻하는 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거룩한 여덟 가지 길이란 바로 八正道라는 修行法을 말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인은 바로 八正道를 실현하는 자로 그리고 진정한 종교는 그런 종교인이 存在하는 宗敎로 규정한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八正道의 經說的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미리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八正道안에는 불교라는 특정 종교가 전혀 부각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진정한 종교 또는 종교인은 어떤 특정 종교를 信仰한다는 次元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普遍的 修行法을 실현하고 있다는 次元에서 결정된다는 의미를 확정적으로 드러내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八正道와 관련된 가장 요약적인 경설 하나를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이것이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이다. 곧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정진. 바른 기억. 바른 집중이다.
어떤 것이 ①바른 견해인가. 比丘들아. 괴로움에 대한 앎. 괴로움의 집기에 대한 앎. 괴로움의 멸함에 대한 앎.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앎. 이것이 비구들아. 바른 견해이다.
어떤 것이 ②바른 사유인가. 벗어남의 사유. 분노하지 않는 사유. 해치지 않는 사유. 이것이 비구들아. 바른 사유이다.
어떤 것이 ③바른 언어인가. 거짓말을 멀리하고 험담을 멀리하고 거친 말을 멀리하고 쓸데없는 말을 멀리한다. 이것이 比丘들아. 바른 언어이다.
어떤 것이 ④바른 행위인가. 살생을 멀리하고 훔치는 짓을 멀리하고 애욕에서의 음행을 멀리한다. 이것이 比丘들아. 바른 행위이다.
어떤 것이 ⑤바른 생활인가. 여기에서 比丘들아. 삿된 생활 법을 버리고 바른 생활 법으로서 삶을 꾸려간다. 이것이 비구들아 바른 생활이다.
어떤 것이 ⑥바른 정진인가. 여기에서 比丘들아. 比丘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惡하고 不善한 法들을 일어나지 않도록 意慾的으로 노력하고 精進力을 일으키고 마음을 잡아 노력한다. 이미 일어난 惡하고 不善한 법들을 버리기 위해 意慾的으로 노력하고 精進力을 일으키고 마음을 잡아 노력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善한 法들을 일어나게 하기 위해 意慾的으로 노력하고 精進力을 일으키고 마음을 잡아 노력한다. 이미 일어난 善한 法들을 머물게 하고 망실되지 않게 하고 더 많이 되게 하고 방대하게 하고 닦이게 하고 충족되게 하기 위해 意慾的으로 노력하고 精進力을 일으키고 마음을 잡아 노력한다. 이것이 比丘들아. 바른 정진이다.
어떤 것이 ⑦바른 기억인가. 여기에서 比丘들아. 몸에서 몸을 보고 지내되 열심히 智慧와 記憶을 갖추고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여 지낸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보고 지내되 열심히 智慧와 記憶을 갖추고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여 지낸다. 이것이 比丘들아. 바른 기억이라고 불린다.
어떤 것이 ⑧바른 집중인가. 여기에서 比丘들아. 比丘가 愛慾을 떠나고 善하지 못한 法을 떠나 사색과 사려를 갖춘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낸다.
사색과 사려가 적정해져 안으로 깨끗하고 마음이 하나로 되고 사색과 사려가 없고 집중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낸다.
기쁨에 대한 탐착을 떠나 담담히 바라보면서도 기억과 지혜를 갖추어 지낸다. 그리하여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게 되어 ‘담담히 바라보고 기억을 갖춤은 즐거운 삶이다.’라고 성인들이 말하는 세 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낸다.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어 또 안심과 근심도 이미 과거에 소멸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담담히 바라보면서도 기억을 갖추어서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낸다.
이것이 비구들아 바른 집중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아. 이것이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이라는 거룩한 진리이다.”
이상의 八正道에 대한 설명 중에서 두 가지 정도를 주의하고 나면 八正道의 가르침은 어떤 宗敎를 信仰하든 관계없이 당연한 요청들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窮極的으로 八正道 안에는 佛敎라는 개별 종교가 굳이 강조되지는 않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부연하기 전에 그 두 가지 주의할 점에 대해 먼저 언급해 보자.
우선 하나는 ①바른 견해에 대해서 조금 설명할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善 ‧ 惡의 의미에 대해 좀 첨언할 것이 있다.
바른 견해는 네 가지 사실에 대한 앎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사실[苦諦]에 대해 정확히 알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이다.
이는 모든 종교가 동의하는 바이다. 흔히 佛敎는 苦痛에 대한 意識이 강하고 基督敎는 罪惡에 대한 意識이 강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같은 말이다. 基督敎는 苦痛의 原因이 人間의 罪惡이라고 본 것이므로 기실은 人生이 괴로움에 제압되어 있다는 데서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괴로움의 집기[集諦]에 대한 앎인데 이는 괴로움의 발생원인과 과정에 대한 앎을 뜻한다. 초기불교는 괴로움의 발생 원인을 무명(無明) 곧 眞理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 ‧ 착각 ‧ 배반에 둔다. 眞理가 무어냐에 대해서는 종교마다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眞理에 대해 무지하고 착각하고 배반했기에 괴로워진다는 論理를 받아들이지 않을 종교는 없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眞理는 구체적인 물체나 인격체가 아님도 흥미 있는 사실이다. 초기불교는 眞理를 법성(法性, dharmata)이라고도 부르거니와 그것은 모든 존재나 사건에 내재된 법칙을 뜻하는 말이다.
