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본 금강경

제14 離相寂滅分

동산/혜산방 2011. 11. 11. 12:36

本文(14 離相寂滅分)

65)그런데 수부티 존자는 법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눈물을 닦고 나서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선서시여.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문은 최상의 (보살)승에 나아가 서있는 유정들을 위하고 가장 수승한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자들을 위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저에게 앎이 생겼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까지 이와 같은 법문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에서 설하는 것을 듣고 진실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보살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을 갖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진실의 생각 진실의 생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이 법문이 설해질 때, 제가 그것을 분별하고 신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장래 먼 훗날에, 나중 오백년이 지난 후에, 바른 법이 소멸되며 굴러갈 때 어떤 사람들이 이 법문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독송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간직한 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세존이시여, 실로 그들에게는 자아라는 생각이 전개되지 않으며, 유정이라는 생각이 전개되지 않으며, 영혼이라는 생각도, 개인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어떤 생각도 전개되지 않고 생각 아닌 것도 전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자아라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며, 유정이라는 생각도 생각이 아니며, 영혼이라는 생각도, 개인이라는 생각도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제불 세존은 일체의 생각을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말했을 때 세존은 수부티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수부티야, 그렇다. 이 경전이 설해질 때, 이를 듣고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갖춘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가 설한 이 최상의 바라밀다는 곧 바라밀다가 아닌 것이다. 수부티야, 여래로서 내가 설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를 무수한 제불 세존도 설하셨다. 그러므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라고 불리는 것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여래의 인욕바라밀다는 곧 바라밀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일찍이 내가 과거세에 칼링가 왕이 나의 팔다리 등에 있는 살을 도려내었을 때, 그때 나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유정이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어떠한 생각도, 생각이 아닌 것도 없었다.

수부티야, 그것은 왜 그런가. 그때 만일 나에게 자아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 때 나는 분명 분노의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만일 유정의 생각, 영혼의 생각, 개인의 생각이 있었다면, 그때에 나에게는 분명 분노의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나는 잘 알고 있으니, 즉 일찍이 과거 오백생 동안 나는 크샨티와딘 이라는 도사였다. 그때에도 나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유정이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색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소리, 냄새, , 촉감, 법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법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되지만 법이 아닌 것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도 아니 된다. 어떠한 것에든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머무른다는 것은 곧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 소리, 냄새, , 촉감, 법에 머묾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66)

또한 실로 수부티야, 보살은 모든 유정들을 위해 이와 같이 보시하고 희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유정이라는 생각은 곧 생각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가 설한 유정도 곧 유정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는 진실을 말하며, 여래는 사실을 말하며, 여래는 그대로 말하며, 여래는 다르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 여래는 틀리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여래가 깨닫고 교시하고 통찰한 법, 그것에는 사실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수부티야, 예를 들어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와 같이 사건에 빠진 채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보아야한다. 수부티야, 예를 들어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밤이 지나 태양이 떠오를 때 여러 가지 색들을 볼 것이다. 그와 같이 사건에 빠지지 않고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보아야 한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로서 이 법문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독송하고 다른 사람에게 널리 드러낸다고 하자. 수부티야, 여래는 붓다의 지적 능력으로 그들을 알고 있으며 붓다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고 있다. 또 수부티야, 여래는 그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수부티야, 유정들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고 감쌀 것이다.”

65) [14離相寂滅分]

66)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存在事件外的으로 보아 有情界에서 佛界에 이르기까지 모든 存在事件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끝없는 움직임과 변화를 보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內的으로 볼 때 法性으로 되어 있으니 으로 볼 때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할 수 없고 法性으로 볼 때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은밀히 허용된다. 하지만 하니 머물 수 없고 法性하지 않아도 一切 存在共有하니 결국 어느 한 存在事件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당시 라쿨라핏트 라는 한 장자가 늙고 몸에 重病이 들어있는 상태로 부처님을 찾은 자리에서 저는 이미 나이는 많고 몸에는 병까지 들어 근심과 걱정이 많습니다. 저에게 한 마디말씀을 해주십시오.” 라고 法門을 청했을 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yrakayo anataracitta! (atyrakayo에서 atyra의 원형 atura; 들다. kayo; an;부정. citta: 마음.) 몸은 들었으나 마음은 들지 마라!

이 이야기는 몸은 들더라도 마음은 들지 말며 몸은 늙더라도 마음은 늙지 말며 몸은 죽어가더라도 마음은 죽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배우는 것이다. 배움의 길에 있는 동안은 늙지 않고 들지 않으며 죽지 않는다. 라는 뜻이다.

金剛經은 어려운 내용의 經典이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알아낼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니며 학교에서 배운 世俗知識으로 간단하게 생각하여 얻어낼 수 있는 그런 내용도 아니다.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智慧로서만 理解할 수 있는 그런 經典이다. 우리 불자들도 항상 배움에 길에 있는 마음으로 金剛經을 읽고 理解하려는 노력으로 수행하도록 하자. 그렇게 하면 法性에 대하여 최소한 눈치는 채게 될 것이다.

 

14 離相寂滅分金剛經 32品 中 最頂点으로서 가장 길게 되어있는 부분이며 그 내용 또한 가장 頂点으로서 깊은 내용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앞에서 공부한 내용을 총동원하여 내용을 숙지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수부티존자는 법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dharmavegena asryni pramuncat). 라고 되어있는 산스크리트 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 마음의 청정함(ekacittaprasada)”이라는 原典의 내용을 淨信 이라고 간략하게 번역하던 구마라집 스님이 무려 12자를 드려서 聞說是經深解義趣, 涕淚悲泣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구라라집 스님도 이 부분에 와서 수부티와 같은 심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는데 있어 그 마음은 어떤 내용인가를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의 경이로운 것(parama-ascary)에 대한 분석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장) 경이로운 것[Parana ascarya]

2. 先現起請分

ascaryam Bhagavan parama-ascaryam sugata, yavad eva tathagatena arhata samyaksanbuddhena bodhisattva nahasattva anuparigrhttah paramena anugrahena. ascaryam Bhagavan yavad eva tathagatena arhata samyaksambuddhena bodhisattva mahasattvah parinditah paramaya parindanaya.

12. 尊重正敎分

kah punar vado ya imam dharmaparyayam sakalasamaptam dharayisyanti vacayisyanti paryavapsyanti parebhyas ca vistarena samprakasayisyanti, paramena te subhute ascaryena samanvagata bhayisyanti. tasmtms ca subhute prthivipradese sasta viharaty anyataranyataro va vijnagurusthaniyah.

14. 離相寂滅分

-1. atha khalv ayusman Subhutir dharmavegena1) asruni pramuncat, so 'sruni pramrjya Bhagavantam etad avocat :

ascaryam Bhagavan parama ascaryam sugata, yavad ayam dharmaparyayas tathagatena bhasito 'grayanasamprasthitanam sattvanam arthaya sresthayanasamprasthitanam arthaya, yato me Bhagavan jnanam utpannam. na maya Bhagavan jatvebanrupo dharmaparyayah srutapurvah. paranena te Bhagavann ascaryena samanvagata bodhisattva bhavisyanti ya iha sutre bhasyamane srutva bhutasamjnam utpadayisyanti. tat kasya hetoh? ya caisa Bhagavan bhutasamjna saivabhutasamjna. tasmat tathagato bhasate bhutasamjna bhutasamjneti.

爾時須菩提, 聞說是經深解義趣, 涕淚悲泣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則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是實相者則是非相, 是故如來說名實相.

 

-2. na mama Bhagavan duskaram yad aham imam dharmaparyayam bhasyamanam avakalpayamy adhimucye. ye 'pi te Bhagavan sattva bhavisyanty anagate 'dhvani pascime kale pascime samaye pascimayam pancasatyam saddharmavipralope vartamane, ya imam Bhagavan dharmaparyayam udgrahisyanti dharayisyanti vacayisyanti paryavapsyanti parebhyas ca vistarena samprakasayisyanti, te paramascaryena samanvagata bhavisyanti.

世尊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不足爲難,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則爲第一希有.

 

-3. api tu khalu punar Bhagavan na tesam atmasamjna pravartisyate, na sattvasamjna nasamjna pravartisyate, napitesam kacit samjna nasamjna pravartate. tat ksaya hetoh? ya sa Bhagavann atmasamjna saivasamjna, ya sattvasamjna jivasamjna pudgalasamjna saivasamjna. tat kasya hetoh? sarvasamjnapagata hi buddha Bhagavantah.

何以故, 此人無我相無人相無衆生相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則名諸佛.

 

-4. evam ukte Bhagavan ayusmantam Subhutim etad avocat: evam etat subhute evam etat. parama-ascaryasamanvagatas te sattva bhavisyanti ya iha subhute sutre bhasyamane nottrasisyanti na samtrasisyanti na santrasam apatsyante. tat kasya hetoh? paramaparamiteyam subhute tathagatena bhasita yadutaparamita. yam ca subhute tathagatah paramaparamitam bhasate, tam aparim anapi buddha Bhagavanto bhasante, tenocyate paramaparamiteti.

佛告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甚爲希有, 何以故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1) 원어로는 dharmaegena이고 이를 구마라집 삼장은 聞說是經深解義趣이라고 가장 장황하게 해석해주고 있다. 한 마음의 청정함(ekacittaprasada)이라는 말을 淨信이라는 간략한 말로 옮기는데 비해 이례적이다.

실제 dharmavega라는 말은 종교적인 경외심. 진리에 대한 외경심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일종의 감동하여 찬양하는 마음)

 

용례를 보면 부처님의 열반을 두고 디팡카라 부처님의 영광. 부처님의 제자인 40만 명의 阿羅漢의 모임. 두 발의 신비한 특징들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든 유위법은 무상하다. 실로 모든 유위법은 무아(無我)이다.(덧붙여 부처님 육신에 대한 최종적 교리 표현은 이렇다. ‘여래의 몸이란 생한 것이고 이루어진 것이고 결합된 것이고 부서지는 법이건만 이를 두고 부서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yam tam jatam bhutam sankhatam paloka-dhammam tam vata ma palujjiti n' etam thanam vijjati')라고 느끼는 것을 보고 dharmavega라고 한다.

 

최근에 연구한 대불전경을 보면 모든 과거 24분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는 꼭 이 dharmavega를 언표하고 있다.

그것은 초기불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事件般涅槃이고 그 事件에 대해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거니와 이를 확대하면 주어진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事件이 벌어질 때 그 事件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 법문에서 가장 중요한 언표가 이루어졌기에 비로소 수보리는 dharmavega에 의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면 앞서 13여법수지분에서 이 법문의 가장 중요한 언표가 이루어졌다는 뜻이거니와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반야바라밀다 법문의 한 게송이라도 受持讀誦하여 爲他人說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부처님의 반야바라밀다 법문은 반야바라밀다가 무엇이냐 하는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접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반야바라밀다 법문의 사상과 정신을 모두에게 선양하는데 있다.

