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본 금강경

제11 無爲福勝分

동산/혜산방 2011. 10. 21. 15:24

本文(11 無爲福勝分)

59)세존이 물으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 강가의 모래알만큼의 강가이 있다고 하자. 그 많은 들에 있는 모래알은 많다고 하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 강가들만 하더라도 많습니다. 하물며 그 많은 강가에 있는 모래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내가 너에게 말하겠으니 잘 이해하도록 하라. 여인 또는 남자가 누구든지 그 많은 강가에 있는 모래알만큼의 세계를 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워 여래 응공 정등각자에게 그것을 보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여인 또는 남자가 그것을 인연으로 많은 복덕을 쌓게 되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많습니다. 선서시여, 많습니다. 여인 또는 남자가 그것을 인연으로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게 됩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수부티야, 어떤 여인 또는 남자가 그렇게 많은 세계를 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워 이것을 여래 응공 정등각자들에게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이 법문 가운데 네 구절로 이루어진 게송 한 편만이라도 받들어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드러낸다면 그것이 더 많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60)

59) [11장 무위복승분]

60) 복덕의 기준은 아누다라삼먁삼보리에 접근하게 하는 속도와 효율이다.

 

10 莊嚴淨土分에서 授記意味첫째 法位菩薩에게 자신감을 부여하는데 있으며 둘째 當爲性(사명감)을 부여하는데 있다. 여기서 當爲性의 개념은 불종성경의 練燈부처님 편에 있는 씨앗이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練燈佛은 수메다에게 修行者는 부처의 씨앗이다. 라고 지적함으로서 如來藏思想에서의 如來胎兒라는 뜻과 같으며 이는 부처가 되는 것에서 도망가지 말라는 이야기이며 도망갈 수도 없는 當爲性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如來胎兒가 자라면 如來가 될 수밖에 없는 當爲性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法華經窮子喩에서 窮子壯者의 아들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피력하면서 단지 方便으로 서서히 일을 익히게 함은 마치 修行者에게 서서히 佛法을 익혀나가다가 法位에 들었을 때 비로소 授記를 해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제11 無爲福勝分에 오면 그 내용이 金剛經에서 무려 여섯(8.依法出生分 11.無爲福勝分 19.法界通化分 24.福智無比分 28.不受不貪分 32.應化非眞分)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계속 출현하고 있다.

 

여섯의 내용을 취합하여 공통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福德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은 모두 보시에 중점을 두고 있다.

2. 보시의 대상은 항상 如來 應供 正等覺者에게 하고 있다.

3. 보시의 내용은 항상 七寶로 되어있다.

 

여기서 七寶라 함은 그 生産에 많은 사람의 많은 노력이 들어간 그런 寶石類가 된다. (. 다이아몬드 1캐럿은 0.2g이지만 이를 生産하기 위하여 는 평균 260ton의 암석을 부수어야 한다.)

그러한 七寶를 가장 적은 이 수미산만큼의 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만한 生産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巖石을 부수어야 할까. 어마어마한 이 될 것이며 그 노력은 얼마만큼 될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金剛經四句偈 하나라도 받들고 暗記하고 익혀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이 수천억만 배 크다는 暗示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칠보보시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품을 취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七寶布施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품.

칠보보시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품은 총 6개품으로 6개품을 모두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8. 依法出生分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훌륭한 집안의 아들과 딸들이 이 삼천대천세계일곱 가지 보배로 가득 채우고 여래 응공 정득각자께 보시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양가의 아들딸은 그 인연으로써 더 많은 복덕이 생겼다고 하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그렇습니다. 양가의 아들딸로서 그들은 그 일로인해 많은 복덕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복덕. 그것은 복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생긴 복덕’ ‘생긴 복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실로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로서 이 삼천대천세계를 일곱 가지 보배로 가득 채우고 여래 응공 정득각자께 보시했다고 하자. 그리고 이 법문 가운데 네 구절로 이루어진 게송 한편이라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가르치고 드러내었다고 하자. 그러면 이것이야말로 그 인연으로써 더 많은 복덕이 생기게 되니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다.

