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본 금강경

제7 無得無說分

동산/혜산방 2011. 9. 23. 14:15

本文(7 無得無說分)

47)또 세존은 수부티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다. 라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이라도 존재하는가. 또 여래가 가르친 어떠한 법이라도 존재하는가.”

이와 같이 설하였을 때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세존이 말씀하신 의미를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여래께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다. 라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은 없습니다.48) 또 여래께서 가르치신 어떠한 법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원만히 잘 깨달았고 가르치셨다고 하는 법은 붙잡을 수도 없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聖人들은 무위법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49)

47) [7장 무득무설분]

48) 23)번을 다시 옮긴다. 반야부의 경우 이다라는 술어와 있다라는 술어는 실체적인 것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1) 영원하지 않고 (2) 독존하지 못하고 (3) 충만하지 못한 것은 실체가 아니고 그런 것은 그것이다라고 표현될 수 없으며 그것이 있다.” 고도 표현될 수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조차도 결코 (1)영원하지 않고 (2)독존하지 못하고 (3)충만하지 않다. 그래서 그것은 없다. 오직 (1)영원하고 (2)독존하고 (3)충만한 것만이 그것이다.”라고 표현될 수 있으며 그것이 있다.”고도 표현될 수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저 부정된다는 것이야 말로 金剛經 思想의 절정에 이른 파격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49) 아함의 차원에서는 무위법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반야부에 오면 그 무위법조차 유위법과 연생관계 속에서 절대성을 상실하게 된다. 보살 마하살은 바로 그 놀라운 사실에 정통해 있다.

 

이품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고 불릴만한 정해진 법도 없다(無有定法).” 라는 말이 나오는 품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부정하는 것이 이제까지 나온 부정과 같은 맥락의 부정인가를 심각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산스크리트 원전에는 정해진 법(定法)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어떠한 법도 없다는 말만을 하고 있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랍시고 한 어떠한 은 없다. 라고 하고 있다. 이는 어떠한 법도 없다. 라고 하면 佛敎를 부정하는 이야기가 되므로 구마라집 스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도 해진 모습은 없는 것이다, 라고 우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原典의 내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어 아래에 原典漢譯經典을 비교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7.

punar aparam Bhagavan ayusmantam Subbhutim etad avocat: tat kim manyase subhute, asti sa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 anuttara samyaksambodhir ity abhisambuddhah, kascid va dharmas tathagatena desitah? evam ukta ayusman Subhutir Bhagavantam etad abocat: yatha aham Bhagavan Bhagavato bhasitasyartham ajanami, nasti sa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 anuttara samyaksambodhir ity abhisambuddhah, nasti dharmo yas tathagatena desitah, tat kasya hetoh? yo 'sautathagatena dharmo 'bhisambuddho desito va, agrahyah so 'nabhilapyah, na sa dharmo na aeharmah. tat kasya hetoh?

asamskrtaprabhavita1) hy aryapudgalah.

 

7) 無得無說分

須菩提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또 세존은 수부티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다. 라고(랍시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이라도 존재하는가. 또 여래가 가르친 어떠한 법이라도 존재하는가.”

이와 같이 설하였을 때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세존이 말씀하신 의미를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여래께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다. 라고(랍시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은 없습니다.2) 또 여래께서 가르치신 어떠한 법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원만히 잘 깨달았고 가르치셨다고 하는 법은 붙잡을 수도 없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무위법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3)

 

1) <1> sila-samadhi-panna-paribhavitam cittam sammad eva asavehi vimuccati, seyyathidam kamasava bhavasava avijja asava ti.(戒律 三昧 智慧의 상태로 완전히 바뀐 마음이라야 올바로 여러 에서 解脫하니 곧 慾漏 有漏 無明漏에서 解脫한다.)

 

여기서 bhavita를 닦는다고 흔히 해석하는데 또 그것이 修行一般的解釋인데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bhavita닦음 쪽으로 해석하면 asamskrtaprabhavita無爲法 닦은 자로 해석된다. 이 말은 無爲法이 닦음이라는 동사의 목적어로 취급되어 修行方法意味를 지니게 된다.