 

그러기에 14離相寂滅分에서 수보리존자는 자신의 종교적 경외심을 나타내는 찬양언어 곧 dharmavega를 그 다음 문장에서 세존이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선서시여,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문은 최상의 (보살)에 나아가 서있는 유정들을 위하고 가장 수승한 (보살)에 나아가 서 있는 자들을 위하는 것입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 [범망경] acchariyam avuso abbhutam avuso yavan c' idam tena bhagavata janata passata arahata samma-sambuddhena sattanam nanadhimuttikata suppatividita.

 

10. [수바경] acchariyam bho ananda, abbhutam bho ananda. so cayam bho ananda ariyo silakkhandho no aparipunno, evam paripunnam vaham bho ananda ariyam silakkhandham ito bahidha annesu samana-brahmanesu na samanupassami.

 

## evam vutte raja magadho ajatasattu vedehi-putto bhagavantam etad avoca; 'abhikkantam bhante, abhikkantam bhante. seyyatha pi bhante nikkujjitam va ukkujjeyya paticchannam va vivareyya mulhassa va maggam acikkheyya andhakare va tela-pajjotam chareyya: cakkhumanto tupani dakkhintiti, evam eva bhagavantam saranam gacchami dhamman ca bhikkhusamghan ca, upasakam mam bhagava dharetu ajjatagge panupetam saranam gatam.

 

그런데 수보리가 나타내는 외경심 중에서 경이롭다(놀라운 일)感情理解하기 위해서는 vega라는 말이 붙어있는 用語를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samvega(느낌을 일으킬만한) 네 곳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참조해보자.

 

 

느낌을 일으킬 만한(samvega) 네 곳

 

부처님, 예전에 여러 方向에서 雨期를 지내던 比丘들이 如來를 뵙기 위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마음을 익힌 그 比丘들을 볼 수 있었고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부처님께서 가시고 나면 마음을 익힌 比丘들을 저는 볼 수 없게 되고 모실 수 없게 됩니다.”

 

아난다야, (다음의) 네 가지 (장소)가 믿음 있는 善男子들이 볼 만하고 느낄 만한 곳이다. 어떤 것이 넷인가?

 

여기에서 如來께서 태어났다.’라고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난다야, 믿음 있는 善男子들이 볼 만하고 느낄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如來께서는 더 이상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잘 깨달았다.’라고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난다야, 믿음 있는 善男子들이 볼 만하고 느낄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如來께서 더 이상 없는 의 바퀴를 굴리셨다.’라고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난다야, 믿음 있는 善男子들이 볼 만하며 느낄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如來께서 無餘涅槃界般涅槃에 드셨다.’라고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난다야, 믿음 있는 善男子들이 볼만하여 느낄 만한 곳이다.

아난다야, 이 네 가지 (장소)가 믿음 있는 善男子들이 볼만하여 느낄 만한 곳이다.

 

아난다야, 믿음 있는 比丘. 比丘尼. 남자 在家信者. 여자 在家信者(그 네 가지 장소에) 올 것이다.

여기에서 如來께서 태어나셨다.’라고 하며. 여기에서 如來께서 더 이상 없는 바르고 원만한 개달음을 잘 깨달으셨다.’라고 하며. 여기에서 如來께서 더 이상 없는 의 바퀴를 굴리셨다.’라고 하며. 여기에서 如來께서 無餘涅槃界般涅槃에 드셨다.’라고 하며.

아난다야, 누구든지 사당에서 유행하다 깨끗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 모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 좋은 곳인 天上世上에 태어난다.”

 

 

마지막 부분에서 누구든지 사당에서 유행하다 깨끗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 모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 좋은 곳인 天上에 태어난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깨끗한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아함경에서는 惡趣에 떨어지지 않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惡業을 짓지 않고

2. 善業에 매진하며

3. 맑은 정신으로 죽는 것(正見確立하고 죽음) (“누구든지 사당에서 유행하다 깨끗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 모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 좋은 곳인 天上에 태어난다.”)

 

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위에 있는 문건 내용 중 天上에 태어남이라는 가르침은 분명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확인되는 셈이다.

 

따라서 위의 天上에 태어난다는 선언은 涅槃經에 기록되어있는 내용이므로 부처님의 말씀이 확실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부처님의 涅槃당시 하신 말씀을 고치는 제자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vega라는 말은 매우 宗敎的인 외경심. 眞理에 대한 尊敬心에 사용하는 用語로서 아무데나 쓰는 용어가 아니라 반드시 부처님의 涅槃이라는 事件에 대하여만 표현되는 單語로서 수보리는 dharma-vega(畏敬心; 감동. 두려움. 놀라움이 복합된 감정)를 제13如法受持分에서 느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렇게 느끼게 한 내용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반야바라밀다 法門의 한 偈頌이라도 受持讀誦하여 爲他人說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산스크리트 經典에는 그 다음 구절로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漢譯經典에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있어 아쉬운 점이다.

그 내용을 확인해 보면 제14離相寂滅分에서 수보리尊者는 자신의 종교적 외경심 dharmavega를 느낀 감정의 이유를 그 다음구절에서

 

세존이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선서시여,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문은 최상의 (보살)승에 나아가 서있는 유정들을 위하고 가장 수승한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자들을 위하는 것입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마라집 스님은 이때에 수보리가 느낀 감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聞說是經深解義趣, 涕淚悲泣 이라고 장장 12의 구절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마라집 스님이 이렇게 까지 표현하였다는 것은 이때의 수보리의 심정을 구마라집 스님도 느꼈을 것이라는 증거이며 이때의 감정이야말로 바로 dharmavega 법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라는 대목에서 제13如法受持分까지를 제대로 보았다면 우리도 느껴야 할 외경심인 것이다.

 

이제 제14離相寂滅分에서 이야기하는 경이로운 것에 대하여 알아보자.

 

세존이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선서시여,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문은 최상의 (보살)승에 나아가 서있는 유정들을 위하고 가장 수승한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자들을 위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저에게 앎이 생겼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까지 이와 같은 법문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에서 설하는 것을 듣고 진실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보살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을 갖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진실의 생각 진실의 생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漢譯經典을 보면

爾時須菩提, 聞說是經深解義趣, 涕淚悲泣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則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是實相者則是非相, 是故如來說名實相,

 

이라고 하면서 중간에 수보리가 한 이야기(보라색부분)를 생략하므로 서 마치 수보리가 처음 듣는 깊은 내용의 經典을 부처님이 하시는 것을 듣고 희유 하다고 느낀 것처럼 해석되게 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

 

그러나 희유하다는 것은 특이하다 또는 드물다는 표현이며 미증유일찍이 없었던 것의 뜻인데 비하여 경이롭다는 것놀라운 것과 특이한 것을 합친 표현인 것이다.

 

또 이 경이롭다는 표현은 앞의 제2先現起請分과 제12尊重正敎分에서 이미 나온 이야기로서 위의 경우와 제14離相寂滅分의 경우를 비교하여 해석해야할 것이다.

 

먼저 제2先現起請分에서 하시는 분如來. 應供. 正等覺者 라고 부르면서 부처님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르면서 대상은 보살마하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제14離相寂滅分에서는 설하시는 분如來라고 단순하게 표현하면서 대상에 대하여는

최상의(agrayana)탈것에 나아가 서있는 有情

가장 수승한(sresthayana)탈것에 나아가 서있는

라고 보살마하살을 2가지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무엇을 하였는가를 보면 제2先現起請分에서는 2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극한 보살핌을 보살마하살들에게 베풀어주시고

지극한 사명을 보살마하살들에게 부촉하고 계신다.

 

그러나 제14離相寂滅分에서는 단순하게 法門하셨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2선현기청분의 내용과 제14離相寂滅分의 내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 답은 제12尊重正敎分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은 이 法門全貌(전모)를 완전히 지니고 외우고 독송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낸다면 그러한 사람들은 가장 경이로운 것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극한 보살핌을 보살마하살들에게 베풀어주심은 반야바라밀다법문을 설하여주셨으니 法門의 전모를 완전히 지니고 외우고 독송하라는 것이며 또한 지극한 사명을 보살마하살들에게 부촉하심은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내라는 것이니 爲他人說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표현한 것이 제14離相寂滅分에서는 法門하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듣고 배운 반야바라밀다法門을 가지고만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이를 爲他人說 해야만 비로소 경이로운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爲他人說에 의해서 비로소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법문이 완전히 자기 것이 되며 이것은 남을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보살 자신을 위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이익이 있다는 것인가.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깨달음으로의 引導인 것이다.

 

그러므로 佛法(반야바라밀다 法門)은 듣고 안에 넣어두면 아무 소용이 없으며 爲他人說 하여 佛法弘布의 순간부터 佛法은 빛이 나며 자신도 반야바라밀다의 깨달음을 證得하게 되며 세상도 佛法으로 가득한 佛國土가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이로운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1. 수보리가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세존이시여, 이 경전에서 설하는 것을 듣고 진실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보살은 경이로운 것을 갖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라는 대목에서 이야기하는 지적인 판단을 말하는 것이며

 

2.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그렇다. 수부티야, 그렇다. 이 경전이 설해질 때 이를 듣고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갖춘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대목에서는 정서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3. 수보리가 이야기 하는 대목에서

그러나 세존이시여, 장래 먼 훗날에 나중 오백년이 지난 후에 바른 법이 소멸되며 굴러갈 때 어떤 사람들이 이 법문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독송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간직한 자가 될 것입니다.”

 

라는 대목에서 경이로운 것에 대한 확실한 내용을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爲他人說이야말로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라는 부처님의 또 한 번의 강조인 것이다.

 

그런데 위의 1번 항목의 문장을 漢譯經典에서 보면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則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是實相者則是非相, 是故如來說名實相,

 

이라고 하면서 마치 實相을 설명하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는 實相般若에서 이야기 하는 참모습(眞理)으로서의 뜻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생각(참모습이 아니라 진실하다는 판단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이로운 것을 갖춘 사람을 成就第一希有功德 이라고 번역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구마라집 漢譯本에는 생략되어있으므로 경이로운 것이 어떤 것인지 확정짓기 매우 어렵게 되어있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3번 항목에서 漢譯經典에는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不足爲難,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則爲第一希有,

 

라고 하면서 가장 重要한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내는 것 즉 爲他人說 하는 것을 생략하므로 서 마치 受持 讀誦만하면 경이로운 것을 갖춘 사람이라고 잘못理解하게 하고 있는 것도 매우 아쉬운 점이다.

 

金剛經에서 부처님이 强調하고 있는 것은 반야바라밀다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爲他人說하므로서 佛敎를 홍포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究竟涅槃證得하는 것을 最高功德이며 심지어 無爲福 이라고 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놀랍다. 라는 말의 原語asuchariyam으로서 놀랍다. 경이롭다와 같은 뜻의 單語로서 이 單語는 부처님에 관련된 이야기에만 쓰이는 用語이며 阿含經에 최초로 쓰인 부분이 범망경에 나온다. 1[범망경]부분.

 

1. [범망경] acchariyam avuso abbhutam avuso yavan c' idam tena bhagavata janata passata arahata samma-sambuddhena sattanam nanadhimuttikata suppatividita.

놀라운 일이다. 벗들이여. 일찍이 없었다. 무엇이 일찍이 없었던 놀라운 일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저 알고 보시며 同等하시며 바르고 원만히 깨달으신 분인 世尊께서는 衆生들의 여러 가지 성향(경향)에 대해서 아주 잘 꿰뚫어 보십니다.”

