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본 금강경

제6장 淨信希有分

동산/혜산방 2011. 9. 16. 12:50

 

本文 (6淨信希有分)

39) 이와 같이 설하셨을 때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장래 미래세에 오백년 지난 후에 바른 법이 소멸되는 시기가 전개될 때 이들 경전의 구절이 이와 같이 설해졌을 때 이에 대해 진실하다는 생각40) 을 일으키는 자가 있겠습니까.”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지금 그와 같이 장래 미래세에 오백년 지난 후에 바른 법이 소멸되는 시기가 전개될 때 이들 경전의 구절이 이와 같이 설해졌을 때 이에 대해 진실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자가 있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수부티야. 장래 미래세에 오백년 지난 후에 바른 법이 소멸되는 시기가 전개될 때 이들 경전의 구절이 이와 같이 설해졌을 대 이에 대해 진실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다.

실로 수보리야 오백년 지난 후에 바른 법이 소멸되는 시기가 전개될 때 덕을 갖추고 계율을 지키며 지혜가 뛰어난 보살 마하살들이 있어 이들 경전의 구절이 이와 같이 설해졌을 경우 그들은 진실이라는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수부티야, 또 이들 보살은 오직 한 분의 부처님만을 모신 것이 아니며 오직 한분의 부처님에게서만 선근을 쌓은 것이 아니다. 수부티야, 이 보살마하살들은 백천의 수많은 부처님을 섬기며 백천의 수많은 부처님 아래에서 선근을 쌓은 것이다. 그들은 이들 경전의 구절이 이와 같이 설해졌을 경우 청정한 한마음41)을 얻을 것이다.”

39) [6淨信希有分]

40) 여기서의 생각도 바로 (samjna)이다. 을 금하는 金剛經의 입장에서 보면 意外의 표현이다. 그러기에 여기서의 을 잘 해석해야 한다.

1. 은 근본적으로 作爲的인 성격이 있다. 실체 아닌 것을 실체로 보는 것도 작위적이다. 그래서 이다. 그런 것처럼 未來世에 곧 부처님이 아니 계신 상황에서 이런 교설을 접하면 그것이 진실하다는 판단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는다.

그때는 비상한 각오로 이 교설을 진실하다고 밀어붙여야 하거니와 형태적으로 作爲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간혹 불교만이 금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진술을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해서는 아니 될 생각을 금하는 것이지 아무리 이라 하더라도 해야 할 생각이라면 비상한 각오로 진행해야 하는 법이다.

이상의 가르침이 진실하다는 이 생각은 힘들지만 큰 용기로 일으켜야 한다. 건전한 비판은 버려야할 思量分別이 아니라 우리를 眞理로 인도하는 드문 나침반이다. 물론 이 생각도 하나의 사건이므로 껍데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그것이라고 인정해서도 아니 되고 그것이 있다고 긍정해서도 아니 된다.[14 이상 적멸 분 참조] 그러나 일으켜야 된다.

· · · . · . · 가 모두 껍데기이지만 그래도 그런 줄 알면서 · · · 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는 참 뜻이 아닐까?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14 이상 적멸 분 참조]

41) 청정한 한마음(eka-citta-prasada)"이 후반부에 설해지는 無生法忍 法性에 대한 智慧를 의미하는 듯하다. prajnaparamitam-asritya viharaty-acittavaranab. cittavarana- nastitvad- atrasto viparyasatikranto nisthanirvanab. 한마음의 투명함은 정확히 마음의 가림에 대한 antithese이다. 우회적 사지연기의 입장에서는 cittavarana trasta. viparyasa 대승의 죽음이라는 구조를 뽑을 수 있거니와 이는 12연기로 대응해보면 무명 → … → 죽음의 구조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12연기의 최초지분인 無明은 바로 을 전제로 한다. 연기란 그렇게 자신이 전제로 하는 實相을을 정확히 자신의 지분 속에 품는다. 無明이 성립되려면 그와 반대되는 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cittavarana(마음의 가림)가 성립하려면cittavarana와 반대되는 무언가가 전제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일단 형식논리로 하자면 acittavarana(가리지 않음)가 된다. 마치 無明에 대해 처럼.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니 avarana(가림)를 부정하면 뜻으로 볼 때 prasada(투명함)가 적절함. prasada의 뜻은 투명함(transparent)”이기 때문이다.