초기불교는 괴로움의 발생과정을 네 가지로 설한다. 하나는 인과율적 발생과정. 둘은 因緣論的 발생과정. 셋은 相依相關的 발생과정. 그리고 최종적으로 緣起論的 발생과정이다. 바로 이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인과율(因果律) ‧ 인연론(因緣論) ‧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 연기(緣起) 등이 바로 法則이자 法性이자 初期佛敎가 보는 眞理인 것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法則들을 고찰해보면 그것을 굳이 부정할 어떤 宗敎도 딱히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存在나 事件을 설명하는 根本原理를 밝힌 것이니 누구나 세상을 살펴보면 그 原理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緣起로 종합되는 이상의 原理들을 자신이 지은 것도 아니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건 아니하건 관계없이 法界에 상주[法界常住]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단지 그것을 깨달아 중생에게 연설해 깨우쳐 줄 뿐이라고 설했다.
이어서 세 번째는 괴로움의 멸함[滅諦]에 대한 앎인데 이는 괴로움을 없앨 수 있음에 대한 확신과 괴로움이 사라진 境地에 대한 앎을 뜻한다. 그럴 때 모든 종교는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반드시 하고 있다. 예컨대 基督敎에서 永生을 약속하고 佛敎에서 涅槃을 약속하는 것은 바로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약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서의 앎은 모든 종교가 공유되는 것이다. 아울러 괴로움을 극복한 境地를 종교마다 선언하고 있거니와 초기불교는 그것을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涅槃이라고 한다. 여기서 涅槃은 “구차제정 수행을 통해 成就되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보편타당한 永生의 實體的 흐름”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涅槃에 대한 설명 중에서 ‘구차제정’이나 ‘실체적 흐름’같은 표현은 다른 종교에서 주장하는 표현이 아니지만 ‘즐거움으로 충만한’ 또는 ‘영생’과 같은 표현은 사실 여러 종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그 차이도 물론 있지만 공유하는 지평도 상당히 넓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차제정’이라는 표현은 이 八正道 중에 마지막인 바른 집중과 연결되는 본도(本道) 修行法을 뜻한다. 따라서 涅槃에 대한 설명을 구성하는 술어들을 분석해 보면 불교에만 고유한 폐쇄적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네 번째로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道諦]에 대한 앎인데 그것은 바로 八正道에 대한 앎이다. 八正道를 중심으로 한 修行만이 괴로움을 끝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진정한 종교의 조건은 언제나 八正道로 대표되는 修行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선 ‧ 악(善惡)에 관해서는 종교사상마다 그 윤리학적 입장이 다르다. 예컨대 基督敎의 善이 信仰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면 佛敎의 善은 공리(共利)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基督敎의 信仰이 共利를 무시하게 하는 信仰은 결코 아닐 것이다.
佛敎 또한 信仰의 功德을 강조하여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고 하는 유명한 문구가 아니라 하더라도 초기불교에서는 이미 修行 및 善行의 대표적인 덕목으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사예류법(四預流法)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사불괴정(四不壞淨). 오근(五根) 중의 신근(信根). 오력(五力) 중의 신력(信力) 등 믿음에 관한 교설은 풍부하다.
어쨌든 佛敎의 信仰이 다른 宗敎의 信仰과 같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붓다라는 個別 人格體와 佛敎라는 個別 宗敎에 대한 막무가내기식의 信仰을 뜻하지는 않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필자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八正道 안에는 佛敎라는 個別 宗敎가 전혀 강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붓다라는 개별 人格體가 전혀 前提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八正道의 다른 德目들을 살피면 더욱 증대된다.
②바른 사유를 보자. “벗어남의 사유. 분노하지 않는 사유. 해치지 않는 사유”를 실천하라고 한다. ‘벗어남의 사유’란 애욕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사유하는 것을 특징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어느 종교나 성적인 측면에서의 금욕을 강조하지 않는가?
그것은 굳이 불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분노하지 않음’이란 자신을 공격하는 자에 대한 용서를 뜻하며 ‘해치지 않음’이란 적에 대한 적극적인 동정심을 뜻한다. 여기서 어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③바른 언어와 ④바른 행위를 보자. 어느 종교가 “거짓말을 멀리하고 험담을 멀리하고 거친 말을 멀리하고 쓸데없는 말을 멀리하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며 “殺生을 멀리하고 훔치는 짓을 멀리하고 愛慾에서의 淫行을 멀리하라.”고 명령하지 않겠는가?
⑤바른 생활. 삿된 생활 법은 정당하지 않은 생활 법을 말하고 정당하지 않은 생활법이란 律法에 저촉되는 생활법이다. 여기서 修行者의 경우 律法에 저촉된다함은 修行 이외의 방식으로 음식을 얻거나 생활 용품을 얻는 것을 말하고 在家者의 경우 그가 속한 사회의 法律을 어겨서 얻은 財貨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초기불교의 율법은 그 자체에 불교라는 개별 종교가 전혀 전제되어 있지 않으니 그래서 어느 종교라도 받아들일 만한 요청이고 나아가 종교인이든 무종교인이든 다 받아들일만한 普遍性이 돋보이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⑥바른 정진. 나쁘고 삿되고 속되고 미혹한 惡은 언제나 버려야 하고 좋고 바르고 참되고 밝은 善은 언제나 갖추려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이거니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종교가 어디 있겠는가?