 

라는 문장에서처럼 부처님에 관련된 特別能力(如來10)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데 쓰이고 있는 것처럼 부처님에 관련된 내용에만 쓰이는 특별한 用語인 것이다.

 

물론 위의 문장이 나타나기 위 하여는 앞에 어떤 스승과 제자인 2명의 外道가 부처님 行列을 뒤 딸아 가면서 한 外道는 부처님을 일관되게 칭찬만 하면서 걸어가고 또 한명의 外道는 부처님을 일관되게 비방하면서 걸어가는 것을 보고 比丘들이 서로 이야기 하면서 왜 그러한가를 또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할 것인가를 부처님에게 여쭈어보자고 하면서 서로 이야기 하는 대목인 것이다.

 

이처럼 경이롭다. 또는 놀라운 일이다. 라고 할 때는 오로지 부처님에 관련된 사항임을 감지하여야 할 것이다.

 

경이로운 것이 자신의 內面에 자리 잡았다고 하려면 이제 受持 讀誦과 더불어 爲他人說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佛子라야 希有功德成就라는 인정을 받을 資格이 있는 菩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세존이시여, 이 경전에서 설하는 것을 듣고 진실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보살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을 갖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진실의 생각 진실의 생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진실이라는 생각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게 된다.

 

진실이라는 생각을 구마라집 漢譯經典의 제14離相寂滅分 에서는 實相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 대목은 제6淨信希有分에서는 眞實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또는 진실한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라고 하면서도 비록 作爲的이었지만 이것이 있어야 청정한 한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매우 중요시하고 있었다.

또 다음 구절에 이 보살들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유정이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는 다면서 그 초점이 생각에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작위적인 생각이라도 실천을 해야 청정한 한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제14離相寂滅分 에서는 세존이시여,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생각에 초점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실이라는 판단에 초점이 맞추어 진 것인지 탐구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하다는 생각原語bhuta(진실) samjna(생각)로서 6淨信希有分에서의 진실이라는 생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그 作爲的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것에 의해서 청정한 한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에 비하여 14離相寂滅分 에서의 진실이라는 생각作爲的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제6淨信希有分에 대한 를 다시 한 번 기재하니 참고로 읽어보기 바란다.

39) [6淨信希有分]

40) 여기서의 생각도 바로 (samjna)이다. 을 금하는 金剛經의 입장에서 보면 意外의 표현이다. 그러기에 여기서의 을 잘 해석해야 한다.

 

1. 은 근본적으로 作爲的인 성격이 있다. 실체 아닌 것을 실체로 보는 것도 작위적이다. 그래서 이다. 그런 것처럼 未來世에 곧 부처님이 아니 계신 상황에서 이런 교설을 접하면 그것이 진실하다는 판단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는다.

그때는 비상한 각오로 이 교설을 진실하다고 밀어붙여야 하거니와 형태적으로 作爲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간혹 불교만이 금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진술을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해서는 아니 될 생각을 금하는 것이지 아무리 이라 하더라도 해야 할 생각이라면 비상한 각오로 진행해야 하는 법이다.

이상의 가르침이 진실하다는 이 생각은 힘들지만 큰 용기로 일으켜야 한다. 건전한 비판은 버려야할 思量分別이 아니라 우리를 眞理로 인도하는 드문 나침반이다. 물론 이 생각도 하나의 사건이므로 껍데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그것이라고 인정해서도 아니 되고 그것이 있다고 긍정해서도 아니 된다.[14 이상 적멸 분 참조] 그러나 일으켜야 된다.

· · · . · . · 미가 모두 껍데기이지만 그래도 그런 줄 알면서 선· · · 각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應無所住 而生其心하는 참 뜻이 아닐까?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14 이상 적멸 분 참조]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진실의 생각 진실의 생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진실의 생각도 껍데기이기 때문에 버려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는 진실의 생각이 일어나는 조건에 무게중심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이라도 한 단계 진보한 것으로서 제6淨信希有分에서는 맞는 생각이라면 作爲的이지만 그렇게 생각해야만 하며 그래야 청정한 한마음을 얻는다고 하고 있는 반면에 제14離相寂滅分 에서는 그렇게 作爲的이어서는 안 되고 自然的으로 習慣的으로 쏠림현상. 기울어짐 과같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涅槃經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比丘敎團이 쇠퇴하지 않고 修行者가 계속 이어저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서 比丘들이 갖추어야할 4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1. 도덕적 감각을 갖출 것.

2. 도량을 갖출 것.(장엄해야할 것. 청정해야할 것. 고요해야할 것)

3. 스승과 도반을 갖출 것.

4. 건전한 관심을 갖출 것.

 

여기서 건전한 관심이란 世俗的인 것의 반대말로서 부처님은 이 건전한 관심을 갖추기 위해서 다시 4가지 항목에서 각각 7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관심두지 말아야 할 것 7가지.

둘째 관심두지 말아야 할 것에 관심두지 않는 방법 7가지

셋째 관심 두어야 할 것 7가지.

넷째 관심 두어야 할 것에 관심 두는 방법 7가지

 

이때의 關心과 대치된다. 關心原語adhimukti로서 쏠림. 기울어짐. 의뜻을 갖는 말로서 달리 표현하면 재미를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關心 둔다는 것은 전혀 作爲的이지 않고 自然的으로 쏠림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제14離相寂滅分 에서의 진실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제6淨信希有分에서처럼 作爲的이어서는 안 되며 한 단계 더 진행된 단계 즉 自然的으로 그렇게 생각되도록 修行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다음 수보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그러나 세존이시여, 이 법문이 설해질 때 제가 그것을 분별하고 신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다.”

라고 할 때의 信解한다는 말을 바로 自然的으로 쏠리는 것 adhimukti(관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自然的으로 진실이라는 생각이 일어남을 말하는 것이며 장래 먼 훗날 五 百年이 지난 후에 바른 이 소멸되며 굴러갈 때 어떤 사람들이 이 法門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독송하며 爲他人說 한다는 것은 바로 자연스럽게 信解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먼 훗날에 이렇게 진실이라는 생각 adhimukti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간직한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수보리의 판단은 어쩌면 당연한 판단인 것이다.

 

따라서 진실하다는 생각 이라는 말이 제6淨信希有分에 쓰일 때는 作爲的인 생각을 말하지만 제14離相寂滅分에 와서는 作爲的이어서는 안 되며 自然的인 것 즉 adhimukti 의 생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더구나 漢譯信解 受持가 아니라 분별하고 신해하는 것이라고 순서가 바뀌어야 하며 그래야 爲他人說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adhimukti 하는 것이며 이것이 信解한다는 뜻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두어야 할 것이다.

 

(本文 ;중간부를 설명을 위하여 재 기재한 것임)

세존이시여, 이 경전에서 설하는 것을 듣고 진실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보살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을 갖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진실의 생각 진실의 생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이 법문이 설해질 때, 제가 그것을 분별하고 신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장래 먼 훗날에, 나중 오백년이 지난 후에, 바른 법이 소멸되며 굴러갈 때 어떤 사람들이 이 법문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독송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간직한 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세존이시여, 실로 그들에게는 자아라는 생각이 전개되지 않으며, 유정이라는 생각이 전개되지 않으며, 영혼이라는 생각도, 개인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어떤 생각도 전개되지 않고 생각 아닌 것도 전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자아라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며, 유정이라는 생각도 생각이 아니며, 영혼이라는 생각도, 개인이라는 생각도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제불 세존은 일체의 생각을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本文에서 수보리는 경이로운 것을 간직한 자가 될 것입니다. 라고 한 후에 그들에게는 自我라는 생각이 전개되지 않으며 有情이라는 생각이 전개되지 않으며라고 이야기 하면서 그 이유를 왜냐하면 諸佛 世尊一切의 생각을 제거하셨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제6장의 淨信希有分의 내용과 같은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이 부분에서 그리고 또 그들에게는 어떤 생각도 전개되지 않고 생각 아닌 것도 전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대목도 제6淨信希有分에서처럼 생각은 이고 생각 아닌 것은 般若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생각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생각 아닌 것은 당연히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제6淨信喜有分처럼 해석하면 어떤 도 전개되지 않고 般若도 전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해석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는 완성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완성은 완성이라는 인식이 없을 때 진정한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경이로운 것이란 무엇인가? 이 부분을 4가지로 나누어 보면

 

1. 경이로운 것을 간직한 500년이 지난 뒤 爲他人說 하는 菩薩이라는 것.

2. 그 사람들에게는 我想. 有情. 靈魂. 個人이라는 생각이 전개되지 않는다.

3. 이라든가 非想이 전개되지 않는다.

4. 왜냐하면 諸佛一切 想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라는 순서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3번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생각 아닌 것은 당연히 없다는 뜻이며 나머지 3개는 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이라는 것은 造作의 성격이 한 것이기 때문에 보다는 자연스러움 adhimukti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번은 500年 後의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爲他人說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의식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4번의 이유를 든 것은 부처님을 보아라. 부처님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爲他人說하시는 분이 아니냐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samjna造作이 있는 人爲的인 것이라면 prajna造作이 없는 자연스러운 판단 以前의 뜻도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산스크리트어라는 단어는 samskrtar(조작)에서 a가 떨어져 나간 것이 samskrt 이다. 그래서 산스크리트라는 말은 품위 있게 말하기 위해서 造作된 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samskrt에 반대되는 말은 prakrt로서 prakrt自然語(원초적인 것)를 즉 인간이 품위를 떠나서 그냥 말하는 자연적인 언어라는 의미로서 이것을 보면 samjnaprajnasampra로 비교되는 것이 비슷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원초적이라는 이야기는 반야바라밀다는 반야에는 원초적이라는 뜻도 있으므로 般若를 알아냄으로서 彼岸에 이른 것이 아니라 般若彼岸에 이른 것 즉 알아냄 자체彼岸에 이른 것을 말하므로 修行者般若가 둘이 아니고 般若 그 자체가 될 때 비로소 彼岸에 이른다는 것과 상통하는 이야기 가 되는 것이다.

 

이는 般若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修行者般若그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냄이 피안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는 방편과 보리 즉 과정과 결과를 구분하지 않는 단계(과정과 결과는 동전의 양면관계라는 생각의 단계)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14離想寂滅分에서 나타내려고 하는 부처님의 본래의 뜻은 자연스러운 것. adhimukti(관심)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건전한 관심이 유지가 되려면 修行 그자체가 일상생활이 되어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며 그것이 즐거움이고 기쁨인 그런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다.

修行完成은 이런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完成된 후에는 修行은 필요가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명태자는 각 의 이름을 정하면서 제14離想寂滅分에 와서는 을 떠남으로서 寂滅에 이르는 이라는 뜻을 적고 있는 것은 본말이 바뀐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 생각과 생각 아닌 것도 전개되지 않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諸佛世尊一切의 생각을 除去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생각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는 부수적인 부분인 것이다.

14離想寂滅分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경이로운 것을 갖춘 자가 되는 자연스러움(adhimukti)의 조건인 것이다.