 

실제로 戒 定 慧를 닦는다는 말은 戒 定 慧가 닦음의 방법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아서는 아니 된다. 비록 戒 定 慧닦다의 수단적 방법을 의미할 수 있지만 無爲는 그 닦음의 목적이 되고 목표는 될 수 있어도 수단적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bhavita와 결합하는 말은 단순한 수단적 방법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목표로서의 의미를 띠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런 차원에서 바뀐 것. 된 것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적절한 번역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안 좋은 것에서 좋은 것으로 바뀌는 것에서 좋은 것은 바로 목표로서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sila-bhavita弱慧者의 상태에서 智慧者의 상태로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말로 보고 samadhi-bhavita산란자의 상태에서 집중자의 상태로 바뀌었음을 의미하고 panna-bhavita약혜자의 상태에서 지혜자의 상태로 바뀌었음을 의미하고 asamskrta -prabhavita有爲의 상태에서 無爲의 상태로 바뀐 것. 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修行을 늘 바꾸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살펴온 나의 입장은 온당한 것이다.

 

<2> bhavita되다 되게 하다[사역] 되게 하여지다”[수동]의 변화를 밟는다. 결국 되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의미로는 bhuta가 있으니 비교해야 한다.

 

그러면 이 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bhuta는 대표적으로 四大로 쓰이는 말이다. 그리고 이 금강경 제6 정신희유분에서는 진실하다는 생각이라 할 때 그 진실하다bhuta이다.

 

sabbapanabhutahitanukamp라 할 때는 生命體의 의미이다. 이 중에서도 四大에서의 用法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주의해야 한다. 모든 色法이 그것으로 중요한 것이 mahabhuta 이다. 이처럼 bhuta도 역시 된 것이라는 意味를 지닌다.

그렇지만 bhavita 와는 다르다. 바로 修行을 통해 바뀌어서 된 것을 bhavita 라고하고 그냥된 것은 bhuta이다. 그러면 修行은 왜 하는가? 결국 samskrtadharma(有爲法)asamskrtadharma(無爲法)로 바꾸는 것이 修行이다.

따라서 bhavita라는 말이 結合해서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정형의 表現asamskrta-bhavita(無爲)이다. 그리고 bhutasamskrta-bhuta(有爲)로 볼만하다.

 

<3> 여기서 接頭辭를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asamskrta-bhavitaasamskrta-prabhavita는 무슨 差別이 있을까? 그야말로 以無爲法, 而有差別이라는 번역에서도 우연찮게 差別이라는 말이 쓰이므로 숙고해야 한다.

用語에서 살펴보면 asamskrta-bhavita無爲法이 되어 그것에 머무는 분위기이고 asamskrta-prabhavita그것에서 다시 진행하고 마는 意味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면 지나칠까?

pra는 그 유명한 prajnapra이고 samprasthitapra인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냥 無爲法이 아니고(非法) 물론 有爲法도 아니다.(그러므로非非法이라고 해야 할 것임) 왜냐하면 無爲法이 된 聖賢들이 거기서 한 걸음 더 걸어 나간 境地에서 비로소 論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2) 반야부의 경우 이다라는 술어와 있다라는 술어는 實體的인 것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1) 永遠하지 않고 (2) 獨存하지 못하고 (3) 充滿하지 못한 것은 實體가 아니고 그런 것은 그것이다라고 表現될 수 없으며 그것이 있다.” 고도 表現될 수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조차도 결코 (1)永遠하지 않고 (2)獨尊하지 못하고 (3)充滿하지 않다. 그래서 그것은 없다.

오직 (1)永遠하고 (2)獨存하고 (3)充滿한 것만이 그것이다.”라고 表現될 수 있으며 그것이 있다.”고도 表現될 수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저 否定된다는 것이야 말로 金剛經 思想의 절정에 이른 破格的 表現이 아닐 수 없다.

 

3) 아함의 차원에서는 無爲法絶對的이다. 그러나 반야부에 오면 그 無爲法조차 有爲法緣生關係 속에서 絶對性을 상실하게 된다. 보살 마하살은 바로 그 놀라운 사실에 정통해 있다.

 

 

어떤境地에 들지 못한 자가 그 境地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제7無得無說分에서는 無爲法이라는 表現을 가지고 大乘窮極的境地을 멋들어지게 설명한 말이 바로 asamskrta-prabhavita 이다.

金剛經에서는 無爲法이라는 말을 중요하게 쓰고 있다. 아함경은 有爲無爲로 나누고 있다. 結合이 풀린 세계가 無爲의 세계이며 그것이 涅槃의 세계이다.

 

金剛經에서는 이 無爲法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의 세계를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이 asamskrta-prabhavita 이다. asamskrta(無爲)의 단어 뒤에 있는 bhavita는 아함경의 涅槃을 나타낸다. 그러나 金剛經에 와서는 pra라는 접두사가 붙어있다.