⑦바른 기억. 이 내용이 바로 요즘 한국하회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위파싸나(vipassana)”라고 하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전통적인 修行法의 모태가 되는 사념처(四念處)修行法이다. 佛敎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리고 宗敎人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위파싸나 修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八正道가 다종교사회 속에서의 普遍性을 담보하는 증좌가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끝으로 ⑧바른 집중 또는 바른 삼매. 이것은 전문적으로 색계사선법(色界四禪法)이라는 것으로 초기불교 명상수행의 근본 修行法이다.
이 글이 명상수행을 전문적으로 논급하는 글이 아니므로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는 없지만 단언하건데 이 修行法에서 제시되는 여러 가지 과정과 체험들이 반드시 佛敎人이어야만 성취할 수 있고 佛敎人이 아니면 아니 된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離生喜樂]”을 성취할 수 있고 누구나 “집중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定生喜樂]”, “담담히 바라보고 기억을 갖춘 즐거운 삶[捨念樂住]”, “담담히 바라보면서도 기억을 갖춘 청정함[捨念淸淨]”을 경험할 수 있다.
이처럼 佛敎 修行法 속에는 佛敎가 없다. 그러기에 佛敎 修行法은 다종교 사회의 모든 宗敎를 담을 수 있음을 뜻한다. 또한 그러기에 佛敎도 그렇고 他 宗敎도 그렇고 宗敎의 未來는 修行法에서 찾아야 하며 個別宗敎는 사라져도 修行法은 살아남지 않을까 예단해 보게 된다.
초기불교에서는 自性이 空하다. 라고 한 반면에 반야부에 오면 諸法空性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모든 存在나 事件은 本質의 한 현상일 뿐이라는 시각이 필요하다.
따라서 종교가 참 종교이려면 관용해야 한다. 그러나 종교가 참 종교의 가면을 쓴 사악한 종교라면 관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종교가 참 종교인가 아닌가를 알아내는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19 ~ 20세기는 Religon의 시대였다면
21세기 초는 religiones의 시대(다종교시대. 종교다원시대. 종교들의 시대)
미래는 religons의 시대(종교화의 시대)가 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五濁惡世란 뒤집어서 말하면 5가지가 淸淨해야 세상이 淸淨해 진다는 뜻으로서 이중에서 見濁이란 세상의 見解가 탁하다는 뜻으로 여기서 見解란 세 가지 세상의 눈을 뜻하며 여기서 세상의 눈이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3가지 부류의 사람을 말하며 그 3가지 부류란 敎育者. 學者. 宗敎人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敎育者가 濁하지 않으려면 敎育者가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인 師命意識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學者가 濁하지 않으려면 正直이라는 덕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宗敎人이 탁하지 않고 淸淨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은 師命意識과 正直은 기본이며 여기에 더하여 寬容의 美德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學者가 대부분 宗敎人이었으며 宗敎人이 學者의 역할을 겸해왔다.
初期佛敎의 寬容은 八正道로서 모든 것이 설명되며 부처님의 初轉法輪이 四聖諦와 中道를 설하였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바로 中道의 실천이 八正道이며 四聖諦의 마지막 부분인 道諦의 실천이 八正道이니 모든 내용이 八正道로 歸屬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八正道의 실천만이 寬容의 실천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반야부 경전에 오면 모든 것을 法性의 次元에서 봄으로서 자연스럽게 寬容이 실천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어서 제16능정업장분의 문구인 “왜냐하면 수부티야, 그 사람들은 전생에서부터 악취에 태어나게 하는(應墮惡道) 부정한 업을 지었으나 현세에서 그렇게 천대받음으로써 비로소 전생의 부정한 業에서 벗어나 붓다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에서 붓다의 깨달음 이라는 대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구마라집 역본 漢譯 金剛經에는 先世罪業則爲消滅,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산스크리트 원전에는 단지 buddhabodhim이라고 하여 붓다의 깨달음 이라고만 되어 있다.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면 오로지 그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이 되지만 실제로 깨닫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 깨달음이 초기 성문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벽지보리의 깨달음 등 여러 단계의 깨달음이 있는데 이런 앞의 깨달음은 깨달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따라서 부처님은 반야부 경전이 본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는 것이 주제이니 다른 깨달음을 지칭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 앞의 깨달음도 인정은 해주어야 함으로 이 대목에서는 총체적으로 붓다의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15持經功德分과 제16能淨業障分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분을 그렇게 처리한 것은 아니고 필요한 경우 나머지 부분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분명히 지칭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는 부처님의 의도로 볼 수 있으며 무조건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 과감한 감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한 각 품의 번역 비교표를 참고해 보자.
각 품 번역비교
제2 (선현기청분) katham Bhagan bodhisattvayanasamprasthitena sthatavyam(보살승에 나아가 서있는 자)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제7(무득무설분). tat kim manyase subhute, asti sa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 anuttara samyaksambodhir, ity abhisambuddhah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제8(의법출생분). ato nirjata hi subhute tathagatanam arhatam samyaksambuddhanam anuttara samyaksambodhir
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제14(이상적멸분). tasmat tarhi subhute bodhisattvena mahasattvena sarvasamjna vivarhayitva anuttarayam samyaksambodhau cittam utpada -yitavyam.