 

6淨信希有分에서 漢譯經典청정한 한마음을 깨끗한 믿음이라는 뜻의 淨信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진행되는 經說에서 그 참뜻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 진실하다는 생각의 뜻을 살펴보자.

1. 진실이지만 받아들이기 힘들 때 비상한 각오로 진실하다고 밀어붙이는 作爲的인 행위가 필요한데 이 作爲的인 생각도 일종의 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진실하다는 생각()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貪 瞋 癡의 치(moha)는 그냥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기는 아는데 사실을 애써 거부하는 것이 (moha)이다.

2. 생각이라고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생각은 일으켜야 한다. 그 예로서 모든 생각은 버려야 하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생각은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청정한 한마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佛敎에는 4개의 緣起해지고 있다.

18實相으로 하는 <~> 六觸. 六受. 六想. 六思 六觸緣起 1緣起라고 한다.

六界實相으로 하는 <~> 色 受 想 行 識五蘊緣起2緣起라 한다.

實相으로 하는 <~> 無明. . 12緣起3緣起라 한다.

청정한 한마음實相으로 하는 <~> 마음의 가림두려움뒤바뀐 생각대승의 죽음에 떨어진다는 迂廻的 4支緣起4緣起라 한다.

 

이 중에서 六觸緣起五蘊緣起 그리고 12緣起는 아함경에서 설해지는 緣起이며 般若心經우회적 4支緣起大乘經典般若部 經典에 와서 해지는 緣起法이다.

따라서 이 4개의 緣起를 공부하는 것이 佛敎인 것이다. 緣起는 여기서 끝나고 法華. 華嚴. 淨土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般若心經緣起에서 마음의 가림이라는 첫 번째 支分은 어떤 實相을 바탕으로 發生하는데 般若心經에는 그 어디에도 그 實相支分을 찾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이나 반야바라밀다實相支分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문구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제로 實相支分청정한 한마음인데 그것이 金剛經에서 이미 해져 있으므로 般若心經에는 생략된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한마음이란 산스크리트 어로 eka-citta-prasada로서 eka는 하나라는 뜻이며 citta는 마음이라는 뜻이고 prasada는 투명함이라는 뜻으로 투명한 하나의 마음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사실은 한마음의 투명함 이라고 해야 정확한 해석이 된다.

 

따라서 한마음의 투명함에서 잘못 본 것이 마음에 가림이 있음이라는 最初支分이 됨으로서 다른 緣起法처럼 완벽한 반대문구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로소 eka-citta-prasadacitta-avaranatrastaviparyasamorama 로 제4般若心經五蘊緣起가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정한 한마음을 얻는다. 라고 함으로서 얻는다는 말은 최종목적지에 도착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청정한 한마음이 바로 이요 반야바라밀다이며 無生法忍이며 彼岸에 도달했음을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金剛經의 제1法會因有分에서 수보리의 질문인 양가의 아들딸로서 보살승에 나가 서 있는 자는 어떻게 서야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양한 색깔과 방법으로 설명을 하고 계신 것이다.

 

첫째: 大乘正宗分에서는 有情 界에서 알려지는 그 모두를 나는 無餘涅槃界滅度 시켜야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무수한 有情滅度 시켰다하더라도 실은 어떠한 有情般涅槃한 자는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수부티야, 自我라는 생각 有情이라는 생각 또는 靈魂이라는 생각 個人이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그는 菩薩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妙行無住分에서는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모습에 대한 생각에 조차 머물지 않은 채 보시해야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모습에 대한 생각에 조차 머무르지 않은 채 보시한다면 수부티야 그때 생긴 福德을 헤아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如理實見分에서는 수부티야, 무릇 상호의 구족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모두 허망하고 상호의 구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모두 허망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하니 실로 상호란 상호가 아니라고 할 때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이다.(laksanalaksana가 아니라고 볼 때)

 

넷째: 正信稀有分에서는 청정한 한마음을 얻을 것이다.”