 

本文

이와 같이 말했을 때 세존은 수부티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수부티야, 그렇다. 이 경전이 설해질 때, 이를 듣고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갖춘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가 설한 이 최상의 바라밀다는 곧 바라밀다가 아닌 것이다. 수부티야, 여래로서 내가 설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를 무수한 제불 세존도 설하셨다. 그러므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라고 불리는 것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여래의 인욕바라밀다는 곧 바라밀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일찍이 내가 과거세에 칼링가 왕이 나의 팔다리 등에 있는 살을 도려내었을 때, 그때 나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유정이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어떠한 생각도, 생각이 아닌 것도 없었다.

수부티야, 그것은 왜 그런가. 그때 만일 나에게 자아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 때 나는 분명 분노의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만일 유정의 생각, 영혼의 생각, 개인의 생각이 있었다면, 그때에 나에게는 분명 분노의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나는 잘 알고 있으니, 즉 일찍이 과거 오백생 동안 나는 크샨티와딘 이라는 도사였다. 그때에도 나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유정이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라는 위 법문 중에서

 

이 경전이 설해질 때 이를 듣고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갖춘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문장에서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란 어떠한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般若心經의 다음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菩提薩唾 依般若波羅蜜多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原離顚倒夢想 究竟涅槃.

 

金剛經에서 經典이 설해질 때란 바로 반야바라밀다가 설해질 때意味하며 이를 듣고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般若心經에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어야(心無罣礙) 비로소 無有恐怖 原離顚倒夢想 하여 究竟涅槃에 이른 다는 말이니 究竟涅槃에 이른 다는 이야기나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란 가장 경이로운 것을 갖춘 자라는 이야기는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문건의 원문에

nottrasisyanti(떨지 않는)

nasamtrasisyanti(두려워하지 않는)

na santrasam apatsyante(두려움에 떨어지지 않음)

이라는 글에서 모두 trasa라는 단어로 되어있는데 이는 般若心經에서 공포(恐怖)라고 번역된 trasa라는 단어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般若心經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살아지고 뒤바뀐 망상을 떠나 窮極的涅槃에 이른 는 곧 金剛經경이로운 것을 얻은 자와 같은 것이다.

 

떨지 않고 두려움이 없으려면 내면적으로는 三毒心을 완전히 제거하였고(無貪. 無瞋. 無癡) 밖으로는 사무량심(大慈. 大悲. 大喜. 大舍)을 갖춘 자라야 경이로운 것을 갖춘 자로서 金剛經受持 讀誦하고 爲他人說하는 것에 adhimukti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가 설한 이 최상의 바라밀다는 곧 바라밀다가 아닌 것이다. 수부티야, 여래로서 내가 설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를 무수한 제불 세존도 설하셨다. 그러므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라고 불리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최상의 바라밀다라고 하는 교리적이고 사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파불교 당시 최상의 바라밀다라고 하면 이것은 인욕바라밀다와 깊은 연관을 갖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 다음에 부처님 전생에 칼리 왕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인욕바라밀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第一의 바라밀 즉 最上의 바라밀이란 생명을 받쳐서 보시할 때 비로소 제일의 보시바라밀이라고 하므로 최상의 인욕바라밀도 자신에 생명에 관련된 인욕바라밀이라야 最上忍辱바라밀이라고 할 확률이 높다.

 

金剛經은 부파불교를 공격하면서 만들어진 經典이므로 부파불교의 법리에 정통해 있으므로 부파불교의 바라밀다를 이 經典에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파불교의 바라밀다에 대하여 깊이 연구해 보기 바란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가 설한 이 최상의 바라밀다는 곧 바라밀다가 아닌 것이다. 수부티야, 여래로서 내가 설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를 무수한 제불 세존도 설하셨다. 그러므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라고 불리는 것이다.”

 

위 내용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大乘에서 바라밀다라면 이미 完成이고 完成은 이미 最上임을 나타내는 말인데 여기에 덧붙여 最上의 바라밀다라고 하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最上이라는 단어는 없었어도 되는 부분이며 오히려 없는 것이 훨씬 그 뜻을 理解하는데 편리할 것이었다.

 

그러나지날랑카라(jinalankara; 勝者莊嚴)복주 주석서에는 輪回에 대해 저쪽 언덕인 涅槃을 향하여 가는 길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시 등이다. 보시 등을 하려고 하는 의도를 갖추고 있는 법들이 파라미라고 불린다.”라고 설해져 있다.

 

이 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부파불교의 바라밀은 보살들이 충족해야하는 보시와 같은 일련의 의무(義務)들이 파라미바라밀이라고 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파불교의 내용을 반박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초기 金剛經이므로 부파불교의 바라밀을 반박하는 의미에서 最上의 바라밀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오로지 涅槃만을 完成으로 보고 있으며 바라밀은 오히려 과정의 의미가 깊으므로 과정이라면 순위가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最上의 바라밀이니 殊勝한 바라밀이니 普通의 바라밀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金剛經에서 바라밀다를 부정하는 것은 論理的으로 해결할 수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 어떤 것을 부정하고 심지어 부처나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부정하더라도 바라밀다만은 부정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라밀다야 말로 유일한 알맹이이기 때문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바라밀다를 알맹이로 하여 더 많은 것을 확충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法華經에 가면 타타타가 나오므로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문제이지만 그러나 法華經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있다.

타타타에 대하여 諸法實相을 보는 것은 諸法實相임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實相반야바라밀다를 버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제14離相寂滅分의 위 대목에서 最上바라밀다를 부정하는 것은 부처님이 의도적으로 복선을 깔고 암묵적으로 앞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成就를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金剛經에서 바라밀을 설명하면서 인욕바라밀을 예로 든 것에 대하여 매우 중요시해야 한다. 경전자료에서는 忍辱은 경멸받았을 때뿐만 아니라 찬탄에 대하여도 부화뇌동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을 선양하고 있다.

 

그러나 남방 상좌부의 論書는 윤리적. 언어적 공격행위에 대해서 화내지 않고 참는 것에 대하여서 만 인내바라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인내에 대하여 이런 저런 내용을 상세히 적고 있는 것이 남방 상좌부계통의 기록인 것이다.

 

그러나 金剛經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인욕바라밀은 그 境地作爲的이어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境地이며 自然的으로 그렇게 되는 즉 인욕adhimukti 되는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되어서 그 境地를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다음 문건의 내용을 참고해 보자

 

 

인욕바라밀에 대한 참고문건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가 설한 이 최상의 바라밀다는 곧 바라밀다가 아닌 것이다.(1) 수부티야, 여래로서 내가 설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를 무수한 제불 세존도 설하셨다. 그러므로 최상의 반야바라밀다라고 불리는 것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여래의 인욕바라밀다는 곧 바라밀다가 아니다.(2) 왜냐하면 수부티야, 일찍이 내가 과거세에 칼링가 왕이 나의 팔다리 등에 있는 살을 도려내었을 때, 그때 나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유정이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어떠한 생각도, 생각이 아닌 것도 없었다.

수부티야, 그것은 왜 그런가. 그때 만일 나에게 자아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 때 나는 분명 분노의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3) 만일 유정의 생각, 영혼의 생각, 개인의 생각이 있었다면, 그때에 나에게는 분명 분노의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나는 잘 알고 있으니, 즉 일찍이 과거 오백생 동안 나는 크샨티와딘 이라는 도사였다.(4) 그때에도 나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유정이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5)

 

(1) 반야바라밀다조차도 바라밀다가 아니라는 표현은 누누이 강조하지만 반야바라밀다도 껍데기이므로 부정된다는 식의 접근을 해서는 아니 된다.

바라밀다는 언제나 알맹이이고 알맹이로서는 궁극적인데 이르렀다는 것이 般若部 經典의 일관된 입장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궁극적인 알맹이 입장에서 이제는 껍데기 세계에 대한 완전한 통찰이 새로이 있어야 하거니와 그것이 아마도 眞如實相(tathata)의 소식일 줄 모른다.

그리고 眞如實相이란 諸法實相 보는 것은 諸法實相임을 보는 것이라는 말 속에 그 소식이 있을 줄 모른다.

그런 眞如實相에 비한다면 아직 끝이 아니므로 부정되고 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앞서 반야바라밀다조차도 어떻든 부정되었으므로 다른 바라밀다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여러 바라밀다 중에서도 부처님은 특히 인욕 바라밀다를 택하여 그것조차 바라밀다아니라는 일관된 가르침을 베푸신다.

 

그것은 알맹이 세계에 도달했을 때의 功能(sakti)이 어떤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보시. 지계. 정진. 선정 등은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문제이다. 그것들은 실천해야 되지만 아니 한다고 해서 당장 무슨 심각한 피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으로 그것이 옳으니 실천할 뿐이다. 그러나

 

첫째 인욕은 남이 자신을 공격하여 실제 피해가 발생한 경우이다. 이 경우는 참으면 피해를 안고 가야하고 참지 않으면 인욕을 지키지 못한 더 큰 종교적 피해에 직면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익의 추구(즐거움의 추구)라는 동일한 방향성 속에서 움직인다. 그런데 아무 잘못도 없이 피해를 입었는데 어떻게 참는가?

 

둘째 피해를 입으면 솟아나는 분노의 속도이다. 욕심도 어리석음도 은근한 면이 있어 대처할 시간이 있다. 이에 비해 분노는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면이 있어 분노를 의식하고 참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등의 시간적 여유를 누릴 수 없다.

 

그러한 분노를 능히 제압하는 것이 바라밀다의 功能이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살점을 저며 내는데도 바라밀다의 境地는 상대에 대한 분노마저도 전혀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아함의 涅槃에서는 결코 나올 수가 없는 境地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되는 究竟涅槃境地인 것이다.)

 

(3) 분노自身에게 직접 일어난 事件에 대하여 發生하는 것이므로 위의 인욕바라밀에 관한 문건 (2)에서 보는 것처럼 忍耐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忍辱바라밀이 매우 중요한 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다.

 

위 문장에서 인욕바라밀에 관한 내용을 뒤집어 보면 자기가 自己自身을 돌이나 나무토막처럼 보기 때문에 自我가 없고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自我라는 생각이 있으니 憤怒의 생각도 있게 되고 自我라는 생각이 없으니 憤怒의 생각도 없어진다. 돌들이 정을 맞아 부서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憤怒의 생각 따위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은 돌을 나라고 결코 보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나무토막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것을 보고도 그러하니 죽은 나무토막을 결코 나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 대목에서 我想을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선명한 질감을 체험할 수 있는 대단한 기회를 제시하고 계신다.

나를 돌이나 죽은 나무토막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我想을 제거한 境地에 대한 느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라밀다의 경지이다.

 

(4) 크샨티와딘 도사에 대한 이야기는칸타와디 자타카(No. 313)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고타마 부처님이 前生菩薩이었을 때 카시[(Kasi); 기원전 6~7세기경 織物로 가장 유명했던 都市國家로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였음]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는데 쿤다카(Kuneaka)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부모님이 죽은 뒤에 막대한 財産을 모두 보시해 버리고 히말라야로 修行을 하러 들어갔다. 修行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카시으로 되돌아와 의 동산에서 머물렀는데 카시국의 최고 사령관이 그를 모셨다.