 

11. 無爲福勝分

세존이 물으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큰 강인 강가강의 모래알만큼의 강가이 있다고 하자. 그 많은 강들에 있는 모래알은 많다고 하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 강가들만 하더라도 많습니다. 하물며 그 많은 강가에 있는 모래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내가 너에게 말하겠으니 잘 이해하도록 하라. 여인 또는 남자가 누구든지 그 많은 강가에 있는 모래알만큼의 세계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워 여래 응공 정등각자에게 그것을 보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여인 또는 남자가 그것을 인연으로 많은 복덕을 쌓게 되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많습니다. 선서시여. 많습니다. 여인 또는 남자가 그것을 인연으로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게 됩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수부티야. 어떤 여인 또는 남자가 그렇게 많은 세계를 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워 이것을 여래 응공 정득각자들에게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이 법문 가운데 네 구절로 이루어진 게송 한 편만이라도 받들어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드러낸다면 그것이 더 많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19. 法界通化分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양가의 아들딸로서 이 삼천대천세계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워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여러 여래 응공 정등각자에게 보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양가의 아들딸들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덕이 생기게 되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많습니다. 선서시여. 많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바로 그러하다.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들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덕이 생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복덕 복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복덕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며 그러므로 복덕이 생긴다고 하기 때문이다. 수부티야. 만일 복덕이라는 것이 있다면 여래는 복덕이 생긴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24. 福智無比分

또한 수부티야. 만일 양가의 아들딸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산 가운데 왕인 수메루산 만큼일곱 가지 보물을 쌓아 지니고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존경스러운 여러 여래 응공 정등각자에게 보시한다고 하자. 또 양가의 아들이나 딸이 반야바라밀다라는 법문 중에서 예를 들어 네 구절로 이루어진 게송 한편이라도 받들고 이를 남에게 드러낸다고 하자. 수부티야. 이 경우 전자의 생긴 복덕은 후자의 생긴 복덕에 비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28. 不受不貪分

그리고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이 강가강의 모래알만큼의 세계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우고 이것을 여래 응공 정등각자께 보시한다고 하자.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떤 보살이 無我無生法忍을 얻었다고 하자. 이것이야말로 그 인연으로 훨씬 많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생기게 할 것이다. 그러나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그 복덕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수부티 존자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생긴 복덕을 진정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받아들이되 그러나 붙잡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32. 應化非眞分

또한 실로 수부티야. 어떤 보살 마하살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세계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우고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여러 여래 응공 정등각자께 보시했다고 하자. 그리고 한편으로는 양가의 아들딸이 이 반야바라밀다의 법문에서 네 구절로 된 게송 한편만이라도 받아들고 간직하고 가르치고 외우고 또 다른 사람에게 널리 드러내어 준다고 하자. 이것이야말로 그 因緣으로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더 많은 福德을 쌓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드러내 줄 것인가.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러낸다고 한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金剛經과 같은 짧은 經典에서 무려 6개품에서 福德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람이 사는데 이 없이 산다는 것은 매우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부처님은 衆生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또 소명태자가 無爲福勝分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七寶에 의한 有爲福이요 有漏福이며 金剛經 수지 讀誦 解說無爲福이요 無漏福이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1無爲福勝分은 제10莊嚴淨土分의 연결선 상에서 보아야 한다. 金剛經은 반야바라밀다가 目的이지만 제10莊嚴淨土分아뇩다라삼먁삼보리複線이 깔려있는 것으로서 成佛目的을 이룰 四句偈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一粒豆子 爆出冷灰(한 개의 콩알이 식은 재로부터 튀어나오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식은 재는 衆生을 이야기 한 것이요 콩알은 깨달음을 얻은 자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金剛經의 산스크리트 原典에서 보면 福德을 설하는 각 품에서 그 인연으로써 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이 原語에는 반드시 toto() nidanam(인연으로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본래 因緣이라는 말은 hatu()pratyaya()이라는 말의 合成語로서 一般的으로 因緣이라는 뜻을 표시할 때는 반드시 hatu pratyaya라고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因緣으로 福德을 얻는다는 말에는 꼭 toto nidanam이라는 단어로 일관하여 쓰고 있다.

 

hatu pratyaya를 어원분석을 하면 hatu내몰다. 또는 움직이다로서 내모는 것의 뜻이 있고 pratyaya기대는 곳의 뜻이 있어 의 뜻에 부합하다. 그러나 nidanam는 그 뜻이 매우 다르다.

