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본 금강경

제17 究竟無我分

동산/혜산방 2011. 12. 2. 14:15

 

本文(17 究竟無我分)

71)실로 수부티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어떻게 서 내어야 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세존이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수부티야,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는 내가 모든 유정을 무여열반계로 멸도 시켜야 한다. 그러나 설사 많은 유정을 멸도 시켰다 하더라도 어떠한 유정도 반열반한 유정은 없다.’라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만일 보살에게 유정이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그는 보살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는 보살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실은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그 어떠한 법이 있는가.”

 

이와 같이 설하셨을 때 수부티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이해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였을 때 세존은 수부티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수부티야. 바로 그러하다. 수부티야,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부티야, 만일 여래가 무엇인가 깨달은 법이 있다면, 디팡카라 여래는 나에게 젊은이여, 너는 후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수부티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인 나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그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젊은이여, 너는 후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될 것이다.’라는 수기를 디팡카라 여래로 부터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는 진실한 진여72)의 다른 이름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생하는 일이란 없는 법성의 다른 이름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법의 단절됨의 다른 이름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생하는 일이란 없는 궁극적인 것의 다른 이름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최상의 의미는 곧 생하는 일이 없음이기 때문이다.”

수부티야, 만일 누군가가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실제로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수부티야, 그는 진실이 아닌 것에 집착해 나를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수부티야, 여래가 깨달았거나 또는 설하는 바의 법에는 진실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붓다의 법이라고 여래는 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이 아니다라고 여래는 설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붓다의 법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수부티야, 그것은 다음과 같으니 갖추어진 몸, 위대한 몸을 지닌 사람과 같다.”

 

수부티 존자는 말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갖추어진 몸, 위대한 몸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씀하지만,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실로 몸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갖추어진 몸. 위대한 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수부티야, 어떤 보살이 나는 유정들을 멸도 시킬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도대체 보살로 불릴만한 그 어떤 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수부티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로 불릴만한 그 어떤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유정, 유정이라는 것, 그것은 유정이 아니라고 여래는 말하며, 그러므로 유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여래는 모든 법에는 자아가 없으며 유정이 없으며 영혼이 없으며, 개인이 없다고 설한다.

수부티야, 어떤 보살이 나는 국토장엄을 성취하리라하고 말한다면, 그에게도 그와 같이 말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국토 장엄 국토장엄 이라는 것, 것은 장엄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니, 그러므로 국토장엄으로 불리는 것이다.

수부티야, 만일 보살이 제법에는 자아가 없다, 제법에는 자아가 없다고 신해한다면, 여래 응공 정등각자는 그를 보살마하살이라고 칭한다.”

71) [17장 구경무아분]

72) bhuta-tathata

 

17 究竟無我分 은 장문이므로 부분씩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앞품에서 나온 내용을 다시 기재한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약간씩 추가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 부분을 비교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실로 수부티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어떻게 서 내어야 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세존이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수부티야,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이렇게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모든 유정을 무여열반계로 멸도 시켜야 한다. 그러나 설사 많은 유정을 멸도 시켰다 하더라도 어떠한 유정도 반열반한 유정은 없다.’라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만일 보살에게 유정이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그는 보살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생각 내지 개인이라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는 보살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실은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

atha khalv ayusman Subhutir Bhagavantam etad avocat : katham Bhagavan bodhisattvayanasamprasthitena sthatavyam. katham pratipattavyam, katham cittam pragrahitavyam?

Bhagavan aha : iha subhute bodhisattvayanasamprasthitenaivam cittam utpadayitavyam : save sattva mayanupadhisese nirvanadhatau parinirvapayitavyah. evam ca sattvan parinirvapya, na kascit sattvah parinirvapito bhavati. tat kasya hetoh?

sacet subhute bodhisattvasya sattvasamjna pravarteta, na sa bodhisattva iti vaktavyah, jivasamjna va yavat(내지) pudgalasamjna va, pravarteta, na sa bodhisattva iti vaktavyah. tat kasya hetoh? nasti subhute sa kascid dharmo yo bidhisattvayanasamprasthito nama.

爾時須菩提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實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則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2.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그 어떠한 법이 있는가.”