 

하루는 바라나시(카시국의 수도)인 칼라부(Kalabu)宮女들을 거느리고 동산에 왔다가 술이 취해 골아 떨어졌다. 宮女들은 이 잠들자 이리저리 동산을 거닐다 修行者를 보았고 자신들에게 법을 설해 달라고 했다.

이때 은 깨어나 궁녀들을 찾았고 궁녀들이 그 修行者에게서 忍耐야말로 最上利益을 보장하는 덕목이라는 교훈을 듣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修行者 자신의 忍耐를 시험해 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매질을 2만 번 했다. 그래도 忍耐한다고 하자 이제는 직접 숨은忍耐를 찾아보아야겠다고 하여

겉 피부를 벗기게 했다. 그러나 忍耐라는 것이 보이지 않자

속 피부를 벗기게 했다. 그래도 忍耐라는 것이 눈으로 보일 리 없었고 이때 修行者는 말하길 忍耐는 피부 밑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存在한다고 했다. 더욱 화가 난

피부 아래의 살점을 조각내었고

두 팔을 잘랐고

두 발을 잘랐고

두 귀를 잘랐고

코를 잘랐다. 그렇게 지절들을 자르면서 칼라부 은 계속 修行者에게 어떤 법을 준수하느냐고 물었고 그럴 때마다 修行者忍耐을 준수한다고 일관되게 답했다.

 

은 화가 난 채로 동산을 떠났고 이어 땅이 열리면서 아비지옥으로 삼켜졌다. 최고 사령관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면서 修行者에게 용서를 구했다. 修行者는 이에 자신은 어떤惡意도 품고 있지 않다고 답한 뒤 상처로 인해 죽었다.

 

그러나 죽어 가면서도 오히려 에 대한 祝福의 말들을 중얼거렸다.(다른 각본에는 히말라야로 돌아갔다는 것도 있다.) 그때의 칼라부는 지금의 데바닷타이고 최고 사령관은 사리불 존자이다. 라는 결론으로 끝내고 있다.

 

(5) 나쁜 것에 대한 생각은 아니 되지만 좋은 것에 대한 생각은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窮極的으로 좋은 것에 대한 마음도 作爲的으로 일어나서는 아니 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곧 위의 문장에서 제거하라고 하는 일체의 생각좋거나 나쁜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뜻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作爲的으로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일으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뜻.)

 

 

부처님은 이 대목에서 我想을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선명한 질감을 체험할 수 있는 대단한 기회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신 것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나를 돌이나 죽은 나무토막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我想을 제거한 境地에 대한 느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라밀다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인욕바라밀다境地란 자신을 돌이나 나무토막처럼 보는 境地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자기 存在에 대한 執着은 너무 한 것이어서 이를 무너뜨리려면 반야바라밀다境地에 가야 한다는 것이며 반야바라밀다야 말로 진정 自我가 없는 自我에 대한 대체물로서 반야바라밀다가 되는 그런 境地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執着의 중량감을 해소시킬 수 있는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대체물로서의 가치를 가진 것반야바라밀다境地라는 이야기 이다.

 

이러한 뜻은 이미 초기불교에서 六根無我.”라는 말에 이미 그 가르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깊은 意味로 보면 이미 여기에 그 뜻이 들어있었다고 보아야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一貫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봄으로서 我執이 생기고 여기에 驕慢이 생겨서 我慢 이 되고 我慢我執을 지속하려는 自身에 대한 맹목적 사랑인 渴愛가 생겨서 我愛로 진행되고 이에 따라 이러한 我愛가 그것을 방해하는 外部로 작용함으로서 貪慾憤怒가 발생하는 것을 이미 보아온 것이다.

 

이를 없애려면 自我를 없애기 전에는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除去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阿含의 과정에서 배운 바이다. 없애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자기가 어디가 약하고 어디가 강한지 잘 모르기 때문에 절차에 따른 코스가 중요한 것이다.

코스에서 전 과정을 배우다가 자기에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에 의해서 我執을 제거한 사람이 만든 것이 禪宗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에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절차에 따라 코스를 거치다가 자신에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방법을 찾았을 때라야 분노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욕바라밀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분노의 생각에서 분노瞋恚를 말하며 생각을 말하므로 瞋恚想(진에상) 된다. 에 어떤 내용이 붙어 있을 때는 아주 주의를 해야 한다. 여기서도 분노라는 말이 붙어서 瞋恚想이 되어있다.

 

그런데 이 분노의 생각에 대한 사리불의 설명내용이 있어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것이다.(장 니카야의 중집경 안에서 사리불이 설하는 경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분노의 생각에 대한 사리불의 설명 (참고문건)

 

() tayo(세 가지) akusala(不善) vitakka(사색;思索) : kama(애욕의)-vitakko(사색), vyapada(분노)-vitakko(사색), vihimsa(해침)-vitakko(사색).

() tayo(세가지) kusala()-vitakka(思索) : nekkhamma(出離: 욕망으로부터의 떠남을 말함)-vitakko(사색), avyapada(분노하지 않음의)-vitakko(사색), avihimsa(해치지 않음의)- vitakko(사색).

() tayo(세가지) akusala(不善) samkappa(사유;思惟) : kama(애욕)-samkappo(사유), vyapada(분노)-samkappo(사유), vihimsa(해침)- samkappo(사유).

() tayo(세가지) kusala() samkappa(思惟) : nekkhamma(출리;분노로부터 떠남)- samkappo(사유), avyapada(분노하지 않으려는)- samkappo(사유), avihimsa(해치지 않으려는)- samkappo(사유).

() tisso(세가지) akusala(不善) sanna(생각;) : kama(애욕)-sanna(), vyapada(분노)- sanna(생각;), vihimsa(해치려는)- sanna(생각;).

() tisso(세가지) kusala() sanna(생각;) : nekkhamma(出離;애욕으로부터 떠남의)- sanna(생각;), avyapada(분노하지 않으려는)-sanna(생각;), avihimsa(해치지 않으려는)- sanna(생각;).

() tisso(세가지) akusala(하지 않은) dhatuyo(요소;) : kama(애욕)- dhatu(요소;), vyapada(분노)- dhatu(요소;), vihimsa(해침) - dhatu(요소;).

() tisso(세가지) kusala() dhatuyo(요소;) : nekkhamma(出離; 애욕으로부터의 출리)- dhatu(요소;), avyapada(분노하지 않으려는)-dhatu(요소;), avihimsa(해치지 않으려는)-dhatu(요소;).

 

 

위 문건내용의 순서는 역으로 된 것이며 이때의 의 진행은 dhatu()부터 시작되는 것 이며 일종의 연기론적 전개를 가지고 있는 내용으로서 정상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dhatu(;要素)sanna()sankappo(사유;思惟)vitakko(사색;思索)

 

그런데 여기서 다음에 . 思惟. 思索이 오는 것은 그 愛慾. 憤怒. 해침의 일 때만 다음에 . 思惟. 思索이 오지 다른에서는 다음에 . 思惟. 思索이 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dhatu)18에서의 와 그 의미에 있어서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18에서는 要素階層意味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要素意味만 있고 계층의 意味는 없다.

 

愛慾에 대한 愛慾要素가 자신의 앞에 있을 때만 비로소 愛慾을 일으킬만하다고 확정적으로 판단하는 이 발생하며 이로부터 그 발생한 에 자신의 마음을 맞추어 넣게 되는 것 즉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思惟이며 思惟가 발생하면 그 것 말고도 주위의 여러 가지의 것 들 중에서 오직 愛慾에 관련한 것들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思索인 것이다.

 

따라서 kama(애욕). vyapada(분노). vihimsa(해침)의 각각의 [要素]로부터 출발하거니와 이 要素는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며 내게서 일어나는 것 중에는 이 시작이므로 을 없애야만 사유(思惟)사색(思索)의 단계로 진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지 사유(思惟)단계사색(思索)단계는 아무리 없애도 다시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自我라는 것도 나라고 보게 하는 [要素]가 있기 때문에 나라고 보는 것이며 그 要素는 내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라고 생각하는 을 없애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만나야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며 나쁜 것을 만나면 나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14離相寂滅分에서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라는 것 비록 좋은 어떤 생각이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생각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모든 생각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初期佛敎에서는 분노(憤怒)要素부터 벗어나는 환경을 만들라고[出家]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大乘佛敎에서는 除去하라고 가르치면서 바라밀이라는 과정을 넣으므로 써 菩薩道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世俗에 나와서도 衆生을 위해서 菩薩道를 행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말에는 생각의 단계를 구분하는 말이 없다. 어느 것이나 그냥 생각이라는 말로 통일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는 이를 구분하여 사용한다. 그래서 한문에서 思惟思索이라고 하면 그게 그거 같아서 확실한 구분이 가지 않지만 사실은 다르다. 여기서 思惟思索의 단계를 구별하여 그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sanna; ): 愛慾要素가 있을 때 愛慾을 일으킬 만 하구나라고 확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이라고 한다.

 

思惟(sankappo; 사유): 八正道에서 두 번째 正思惟라고 할 때의 思惟와 같은 것으로서 일어난 자기마음을 맞추어 넣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愛慾의 대상에만 관심을 執中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思惟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이제는 思索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思索(vitakko; 사색): 이제는 그것 말고도 애욕과 관련된 딴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단계 관심을 집중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렇게 진행되는 중에 아주 안 좋은 것이 있으니 그것이 분노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憤怒의 생각이라는 것을 분석해 보면 憤怒할만한 要素가 있는 에서 憤怒이 발생하면서 이어서 憤怒思惟가 발생하여 그것에 집중하게 되고 여러 가지 憤怒에 관련된 것만 생각하는 憤怒思索이 발생하게 됨으로서 그러면서 愛慾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는 해침의 생각()이 일어나서 해침의 思惟해침의 思索을 거쳐서 外部해침의 行動이 일어나서 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위의 환경을 憤怒하지 않는 환경으로 만들어야하며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을 제거하므로 서 憤怒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는 접근법인 것이다. 그래서 돌이나 나무의 에서처럼 나라는 생각()을 제거하므로 서 憤怒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모든 생각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마음을 일으켜야 한다.(5)

라고 하면서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면서 생각이라는 단어와 마음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을 때에야 初發心時 邊正覺이라는 뜻에 부합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發心했다고 무조건 邊正覺은 아닌 것이다. 일체 제거하고 發心해야 發心이지 아무렇게나 發心만 하면 發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일체 을 제거하고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과 같은 意味이다.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다.

 

또 위 문장에서 생각마음이라는 별개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두 단어는 어떻게 다르며 어떤 관계가 있는가?