 

은 일종의 原因으로서 原因이라 하면 모든 事件原因이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福德이라는 말에는 hatu도 맞지 않고 pratyaya도 맞지 않으며 반드시 nidanam만이 적합한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nidanam을 어원분석을 하면 ni 아래라는 뜻이며 danam주는 것 그리하여 아래로 주는 것이라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福德이라는 말과 함께 쓰는 單語는 반드시 nidanam을 쓰고 있는 이유는 어원분석에 의해서는 뜻이 나오지 않으므로 어휘의 용해에 의하여야 할 것이다.

 

소명태자가 無爲福勝分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본래 無爲라는 말과 이라는 말은 함께 있을 수 없는 單語로서 을 짓는 行爲自體가 이미 有爲이므로 범주오류이지만 굳이 無爲福이라고 칭한 것은 次元差異를 나타내기 위한 方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에서 가장 수승한 無爲福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有漏에서 아무리 잘해도 無漏가 될 수 없고 有爲에서 아무리 잘해도 無爲가 될 수 없듯이 有漏福은 아무리 많아도 無漏福에 비유할 수 없고 有爲福은 아무리 많아도 無爲福이 될 수 없다.

이는 나무 잎이 아무리 많아도 피어오른 꽃 한 송이에 비유될 수 없듯이 次元差異를 나타내는 것이다.

 

有漏 또는 하다는 뜻이지만 無爲善惡을 이미 넘어서 바르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有漏福은 보시를 통하여 얻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보시로는 煩惱를 없앨 수는 없으므로 煩惱를 끼고 가는 行爲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부처님에게 아무리 많은 七寶를 보시한다 해도 그것은 煩惱除去하거나 斷切시키는 行爲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無漏修行을 쌓아가는 것을 말하므로 修行만이 煩惱除去하거나 斷切해 가는 쪽이 되는 것이니 無漏福이란 근본적인 煩惱除去하거나 斷切시키는 行爲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無漏福無爲福 하나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無爲福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無爲福金剛經12. 13. 14. 15. 16. 24장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는 勸善을 말하는 것으로 즉 金剛經 법문가운데 네 구절로 이루어진 偈頌 한편만이라도 지니고 받들고 해득하고 까지가 無漏福을 짓는 行爲이며 그다음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드러낸다.”는 것이 無爲福인 것이다.

 

金剛經 법문가운데 네 구절로 이루어진 偈頌 한편만이라도 지니고 받드는 行爲無漏福에 지나지 않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드러낸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無爲福 이라는 이야기 이다.

 

그런데 이 가르치고 드러낸다는 말은 勸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佛土莊嚴과 그 位相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佛土莊嚴(勸善)法位에 든 菩薩彼岸에서 此岸으로 건너와서 하는 것이지만 金剛經 단계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이 勸善도 습관이 되어야 此岸에 와서도 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金剛經 단계에서 계속해서 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처님의 敎示方法으로서 低次元의 가르침에서 이미 高次元의 가르침의 內容複線으로 깔아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信 解 行 證의 불교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信 解 行 證의 결과 眞理合一하게 되는데 그 단계는 다음과 같다.

 

: srad(가슴)dha ; 어쩐지 맞는 것 같다는 느낌.(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

: prai(완전히)jna(아는것): 의 뜻; 心證을 확보하는 단계.(머리로 받아들인 것)

: car()yam ; 실제 해보는 것.(몸으로 받아들이는 것)

: saksi()-karana; 눈으로 보는 것.(눈으로 직접 확인함으로서 眞理合一하는 것)

 

따라서 佛敎는 머리로 알고 理解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어쩐지 맞는 것 같다는 느낌) 머리로 理解하고(心證을 확보하는 단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실제로 해보는 것)에 의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勸善이라는 것은 佛土莊嚴位相이 같은 것인데 굳이 이 단계에서 부처님이 요청하는 것이 의문이다. 勸善도 하나의 경향이므로 평소에 습관이 되지 않으면 깨달은 후에도 勸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勸善을 반야부 단계에서 요청하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요청은 부처님이 계속 권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어떤 일을 하고 回向하지 않으면 가책을 느끼는 것을 보면 가책도 有漏이므로 그래서 이것을 권하고 있는 것인지.

여하튼 勸善은 깨달음을 얻은 에 하는 것이 원칙인데 勸善을 이 단계에서 미리부터 요청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야 勸善도 할 수 있는 것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에 관하여 勸善에 대한 기록을 참조해 보자.