이와 같이 설하셨을 때 수부티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이해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였을 때 세존은 수부티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수부티야. 바로 그러하다. 수부티야,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2)

수부티야, 만일 여래가 무엇인가 깨달은 법이 있다면 디팡카라 여래는 나에게 젊은이여, 너는 후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수부티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인 나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그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젊은이여, 너는 후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될 것이다.’라는 수기를 디팡카라 여래로 부터 받은 것이다.3)

tat kim manyase subhute asti sa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 dipankarasya tathagatasyantikad anuttaram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h? evam ukta ayusman Subhutir Bhagavantam etad avocat :

yatha ham Bhagavam Bhagavato bhasitasyartham ajanami, nasti sa Bhagavan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 dipankarasya tathagatasy arhatah samyaksambuddhasya antikad anuttaram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h. evam ukte Bhagavan ayusmantam Subhutim etad avocat :

evam etat subhute evam etat, nasti subhute sa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 dipankarasya tathagatasyarhatah samyaksambuddhasyanti -kad anuttaram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h.

sacet punah subhute kascid dharmas tathagatenabhisambuddho bhavisyat, na mam dipankaras tathagato vyakarisyad : bhavisyasi tvam manavanagate dhvani sakyamunir nama tathagato rhan samyaksam -buddha iti.

yasmat tarhi subhute tathagatenarhata samyaksambuddhena nasti sa kascid dharmo yo nuttaram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s, tasmad aham dipankarena tathagatena vyakrto : bhavisyasi tvam manavanagate dhvani sakyamunir nama tathagato rhan samyaksam -buddhah.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於燃燈佛所,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不也世尊, 如我解佛所說義, 於燃燈佛所,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燃燈佛則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燃燈佛與我授記作是言, 汝於來世當得作佛, 號釋迦牟尼,

 

3.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는 진실한 진여의 다른 이름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생하는 일이란 없는 법성의 다른 이름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법의 단절됨의 다른 이름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생하는 일이란 없는 궁극적인 것의 다른 이름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최상의 의미는 곧 생하는 일이 없음이기 때문이다.4)

tat kasya hetos? tathagata iti subhute bhutatathataya etad adhivaca -nam. tathagata iti subhute anutpadadharmataya etad adhivacanam.

tathagata iti subhute dharmocchedasyaitad adhivacanam. tathagata iti subhute atyantanupannasyaitad adhivacanam. tat kayya hetoh? esa subhute anutpado yah paramarthah.

何以故, 如來者則諸法如義

 

1) 3대승정종분과 겹치는 단락이지만 그래도 그에 비해 제17구경무아분에서 새로이 첨가된 부분 이다.

2) 여기까지는 10장엄정토분의 첫 주제와 내용상 일치한다.

3) 역시 10장엄정토분에 덧붙여진 부분이다.

4) 14이상적멸분;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는 진실을 말하며, 여래는 사실을 말하며, 여래는 그대로 말하며, 여래는 다르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 여래는 틀리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와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서로 같음을 알 수가 있다.

 

4.

수부티야, 만일 누군가가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실제로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수부티야, 그는 진실이 아닌 것에 집착해 나를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5)

또한 수부티야, 여래가 깨달았거나 또는 설하는 바의 법에는 진실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다.6)

그러므로 모든 법은 붓다의 법이라고 여래는 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이 아니다라고 여래는 설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붓다의 법이다.’라고 하는 것이다.”7)

수부티야, 그것은 다음과 같으니 갖추어진 몸, 위대한 몸을 지닌 사람과 같다.”

수부티 존자는 말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갖추어진 몸, 위대한 몸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씀하지만,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실로 몸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갖추어진 몸. 위대한 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8)

yah kascit subhute evam vadet : tathagatenarhata samyaksambudd -henanuttara samyaksambodhir abhisambuddheti, sa vitatham vadet, abhyacaksita mam sa subhute asatodgrhitena. tat kasya hetoh?

nasti subhute sa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nuttaram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h. yas ca subhute tathagatena dharmo abhisambuddho desito va. tatra na satyam na mrsa. tasmat tathagato bhasate sarvadharma buddhadharma iti. tat kasya hetoh?

sarvadharma iti sbhute adharmas tathagatena bhasita. tasmad ucyante sarvadharma buddhadharma iti. tad yathapi nama subhute puruso bhaved upetakayo nahakayah. ayusman Subhutir aha : yo sau Bhagavams tathagatena puruso bhasita upetakayo mahakaya iti, akayah sa Bhagavams tathagatena bhasitah. tenocyata upetakayo mahakaya iti.