 

먼저 인욕에 관한 문건 5)의 내용을 살펴보면

(5) 나쁜 것에 대한 생각은 아니 되지만 좋은 것에 대한 생각은 일으켜야 한다.(곧 위의 문장에서 제거하라고 하는 일체의 생각나쁜 것에 대한 생각을 뜻하고 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좋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뜻.) 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窮極的으로는 좋은 것에 대한 마음도 作爲的으로 일어나서는 아니 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는 뜻으로서 위의 문장에서 제거하라고 하는 일체의 생각좋거나 나쁜 모든 것에 대한 생각(생각은 어떤 생각이든 작위적인 성격이 있다)을 뜻하고 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作爲的으로서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일으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나쁜 생각이라는 것도 그 수준이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 정도의 높은 境地의 생각임을 참고해야한다. 그러나 좋은 생각<나라는 것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중에서도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지만 이 생각도 作爲的인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이라는 말은 억지가 들어간(作爲的) 것이며 마음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일어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일체의 생각을 제거하고 阿耬多羅三藐三菩提에 대한 마음 자연스럽게 일으키게 될 때 初發心時 邊正覺 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야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아함 . 반야 . 법화. 화엄 를 비교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아함부: 初發心完全하면 3惡趣를 벗어난다. 라고 가르치며

반야부: 제대로 된 초발심은 일체의 생각을 제거한 것이다. 라고 가르치며

법화. 화엄부: 初發心이 바로 正覺이다. 라고 바로 치고 들어간다.

그러므로 법의 거울이라는 법문을 참조하여 초발심시변정각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아보자.

 

 

법의 거울이라는 법문 (참고문건)

28 아난다야. 사람의 死後에 대해 결정적으로 예언하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죽을 때마다 如來께 와서 그 뜻을 묻는다면 이것은 如來를 귀찮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야. 법의 거울이라는 법문을 설하겠다. 이 법문을 갖춘 거룩한 比丘는 스스로 원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地獄이 다하였고 畜生이 다하였고 餓鬼領域을 다했다. (즐거움에서) 멀어져 있는 곳 또는 나쁜 곳 또는 아래로 떨어져 있는 곳이 다했다. 나는 흐름에 이르렀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법이고 원만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향하여 결정되어 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29 아난다야. 어떤 것이 법의 거울이라는 법문인가? 즉 그 법문을 갖춘 거룩한 比丘스스로 원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나에게는 지옥이 다하였고 축생이 다하였고 아귀의 영역이 다했다. (즐거움에서 멀어져 있는 곳 또는 나쁜 곳 또는 아래로 떨어져 있는 곳이 다했다.)

[부처님은 지옥. 아귀. 축생이라는 印度의 기존 일반적인 용어보다는 즐거움에서 멀어져 있는 곳. 나쁜 곳. 아래로 떨어져 있는 곳 등의 용어를 선호하셨다.]

 

나는 흐름에 이르렀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법이고 원만한 깨달음을 향하여 결정되어 있다.”라고 답할 수 있는가. 여기에 아난다야. 거룩한 比丘가 부처님에 대하여 부서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갖추고 있다.

[부서지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원래대로일 때만 부서지지 않는다. 조작한 것들은 다 부서진다.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믿음만이 부서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도 부서지지 않는 깨끗한 마음이아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저 부처님(그렇게 온). 동등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밝힘에의 진행을 완성한. 잘 간. 세간을 아는. 더 이상 없는. 사람을 길들이는. 천신과 인간의 스승인. 깨달은 어른이시다.”라는 (믿음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믿음을 갖추고 있다는 말은 부처님에 대한 부서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갖춘 것을 말하며 궁극적인 단계에서의 깨달음은 (사건)이고 부처님은 (주체)인데 이 단계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이고 깨달음이 부처님인 것이다.

부처님을 추구하면 깨달음이고 깨달음을 알아내면 부처님에 도달하니 다시 말하면 궁극적인 세계에서는 事件事件主體가 이 단계에서는 일치한다는 내용임.]

 

에 대하여 부서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갖추고 있다. 부처님에 의하여 잘 설해졌고 함께 볼 수 있고 시간을 넘어섰고 와서 볼 수 있고 이끄는 것이고 식자라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추고 있다.)

[A급은 믿음을 일으킬 때 發心을 하고 B급은 法寶에 대한 믿음을 일으킬 때 發心을 하고 C급은 그렇게 믿음을 일으켜서 깨닫는 사람이 있을 때 發心한다는 것.]

 

僧團에 대하여 부서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갖추고 있다. “부처님의 비구 승단은 잘 도달 했다. 부처님의 비구 승단은 곧게 도달했다. 부처님의 비구 승단은 이치에 맞게 도달했다. 부처님의 比丘僧團바르게 도달했다.

(여기서 부처님의 비구 승단이란) 네 쌍의 사람들 곧 여덟 계층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48배를 말함]

이러한 부처님의 比丘僧團은 공양할 만하고 희생을 바칠 만하고 제물을 올릴 만하고 합장할 만하여 더 이상 없는 세상의 복밭[福田]이다.”라는 (믿음을 갖추고 있다)

 

(끝으로) 聖人들이 사랑하고 부서지지 않았고 갈라지지 않았고 얼룩덜룩하지 않고 오점이 없고 자유로운 노예 같고 더럽지 않고 삼매로 전개되는 계율들(거룩한 비구가) 갖추고 있다.

아난다야. 이것이 법의 거울이라는 법문이니 이것을 갖춘 거룩한 비구는 스스로 원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地獄이 다하였고 축생이 다하였고 아귀의 영역이 다했다. (즐거움에서 멀어져 있는 곳 또는 나쁜 곳 또는 아래로 떨어져 있는 곳이 다했다.) 나는 흐름에 이르렀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법이고 원만한 깨달음을 향하여 결정되어 있다.” (初發心時邊正覺)

 

 

 

위 문건에서 48배를 이야기함은 48배의 修行者만 공양할만하고 희생을 바칠 만하고 제물을 올릴만하고 합장할만하다는 것이 아니라 원만한 깨달음을 향하여 결정된 사람이 이미 있다는 뜻인 것이다.

따라서

: 원만한 깨달음 자체인 부처님이 계시고

: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 법이 있고

僧團: 지금 그 길을 가서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있다는 뜻인 것이다.

戒律: 그리고 계율들을 갖추고 있다.(. . 혜 이므로 이 계율 항이 먼저이다.)

 

위 문건의 내용은 부처님이 80세 때 설한 法門이다. 내용으로 보면 阿含에서 이제 반야부로 연결되는 부분으로 보이며 그럼으로 반야부경설도 부처님의 經說임을 알 수가 있다. 또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發心을 한다면 그것이 初發心時 邊正覺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金剛經에서는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위 문건의 법의 거울이라는 법문은 바로 發心을 이야기 한 것이다. 아함에서 이미 發心에 대한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아함에 반야를 합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세상 살기가 힘들어도 원만한 깨달음으로의 發心을 포기하지 말고 잊지 말자. 發心만 포기하지 않고 잊지 않으면 三惡聚는 면한다는 것이다.

 

本文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색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소리, 냄새, , 촉감, 법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법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되지만 법이 아닌 것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도 아니 된다. 어떠한 것에든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머무른다는 것은 곧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 소리, 냄새, , 촉감, 법에 머묾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66)

 

또한 실로 수부티야, 보살은 모든 유정들을 위해 이와 같이 布施하고 喜捨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유정이라는 생각은 곧 생각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가 설한 유정도 곧 유정이 아닌 것이다.” (생각인 것과 생각 아닌 것. 유정인 것과 유정 아닌 것의 대비)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는 진실을 말하며, 여래는 사실을 말하며, 여래는 그대로 말하며, 여래는 다르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 여래는 틀리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여래가 깨닫고 교시하고 통찰한 법, 그것에는 사실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수부티야, 예를 들어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와 같이 事件에 빠진 채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보아야한다. 수부티야, 예를 들어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밤이 지나 태양이 떠오를 때 여러 가지 색들을 볼 것이다. 그와 같이 事件에 빠지지 않고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보아야 한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로서 이 법문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독송하고 다른 사람에게 널리 드러낸다고 하자. 수부티야, 여래는 붓다의 지적 능력으로 그들을 알고 있으며 붓다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고 있다.

 

또 수부티야, 여래는 그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수부티야, 유정들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고 감쌀 것이다.”

 

이제 부처님은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면서 . . . . . 그 어디에도 머물러서는 안 되며 심지어 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아닌 것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되며 심지어 그 어떤 것에도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고 강조하시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왜냐하면 머무른다는 것은 곧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렇다면 이 이유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 문제를 깊이 고찰해 보아야 한다.

 

먼저 漢譯經典에서는 色 聲 香 味 觸 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하고 난 뒤에 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아닌 것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되며 그 어떤 것에든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는 항목이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마치 色 聲 香 味 觸 (대상으로서의 법)과 그다음 항목의 (대상과 사건을 포함하는 법 즉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과 추구해서는 안 되는 내용을 포함하는 법을 말함)이 같은 것으로 해석하게끔 하는 기능을 하고 있지만 이때의 은 그 범위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아래의 문건을 살펴보면서 漢譯經典의 내용이 왜곡되어있음을 살펴보고 산스크리트 原典에서 부처님의 본뜻을 알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에 대한 漢譯經典原典에서의 비교 참고문건

 

4. 妙行無住分

api tu khalu punah subhute na bokhisattvena vastupratisthitena danam, na kvacit pratisthitena danam datavyam, na rupapratisthitena danam datavyam, na sabdagandharasasprastavyadharmesu pratisthitena danam datavyam. evam he subhute bodhisattvena mahasattvena danam datavyam yatha na nimittasamjnayam api pratitisthet.

또한 실로 수부티야 보살은 事件에 머무른 채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 또 그 어디에도 머무른 채 보시해서는 안 된다. 색에 머무른 채 보시해서도 안 되며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 그리고 법들에 머무른 채 보시를 해서도 안 된다.

復次須菩提, 菩薩於, 應無所住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布施, 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不住於相

 

위 내용에서 復次須菩提, 菩薩於 할 때의 原語vastu(사건)로서 어떤 事件을 의미하며 부처님은 가능한 vastu(事件)이라는 말을 싫어하시는데도 잘 쓰지 않는 vastu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과 차이를 두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漢譯에서는 이를 무리하게 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잘못을 하고 있다.

 

10. 莊嚴淨土分 tasmat tarhi subhute bodhisattvena mahasattvenaivam apratisthitam utpadayitavyam utpadayitavyam yam na kvacit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그 어디에도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라는 뜻), na rupa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na sabda gandha rasa sprastavya dharma pratisthitam citttam utpadayitavyam.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무엇엔가 머물러 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색에 머물러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소리. 냄새. . 촉감. 법에 머물러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是故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14. 離相寂滅分 tasmat tarhi subhute bodhisattvena mahasattvena sarvasamjna vivarjayitya anuttarayam samyaksambodhau cittam utpadayitavyam. na rupa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na sabda gandha rasa sprastavya dharma 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na dharma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na adharma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na kvacit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tat kasya hetoh? yat pratisthitam tad evapratisthitam. tasmad eva tathagato bhasate : apratisthitena bodhisattvena danam databyam. na tupasabdagandharasasprastavyadharmapratisthitena danam databyam. [api tu khalu punah subhute bodhisattvenaivamrtpo dana parityagah kartavyah sarvasattvanam arthaya.]