다섯째: 無得無說分에서 수보리의 대답에聖人들은 無爲法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함으로서 수보리의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색깔과 방법으로 어떻게 서야하며 어떻게 나아가야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 대목이 또한 중요하다. 이렇게 청정한 한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如來부처님의 아는 바로서 그들을 알고 있고 부처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고 있고 그래서 如來는 그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슨 뜻인가가 중요하다.

 

本文

수부티야, 여래는 부처님의 아는 바로서 그들을 알고 있다. 수부티야, 여래는 부처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고 있다. 수부티야, 여래는 그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AA) 수부티야, 그들은 모두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쌓고 또 감싸 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이 보살 마하살들에게는 자아라는 생각이 전재되지 않으며 또 유정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으며 영혼이라는 생각도 개인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부티야 또 그들 보살 마하살에게는 법42)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으며 법이 아니라는43) 생각도 그와 같다. 나아가 수부티야, 그들에게는 생각이라든가 생각이 아니라든가 하는 것44)도 전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만일 그 보살 마하살들에게 법이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자아에 대한 집착, 유정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인에 대한 집착도 있게 될 것이다. 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자아에 대한 집착, 유정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인에 대한 집착이 있게 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법과 법 아닌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뗏목으로 비유되는 법문을 알고 있는 사람은 법45)조차 버려야 한다. 하물며 법 아닌 것46)이야 라고 이미 말하였다.”

 

AA) [大品般若 聞持品]에는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신다. “만약 보살이 아직 法位의 가운데 들지 못했다면 여러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기별을 주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다가 설해지는 것을 들을 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가운데는 내 이름이 없어 마음이 청정하지 않다.’라고 한다. 이것은 보살에게 나타난 악마의 일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에 수보리가 말씀드린다. “어떤 인연으로 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가운데에 이 보살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까.”

다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아직 반드시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지 못한 보살에게는 모든 부처님이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法位 菩薩은 화엄 십지로 하면 제8지 부동지보살 정도로 여겨진다.

이 부동지 보살에 대해 화엄경에서는

잘했도다. 선남자여. (=無生法忍, anutpattika-ksanti)은 제일에 부처님의 법을 순종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선남자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 가지 힘과 두려움이 없음과 열여덟 가지 함께 하지 않는 부처님의 은 그대가 아직 얻지 못하였으니 그대는 이 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할 것이요 이 의 문에서 방일하지 말라.”[화엄 십지 중 제8지 부동지의 초입 부]

42) 無爲 · 定法

43) 非無爲· 非定法 = 有爲 · 不定法

非法의 구분은 有爲法無爲法으로의 구분이 제일 적절하다. 俱舍論有漏 無漏 쪽에 초점을 두나 분명 書頭有爲法無爲法으로의 구분이다. 그리고 고 익진 박사님은 有爲 無爲로 일관하셨다.

(1)[구사론]의 입장

俱舍論五位七十五法을 확정지을 때 최초로 有爲 72無爲 3으로 나눈다. 뒤에 有爲 가운데 色法· 心所法· 心不相應行法四位를 설정한다. 이것은 一見하기에 俱舍論 등이 諸法의 분류에서 가장 근본적인 분류기준으로 結合(sankhata, sk. samskrta Tib. hdus-byas)· 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 사실 俱舍論本論의 벽두에서 三無爲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부터 시작하고 있다 <Abh. K, p.3.>

 

俱舍論序論格으로 對法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처음 그 차체의 논술에 들어간다. 그때 어떤 들의 決擇을 위하여 對法이 설해졌다고 했거니와 무엇이 그 들인가? 有漏法無漏法들이다. 이것이 一切法을 요약하여 말한 것이다.”(katame punas-te dharma yesam pravicaya-artham-abhidharmo upadesa ityaha. sasravanasrava dharmah. esa sarvadharmam samasanirdesah (2)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44) 생각이라든가 생각이 아니라든다 하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고 그 어떤 사건 Q도 껍데기이므로 전개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설령 깨달음을 얻으려는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생각인 이상 작위적 강제적 성격을 띠었기에 생각인 것이다. 이 말은 만일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생각이 더 이상 전개되지 않으리라는 뜻이 들어 있다.