# 若有人言, 如來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 於是中無實無虛, #是故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 #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5) 7무득무설분; 또 세존은 수부티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다, 라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이라도 존재하는가. 또 여래가 가르친 어떠한 법이라도 존재하는가.” 이와 같이 설했을 때 수부티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 말씀하신 의미를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여래께서 이 아뇩다라삼막사보리 이다, 라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은 없습니다. 또 여래께서 가르치신 어떠한 법도 있지 않습니다.

 

6) 14이상적멸분 여래가 깨닫고 교시하고 통찰한 법, 그것에는 사실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7) 8의법출생분 왜냐하면 수부티야, 이로부터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로부터 제불세존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부처님의 법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실로 부처님의 법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8) 10장엄정토분; 갖추어진 몸이며 거대한 몸이 있으니 마치 수메루 산과 같은 크기의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는 거대하다고 하겠느냐.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거대합니다. 선서시여, 그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는 거대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실로 세존이시여 그 존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제 제17究竟無我分을 각 대목별로 분석하여 보기로 하자.

1.

1)실로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어떻게 서 내어야 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세존이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수부티야,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는 내가 모든 유정을 무여열반계로 멸도 시켜야 한다. 그러나 설사 많은 유정을 멸도 시켰다 하더라도 어떠한 유정도 반열반한 유정은 없다.’라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만일 보살에게 유정이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그는 보살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는 보살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실은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

 

1) [17구경무아분]

2) 3대승정종분 과 겹치는 단락인데 그래도 그에 비해 제17구경무아분에서 새로이 첨가된 부분이 이 마지막 문장이다.

3대승정종분 에서는 菩薩乘을 처음으로 선양하는 입장이므로 그곳에서 대뜸 菩薩이라는 법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제17究竟無我分 정도에 오면 菩薩이나 菩薩乘에 나아가 서 있는 자라는 것도 껍데기이므로 아니다. 없다.’식으로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그 어떠한 법이 있는가.”

이와 같이 설하셨을 때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이해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3)

 

3) 여기까지는 제10장엄정토분의 첫 주제와 내용상 일치한다. 그런데 제10장엄정토분에서는 디팡카라 如來 곁에서 단순히 어떤 법(수기)을 얻은 것이 있는가?(assto sa kascid dharmo)”라고 나온다. 그에 비해 이곳 제17구경무아분에서는 어떤 법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고 明記되어 나타난다.

 

실제 수메다 바라문이 디팡카라 如來의 곁에서 얻은 것은 授記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결과로서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언급하는 것은 다소 맞지 않는 면이 있다. 그러나 授記原因이 되고 아울러 그 이후 필연적으로 뒤 따르는 修行(10만겁 동안 한 번도 게으르지 않은 수행)佛土莊嚴原因이 되어 阿耨多羅三藐三普提라는 結果를 얻었으므로 授記三菩提는 동전의 兩面으로 보아도 된다. 授記삼보리를 얻어 부처님이 된다는 授記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 대목은 디팡카라 부처님과 관련하여 授記를 받았다는 事件도 다 껍데기이고 이처럼 그 原因이 껍데기이니 그 結果 삼보리 또한 껍데기여서 결코 그런 것이 있다고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17究竟無我分에서는 분명히 덧붙이니 授記라는 事件이나 삼보리라는 境地가 진실로 알맹이로 存在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事件일 수 없고 그래서 누가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니 디팡카라 如來가 나에게 授記 주는 일 자체가 없었으리라.”고 맺고 있는 것이다.

 

모든 表現 모든 言說 모든 言語는 껍데기로서의 事件이나 現象에 대해 제시되는 것이지 이미 알맹이일 때는 表現의 범위를 벗어나니 이미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말을 하면 이미 그 말의 내용으로서의 事件은 껍데기이고 窮極的으로 없는 것일 뿐이고 말할 수 없을 때에야 그것이 알맹이인 法性이 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껍데기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상에 걸려들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는 것임)

授記란 쓰임새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이 쓰임새로 볼 때 神 佛 衆生 無差別 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데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쓰임이 다르니 . . 衆生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쓰기 나름이다. 잘 쓰려면 授記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말하였을 때 세존은 수부티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수부티야. 바로 그러하다. 수부티야,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부티야, 만일 여래가 무엇인가 깨달은 법이 있다면, 디팡카라 여래는 나에게 젊은이여, 너는 후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수부티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인 나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그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젊은이여, 너는 후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될 것이다.’라는 수기를 디팡카라 여래로 부터 받은 것이다.4)

 

4) 끝 부분에서 授記를 주었다는 내용은 역시 제10장엄정토분에 비해 덧붙여진 부분이다.