菩薩應離一切相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제15(지경공덕분) sarve te subhute sattvah samamsena bodhim dharayisyamti.
如是人等則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
제16(능정업장분) drsta eva 옴귿 taya paribhutataya tani paurvajanmikany asubhani karmani ksapayisyanti, buddhabodhim camuprapsyanti.
先世罪業則爲消滅,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제17(구경무아분) nasti sa kascid dharmo yo nuttaram samyaksambod -him abhisambuddhas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제22(무법가득분) no hidam Bhagavan nasti sa Bhagavan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nuttaraim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h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爲無所得
제23(정심행선분) api tu khalu punah subhute samah sa dharmo na tatra kimcid visamam. tenocyate nuttara samyaksambodhir iti.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제27(무단무열분) tat kim manyase subhute laksanasampada tathagatena anuttara samyaksambodhir abhisambuddha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제31(지견불생분) evam hi subhute, bodhisattvayana samprasthitena sarvadharma jnatavya drastavya adhimoktavyah (보살승에 나아가 서있는 자)
須菩提,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cf. sravaka-bodhi, 성문보리(부파불교에서 자주쓰임. 일명 阿羅漢의 경지.: 사제법에 의한 깨달음)
pratyeka(sam)-bodhi 벽지보리(십이연기에 의한 깨달음)
buddha-jnana-darsana 붓다의 깨달음(일명 성불)
붓다의 깨달음의 크기를 비교해 보기위한 印度의 數字개념을 참조해 보자.
1.락차→ 2.구지→ 3.아유다→ 4.나유타→ 5.빈바라→ 6.긍갈라→ 7.아가라→ ⋯⋯⋯→ 124. 불가설 불가설전
여기서 락차의 크기는 10만이며 구지= 락사☓100배= 1000만 아유다= 구지☓구지=10¹⁴(100조)
나유타= 아유다☓아유다=10¹⁴☓10¹⁴=10의 28승. 빈바라= 나유다☓나유다=10의 28승☓10의 28승= 10의 56승.
긍가라= 빈바라☓빈바라= 10의 56승☓10의 56승 =10의 112승. 아가라= 긍가라☓긍가라= 10의 112승☓10의 112승= 10의 224승. 이렇게 계산하여
*124번째 대수인 불가설 불가설전의 크기를 숫자로 표현하면 10의[7☓2의 n승]승이고 이것은 3.7☓10의 37승]승에 해당한다.
이 말은 1뒤에 0을 3.7☓10의 37승개를 덧붙여야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1뒤에 3.7☓37개 그러니까 약 160개 정도 붙이는 것이 아니고 3.7☓10의 37승개를 붙여야 한다는 말이 된다.
굳이 수 단위로 표현하면 1뒤에 0이 3.7☓100경☓1000경개가 붙어야 한다.
그렇다면 1뒤에 0을 3.7☓10의 37승個 곧 3.7☓100경☓1000경個를 붙이면 그 0이라는 숫자가 늘어선 길이는 어느 정도나 될까?
만일 1자 뒤에 1cm마다 0을 하나씩 쓴다고 하자. 그러면 1자 뒤에 늘어선 0의 길이는 3.7☓100경☓1000경 cm가 된다.
*그렇다면 3.7☓100경☓1000경 cm는 어느 정도의 길이일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가장 긴 길이의 단위는 1光年(ly. light year)이 일반적이다.(파섹(Parsec); 1파섹= 3.258 光年=약30.823Pm=0.030823Em 엑싸미터(exameter; Em): 페타미터의 1000배; 10의 18승 m 등의 단위를 쓰기도 하지만 그럴 때 1光年은 cm로 환산하면 10의 18승 cm(=10의 16승 m =10의 13승 km)이다.
이는 100경 cm라는 말이고 1cm에 0을 하나씩 쓴다면 100경개의 0을 쓸 수 있는 거리이다. 따라서 불가설 불가설전은 光年을 길이단위로 하더라도 3.7☓1000경 光年의 길이를 1cm에 0을 하나씩 쓰면 채울 수 있는 숫자가 된다.
그러면 3.7☓1000경(10의 19승)광년은 어떤 거리일까?
現代科學은 우리 宇宙의 크기를 260억 光年에서 약500억 光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계산의 편의를 위해 370억 光年이라고 해 보자.
* 3.7☓1000경 光年은 3.7☓10의 19승 光年인데 우리 宇宙의 길이인 370억 光年 곧 3.7☓10의 10승 光年의 10억 배의 길이이다.
* 여기서 佛敎의 宇宙觀을 떠올리는 것은 흥미롭다. 宇宙가 1000개가 모이면 1小天世界이고 그 小天世界가 다시1000개가 모이면 1中天世界이고 그 中天世界가 1000개가 모이면 그것이 三千大天世界이다. 다시 말하면 한 宇宙 또는 世界가 10억 개가 모인 것이 三千大天世界이다.
*이는 결국 불가설 불가설전이라는 124번째 마지막 대수가 마지막이 되는 이유의 일단이라 할 수 있거니와 機械的으로 더 큰 숫자를 가져와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일단 이정도 숫자에 이르면 三千大天世界 안에 있는 宇宙를 한 줄로 늘여놓아야 꽉 차고 감당이 되는 숫자이니 족한 줄 알아도 될 것이다.