45) 무위· 정법은 유위· 부정법과 연생관계를 맺으므로 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46) 유위· 부정법은 무위· 정법과 연생관계를 맺으므로 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위 내용에서 如來는 부처님의 아는 바로서 그들을 알고 있다.= 佛知

如來는 부처님의 눈으로서 그들을 보고 있다. = 佛見

如來는 그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佛覺 에서 잘 파악하고 있다라는 말은 문맥을 위해서 그렇게 번역한 것이고 原典에서는 특별하게 buddhas te subhute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직역하면 如來는 그들에 대하여 깨달아졌다.”라는 뜻으로 바로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부처님은 깨닫는 다는 말을 여간해서는 잘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붓다라는 말 자체와 혼동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如來는 그들에 대하여 깨달아 졌다. 라는 表現을 쓰고 있다. 따라서 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말은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청정한 한마음을 얻는 다는 것은 곧 깨달음의 시초라는 뜻으로 청정한 한마음이 바로 究竟涅槃이요 空性이며 大明이고 반야바라밀다이며 無生法忍을 얻음이며 彼岸에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으로서 佛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시작이며 이것에 포함되는 내용이라는 뜻이 담겨있는 이야기 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아는 바로서 알고 부처님의 눈으로서 보고 부처님은 그들에 대하여 깨달아 졌다.” 라는 말은 부처의 깨달음과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청정한 한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다는 내용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같은 내용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청정한 한마음에서 한마음을 얻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음을 얻으려면 대상이 하나일 때만 가능하며 한마음이 된다는 것은 대상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한마음이 되는 것이며 하나가 될 때만이 비로소 투명해짐으로 투명한 마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한마음의 본래의 뜻인 한마음의 투명함이라는 투명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現前三昧에는 法則에 입각한 現前三昧實相에 입각한 現前三昧가 있다.

예를 들어보면 緣起法則에 마음이 고정된 것이 法則에 입각한 現前三昧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입각한 투명함이 바로 實相에 입각한 現前三昧이다. 한 가지 마음이라는 말이 성립된 세계가 實相의 세계이다.

 

實相의 세계란 통합의 세계이다. 예를 들어 18만 보더라도 18對立을 통합하여 不生不滅構造를 갖는다. 構造 속에서는 生滅心이라는 分別이 사라진다. 不生不滅의 한 가지 마음이 成立한다.

 

여기서 한 번 더 들어간 것이 六界인데 六界自己와 남의 對立통합한 융합의 세계이며 이라는 세계에 들어가면 存在變化통합한 융합의 세계이며 이라는 世界生死涅槃통합한 세계이다.

통합한다는 것은 하나를 만든다는 것을 말하며 모든 것 즉 生死涅槃을 하나로 만든 것이 世界이다.

무엇을 제일 잘 알려면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된 것이 한마음이다.

 

*

18: 對立統合하여 不生不滅構造를 가짐.

六界: 自己와 남의 對立統合하여 單一構造를 가짐.

: 存在變化對立統合하여 不動의 존재로.

: 生死涅槃統合하여 彼岸의 세계로.