[evam vastupatito bodhisattvo drastavyo yo vastupatito danam parityajati........ evam avastupatito bodhisattvo drastavyo yo vastupatito danam parityajati.]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누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색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소리. 냄새. . 촉감. 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되지만 이 아닌 것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머무른다는 것은 곧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 소리. 냄새. . 촉감. 에 머묾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보살은 모든 유정들을 위해 이와 같이 보시하고 희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유정이라는 생각은 곧 생각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가 설한 유정도 곧 유정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는 진실을 말하며, 여래는 사실을 말하며, 여래는 그대로 말하며, 여래는 다르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 여래는 틀리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여래가 깨닫고 교시하고 통찰한 , 그것에는 사실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수부티야, 예를 들어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와 같이 事件에 빠진 채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보아야한다. 수부티야, 예를 들어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밤이 지나 태양이 떠오를 때 여러 가지 색들을 볼 것이다. 그와 같이 事件에 빠지지 않고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보아야 한다.”

是故須菩提, 菩薩應離一切相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則爲非住, 是故佛說菩薩心不應住色布施,[須菩提, 菩薩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 [若菩薩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則無所見, 若菩薩心不住法, 而生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

 

 

부처님은 제4妙行無住分에서는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事件이므로 색 성 향 미 촉 법의 (dharma)라는 단어와 혼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굳이 vastu(事件)이라는 단어를 선택적으로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漢譯經典에서는 굳이 이라고 번역하고 있어 原典을 보지 않고는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그런데 제10莊嚴淨土分에서 와서는 오히려 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 즉 머물지 않은 마음에 중점을 둔 설명인 것이다.

 

그런데 金剛經에서 가장 잘 번역되었다고 하는 제10莊嚴淨土分應無所住而生其心(na kvacit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응당 그 어디에도 머묾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라.)이라는 내용을 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제14離相寂滅分에 와서는 應生無所住心(응당 머물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라) 이라고 번역하여 마치 머문 마음머물지 않는 마음이 따로 存在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본래 마음이란 새끼줄을 뱀으로 보는 마음이 따로 있고 새끼줄로 보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였을 뿐이며 더구나 마음이 새끼줄을 만들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란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일으키면 그것이 전부이지 하나는 일으키고 하나는 남아있는 것이 아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하고 나니까 色 聲 香 味 觸 法(인식론적 대상의 종합으로서의 법)인 것과 아닌 것 (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까지 포함한 즉 대상과 사건을 포함하는 법. 다시 말하면 우리가 추구해야할 대상과 추구해서는 안 되는 대상까지를 포함하는 법을 말함. 따라서 보시하고 희사해야한다고 이야기 한 것임.)이 모두가 같은 것이 되어버려서 불필요한 것처럼 인식할 우려가 있으므로 아예 그 항목을 생략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漢譯經典에서 생략된 부분; 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되지만 이 아닌 것에 머무른 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제14離相寂滅分에서 이 부분은 제4妙行無住分에서 vastu(事件)이라고 표기하는 부분의 法門 즉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事件에 중점을 둔 法門과 제10莊嚴淨土分의 어떤 에도 머문바 없는 마음을 일으키라고 하는 마음에 중점을 둔 法門함께 存在하는 배경을 조심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제14離相寂滅分에 와서는 이 부분을 혼란을 초래할 것을 감수하면서도 vastu(事件)이라는 單語를 쓰지 않고 (dharma)이라는 單語를 사용하는 이유는 金剛經에서 최초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채야 하는 것이다.

 

그 뒷부분도 대부분 金剛經前半部에서 나온 내용을 한 번 더 강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그렇게 만 보면 안 될 것이다. 이 짧은 經典에서 굳이 後半部를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으로 사용한다면 낭비가 심한 것이다.

 

실제로 金剛經後半部에서는 어떤 存在事件이든 반드시 그 상반되는 存在事件함께 存在한다는 理論을 서서히 나타냄으로서 이제부터의 경전내용이 한 단계 더 진전한 것으로서 이제까지의 平面的인 것의 差異로부터 이제는 次元次元 間差異를 가진 것끼리의 對等關係를 설명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剛經의 산스크리트 原典에서는 法性이라는 단어가 제26法身非相分에 가면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漢譯經典과 다른 것이다.

 

지금 까지는 이라는 次元에서는 存在事件이라는 관점에서 對等關係를 설명했다면 이제는 A-A 라는 서로 次元이 다른 것과의 對等關係를 갖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앞으로 진행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세계次元次元對等關係를 생각하는 境地을 나타내면서 지금부터 그 연습을 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제14離想寂滅分의 주66)을 참고해보자.

66)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存在事件外的으로 보아 有情界에서 佛界 이르기까지 모든 存在 事件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끝없는 움직임과 변화를 보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內的으로 볼 때 法性으로 되어 있으니 으로 볼 때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할 수 없고 法性으로 볼 때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은밀히 허용된다.

하지만 하니 머물 수 없고 法性하지 않아도 一切 存在共有하니 결국 어느 한 存在事件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본래 dharmata(法性)지니는 것dharma()모인 것法門 이다.

의 관계에서 法性이란 普遍性妥當性(타당성)을 갖춘(眞理條件) 것인데 비하여 으로 존재며 이란 存在事件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은 변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머물 수 없고 法性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普遍性] 어느 하나에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머물거나 잡으려면 모든 時間(過去. 現在. 未來) 모든 空間(중중무진)에 있을 수 있어야 法性에 머물거나 잡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法性에 머물거나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次元이 같은 것끼리의 대비에서는 머물 수가 있지만 法性처럼 서로 次元이 다른 것과의 對比는 또 다른 次元의 문제인 것이다.

 

실제로 일체의 존재나 사건[]으로 볼 때는 모두가 다른 이면서 으로 볼 때는 모두가 같은 이 된다. 그런데 모습()으로 볼 때는 다르고 性品으로 볼 때는 같다고 하지만 한 가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머문다. 머물지 않는다 하는 부분에서는 미묘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으로 볼 때는 변하므로 머물 수 없다. 그런데 性品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 머문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 변하니 머물 수 없고 法性은 변하지는 안치만 어느 한곳에 단독으로 있지 않고 一切共有하니 그 어디에도 머물 수 없다는 認識을 이제부터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을 제거하면 의 덩어리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時間空間이라고 하는 덩어리만 남게 되니 그 어디에도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왜냐하면 머무른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이유가 성립하는 것이다. 본래 그 어디에도 머물 수가 없는 것이기에 머무른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야 이 부분을 理解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認識이야말로 이제 法華經이나 華嚴經에 가서 諸法實相을 보는 것은 諸法實相임을 보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연습金剛經의 후반부임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여래가 깨닫고 교시하고 통찰한 법 그것에는 사실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라고 하면서 머문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如來 보살은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 소리, 냄새, , 촉감, 법에 머묾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면서 머묾 없는 보시를 강조하고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든가 또는 有情有情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통해 앞의 내용을 강조하고 이것이 진실과 사실이며 그대로이며 다르지 않고 틀리지 않는다고 강조하시고 그 福德에 대하여 하고 있음은 前半部에서 이야기 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前半部의내용을 한 번 더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金剛經의 전반부가 一切執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면 후반부에서는 그 을 떠나서 만나야 된다는 法性이라는 진실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이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버려야할 (虛想)이 아니라 가져야할 (實相)을 언급하는 것)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虛想을 버리고 法性을 인식하여야 實相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반야부와 法華華嚴에서의 實相을 확보하라는 내용의 연결고리가 法性을 확실히 認識하는 것이다.

 

이는 A라는 에도 빠지지도 말고 머물러서도 안 되지만 -A라는 에도 빠지지도 말고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내용으로서 次元次元이 서로 연결되어있어서 어느 한 次元存在에 머물거나 執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同一時間同一場所에 나타날 수가 없으므로 그래서 이라는 것이 되므로 머물 수가 없지만 法性이라는 것은 모든 곳의 모든 것에서 발견할 수 있으므로 어느 하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곳에 存在한다는 것에 그 포인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法性은 변하지는 않지만 어느 하나에 머물러있지 못함으로 어느 하나에 특정 지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모든 共有한다는 표현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내용을 나타내는 설명을 하기 시작한 것이며 法性이라는 시각을 연습하여감으로서 虛想에 대한 완벽한 除去에 의해서 實相에 대한 완벽한 確保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法性을 통찰하는 智慧가 바로 無生法忍인 것이다. 그러므로 一切不可得이요 一切無所住 해야 된다.” 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디에도 머물 수가 없다. 에서 그 어디에도의 깊이가 이제 많이 깊어진 것이다.

 

따라서 諸法實相을 아는 것은 諸法實相이라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라는 法華經의 내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느낄 수 있다.

漢譯 金剛經의 저자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은 그 책을 통하여 읽는 修行者를 위하여 완전히 부정일변도로 번역한 것이며 이는 涅槃에 이른 修行者가 그곳에 安住하려는 매력덩어리를 과감히 제거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결론임.

더 큰 매력덩어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단계에서는 그곳에 安住하려는 마음을 위협과 벽력같은 부정으로 이를 除去하고자 한 것으로 보이며 약간의 긍정할 만한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숨기고 나타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래의 위치에서 이를 확인하고 약간의 긍정할 만한 흔적이 있는 산스크리트 原典을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내용 이였음.]

 

여래가 깨닫고 교시하고 통찰한 법 그것에는 사실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라는 교설에서는 사실과 허망함이란 알맹이와 껍데기의 關係를 통찰해야 할 것이다. 통찰한 은 하나이지만 그 속에는 두 개의 要素가 존재한다. 이는 關係라는 次元에서는 1개이지만 關係를 구성하는 要素次元에서는 2개인 것이다.

이것은 關係임을 통찰해야 할 것이다.

 

 

14 離相寂滅分 후미 부의 분석 참고문건

14-7. api tu khalu punah subhute bodhisattvenaivamrupo dana parityagah kartavyah sarvasattvanam arthaya. tat kasya hetoh? ya caisa subhute sattvasamjna saivasamjna. ya evam te sarvasattvas tathagatena bhasitas ta evasattvah. tat kasya hetoh? bhutavadi subhute tathagatah satyavadi tathavady ananyathavatathagatah. na vitathavatathagatah.

 

14-8. api tu khalu punah subhute yas tathagatena dharmo 'bhisambuddho desito nidhyato, na tatra satyam na mrsa. tad yathapi nama subhute puruso 'ndhakarapravisto na kimcid api pasyet, evam vastupatito bodhisattvo drastavyo yo vastupatito danam parityajati, tadyathapi nama subhute caksusman purusah prabhatayam ratrau surye ‘bhyudgate nanavidhani rupani pasyet, evam avastupatito bodhisattvo drastavyo yo 'vastupatito danam parityajati.

 

14-9. api tu khalu punah subhute ye kulaputra va kuladuhitaro vemam dharmaparyayam udgrahisyanti dharayisyanti vacayisyanti paryavapsyanti parebhyas ca vistarena samprakasayisyanti, jnatas te subhute tathagatena buddhajnanena, drstas te subhute tathagatena buddhacaksusa buddhas te tathagatena. sarve te subhute sattva apraneyam asamkhyeyam punyaskandham prasavisyanti pratigrahisyanti.