 

勸善에 관한 참고문건

parebhyas ca(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vistarena() samprakasayisyanti,(드러낸다) parebhyo(앞의 parebhyas와 같은 뜻으로 형태변화임) desayed(가르치다) 의뜻으로 이 말이 나오는 품이 8.의법출생분 11.무위복승분 12.존중정교분 13.여법수지분 14.이상적멸분 15.지경공덕분 16.능정업장분 24.복지무비분 32.응화비진분 이다.

 

우선 붓다는 法位菩薩들로 하여금 彼岸에서 此岸으로 되돌아오고[이미 붓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如來라고 부르고 있거니와 그 개념은 보살의 반야바라밀다와 방향상의 좋은 대조를 보인다. 반야바라밀다가 건너편으로 간 것이어서 방향 상 멀어져 가는 것이라면 如來는 분명 온다고 함으로서 此岸으로 回向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窮極的으로 자신과 같은 붓다를 이루도록 가르치는 것[붓다가 세간에 출현하는 유일한 이유는 중생에게도 佛之知見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B.S.T.6,p.27 "katamam ca sariputra tathagatasya ekakrityamekakaraniyam mahakrityam mahakaraniyam yena krtyena tathagatorhan samyaksambuddho loke utpadyate? yadidam tathagatajnanadarsanapratibodhanahetunimittan sattvanam tathagatorham samyaksambuddho loke utpadyate. "] 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 붓다가 베푸는 첫째 방법은 授記로 보인다. 授記는 한 붓다가 어떤 弟子를 향하여 未來 어느 시기에 어느 世上에서 어떤 이름의 붓다를 반드시 이루게 된다고 決定的으로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법화경에는 제6 授記品 뿐만 아니라 제8 五百弟子授記品 9 授學無學人記品과 같이 授記를 주제로 하는 이 여럿 있다. 그 외의 에도 授記하는 대목은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이러한 授記를 받은 는 반드시 붓다를 이룰 것이라는 自信感을 갖게 되고 또한 반드시 붓다를 이루고 말겠다는 發心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授記한 뒤에 붓다는 붓다의 알고 보는 바를 보살들도 함께 받게 하려한다.’[B.S.T.6,p.27 “함께 받게 함 - samadapana. 함께 보여줌 - samdarsana, 건너게 함 - avatarana, 깨닫게 함 - pratibodhana, 로 건너게 함 - margavatarana.”]

이 함께 받게 하는 行爲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예부터 열어 줌이라고 옮겼듯이 붓다의 의 전모를 일단 숨김없이 다 열어 주는 것을 意味하는 듯하다. []

 

붓다의 의 전모가 開放됨으로써 보살들은 비로소 最終的으로 佛敎成就해야 할 目標具體的으로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菩薩에게 있어서는 붓다의 敎法信受하는 단계이다.[]

 

함께 받게 한 뒤에 붓다는 보살들에게 함께 보여주려 한다.’ 함께 받게 함이 法藏의 전모를 開放한 것이라면 이제는 그 하나하나를 가르쳐 이해시키려는 것이 함께 보여주는 단계가 아닌가 한다.[]

 

이처럼 붓다가 보여주면 보살들은 자연히 그것을 理解하게(알게) 될 것이다.[]

 

함께 보여준 뒤에 붓다는 보살들에게 건너게 하려한다.’ 건너게 함이란 菩薩들에게 보여준 것을 바탕으로 具體的으로 실천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지금 法華經에서 고유하게 敎化를 받을 菩薩은 일단 彼岸에 이른 菩薩이다. 彼岸에 이른 菩薩에게 그 彼岸으로부터 此岸으로 되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彼岸으로 갈 때도 건너 간 것이라는 表現을 쓸 수 있다. 此岸彼岸을 가르는 물은 건너야 하는 것이므로 그러하다.

 

이제는 彼岸에서 此岸으로 건너와야 한다. 그럴 때 역시 건넌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여간 적절하지가 않다. 菩薩具體的修行이 여기서는 彼岸에서 此岸으로 건너오는데 集中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菩薩의 입장에서는 理解에 입각하여 실천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이 단계까지는 의 전단계임)

 

건너게 한 뒤에 붓다는 보살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한다.’ 具體的인 실천을 통하여 窮極的境地 곧 붓다 자신의 알고 보는 바를 깨닫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此岸으로 다 건너 왔다면 비로소 此岸에 대하여 다시금 알고보고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菩薩의 입장에서도 역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깨닫게 한 뒤에 붓다는 보살들로 하여금 붓다가 알고 본 것의 로 건너게 하려한다.’ 이것은 붓다의 삶의 方式에 입각해 살게 하려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붓다의 삶의 方式이란 다른 存在를 깨닫게 하기위해 함께 받게 하고 함께 보여주고 건너게 하고 깨닫게 하는 그 方式이다.