*

 

또 하나는 如來菩薩한마음의 투명함이라는 청정한 한마음을 얻었을 때 비로소 부처님의 아는 바로서 알고(佛知) 부처님의 눈으로서 보고(佛見) 잘 파악하고 있다(佛覺). 라고 하는 뜻으로 볼 때 究竟涅槃에 든 8地菩薩 이상이 되어야 비로소 부처님이 알고 보며 수기를 준다는 뜻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究竟涅槃을 얻어야 8地菩薩이며 究竟涅槃의 내용을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 단계에서는 究竟涅槃의 내용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고 가지고 가므로 서 究竟涅槃의 내용 즉 空性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내용의 일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佛覺[잘 파악하고 있다 = (原語에는) 如來가 그들에 의해서 깨달아졌다]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위 내용에서 如來가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청정한 한마음을 얻은 菩薩如來가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로서 이는 바로 수기를 준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청정한 한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곧 究竟涅槃證得한 것을 의미하며 究竟涅槃證得에게만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 즉 부처가 될 것을 권고하는 수기를 주기 때문에 究竟涅槃證得하지 못한 菩薩究竟涅槃證得하는데 노력하라고 할 뿐 수기를 주지 않는 것이다.

差異金剛經에서는 如來가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함부 經典에서도 經典比丘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는 2가지 경우로서 阿羅漢 중에서도 大阿羅漢 緣覺(12緣起에 의한 確認)證得 阿羅漢80명의 大阿羅漢의 이름과 크게 잘못생각 하므로 서 부처님에게 꾸중을 듣고 그로인하여 뗏목의 비유와 같은 經說하게끔 한 比丘에 대하여 그 이름이 經典에 나타나게끔 이름을 불러주어 經典에 기록하게 하고 있다.

AA)를 참조해 보자

 

AA) [大品般若 聞持品]에는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신다. “만약 보살이 아직 法位의 가운데 들지 못했다면 여러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기별을 주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다가 설해지는 것을 들을 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가운데는 내 이름이 없어 마음이 청정하지 않다.’라고 한다. 이것은 보살에게 나타난 악마의 일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에 수보리가 말씀드린다. “어떤 인연으로 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가운데에 이 보살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까.”

 

다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아직 반드시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지 못한 보살에게는 모든 부처님이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法位 菩薩은 화엄 십지로 하면 제8지 부동지보살 정도로 여겨진다.)

 

이 부동지 보살에 대해 화엄경에서는

잘했도다. 선남자여. (=無生法忍, anutpattika-ksanti)은 제일에 부처님의 법을 순종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선남자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 가지 힘과 두려움이 없음과 열여덟 가지 함께 하지 않는 부처님의 은 그대가 아직 얻지 못하였으니 그대는 이 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할 것이요 이 의 문에서 방일하지 말라.”[화엄 십지 중 제8지 부동지의 초입 부]

 

AA)에 보면 大品般若 聞持品에 나오는 말로서 法位보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法位는 곧 究竟涅槃을 말하는 것으로서 청정한 한마음을 얻은 것이나 法位를 얻는다는 것이나 같은 뜻이다.

 

또 같은 품에 수기를 받지 못한 보살에게는 모든 부처님이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옴으로서 반야부 經典에서도 究竟涅槃證得하지 못한 菩薩經典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품에서 그 다음 대목에 잘했도다. 선남자여 이 ( =無生法忍, anutpattika -ksanti)은 제일에 부처님의 을 순종하는 것이니라.”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법을 순종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순종이란 을 번역한 말로서 ksantikhanati(용납하다)에서 나온 말로서 순종하다認識論에서는 (안다)라는 말을 쓰기 직전의 단계에 대하여 이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서 이란 원래 (참다)라는 뜻인데 이것을 認識論에서는 단계를 말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처님 법을 완전히 안 것은 아니고 완전히 알았다 함은 부처를 이룬 것이므로를 쓰지만 완전히 안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 법을 덜 안 수행자 중에서는 제일위에 있을 정도로 아주 조금 덜 안 것을 말한다.

 

凡夫단계에서부터 치면 음향(四諦法을 깨달은 修行者) 유순(연기법을 깨달은 修行者) 無生法忍(구경열반知的으로 표현한 것이 無生法이며 반야바라밀다를 깨달은 修行者)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단계 = 부처)의 순서로 올라가는 것이므로 無生法忍이란 無生法 얻었지만 를 얻기 직전의 단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認識論에서는 단계로 쓰는가? 이는 조금만 참으면 의 단계를 얻을 수 있으므로 그 단계를 이라고 하는 것 같다.

