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文(제9 一相無住分)
54)“수부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預流者에게 ‘나는 預流果를 성취했다’라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預流者에게 ‘나는 預流果를 성취했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그는 어떠한 법에 들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預流者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는 色에 들어가는 일이 없으며 소리도 냄새도 맛도 촉감도 법에도 들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預流者로 불리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預流者에게 ‘나는 預流果를 성취했다’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에게는 저 자아의 집착이 존재하며 유정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인에 대한 집착이 존재할 것입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一來者에게 ‘나는 一來果를 성취했다’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一來者에게 ‘나는 一來果를 성취했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一來果를 얻었다고 하는 그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一來者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不還者에게 ‘나는 不還果를 성취했다’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不還者에게 ‘나는 不還果를 성취했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不還果를 얻었다고 하는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不還者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阿羅漢에게 ‘나는 阿羅漢果를 성취했다’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阿羅漢에게 ‘나는 阿羅漢果를 성취했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阿羅漢이라고 불리는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阿羅漢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阿羅漢에게 ‘나는 阿羅漢果를 성취했다’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에게는 저 자아에 집착이 일어나며 유정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인에 대한 집착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如來 應供 正等覺者께서는 저에게 ‘다툼 없이 살아가는 자 가운데 제일인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탐착을 떠난 阿羅漢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나는 阿羅漢이다’, 또는 ‘탐착을 떠나 있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저에게 ‘나는 阿羅漢果를 성취했다’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如來께서는 저에게 ‘양가의 아들인 수부티는 다툼 없이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제일인자로서 그는 또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툼 없이 살아가는 자 다툼 없이 살아가는 자라고 단정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54) [제9장 一相無住分]
위의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預流者를 설명할 때는 我執. 人執. 衆生執. 壽者執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阿羅漢果를 설명할 때도 我執. 人執. 衆生執. 壽者執을 들어 설명하고 있으나 一來者와 不還者를 설명할 때는 그 어떠한 法도 存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預流者와 阿羅漢을 한 set로 묶고 一來者와 不還者를 또 한 set로 묶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을 구마라집 본의 金剛經에서 보면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이라고 되어있는데 산스크리트 原典에는 一來者라고 되어있는 것을 斯陀含이라고 번역하면서 이 斯陀含을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沙門四果에서 預流者 에는 ①最高 일곱 번 往來하는 者와 ②3家家者 ③2家家者 ④一種者 의 4종류가 있어서 이중에 一種者가 한번 往來함이 있는 一往來者이다. 그러나 一來者는 그야말로 바로 한번 이 세상에 오는 者를 말한다.
그리고 不還者는 이 世上에 오지 않고 그냥 天上에서 깨달음을 證得하는 것을 말함으로 한번 태어나는 것은 같으나 이 世上에 오는 것이 아니라 天上에 한번 태어나는 것이니 一來者와 태어나는 곳은 다르나 한번 태어남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阿羅漢은 이生에서 살아있는 몸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구마라집 스님 漢譯本 金剛經에서 斯陀含을 一往來者로 설명한 것은 위의 내용으로 볼 때 一種者와 一來者를 혼용한 것으로서 잘못된 번역이 된다.
有部系統에서는 一來보다는 一種子의 境地를 더 높게 보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왔는데 이는 부처님의 본래취지와 차이가 나는 것으로서 특히 論書에서 天一種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같은 有部系統이라도 증일아함은 대중부소속의 經典이고 장아함은 법장부소속의 經典인데 그 내용이 앞의 有部의 經典이나 論書와 差異가 있다.
물론 그중에도 一來者의 境地를 一來者에 이른 者(sakadagamipatto)와 一來者(sakadagami hoti)로 나누어서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阿羅漢도 現法涅槃者와 命盡과 漏盡이 同時인자로 나누듯이 나누어 생각하려는 것도 부처님이 당시에 그렇게 설명을 하신적도 있다고 보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沙門四果의 이 내용이 부처님의 密意說과 要意說로 되어있음을 알아보아야 한다.
특히 預流者의 내용 중에 4가지 종류로 분류하여 窮極的으로 極七返生者라고 하여 七 字를 사용함을 예의 주시하여야 할 것이다.
預流者는 반드시 人間으로 태어남을 條件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또한 중요한 단서이며 天上에서 모든 苦諦를 해결하는 것은 不還뿐임을 또한 살펴야 한다.
어떻든 預流에 들었다함은 涅槃에 들것이 보장된 聖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드는가하는 것이 관건인데 그 내용들이 阿羅漢. 不還. 一來. 一種子. 2家家. 3家家. 極七返生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들이 모두 極七返生에 포함되는 것임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沙門四果에서 預流. 一來. 不還. 阿羅漢에서 阿羅漢을 다시 初入阿羅漢. 住法阿羅漢. 不動阿羅漢으로 분류하면 7단계가 됨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이는 神足通. 天耳通. 他心通. 宿命通. 天眼通. 漏盡通의 六神通을 얻는 단계와 일치하며 마지막 不動阿羅漢은 住法阿羅漢에서 직선으로 이어짐을 대입할 수가 있다.