*결론을 내리면 불가설 불가설전은 1뒤에 0을 1cm에 하나씩 쓸 경우 3.7☓10의 37승 cm의 거리를 필요로 하는 숫자이고 오늘날 宇宙論에 의할 경우 宇宙의 크기를 대충 3.7☓10의 10승 光年 곧 3.7☓10의 28승 cm로 할 때 그런 宇宙가 10의 9승개가 모인 것이 三千大天世界이므로 三千大天世界의 내용물 즉 그 안에 들어있는 宇宙의 수를 늘어놓은 길이에 해당하는 숫자인 것이다.
따라서 이 크기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크기인 것을 감지해 둘 필요가 있다.
이제 제16능정업장분의 마지막대목을 살펴보자.
本文
또한 왜냐하면 수부티야, 나는 잘 알고 있는 것이 있으니 과거세 아승 지 겁에 더욱더 아승 지 겁에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훨씬 이전에, 84 억 천 니유타의 붓다가 계셨다. 나는 이 붓다들을 공양해 기쁘게 해 드렸으니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수부티야, 이처럼 나는 많은 붓다를 기쁘게 해 드리며 한 번도 거역하는 일이 없었지만 후세에 나중 500세에 바른 법이 소멸하는 시기가 전개될 때 이와 같은 경전들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해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수부티야, 전자의 생긴 복덕은 이 생긴 복덕의 백분이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70) 천분의 일에도. 백 천분의 일에도. 백 억분의 일에도. 백 천 억분의 일에도. 백 천 억 나유타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숫자로도 산수로도 계산으로도 비유로도 비슷함으로도 견줄 수 없는 것이다.
또 수부티야, 만일 양가의 아들딸들이 어느 정도 복덕을 쌓았으며 또 그것을 어느 정도 자신의 것으로 하였는가에 대해 내가 설한다면 그 유정은 내 말을 듣고서는 미치고 의기소침하고 마음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실로 수부티야, 여래가 설한 이 법문은 사의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과보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니 궁금해 질 것이다.”
위 법문내용에서 供養(공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제까지는 보시와 金剛經의 受持 讀誦및 廣爲人說의 福德을 비교하는 내용으로 하여왔다. 물론 보시라고 표현하였지만 이 보시라는 말은 단순한 보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6바라밀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를 모두 포함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제16능정업장분 부터는 이 金剛經의 受持 讀誦과 廣爲人說의 福德을 부처님에 대한 供養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부처님에 대한 供養이라 함은 단순한 供養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보시 즉 6바라밀을 포함하는 보시를 基本으로 하는 부처님에 대한 모든 供養具에 의한 一切의 부처님께 供養하는 福德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供養에 의한 福德도 金剛經의 受持 讀誦과 廣爲人說 하는 福德에 비하면 하찮은 정도의 福德 이라는 설명으로서 金剛經의 受持 讀誦과 廣爲人說이 그만큼 대단한 福德을 生成하며 붓다의 깨달음이 보장되는 비할 바 없는 菩薩行이라는 설명인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出家 修行者를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로서 出家修行者는 열심히 修行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훌륭한 供養이라는 것이며 無量福德을 쌓는 일이지 物質的인 供養은 훌륭한 供養이 아니라는 전해지는 경전의 설명이 있다. 그 예로 수밧다 라는 제자가 500명이 먹을 수 있는 죽을 끓여서 부처님께 공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거절하며 修行者가 깨달음으로서 부처님을 供養하는 것이 도리이지 죽 같은 먹을거리로서 如來를 供養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시면서 거절하고 있다.
이 수밧다라는 修行者는 이후에 부처님을 모시는 승단에 있지 않고 가섭존자를 따라다녔으며 이후 부처님 死後에 제1결집의 原因을 제공하는 사람이 된다.
이러한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修行者로부터의 物質的인 供養을 거절한 것은 後世에 올바른 供養에 대한 부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하여 행동하심으로 理解된다.
그렇지만 一般凡夫는 物心兩面으로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供養에 의해서만 福德을 쌓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一般凡夫는 專門的인 修行者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大乘佛敎에 오면 부처님에 대한 物質的인 供養은 基本的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華嚴經의 初地인 歡喜地 菩薩의 願이 바로 부처님에 대한 供養인 것이다. 말하자면 歡喜地 菩薩의 10大願의 시작이 諸佛供養인 것이다.
이 부처님에 대한 供養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에 대한내용의 문건을 참조해 보기로 하자.
ㅡ공양에 관한 문건 ㅡ
제16능정업장분의 공양에 대한 분석
大乘경전은 한 부처님이 아니고 반드시 모든 부처님을 供養할 것을 요구한다. ① ⟪화엄경⟫ <십지 품>은 제1 歡喜地의 십대願 중 첫째願으로 諸佛供養 願을 주장하고 ②⟪극락장엄경⟫에는 48<범본은 46대원>대원 중 제21願이 그러하다.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불자여, 보살이 이 歡喜地에 머물고는 이러한 큰 願과 이러한 큰 勇猛과 이러한 큰 作用을 能히 成就 하나니 이른바 廣大하고 淸淨하고 결정(潔淨)한 알음알이를 내어 모든 供養거리(供養具)로서 일체 부처님께 恭敬하고 供養하여 남음이 없게 하는 것이니 廣大하기 法界와 같고 끝없기 虛空과 같아서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모든 劫 동안에 쉬지 않느니라.”