10장엄정토분에는 디팡카라 如來 곁에서 授記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여기 제17究竟無我分授記窮極的으로는 삼보리의 證得으로 귀결되므로 그 연결고리에 입각해서 삼보리의 부정에 까지 밀고 들어가는 추진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授記를 주니 아니 주니 하는 대화를 덧붙임으로서 결국 제10장엄정토분이나 제17구경무아분이나 디팡카라 如來 곁에서 받는 것은 결국 授記라는 평범한 사실을 어기지 않고 있다.

 

3.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는 진실한 진여5)의 다른 이름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생하는 일이란 없는 법성의 다른 이름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법의 단절됨의 다른 이름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생하는 일이란 없는 궁극적인 것의 다른 이름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최상의 의미는 곧 생하는 일이 없음이기 때문이다.6)

 

5) 眞實 眞如(bhuta-tathata) = [無生法性] = [의 단절됨] = [窮極的으로 한 적이 없음] = 如來

[眞實眞如]라는 표현에서 무언가가 분명히 存在한다는 한 시사를 받게 된다. 그런데 그 무언가는 결코 하고 하는 것이 아님을 그야말로 如如不動 한 것임을 세 번에 걸쳐 거듭 강조를 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 구마라집의 번역에서는 거의 생략되다시피 한 것을 볼 때 이는 그의 意圖的인 번역의 結果로 볼만 하다.(이러한 중요한 부처님의 암시를 구마라집 스님은 如意라는 한마디로 끝맺고 있음은 아쉬운 일이다.)

 

앞으로도 法性과 관련된 언급은 축소되는 경향을 지속적으로 보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過程에 충실하다보면 結果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래도 結果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이야말로 수행자의 進路에 힘이 붙게 한다.

그 최소한의 정도는 부처님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부처님은 金剛經에서 이 문단에서 보는 정도의 結果에 대한 언급은 보다 이 많다고 생각하셨다고 볼만하다.

 

그에 비해 Kumarajiva(구마라집)는 지나치게 過程의 언급으로 치우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혹시 그의 佛敎思想이 부정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아닌지 또 어떤 긍정적인 종착점도 인정하지 않는 極端的 思惟에 있기 때문은 아닌지(중관학파의 견해가 그러하며 구마라집도 중관학파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번역이란 역자의 思想에 치명적으로 좌우될 수도 있다는 좋지 않은 선례 중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buta-tathata(진실한 진여) : bhuta; 이미 과거부터 존재해 오는 것. tathata ; 진여 그래서 bhuta-tathata진실한 진여라고 번역한 것임.

그러나 이는 이미 過去로부터 存在해 왔고 하지도 않고 하지도 않는 그 무엇을 지칭하는 것을 암시한다. tathatatatha-gata에서 만든 말로서 이는 마치 sunyatasunya라는 말에서 만들어 낸 것과 같다.

 

眞如라는 말은 그렇다는 뜻인데 무엇인가가 전제되지 않고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니다가 아니고 그렇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있기는 있는데 한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無生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려 다섯 번의 언설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存在함을 强力하게 암시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6) 最上意味無生이라는 표현은 無生法性成就하는 것이 반야부 교설의 窮極的 目的임을 잘 보여준다.

14 離相寂滅分왜냐하면 수부티야, 如來는 진실을 말하며, 如來는 사실을 말하며, 如來는 그대로 말하며, 如來는 다르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如來는 틀리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와 비교해 볼 것.

 

4.

수부티야, 만일 누군가가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실제로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수부티야, 그는 진실이 아닌 것에 집착해 나를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7) 또한 수부티야, 여래가 깨달았거나 또는 설하는 바의 법에는 진실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다.8) 그러므로 모든 법은 붓다의 법이라고 여래는 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이 아니다라고 여래는 설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붓다의 법이다.’라고 하는 것이다.”9)

 

7) 7무득무설분과 비교해 볼 것.

7무득무설분; 또 세존은 수부티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다, 라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이라도 존재하는가. 또 여래가 가르친 어떠한 법이라도 존재하는가.” 이와 같이 설했을 때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 말씀하신 意味를 제가 理解한 대로라면 여래께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다, 라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은 없습니다. 또 여래께서 가르치신 어떠한 법도 있지 않습니다.”

 

7無得無說分의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주석을 참조할 것. 기본적으로 디팡카라 如來 곁에서 삼보리라고 할 만한 것을 얻은 적이 없다고 하면서 삼보리를 부정한 이상 여기서 삼보리도 없고 설한 법도 없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8) 14이상적멸분; 여래가 깨닫고 교시하고 통찰한 법. 그것에는 사실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14이상적멸분의 주석에서 이 대목에 대한 3종 해석을 참조할 것.