같은 내용으로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直前의 단계를 법을 순종한다는 말로서 표시하고 있으며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初入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며 그래야 수기를 준다는 말과 상통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本文에서 이라는 생각. 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이란 無爲法을 말하는 것이며 非法有爲法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經典에서 인것이아닌 것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므로 그 中間이 없게 된다.

만일 이것을 非法으로 나누면 非法도 아니고 非法도 아닌 것으로 나뉘어 질수 있으므로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반드시 인 것과 아닌 것으로 나누는데 이때 인 것無爲法을 말하며 아닌 것有爲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이며 무엇이 非法인가?

阿含의 단계에서는 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修行에 도움이 되는 을 말하며 非法이란 修行障碍가 되는 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길 佛法laksana無常. . 無我 이다. 그러므로 佛法이 모습을 나타낼 때는 無常 苦 無我로 나타낸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을 보는 방법은 항상 有爲 無爲로 보아야 한다.

 

修行에 도움이 되는 이란 原因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며 그 結果無爲法이 되는 것이며 修行障碍가 되는 原因의 입장에서 본 有爲法인 것이며 그 結果 輪回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金剛經의 제6淨信希有分에서는 漢譯經典問題點을 살펴보기 위해서 산스크리트본의 해석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산스크리트본의

왜냐하면 수부티야, 이 보살 마하살들에게는 자아라는 생각이 전개되지 않으며 또 유정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으며 영혼이라는 생각도 개인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부티야, 또 보살 마하살에게는 법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으며 법이 아니라는 생각도 그와 같다. 나아가 그들에게는 생각이라든가 생각이 아니라든가 하는 것도 전개되지 않는다.

의 부분을 漢譯經典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로서 우리말로 번역하면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은 다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으며 법 아니라는 상도 또한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이 부분도 원전에는 없는 내용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본문의 원전참조)

왜냐하면 만일 진리라는 생각(法想)을 취하여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걸리게 되며 만약 법 아닌 상(非法想)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응당 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아님(非法)도 취하지 말 것이다.”

 

라고 번역되어 그 내용을 알기가 어렵게 되어있으며 심지어는 생각이라든가 생각이 아니라든가 하는 것도 전개되지 않는다. 라는 부분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이 부분은 청정한 한마음을 얻은 보살마하살은 無量福德을 쌓고 감싸 안을 것이라는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서 본래 부처님의 설법은 그냥 들어도 그 순서나 체계는 그대로 전달된다. 단지 그 내용은 알 수 없어도 그 체계나 순서는 그대로 느껴 져야하는데 漢譯經典은 그렇지 못하다.

 

산스크리트 본을 번역한 것은

왜냐하면 수부티야, 이 보살 마하살들에게는 자아라는 생각이 전개되지 않으며 또 유정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으며 영혼이라는 생각도 개인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부티야, 또 보살 마하살에게는 법42)이라는 생각도 전개되지 않으며 법이 아니라는43) 생각도 그와 같다. 나아가 그들에게는 생각이라든가 생각이 아니라든가 하는 것44)도 전개되지 않는다.”

 

로서 축약하면

왜냐하면 청정한 한마음을 얻은 보살마하살이 無量福德을 얻게 되는 원인은 그 보살마하살들에게는 我想 人想 衆生想 壽者想이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보살 마하살에게는 法想도 전개되지 않으며 非法想도 그와 같다. 나아가 그들에게는 非想도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축약할 수 있으며 여기서 法想이란 無爲法을 말하며 非法이란 有爲法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살마하살은 四想은 물론 法想非法想도 전개되지 않으며 나아가 非想도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無量福德을 쌓고 감싸 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다음 단계로 執着에 대한 대비를 설명하고 있다. 我想 人想 衆生想 壽者想我執 人執 衆生執 壽者執으로 넘어가고 法相法執으로 非法相非法執으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어떤 展開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 것이다.