大乘은 이 pra라는 接頭辭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pra進行 즉 나아감을 뜻하는 接頭辭이다.

無爲法이란 asamskrta-bhavita로서 無爲를 얻어서 그 단계에 그냥 머무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asamskrta-prabhavita阿含部에서의 無爲修行者般若境地에서는 그냥 無爲로 바뀌어서 정지해 있어서는 안 되고 그 無爲의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상태로 되어야 진정한 asamskrta-prabhavita意味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함에서 有餘涅槃無餘涅槃으로 나뉘지만 大乘에 와서는 無爲에도 2개의 無爲가 있으니 이를 구분하는 것과 같다.

無爲에도 五蘊하면서 얻는 無爲法 이 있고 12緣起하면서 얻은 無爲法이 있다고 하는 고급정보에 의한 완벽한 구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金剛經에서 無爲法에 정통했다는 것은 asamskrta-prabhavita로서 이는 두 번째의 無爲法에서도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므로 그냥 無爲法이 아니기 때문에 非法이라고 한 것이다. 有爲法은 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無爲法이 아닌 것도 아니니 非非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金剛經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부정할 때는 그 뜻을 旣存의 부정과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 또 나중에 나오는 반야바라밀다를 부정할 때도 같은 맥락이 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다를 설명하는 經典에서 반야바라밀다를 부정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마라집 스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부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고 정해진 법이 없다(無有定法)는 뜻으로 둘러가는 해석을 한 것이다.

그러나 元典에는 없는 表現이므로 부처님의 本來의 뜻을 原典으로부터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랍시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은 없습니다. 라는 이야기에서 주2)에서 설명한 내용을 보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깨달았다는 어떠한 이란 깨닫는다는 事件經驗도 그 안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 事件이나 經驗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한다는 것도 事件이고 經驗인 바에는 껍데기에 불과하므로 없다고 한 경우를 하나 들 수 있다. 또한 붙잡을 수도 없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 라고 부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이 뜻만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主題로 삼았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명하려는 부처님의 意志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깨달음의 내용을 부정한다는 것은 眞理를 부정한다는 것과 상통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은 最上의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즉 無上正等覺인데 그 위에 또 다른 깨달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본래 깨달음에는 깨닫는다는 事件經驗도 있지만 깨달음에는 깨닫는 내용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깨닫는 내용이란 그 단계에서의 法則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法則에 의한 를 뜻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먼저 法則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法則을 통하여 얻게 되는 최고의 境地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라는 事件經驗은 부정할 수 있어도 깨달음에 포함되는 法則境地를 부정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허물어트리는 것이 며 眞理否定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이제까지의 視覺과는 다른 次元視覺으로의 설명이 必要한 것이다.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처님 말씀은 항상 方便이며 항상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부정하였다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내용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려는 부처님의 意志가 있는 것이라고 눈치를 채어야 한다.

우리가 깨닫는다는 것은 어떤 法則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그 法則을 통하여 成就하는 最高境地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부정한다는 것은 法則을 부정하는 것이고 法則을 부정하면 그 法則에 의해서 成就境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境地를 부정하면 아무것도 없게 된다. 佛敎自體를 부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法則과 그 法則成就境地들을 검토하여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無爲法이 나오고 無爲法에서 더 들어가 境地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보다도 한 단계 더 들어가는 것이다.

 

本文이 내용에서는 敎理的으로는 無爲法과 관련된 내용으로서 이 無爲法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無爲法에서 더 進行을 하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어떻게 해당하는지 또 얼마를 더 들어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한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만이 강조되고 있으며 특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랍시고 떠들 것도 없다, 라고 하고 있다.

 

無爲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 無爲法에 정통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無爲法에 정통해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것이 붙잡을 수도 없고 이야기 할 수도 없으며(이야기 할 수도 없다는 말의 原語떠들 것도 없다. 이다) 도 아니며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랍 시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다는 것은 佛敎랍시고 이야기 할 것도 없고 붙잡을 것도 없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佛敎에서 否定하는 것은 과도기 내지 過程否定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7無得無說分 에서는 終着點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否定은 앞의 論理와는 다른 觀點에서의 否定이다.

 

佛敎에서는 반드시 法則境地가 있는데 한 가지 法則에는 한 가지 境地가 반드시 存在한다. 그런데 佛敎에서의 첫 번째 法則因果 相應法則이다. 이어서 因緣化合法則(연생의 법칙)이 있으며 한 단계 더 들어가면 相依相關法則(집기의 법칙)이 있으며 한 단계 더 들어가면 12緣起法則이 있으며 여기까지가 阿含의 이야기 이다.