 

(14이상적멸분의 주석: 66)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存在事件外的으로 보아 有情界에서 佛界에 이르기까지 모든 存在事件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끝없는 움직임과 변화를 보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內的으로 볼 때 法性으로 되어 있으니 으로 볼 때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할 수 없고 法性으로 볼 때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은밀히 허용된다. 하지만 하니 머물 수 없고 法性하지 않아도 一切 存在共有하니 결국 어느 한 存在事件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9) 8의법출생분; 왜냐하면 수부티야, 이로부터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로부터 제불세존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부처님의 법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실로 부처님의 법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8의법출생분의 주석에서 衆生卽佛의 단언에 대해서 다시 살피기 바란다. 왜냐면 이 대목의 모든 부처님 制外모든으로 일단 해석할 수 있고 그렇다면 부처님 과 다르거나 반대되는 것들이 모두 포함된다. 본시 반야부는 반대되는 것끼리의 同一性 주장에 포인트가 있으나 그것은 다른 것끼리의 同一性을 당연히 포함한다.

따라서 부처님 과 반대인 衆生法과의 同一性뿐만아니라 그의 다른 들과도 얼마든지 同一性을 주장할 수 있으니 이상할 것 없는 표현이다.(8의법출생분의 중생즉불에 대한 단언: 53) 衆生卽佛이라는 반야부의 취지를 담은 단언을 떠올려야 한다. 諸法空相이고 부처의 법도 유정의 법도 제법에 들어가니 이들은 공성의 차원에서는 같은 것이다.)

 

수부티야, 그것은 다음과 같으니 갖추어진 몸, 위대한 몸을 지닌 사람과 같다.”

수부티 존자는 말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갖추어진 몸, 위대한 몸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씀하지만,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실로 몸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갖추어진 몸. 위대한 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10)

 

10) 10장엄정토분과 비교해 볼 것.

10장엄정토분 ; “갖추어진 몸이며 거대한 몸이 있으니 마치 수메루 산과 같은 크기의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는 거대하다고 하겠느냐.”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거대합니다. 선서시여. 그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는 거대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실로 세존이시여, 그 존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5.

세존이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수부티야, 어떤 보살이 나는 유정들을 멸도 시킬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도대체 보살로 불릴만한 그 어떤 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수부티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로 불릴만한 그 어떤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유정, 유정이라는 것, 그것은 유정이 아니라고 여래는 말하며, 그러므로 유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여래는 모든 법에는 자아가 없으며 유정이 없으며 영혼이 없으며, 개인이 없다고 설한다.

 

6.

수부티야, 어떤 보살이 나는 국토장엄을 성취하리라하고 말한다면, 그에게도 그와 같이 말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국토 장엄 국토장엄 이라는 것, 그것은 장엄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니, 그러므로 국토장엄으로 불리는 것이다.11)

 

11) 10장엄정토분의 내용과 비교해 볼 것.

10장엄정토분;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만일 어떤 보살이 나는 국토장엄을 성취하리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국토장엄, 국토장엄이라는 것, 그것은 장엄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한다. 그러므로 국토장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7.

수부티야, 만일 보살이 제법에는 자아가 없다, 제법에는 자아가 없다신해한다면, 여래 응공 정등각자는 그를 보살마하살이라고 칭한다.”12)

 

12) 7무득무설분의 왜냐하면 성인들은 무위법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와 비교해볼만 하다. 다섯 번째 단락에도 그러했지만 無我의 원어가 anatman이 아니고 niratman 이다. 이 접두사의 差異를 어떻게 理解해야 할까? 초기경전의 경우 無我anatman이고 이는 非我意味하다.

 

그에 비해 niratman無我非我의 상태를 意味하기보다는 自我를 제거 탈각시켜버리는 動作意味하게 느껴진다. nirvana(열반) 등에 사용되는 접두사가 nis(동사와 함께 하는 전치사일 때 out, forth; 접두사로서는 out of, lack of)이다. 이는 확실히 除去라는 動作意味가 강한 것이다.

 

이는 반야부의 dynamic한 교리와 연관된다 할 것이다. 7무득무설분에서도 asamskrtaprabhavita라고 하여 pra라는 접두사의 動的인 분위기에 주목했던 적이 있다. 아울러 Kumarajiva(구마라집)의 번역에서 adhimucyate는 지금껏 信解라고 하다가 갑자기 通達이라고 하는 것도 흥미롭다.