 

여기서 法想이란 無爲法이 영원하다고 보는 생각을 말하며 執着이란 최종단계로 먼저 邪見이 발생하면 이것이 習慣 惡習이 되어 드디어 執着이 되는 것으로서 이처럼 부처님은 에 대하여 그리고 執着에 대하여 구분하여 단계별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왜냐하면 수부티야, 만일 그 보살 마하살들에게 법이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자아에 대한 집착, 유정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인에 대한 집착도 있게 될 것이다. 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자아에 대한 집착, 유정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인에 대한 집착이 있게 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법과 법 아닌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뗏목으로 비유되는 법문을 알고 있는 사람은 법45)조차 버려야 한다. 하물며 법 아닌 것46)이야 라고 이미 말하였다.”

 

라고 하면서 제6淨信希有分에서는 執着을 들어 그 理由를 설명하면서 執着에 대하여 묘한 對比를 이루게 하고 있는 것이다.

邪見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邪見習慣이 된 것이 惡習으로서 惡習이 굳어진 것이 바로 執着이므로 아닌 것에 대한 執着이 되어 감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金剛經 내용은 처음 2先現起請分에서 수보리가 질문하기를 菩薩乘에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어떻게 서야 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것인가를 질문하자 부처님은 무수한 有情滅度 시켰다 하더라도 실은 어떠한 有情般涅槃한 자는 없다. 라는 데서 시점을 찾아야함을 설하였다.

 

이것은 질문과 답이 잘 어울린 답이 된다. 無餘涅槃界에 든 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無餘涅槃이라도 끝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阿含涅槃無餘涅槃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남은 것(微細煩惱)이 있기 때문에 無餘涅槃이 아니다.

또한 有情이라는 생각4이 없기 때문에 有情이라고 부를 수 없다. 나도 있고 有情도 있어야 有情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두 개가 다 없으니 有情도 없다는 結論이다. 이것이 3 大乘正宗分이다. 그러나 이것도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진짜 無餘涅槃을 찾아가야 하니 이것이 4 妙行無住分이다. 究竟涅槃모습()에 대한 생각에 조차 머물지 않고 좋은 일을 하라고 설하시면서 그러면 無量福德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설하신다.

 

그리고 5 如理實見分에 와서는 모습모습으로만 바뀐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모습모습 아닌 것으로도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如來를 볼 수 있다고 하신다. 이것이 laksana조차도 laksana 아니라고 볼 때 如來를 본다는 설명을 하신 것이다.

 

nimita는 껍데기는 껍데기로서 영원하다는 생각을 nimita로서 일종이 오염된 생각이라고 말하지만 laksana는 이 껍데기는 바로 다음에 다른 껍데기로 바뀐다고 보는 것으로서 이 laksana는 오염되지 않은 비교적 순수한 이지만 이 laksana가 영원히 laksana로 있다고 보면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laksanalaksana아닌 것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생각이며 터득하기 어려운 생각이며 진실하다고 보기 매우 어려운 생각이다.

 

우리가 모습에 대한 생각에 조차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할 때의 모습은 nimita이다. nimita는 이 모습은 영원히 이 모습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만 laksana는 이 모습은 지금 잠시이고 곧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laksanalaksana가 아니라고 할 때 如來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우리가 깊이 이해해야할 부분이다.

 

그리하여 6 淨信希有分에 와서는 이러한 생각은 매우 두려운 생각으로서 500년 후에 이런 생각을 진실한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고 수보리는 질문을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아득한 옛 부터 여러 부처님 앞에서 善根을 지은 사람은 진실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답하신다. 無量福德結果로서의 이야기이며 善根이란 原因으로서의 이야기이며 善根을 짓는다는 것은 戒律을 지키고 智慧를 갖춘 를 말하는 것이다.

 

laksanalaksana가 아니라고 보면서 善根을 쌓은 이런 사람은 진실하다는 생각을 일으킬 것이며 이런 사람은 佛知로 보고 佛知로 알며 佛知로 깨닫는다고 까지 말하면서 이런 사람은 청정한 한마음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淸淨한 한마음은 바로 究竟涅槃을 말하는 것이다. 청정한 한마음을 얻는 그런 사람은 無量福德의 주인공이 된다고 까지 말씀하신다.