②“(21)世尊이시여 만일 제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佛國土에 태어나는 보살들은 모두가 부처님의 위신력 으로 말미암아 아침식사를 한번 하는데 걸리는 시간 동안에 여러 다른 佛國土로 가서 수백의 부처님 수천의 부처님 수백천의 부처님 수코티의 부처님 내지 수백천 코티니유타의 부처님들을 모든 즐거운 供養具로 모셔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다면 결코 저는 더 이상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원만히 잘 깨닫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부처님을 供養하는데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하나는 부처님은 一世一佛主義에 입각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을 供養하기 위해서는 한 세상에서는 時間的으로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한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려면 空間移動能力이 필요하다.
⟪금강경⟫의 <제16능정업장분>과 ⟪화엄경⟫은 시간적으로 오랜 세월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극락장엄경⟫은 空間移動의 能力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토부는 空間的으로 他邦佛 思想을 주장하므로 보살이 부처님을 供養하는데도 지금 이순간의 무수한 他邦佛을 供養하는 것으로 제안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에 비해 일반적으로 諸佛供養은 무수한 세월을 거치며 世世生生 供養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무수한 세월을 거치며 供養하겠다는 것은 世世生生 부처님을 만나기를 願해야 한다는 뜻>
초기불전 ⟪불종성경⟫은 練燈佛 이래 부처님이 出現할 때 마다 本生菩薩이 練燈佛을 포함해 24분의 부처님께 供養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제16능정업장분>은 연등불을 거론하며 練燈佛부터 고작 24분의 부처님만을 供養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出現한 무수한 부처님을 모두 供養했다고 나오는 것은 나름대로 意味있는 연관이라 할 것이다.
또 하나 供養의 방법으로 모든 供養具로 供養하다는 대목도 주의해야 한다. 供養에 인색해서는 아니 되니 物心兩面으로 정성껏 供養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한 供養이 한 두 번의 단발성으로 그쳐서는 아니 되고 어느 정도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供養의 理由가 부처님의 敎化를 돕고 나아가 자신의 깨달음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초기불전의 過去七佛 供養 모습을 소개한다.
수메다 보살의 修行은 그 이후(연등불)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득한 세월 동안 再生을 거듭했고 91겁 전에는 이름이 아툴라 인 威力 있고 能力 있는 龍王으로 再生했다. 그 劫에 명호가 위파씨(비바시)인 부처님이 出現하셨다. 그 분께는 제자들의 모임이 세 차례 있었다.
첫 번째 제자들의 모임은 680만 명이었고 두 번째 모임은 10만 명이었고 세 번째 모임은 8만 명이었다.
보살은 부처님께 七寶로 아로새긴 黃金의 긴 의자를 보시했다. 이에 스승은 보살에게 授記를 베푸셨다. “그대는 91겁 뒤에 부처님을 이룰 것이다.” 위파씨(비바시) 부처님의 王都는 그 명칭이 반두마티 이였고 반두마 王이 아버지였고 바두마티 가 어머니였다. 칸다 와 티싸 가 두 상수 弟子였고 아소카가 상수 侍者였다. 찬다와 찬다밋타 가 제일가는 두 比丘尼 제자였고 파탈리 나무가 菩提樹였다.
위파씨 부처님의 키는 80완척 이었고 몸에서 뿜어져 나가는 광채는 7 요자나에 미치었고 壽命은 8만세였다. 푸싸 부처님(비바시佛 바로 전의 부처님) 이후에 사람 중에서 가장 높으며 눈을 갖추신 명호가 위파씨 인 正等覺者가 世間에 出現하셨던 것이다.
위파씨 부처님 이후 지금부터 31劫 전에 두 부처님이 계셨으니 한 분의 명호는 시키(시기)였고 또 한 분의 명호는 웨싸부 이였다. 시키 부처님 시절에 보살은 이름이 아린다마 인 王으로 再生해 있었다. 보살은 法服을 비롯한 여러 가지 供養物을 갖춘 큰 보시를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僧團에 올렸다.
아울러 七寶로 장식된 수승한 코끼리와 코끼리 분량의 적절한 供養物을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僧團에 바쳤다. 이에 스승은 보살에게 授記를 베푸셨다.
시키 부처님 이후 名號가 웨싸부 인 스승이 出現하셨다. 웨싸부 부처님 시절 보살은 이름이 수다싸나 인 王으로 再生해 있었다. 보살은 法服을 비롯한 큰 보시를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僧團에 올렸다. 그는 부처님 면전에서 比丘가 되었다. 그리하여 正行과 功德을 갖추었고 佛寶를 생각할 때마다 큰 기쁨을 느꼈다. 이에 스승은 보살에게 授記를 베푸셨다.
웨싸부 부처님 以後에 現在의 劫에 네 분의 부처님이 出現하셨으니 카쿠산다 부처님. 코나가마나 부처님. 가싸파 부처님(가섭불) 그리고 우리 부처님이시다. 카쿠산다 부처님 시절에 보살은 이름이 케마 인 王으로 再生해 있었다.