 

8)번 설명에서 14離相寂滅分의 해석당시에 누락된 설명이 있어 여기에 추가한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보살은 모든 유정들을 위해 이와 같이 布施하고 喜捨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유정이라는 생각은 곧 생각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가 설한 유정도 곧 유정이 아닌 것이다.” (생각인 것과 생각 아닌 것. 유정인 것과 유정 아닌 것의 대비)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는 진실을 말하며, 여래는 사실을 말하며, 여래는 그대로 말하며, 여래는 다르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 여래는 틀리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여래가 깨닫고 교시하고 통찰한 법, 그것에는 사실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우선 위의 본문에서 如來有情도 곧 有情이 아닌 것이다.” 라고 한 다음에 왜냐하면 이라고 하면서 그 理由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냥 보면 그 理由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論理的 흐름을 자세히 따져 보면 AA가 아니라고 同一律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論理에서는 基準을 부정하면 어디에도 比較할 수가 없기 때문에 昏亂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 衆生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有情有情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理由 비록 지금은 동일율을 부정하는 무서운 이야기이지만 그로인해 混亂 초래 하드라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또 그것이 眞實이며 事實이기 때문에 비록 混亂으로 인하여 내가 비방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진실을 말해야 하며, 사실을 말해야 하며, 그대로 말해야하며, 다르지 않게 말해야 하며, 틀리지 않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 理由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眞實에는 불편한 眞實도 있는 것이다. 宗敎란 불편한 眞實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그 불편한 眞實을 과감하게 이야기 하고 계신 것이다.

나중의 깨달음이라는 利益을 위하여 비판을 감수하시면서도 眞實을 과감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衆生을 위한 慈悲로운 마음을 충분이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는 如來가 깨닫고 敎示하고 통찰한 그것에는 事實도 없고 虛妄함도 없다고 하면서 알맹이를 그대로 드러낼 수가 없으니 이야기한 것은 알맹이에 가까이 간 것은 事實이지만 알맹이는 아니니 事實도 없다고 한 것이고 그렇다고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 한 것도 아니니 虛妄함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9)번에서

法性 : 阿含 次元의 용어임.

眞如 : 法華經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

 

따라서 法性이라는 阿含 次元에서 시작하여 現在의 반야부 단계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에 올 法華 次元의 이야기인 眞如를 미리 언급하여 장차 法華 次元의 이야기가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9)번에서 모든 법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8依法出生分에서 이야기 하는 부처님의 법과는 그 범위가 다르다.

 

8依法出生分에서의 부처님의 이라고 할 때는 부처님 과 그 반대되는 衆生法과의 사이에서 반대되는 것끼리의 포함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모든 법이라고 할 때는 부처님의 衆生 法 기타의 을 모두 포함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17구경무아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부분의 모든에는 自我가 없으며 有情이 없으며 靈魂이 없으며 個人이 없다라는 부분에 있다. 여기서 自我가 없다라는 말은 7無得無說分 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無爲法에 정통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아가 없다[無我]”는 말을 金剛經의 앞부분에서는 그 原語anatman으로 되어있으나 제17究竟無我分에 와서는 이것이 niratman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anatman非我(無我라고 알기는 알지만 執着이 남아있는 상태를 意味)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게 해석하는 것이지만 niratman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無我이다. 이때의 無我動作意味하는 단어로서 확실한 제거라는 動作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niratman이라고 하면 我執이라는 執着을 지속적으로 탈각시켜서 除去해나가는 動作進行하는 맛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anatman이라고 하면 諸法無常하여 無我라고 知的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는 判斷으로서의 境地 즉 아직은 自我라는 執着이 남아 있는 상태라면 niratman이라고 말할 때는 諸法無我라는 단순한 말이 아니고 諸法에 들어있는 我執持續的으로 除去해 나아가는 실제 動作性의 뉘앙스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無爲法에 통달한다는 말과 無我法에 통달한다는 그 내용이 다르지 않은 것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anatman(非我)慧解脫 이라면 niratman(無我)는 미세번뇌까지 모두 除去心解脫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金剛經의 후반에 오면 알고 있는 상태로는 안 되고 我執持續的으로 除去하여 脫却시킴으로서 내 안에 있는 모든 微細煩惱까지도 남김없이 除去해 나아가야 한다는 부처님의 뜻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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