住法阿羅漢에서 不動阿羅漢은 별도의 神通이 있어야 함이 아니고 그 境地가 깊어짐을 의미함으로 아래 그림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密意說을 자신이 읽어내야 할 것이다.
그림.
凡夫 ↘ (2)일래↘ (4)초입아라한↘ (6)주법아라한 → (7)부동아라한
(1)예류 ↗ (3)불환 ↗ (5) ↗
(5)번은 人施設이 없지만 아주 重要한 段階로서 스스로 證得하여야 할 내용인 것이다.
부처님의 密意를 알아내려면 (5)번이 아주 重要한 열쇠가 되며 (2)번과 (3)번이 一來와 不還의 위치가 아니며 極七返生의 七回가 아주 중요하다할 것이며 沙門四果의 그림이 모두 極七返生의 그림에 들어감을 알아낼 수 있다.
(4)에서 (5)의 進行과 (4)에서 (5)를 거처 (6)의 進行과 (4)에서 (6)의 進行을 思惟해내어야 할 것이다.
一相無住分에서 沙門四果의 내용으로 볼 때 一來者와 不還者를 한 set로 묶은 것은 한 生만 살면 解脫한다는 내용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을 보인다.
그렇다면 預流者와 阿羅漢이 한 set가 되어 我執. 人執. 衆生執. 壽者執으로 설명되는 理由는 무엇일까?
이제까지는 주로 想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해왔으며 想이란 일종의 邪見의 意味가 强하다. 그러나 預流果라는 어떤 境地에 든다는 것은 어떤 體驗이며 느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體驗에 安住하려는 執着이 發生하기 쉽다는 뜻이며 이 느낌 또는 體驗에 安住하려는 執着에 警告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預流果와 阿羅漢果에만 執着이라는 警告를 보내고 있는 것인가?
이는 預流果란 처음으로 神足通이라는 神通에 의해서 들어온 境地이므로 執着하기 쉬우며 六神通을 完成한 阿羅漢의 境地 또한 執着하기 쉬운 境地이므로 이것에 대한 경고가 强하게 느껴지는 대목인 것이다.
또 구마라집 漢譯本에는 預流果 에서는 執着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阿羅漢果에만 執着이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으나 산스크리트 本에는 분명히 預流果와 阿羅漢果에 모두 執着이라는 單語를 사용하고 있으며 一來果와 不還果에는 분명히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는 분명히 부처님이 그렇게 언급한 것이며 부처님의 意圖는 처음으로 어떤 境地에 들어온 預流果와 最終의 結果라고 할 수 있는 阿羅漢果에서는 그 境地에 執着하기 쉽기 때문에 이를 警告한 것이며 조심해야한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預流果는 一來. 不還. 阿羅漢 果와 다른 부분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本文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예류자에게 ‘나는 예류과를 성취했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그는 어떠한 법에 들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류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는 색에 들어가는 일이 없으며 소리도, 냄새도, 맛도, 촉감도, 법에 들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류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法 自體 즉 境地自體를 否定하고 있는데 반하여 一來果나 不還果나 阿羅漢果는 들어간 當事者를 否定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습니다. 世尊이시여. 一來者에게 ‘나는 一來果를 成就했다’라는 것이 存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一來果를 얻었다고 하는 그 어떠한 法도 存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境地를 얻는 사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金剛經 초반에서 法自體가 存在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 法에 들어간 者도 없다고 하는 二重의 부정을 떠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預流者 에서의 이야기는 境地에 대한 否定이고 一來. 不還. 阿羅漢果 에서는 그境地에 드는 當事者의 否定인 것이다.
어떤 境地에 든 當事者를 공격함에는 항상 그 境地 自體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金剛經 初盤의 가르침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이는 “涅槃에 든 衆生은 하나도 없다”라는 이야기에서 涅槃自體가 없는데 涅槃에 든 衆生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라는 부정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제9 一相無住分은 涅槃에 대한 또 한 번의 否定이라는 것을 알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제9 一相無住分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부분의 수보리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如來 應供 正等覺者께서는 저에게 ‘다툼 없이 살아가는 자 가운데 제일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탐착을 떠난 阿羅漢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나는 阿羅漢이다’, 또는 ‘탐착을 떠나 있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저에게 ‘나는 阿羅漢果를 성취했다’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如來께서는 저에게 ‘양가의 아들인 수부티는 다툼 없이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제일인자로서 그는 또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툼 없이 살아가는 자. 다툼 없이 살아가는 자’ 라고 단정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部分은 金剛經 構成내용에 없더라도 내용상으로 어떤 하자도 없을 部分이지만 이 部分이 있으므로 해서 金剛經이 부처님과 수보리의 실질적인 對話라는 현장감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部分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구마라집 漢譯本의 이 부분에 번역 상 理解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위의 부분의 漢譯本은 다음과 같다.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여기서 無諍三昧의 原語는 arana-viharin으로서 arana는 rana을 부정한 단어로서 rana란 joy of combat로서 싸움(다툼)을 좋아하는 者를 뜻이다.