보살은 발우와 法服을 비롯한 큰 보시와 세안제 및 의약재료 등을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僧團에 올렸다. 王은 부처님이 설하시는 가르침을 듣고 出家했다. 이에 스승은 보살에게 授記를 베푸셨다.
키쿠산다 부처님 이후에 코나가마나 스승이 出現하셨다. 코나가마나 부처님 시절에 보살은 이름이 팝바타 인 王으로 再生해 있었다. 王인 보살은 대신들에게 둘러싸인 채 스승에게 나아가 眞理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을 모시는 僧團을 초청하여 큰 보시를 베풀었으니 특히 팟툰나 國과 치나 國에서 만든 목화솜으로 짠 천. 비단 천. 양털로 짠 천. 黃金샌들 및 여러 가지 物品을 부처님을 모신 僧團에게 보시했다. 그리고 부처님 面前에서 출가했고 스승은 보살에게 授記를 베푸셨다.
코나가마나 부처님 이후에 명호가 카싸파 인 스승이 出現하셨다. 카싸파 부처님께도 역시 제자들의 모임이 한 차례 있었다. 한 차례 제자들의 모임은 2만 명이었다. 그때 보살은 이름이 조티팔라 인 바라문 童子로 再生해 있었다.
그는 세 가지 베다에 정통했으며 땅과 하늘에 대해서 잘 알았다. 그에게는 이름이 가티 카라(항아리 만들다)인 그릇 만드는 친구가 있었다. 그와 함께 스승께 나아가 法을 듣고 出家했다. 그는 분발 정진하여 삼장에 정통해서 카싸파 부처님의 가르침을 世上에 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에 스승은 보살에게 授記를 베푸셨다. “그대는 이 現劫에 부처님을 이룰 것이다.” 카싸파 부처님이 탄생한 城은 그 명칭이 바라나시였고 이름이 브라흐마닷타 인 바라문이 아버지였고 이름이 다나와티 인 바라문 여인이 어머니였다.
티싸 와 바라드와자 가 두 상수 弟子였고 삽바밋타 가 상수 侍者였다. 아눌라 와 우루웰라 가 제일가는 두 比丘尼 弟子였고 닉로다 나무가 菩提樹였다. 카싸파 부처님의 키는 20완척 이었고 수명은 2만 세였다. 코나가마나 부처님 이후에 名號가 카싸파 인 勝利者이며 法의 王이며 사람 중에서 가장 높으신 正等覺者께서 出現하셨던 것이다.
ㅡㅡㅡㅡㅡ 공양에 관한 문건 끝 ㅡㅡㅡㅡㅡㅡ
이 문건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부처님(諸佛)을 供養하겠다는 것은 세세생생 부처님을 만나기를 發願해야 한다는 것이다. 發願 없이 부처님을 만나고 또 만나서 供養 한다는 것은 또 發願 없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15능정업장분의 마지막 대목.
善業: 남에게 좋은 일(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특히 어려운 때 하는 것이 더욱 善業임.>
勸善: 남에게 좋은 일을 함께 하고 져 권하는 것.<이는 善業에서 한 단계 진보한 행동임.>
부처님이 과거세 아승지 劫 전에 수많은 부처님을 모시고 供養한 功德보다도 後世에 바른 法이 消滅하는 시기에 金剛經 受持 讀誦 廣爲人說의 功德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시기에 이를 믿고 밀고 나아가는 그 힘을 부처님이 인정해 주시는 대목으로 理解하여야 할 것이다.
이어서 마지막 대목에 대하여 原典과 漢譯經典을 비교하여 분석해보자.
제16능정업장분 마지막 대목
또 수부티야, 만일 양가의 아들딸들이 어느 정도 복덕을 쌓았으며 또 그것을 어느 정도 자신의 것으로 했는가에 대해 내가 설한다면 그 유정은 내 말을 듣고서 미치고 의기소침하고 마음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실로 수부티야, 여래가 설한 이 법문은 사의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과보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니 궁금해 질 것이다.1)
sacet punah subhute tesam kulaputranam kuladuhitrinam vaham punyaskandham
bhaseyam, yavat te kulaputra va kuladuhitaro va tasmin samaye punyaskandham prasavisyanti pratigrahisyamti, unmadam sattva anuprapnuyus cittaviksepam va gaccheyuh. api tu khalu punah subhute cintyo yam dharmaparyayas tathagatena bhasitah, asyacintye eva vipakah pratikanksitavyah.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聞心則狂亂狐疑不信, 須菩提當知是經義不可思議, 果報亦不可思議
1) 緣起에 대해 부처님은 “若欲 思量觀察 分別其義者 則皆荒迷 無能見者[잡아함; 대정장 2, p 60b]”라고 하셨고 龍世界 佛國境界도 만약 “이를 사의하는 사람은 광혹하게 되고 마음과 뜻이 착란 되어 여러 가지 의결만 일으킨다.[대정장 2, p. 657 a~b]”고 설하셨다.( 緣起. 龍世界. 佛國境界를 아함에서의 3대 불가사의라고 한다.)
華嚴에서는 제 33품으로 不思議法品이 설해지거니와 諸佛國土. 諸佛本願. 諸佛種性. 諸佛出現. 諸佛身. 諸佛音聲. 諸佛智慧. 諸佛自在. 諸佛無碍. 諸佛解脫의 열 가지에 대해 그런 분위기의 말씀이 설해진다. 그리고 이 부분과 관련해 자장 중요한 언급은 역시 法華經이다.