須菩提, 菩薩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一切諸相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卽非衆生, 須菩提, 如來時眞語者實語者如語者不誑語者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此法, 無實無虛, 須菩提, 若菩薩心住於, 而行布施, 如人入闇則無所見, 若菩薩心不住,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受持讀誦, 則爲如來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또한 실로 수부티야, 보살은 모든 유정들을 위해 이와 같이 보시하고 희사해야 한다.1) 왜냐하면 수부티야, 유정이라는 생각은 곧 생각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가 설한 유정도 곧 유정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는 진실을 말하며, 여래는 사실을 말하며, 여래는 그대로 말하며, 여래는 다르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 여래는 틀리지 않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여래가 깨닫고 교시하고 통찰한 법, 그것에는 사실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無實無虛)2)

수부티야, 예를 들어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와 같이 사건에 빠진 채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봐야한다. 수부티야, 예를 들어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밤이 지나 태양이 떠오를 때 여러 가지 색들을 볼 것이다. 그와 같이 사건에 빠지지 않고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봐야한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로서 이 법문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독송하고 다른 사람에게 널리 드러낸다고 하자. 수부티야, 여래는 부처님의 지적 능력으로 그들을 알고 있으며 부처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고 있다. 또 수부티야, 여래는 그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수부티야, 유정들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고 감쌀 것이다.”3)

 

 

1) dana parityagah 그 이전까지는 apratisthitena "danam" datavyam 이었다. 여기는 dana“parityaga”가 더해졌고 또한 표현이 덧붙었으니 “sarvasattvanam arthaya” 일체중생을 위해이다. 앞 단락에서 一切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는 결국 衆生一切를 위해 보시하라.” 는 적극적인 의미로 연결되고 있다.

이는 金剛經의 모든 가르침이 단순한 부정의 유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실천을 통한 긍정적인 境地의 성취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衆生一切에 보시할 수 있도록 하는 金剛經 또는 반야부적 전개과정을 잘 보여준다.

 

중생에 대한 이 아니다.”( = 중생이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중생은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는 ‘A(시간적으로 영원) A이다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바로 여기의 , 의 전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생 이 중생이 아니라면 마치 중생을 무정물 대하듯이 해야 한다는 소리와도 통하거니와 이는 상대에 대한 美醜好惡의 차별이 있으면 보시가 중생 일체를 대상으로 삼을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一佛乘 법문에서의 보시와 비교할 것이 있거니와 그쪽이 慈悲布施라면 반야바라밀다법문에서는 平靜布施이다.

平靜心 無分別心이 전제되어야 진정 제한 없는 慈悲心이 나오는 순서를 생각해 볼 일이다.(“사법계이법계이사무애법계사사무애법계의 아이디어를 떠올릴 만하다.)

 

*(이러한 이야기 들은 보살은 일체의 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야한다는 매우 관념적인 이야기에 대한 설명으로서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임.)*

 

2) 無實無虛 : 반야심경의 眞實不虛(satyam amithyatvat)와 비교할 만하다.

 

如來가 깨닫고 통찰하여 을 설할 때는 물론 거짓을 말하려는 의도로 설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眞實을 말하려는 무슨 意圖를 가지고 설한 것도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말한다.(의 한 에서도 언급했듯이 부처님은 일체의 생각을 제거했거니와 부처님은 부처님이 되신 이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作爲的意識 속에서 진행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이루어졌다.)

 

부처님은 을 말씀으로 설했으니 그것은 그자체의 진실한 전달일 수는 없어 眞實은 아니지만 實體를 가장 밀접하게 묘사한 것이므로 거짓도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결국 方便이므로 그 자체로 진실한 법은 아니지만 眞實을 위한 方便이므로 거짓도 아니다. (말은 말이지 진실 그 자체를 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방편인 것이다.)

 

3) <6 정신희유 분>에서도 수부티야. 여래는 부처님의 아는 바로서 그들을 알고 있다. 수부티야, 여래는 부처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고 있다. 수부티야, 여래는 그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수부티야, 그들은 모두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고 또 감싸 안을 것이다.”

(te subhute tathagatena buyddhajnanena, drstas te subhute tathagatena buddhacaksusa, buddhas te subhute tathagatena. sarve te subhute 'prameyam asamkhyeyam punyaskandham prasavisyanti pratigrahisyanti.)

라고 똑같은 문장이 나왔다.

 

그 때는 청정한 한마음을 얻은 자들에 대해 부처님이 알아주신다고 되어 있었고 지금은 반야바라밀다 법문을 受持 讀誦 爲他人說하는 자에 대해 부처님이 그리하신다고 되어 있다.

 

앞서의 청정한 한마음(eka-citta-prasada)”이 후반부에 설해지는 無生法忍法性에 대한 지혜를 의미한다고 이미 언급했다.

그리고 prajnaparamitam- asritya viharaty- acittavaranah. cittavarana- nastitvad- atrasto viparyasatikranto nisthanirvanah. 한마음의 투명함은 정확히 마음의 가림에 대한 antithese 라고 했다.

 

그리고 한마음은 형식논리상 差別 없는 하나의 대상이 전제될 때에만 성취되고 그 한마음이 투명하다는 것은 그 實相과 마음이 合一되어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해 이곳의 경우 <13如法受持 分>까지 고려하여 본다면 수지 독송 爲他人說가장 경이로운 것에 해당하니 역시 부처님이 그 이름을 기억할 만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반야바라밀다 법문의 한 게송이라도 受持讀誦하여 爲他人說 하라는 것이니 부처님의 반야바라밀다 法門은 반야바라밀다가 뭐냐 하는 理論的이고 논쟁적인 접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반야바라밀다 법문의 思想精神을 모두에게 선양하는데 생명이 있다.<13如法受持 分>의 정신을 잊어버려서는 아니 된다.

그러니 [반야바라밀다 법문의 현재적 선양의 노력][청정한 한마음의 성취]같은 위상이라는 等式을 얻게 됨을 주의해야 한다.

 

 

1) 에서 모든 有情들을 위해라는 이야기는 모든 有情[衆生]들의 利益을 위해라는 이야기로서 모든 衆生을 위하여 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 주의 하여야 한다. 또 여기서 희사한다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희사 parityaga로서 pari는 완전한. 온전한 그리고 tyaga는 버리다. 버림의 뜻으로서 완전한 버림 이라고 번역되는 말로서 意譯하여 희사하다. 라고 되는 것이다.

佛敎六念 修行이라고 있는데 . . . 戒律. . 天上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修行하라는 것을 말하는데 이중에 修行이 바로 tyaga(버림)修行이다. 이러한 pari라는 접두사를 붙이고 있다.

pari般涅槃즉 완전한 涅槃 에 쓰이는 단어로서 완전한 보시 바라밀을 이야기하는 개념이 강하게 묻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완전한 보시一切衆生利益을 위한 보시이어야 하고 다시 말하면 일체중생들을 대상으로 모든 중생에게 이익 되게 보시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그러려면 완전한 버림이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一切衆生을 대상으로 무주상보시를 할 때 그것을 완전한 버림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희사라고 한 것이다.

 

완전한 보시를 하려면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야 하고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려면 無分別心 無差別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慈悲布施를 하려면 먼저 淸淨布施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慈悲布施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慈悲布施의 단계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반야부의 단계인 淸淨布施를 하는 청정한 한마음을 얻어야 만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례를 지켜서 修行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2) 에서 無實無虛허망하다는 뜻이며 眞實不虛에서의 거짓이라는 뜻이 하다.(無虛不虛는 그 原語가 다르다)

 

다음 그와 같이 事件에 빠진 채 보시하는 菩薩도 그와 같이 보아야한다.”에서 事件은 그 原語vastu로서 事件이라는 말인데 제14離相寂滅分 에서도 漢譯에서는 이를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물론 이란 一切 存在事件을 뜻하므로 이라고 하여도 무방하지만 제4妙行無住分에서도 그렇고 부처님이 꼭 事件이라고 표기하는 부분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이 事件이라고 표기하는 부분은 제4妙行無住分에서 [또한 실로 수부티야 보살은 事件에 머무른 채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 또 그 어디에도 머무른 채 보시해서는 안 된다. 색에 머무른 채 보시해서도 안 되며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 그리고 법들에 머무른 채 보시를 해서도 안 된다.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모습에 대한 생각에 조차 머물지 않은 채 보시해야 한다.”]전부를 포함하는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제14離相寂滅分에서 事件이라고 하는 부분은 바로 제4妙行無住分의 내용인 위의 내용이 생략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제4妙行無住分淸淨한 한마음(實相과 계합하는 마음자리)이란 제14離相寂滅分無生法忍 法性을 통찰하는 智慧를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부티야, 예를 들어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와 같이 事件에 빠진 채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보아야한다. 수부티야, 예를 들어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밤이 지나 태양이 떠오를 때 여러 가지 색들을 볼 것이다. 그와 같이 事件에 빠지지 않고 보시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보아야 한다.”

 

또한 실로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로서 이 법문을 받들고 간직하고 외우고 독송하고 다른 사람에게 널리 드러낸다고 하자. 수부티야, 여래는 붓다의 지적 능력으로 그들을 알고 있으며 붓다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고 있다. 또 수부티야, 여래는 그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수부티야, 유정들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고 감쌀 것이다.”

 

위의 제14離相寂滅分의 마지막 구절에서 事件에 빠진 채 보시하는 것에 대한 比喩를 밤에 比喩하고 事件에 빠지지 않은 것을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에 比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는 다음 구절이 제6淨信希有分에서의 청정한 한마음을 얻은 보살에 대한 比喩와 같은(原典 상에는 완전히 일치하는 문장임) 문장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는 淸淨한 한마음을 얻은 자金剛經受持 讀誦하고 다른 사람에게 널리 드러내는 同一하다고 하고 있는데 그 理由는 무엇일까.

 

理由는 바로 事件에 빠지지 않은 채 受持 讀誦하고 爲他人說 하는 라는 극히 一般的인 이야기를 이 대목에 와서는 淸淨한 한마음을 얻은 (8지 보살)같다는 것으로 격상시켜서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理由가 바로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에 事物을 보는 자와 같다는 比喩인 것이다.

 

淸淨한 한마음을 얻은 것이란 바로 實相과 계합한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인데 이처럼 事件에 빠지지 않은 채 보시하고 金剛經受持 讀誦하고 爲他人說 하는 야말로 無生法忍(법성을 통찰하는 지혜를 얻은 것)을 얻은 8菩薩이라는 이야기는 같은 次元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보시 희사라는 단어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보시는 그 보답이 좀 시간이 흐른 다음에 오는 차원의 이야기라면 이에 비하여 여기서는 희사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희사(parityaga)란 말하자면 보시 그 자체를 즐기는 차원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보시(parityaga) 희사8지보살의 단계에서 하는 보시를 말하는 것으로서 아함 차원의 涅槃證得한 것은 운전면허를 따는 것에 비견된다면 이 단계에서의 완전한 보시 희사라는 이야기는 이제는 운전면허를 딴 후에 운전 그 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록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그 마음속에 사과를 따 먹겠다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를 심는 그 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종합하면 事件에 빠지지 않은 채 보시하며 金剛經受持 讀誦하고 爲他人說 하는 는 바로 淸淨한 한마음을 얻은 요 바로 無生法忍을 얻은 이며 華嚴10로 말하면 8地位菩薩이라는 이야기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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