그러므로 arana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無諍으로 번역된 것이며 viharin은 지내다의 뜻으로 “다툼 없이 살아가다.” 라고 번역되는 말로서 三昧라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삼장스님의 번역본에는 無諍住라고 번역하고 있다.<여기서 싸움이란 토론으로 보아야함.>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앞에는 無諍三昧라고 번역하고 있으면서도 原典에 같은 단어인 arana-viharin으로 되어있는 뒷부분을 樂阿蘭那行者라고 번역한 것은 理解되지 않는 부분이다.
阿蘭那란 aranya로서 이는 arani에서 온 말인데 arani란 멀리 떨어짐(현실로부터). 野生의 뜻으로서 현 도시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개척되지 않고 野生의 독충이나 뱀 등이 흔히 있는 그런 장소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는 頭陀行을 意味한다고 할 수 있으나 無諍三昧라고 앞의 것을 번역했다면 뒤의 것도 당연히 無諍三昧라고 번역해야함에도 阿蘭那行으로 번역함은 理解할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부티 尊者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수부티 존자에 대한 기록을 참조해 보자.
수부티 尊者 (참고문건)
수부티 尊者는 당시 코살라국의 수마나 장자(셋티)의 아들이자 아나타핀디카 장자의 동생이다. 아나타핀디카 장자가 제타와나 승원을 바치는 날 부처님의 說法을 듣고서 出家했다.
라자가하에서 遊行을 할 때 마가다國의 빔비사라王은 그를 위해 암자를 지어주기로 약속했다가 잊어버렸다. 그래서 수부티는 露天에서 修行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
王이 그 理由를 알아보고서야 자신의 약속을 생각하고는 草庵을 지어 바쳤고 수부티가 그 草幕(초막)으로 들어가자 바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草幕에 들어간 수부티존자의 詩가 장로 偈에 실려 있다.
“나의 작은 움막은 지붕에 덮여있다./ 그래서 바람이 들지 않아 즐겁기만 하다./ 天神이여, 즐거이 비를 내려라./ 나의 마음은 三昧에 깊이 들었다./ 나는 解脫했다./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간다./ 天神이여, 즐거이 비를 내려라.”//
부처님은 그를 2가지 제일로 임명하셨는데 하나는 “아라나위하리남 악고(aranaviharinam aggo: 다툼 없이 지내는 者 中의 제일)”이고 하나는 “닥기네 야남 악고(dakkhineyyanam aggo: 시주받을 만한 者 中의 제일)”이다.
金剛經에 나오는 “아라나위하리남 악고”의 아라나위하린(arana-viharin)은 “다툼 없이 지내는 자”라는 뜻인데 다툼이 없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가 필요하다고 부처님은 說하신다.
(1) 中道(majjhima-patipada)에 입각할 것. (여기서 중도는 고행과 쾌락의 수행론적인 극단에서의 중도를 말함)
(2) 사람(puggala)을 말하지 말고 법(dhamma)을 말할 것. ⋯ 예를 들어 “貪 瞋 癡가 있으면 輪回하게 된다.”는 표현은 사실이고 이렇게 말하면 法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너는 貪 瞋 癡가 있으니 輪回할 것이다. 또는 너는 貪 瞋 癡가 없으니 解脫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사람을 직접 빗대어 말하는 것은 다툼을 불러들일 수 있다.
(3) 外面的 즐거움(bahiddha-sukha; 눈. 귀. 코. 혀. 몸의 즐거움)을 버리고 內面的 즐거움(ajjhata-sukha)인 禪定의 즐거움을 누릴 것. <외면적인 즐거움은 쇠퇴하기마련이지만 내면적인 즐거움은 증장되는 즐거움이다.>
(4) 사람에 대해 말을 할 때는 그가 앞에 없을 때는 말하지 아니하고 앞에 있을 때는 眞實과 利益이라는 두 조건을 반드시 지킬 것.
(5) 說法에 있어서는 서두르지 말고 부드럽게 할 것.(느긋하고 은근하고 끈기 있게)
(6) 가급적 지역어나 조어나 은어 속어 등을 사용하지 말고 常識的인 표현<우리말로 사색하기>을 넘어가지 말 것.
이처럼 수부티 尊者에게는 다툼 없이 지내는 자와 시주 받을 만한자 중 제일이라는 두 가지 尊稱이 붙어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