 

왜 그러냐하면 그런 보살에게는 4이 굴러다니지 않으며 또 法想도 굴러다니지 않으며 非法想도 굴러다니지 않으며 심지어는 非想이라는 것도 굴러다니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結論的으로 이러한 이라는 것은 결국 執着이니 이 執着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므로 이 執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에 대한 執着非法에 대한 執着이 없는 境地究竟涅槃이다. 왜냐하면 執着이 있기 때문이며 이 버릇이 된 것이 執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이 아닌 것은 무엇이며 뗏목의 比喩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結論的으로 이야기 하자면 에 반대가 非想이므로 無明하는 것이 이듯이 하는 것은 般若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라는 것은 (sanjna)이며 이 아닌 것(非想)般若(prajna)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뗏목의 譬喩(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譬喩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3단계로 되어있다.

 

1) 초기불교의 단계:

: 修行에 도움이 되는 법을 이라고 함.

非法: 修行障碍가 되는 법을 非法이라고 함.

 

2) 반야부 경전의 단계:

: 無爲法을 말함.

非法 : 有爲法을 말함.

 

3) 金剛經의 단계:

: 非想(般若, prajna)을 말함.

非法 : (sanjna)을 말함.

 

따라서 結論的으로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청정한 한마음을 얻은 보살마하살이 無量福德을 얻게 되는 原因은 그 보살 마하살들에게는 我想 人想 衆生想 壽者想이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부티야, 또 그 보살 마하살에게는 法想[無爲法]도 전개되지 않으며 非法想[有爲法]도 그와 같다. 나아가 그들에게는 非想(般若)도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만일 보살마하살들에게 (無爲法般若)이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自我에 대한 執着, 有情에 대한 執着, 靈魂에 대한 執着, 個人에 대한 執着도 있게 될 것이다.

이 아니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自我에 대한 執着, 有情에 대한 執着, 靈魂에 대한 執着, 個人에 대한 執着이 있게 될 것이다. 왜 그러한가하면 보살 마하살은 (無爲法般若)아닌 것[有爲法 (,sanjna)]執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如來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뗏목으로 비유되는 법문을 알고 있는 사람은 45)조차 버려야 한다. 하물며 법 아닌 것46)이야 라고 이미 말하였다.”

 

그러므로 뗏목에 譬喩하면서 無爲法도 버려야하고 심지어는 般若도 버려야하거늘 有爲法이랴!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後半部 無爲法般若 모두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선언하신다. 나의 은 건너가게 하는 이지 지니게 하는 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뗏목에 비유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조차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란 강을 건너기 위한 方便이지 지니고 있어야할 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기조에서 非想 般若반야바라밀다에 도달하기 위한 方便이므로 청정한 한마음을 얻은 후에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無量福德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無量福德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授記를 줌을 뜻하기도 한다. 바로 청정한 한마음을 얻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시작이며 이제 조금 더 노력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으니 精進하라는 뜻이다.

 

더구나 뗏목의 비유를 말씀하시기전에 물뱀(alagadda)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나의 은 물뱀과 같아서 잡을 때 뱀 잡는 막대로 목을 누른 후 독니(毒齒)가 있는 머리 부분을 정확히 잡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뱀에 물려서 죽게 된다.

뗏목이란 方便이며 接近手段이다. 따라서 佛敎를 공부하는 데는 순서와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順序節次를 무시하면 물뱀에 물려서 죽게 된다. 뱀 중에서 이 가장 강한 것이 바다뱀이다.

물뱀이라 함은 바로 바다뱀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 바다뱀 중에는 神經을 마비시키는 出血 毒이 있는데 神經을 마비시키는 은 그 苦痛이 크지 않는데 비해서 出血 毒은 핏줄이 터져서 썩어가며 죽는 무서운 苦痛을 주는 이며 물뱀이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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