 

위의 각 단계도 각각 하나의 境地이다. 그리고 다음 반야부 經典에 오면 四支緣起法則存在하며 그 때의 境地또는 究竟涅槃境地이다.

 

그런데 이 法則들은 한 개의 法則에 한 개의 境地存在하면서 어떤 範圍가 정해져 있는 것을 發見할 수 있다. 그러면서 뒤로 갈수록 앞의 것을 包含하면서 그 範圍가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緣起法則이 이 世上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 뒤에 2가지 境地가 있음을 부처님은 이미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는 境地라는 境地般若部 經典에서 이미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라는 것과 라는 것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야기해버린(떠들어 버린) 것이다.

 

실제로 반야부 경전의 小如品 大如品에서 는 바로 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지 同一하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敎說 속에서 두 개의 境地가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내용이 다르다는 것 이다. 왜냐하면 내용이 같다면 이름을 달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敎說 속에서의 을 설명하기 위한 명칭일 뿐 그 내용을 설명한 적은 없다.

 

般若部 經典에서는 을 거쳐서 로 간다고 하고 있음을 볼 때 으로 끝나지 않고 까지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境地가 있으려면 반드시 그 境地에 걸 맞는 法則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可能하게 하는 法則이 있어야 하는데 그 法則의 명칭이 바로 四支緣起法則이다.

 

그런데 라고 하는 窮極的 境地可能하게 하는 法則存在하지 않는다. 수보리가 이미 그런 것은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잡을 수도 없고 이야기 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를 넘어선 또 다른 境地가 더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야기 할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는 것인가? 法則(可能하게 하는 法則)이 무엇인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있다면 왜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왜 그랬을까?

 

앞의 각 法則은 각 境地에 적용되고 있으며 四支緣起法則無爲法無爲法 아닌 것에 共通的으로 적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에 해당하는 法則 있다면 彼岸此岸共通的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彼岸此岸의 모든 것이 適用되는 法則이 있다면 이는 全體가 되며 全體라는 것은 느낄 수가 없게 된다.

물고기의 世上은 모두가 물이듯이 모두가 적용된다면 比較對象이 없으므로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 다 그것이면 그것에 대한 認識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全體(전부)는 이름을 갖지 못한다.

 

現象法則을 말하려면 全體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므로 法則이라고 할 수가 없고 法則을 말하지 않으면 法則이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며 이야기 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다(붙잡으면 이미 全體가 아님)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 - 法則: 인과상응의 법칙 인연화합의 법칙 상의상관의 법칙 12緣起의 법칙 四支緣起의 법칙 (?)

- 境地: 三世輪回 十八界와 하나 됨 六界와 하나 됨

(涅槃)(무위법다운 무위법)

 

그런데 위의 法則들을 보면 그 範圍(限界)가 정해져 있다.

인과상응의 법칙이 어떤 변화까지 포함시켰다면 상의상관의 법칙은 최종으로 緣起法則이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緣起法則은 모든 것을 包括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을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은 앞의 12緣起의 법칙까지 모두를 包含하고 있다. 그러나 包含할 수가 없다. 그러나 는 앞의 모든 法則包括하여 統合하고 있으므로 이미 全體이며 그 모두를 包含하고 있으니 그 限界가 없다. 그러므로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말할 수 있거나 볼 수 있다면 全體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法則으로 설명하다가 마지막 부분인 는 어떤 法則으로도 나타낼 수 없으므로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니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法則으로도 나타낼 수는 없는 것이므로 法華經에서는 이를 story 중심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法華經에서는 말을 하지만 반야부에서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용어와 법칙중심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명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무엇이므로 붙잡을 수도 없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이야기를 한다면 이미 全體가 아니다.)이기 때문에 이는 도 아니며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하고 있다.

 

理由로서 聖人들은 無爲法에 정통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에서의 無爲法이란 無爲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상태 즉 asamskrta-prabhavita(진행된 무위법)을 말하는 것으로 그 단계에서는 감지는 할 수 있으며 따라서 無爲法正統한다는 進行無爲法을 이야기 하므로 서 그 理由를 삼은 것이다. 따라서 수보리는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進行無爲法(asamskrta-prabhavita)이란 결국 또는 반야바라밀다로서 金剛經에서는 또는 반야바라밀다라는 이야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결국 을 지칭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이 두 번째의 안목인 것으로 제7無得無說分의 진정한 意味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냥 一般論으로 否定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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