法華經의 해당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2 방편품 [교묘한 방편(upayakausalya)](교묘한 방편이려면 道德的으로의 인정받음이 필수이다.)
부처님은 되새김과 알아냄을 갖춘 채(smrtiman samprajana) 三昧에서 깨어나 샤리푸트라 장로에게 말했다.
“샤리푸트라 야, 부처님의 智慧는 심원하고 本質을 알기 어려우며 理解하기 어렵다. 여래⋅응공⋅정등각자 가 깨달은 智慧는 모든 聲門과 辟知佛로서는 알기가 어렵다. 그것은 왜냐하면 샤리푸트라 야, 여래⋅응공⋅정등각자 들은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많은 부처님들을 모셨기 때문이다.
그들 如來들은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부처님의 本行을 본받아 기력을 곤두세워 더 이상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修行했고 멀리까지 修行하여 경탄⋅경이할 만한 법을 얻은 것뿐 아니라 이해하기 힘든 법을 잘 소화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법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사리푸트라야, 여래⋅응공⋅정등각자 들의 깊고 미묘한 의의를 가진 말씀은 理解하기 어렵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은 수많은 교묘한 방편(upayakausalya). 알고 보는 것(jnana-darsana). 원인과 이유의 교시(hetukarana- nirdesana). 근거에 대한 설명 지시(arambana-nirukti-prajnpti) 등. 이것저것 교묘한 방편을 사용하여 이런 것 저런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衆生을 그 속박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修行과 깨달음에 기초한 法을 설하기 때문이다.
샤리푸트라 야, 여래⋅응공⋅정등각자 들은 위대하고 교묘한 방편과 알고 보는 것(知見바라밀)에서는 최고의 바라밀다(mahopayakausalya-jnana-darsana- paramaparamita)에 도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속박도 없고 장애도 없이 알고 보는 힘(jnana-darsana-bala)을 가지고 확신에 차 있으며(vaisaradya)(사무소외), 보통 인간과 구별되는 특이성(avenika)⋅감관(indriya)⋅힘(bala)⋅깨달음의 인자(bodhyanga)를 갖추며 선정(dhyana)⋅해탈(vimoksa)⋅삼매(samadhi)⋅등지(samapatti)(깨닫게 하기위한 방법; 방편)등 일찍이 없었던 법(abbhuta-dharma)을 갖추었기에 여러 가지 法을 설하는 것이다.
샤리푸트라 야, 여래⋅응공⋅정등각자 들은 드물고 일찍이 없었던 위대한 것(mahascaryadbhuta)(知見바라밀)을 얻은 것이다.
샤리푸트라 야, 이러한 말로 만족해라. 여래⋅응공⋅정등각자 들은 드물고 일찍이 없었던 최고의 것을 얻은 것이다.
샤리푸트라 야, 오직 如來만이 如來의 法을 설할 수 있다. 즉 如來가 알고 있는 法을 설할 것이다. 如來만이 一切의 法을 보고 안다.
곧 諸法의 정체(ye)⋅존재방식(yatha)⋅표현(yadrsas)⋅특상(特相, yallaksa -nas)⋅자성(自性, yatsvabhavas) 등이니 제법의 정체가 그러하고 제법의 존재방식이 그러하고 제법의 표현이 그러하고 제법의 특상이 그러하고 제법의 자성이 그러하다고 보고 안다. 실로 如來야말로 諸法의 명료한 目擊者인 것이다.”
이처럼 不可思議에 대한 설명은 부처님에게는 평범한 것이라도 凡夫에게는 不可思議한 것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凡夫에게 思量 觀察 分別에 의해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不可思議한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思議란 思量 分別의 뜻으로서 본건에서는 思量. 觀察. 分別이라 표기함으로서 凡夫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 法에 대한 凡夫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思量. 觀察. 分別뿐이며 이 思量. 觀察. 分別로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으로서만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이므로 부처님의 이 法門은 不可思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不可思議의 대상으로서 아함에서는 緣起法. 龍의世界. 佛國境界를 3대 不可思議라고 하고 있다. (龍을 잡아먹고 사는 생물이 금시조인데도 불가사의한 것이 龍의 世界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대목에서 法門이 不可思議한 것임은 물론 果報도 不可思議 하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果報는 金剛經을 受持 讀誦 廣爲人說 함에 의한 果報를 말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아함 차원)의 3대 不可思議
① 緣起法.
② 龍의 世界
③ 佛國境界
또 4가지 不可思議
① 부처님의 境界(佛國境界)
② 禪定三昧에 들어있는 修行者의 禪의 境界
③ 業의 果報
④ 世間에서의 宇宙論(세상의 끝이나 시작의 境界)
思議: 우리가 行하는 보통의 思惟方式으로서 論理를바탕으로한 생각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一般的인 思惟는 아무리 길게 해도 시간만 길어질 뿐 높아지지는 않는다. 깨달음에 의해서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思惟를 길게 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華嚴經의 不思議法品에서는 不可思議한 것에 대한 것은 一般的인 思惟方式이 아닌 新 思考方式이 필요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어야 이 不可思議한 것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體驗과 經驗을 연결한 特別한 思惟인데 一般的인 思惟로는 不可能하기 때문에 不可思議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