따라서 붓다의 敎化를 받아 깨달음을 이룬 도 끝없이 다른 存在들을 敎化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붓다처럼 사는 것이 될 것이다.[佛土莊嚴, 全衆生成佛 + 佛土建設,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勸善이라고 하는 것임]

 

金剛經8.의법출생분 11.무위복승분 12.존중정교분 13.여법수지분 14.이상적멸분 15.지경공덕분 16.능정업장분 24.복지무비분 32.응화비진분 의 9개품에서 金剛經의 한 구절이라도 떠받들고 들어낸다는 말의 원어가 10가지의 단어들로 형성되어있으면서 서로 약간씩 다른 말을 9개품에서 2-3개씩 섞어서 쓰는 것을 종합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결국 經典을 대할 때(부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보살이 취하여야할 태도를 나타낸 것이 되는 것이다.

 

에 해당하는 항목들

1. sru :(to hear) 듣다.

2. na-prati-ksip:(to throw.버리다) 버리지 마라.

3. ud-grah:(to take. hold 잡다)에 대하여 앞에 위로가 있으므로 받들다.

4. dhr:(to bear 품다. 간직하다) 늘 품고 간직하다.

 

에 해당하는 항목들

5. vac :(to speak 자신에게 말하다) 외우다.

6. yoniso manaso-kr(로부터 思惟하다) 근본적인 사유의 뜻.

7. pari-ava-ap :(to obtain) 완전히 이해하는 것.

 

여기에 . 에 해당하는 항목들이 와야 함에도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가야함으로(이생에서 깨달음을 얻을지 못 얻을지를 모름) 이 단계에서 남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것 같다.

8. bhas :(to speak 남에게 말하다) 독송하고.

9. dis :(to point 핵심을 지적하다) 가르치다.

10. sam-pra-kas :(to shine 빛내다. 상대도 알아차리게 하다) 드러내다.

 

이런 열 가지 單語9개품에서 2-3개씩 섞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취합해보면 결국 信 解 의 단계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 偈頌을 완전히 理解하였다는 것이 되므로 그 완전히 理解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가르쳐 주고 드러낸다면 그 福德無爲福이라고 확언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 참고# Nidana라는 용어의 사용.

nidana原語이거니와 이는 因緣으로 라고 번역되었기에 因緣을 뜻하는 다른 單語들과 比較가 필요하다. 대개 原因hetu, 緣故pratyaya이다.

이중 hetu내 모는 것意味“A라는 상태에서 B라는 상태로 내 모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pratyaya기대는 곳意味로 무엇인가가 存在하거나 일어나기 위해서 동시 共存的으로 의지하는 대상을 뜻한다.

 

이에 비해 nidana語源的으로는 특별한 意味를 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 어휘적 用法을 살펴보면 대개 이렇게 숙어적으로 쓰인다.

“cattaro ahara kimnidana kim samudaya kimjatika kimpabhava 四識은 무엇을 nidana로 하고 무엇에서 집기하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에 서 있게 되는가?”

따라서 nidana는 같은 原因 또는 因緣이라 하여도 내 모는 것이나 기대는 곳이라기보다는 생기게 하는 것의 의미로 쓰인다고 본다.

 

hetu과 결합하는 것이 대표적이거니와 은 행위를 뜻하니 움직이게 하는 原動力으로서 動力因의 의미가 잘 드러난다. pratyaya眼色하여 眼識이 생한다고 할 때 쓰이는 것이 대표적이거니와 무엇이 할 때의 依支處의 위상으로 쓰인다.

 

그런 면에서 nidana와 비슷한 면도 있다. 그러나 nidana福德이 생기게 하는 면에서는 hetu와 그리고 배경이 된다는 면에서는 pratyaya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nidanahetupratyaya의 중간쯤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pratyaya原因結果에서 두 개가 同時存在하여야 하지만 nidana原因結果로 변형되어버렸기 때문에 原因이 그 시점에서 同時存在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剛經 四句偈 중 하나라도 수지 독송하는 功德이 변하여 無爲福으로 된다는 말에는 반드시 nidana라는 單語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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