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文(제10장 莊嚴淨土分)
55)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곁에서 어떠한 법을 얻은 것56)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부티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곁에서 여래께서 얻은 법은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만일 어떤 보살이 ‘나는 국토장엄57)을 성취하리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국토장엄 국토 장엄’이라는 것. 그것은 장엄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한다. 그러므로 국토장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무엇엔가 머물러 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색에 머물러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머물러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수부티야,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갖추어진 몸이며 거대한 몸이 있으니 마치 수메루 산과 같은 크기의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는 거대하다고 하겠느냐.”
수부티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거대합니다. 선서시여, 그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58)는 거대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라고 하지만 그것은 存在가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라고 부를 수는 있습니다. 실로 세존이시여 그 存在는 存在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55) [제 10 장 장엄 정토분]
56) 아함부의 차원에서 보면 授記를 받는다.
57) 앞서 언급한 “수기 받음”과 이곳에서 언급되는 “국토장엄”이 원만히 성취되어 “成佛”이라는 결과를 불러들인다고 일반적으로 여기고 있거니와 이 생각을 허물고 있다.
58) atma-bhavo. 말 그대로는 “自我로 되는 것 또는 自我가 된 것” 우리가 自我라고 부르는 것은 自我가 아니라 自我로 여겨지는 것이므로 부처님은 아예 “自我로 여겨지는 것”이라고 우리를 부른다.
제10장 장엄정토분은 중간에 내용이 생략되어있어 알아야할 내용이 여러 가지이므로 부분적으로 끊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本文
55)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곁에서 어떠한 법을 얻은 것56)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부티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곁에서 여래께서 얻은 법은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제10莊嚴淨土分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練燈佛이다. 그런데 이 練燈佛에 대한 기술을 살펴보면 아함부와 반야부와 법화경과 정토경. 화엄경 등에 등장하는 練燈佛의 내용이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除外하면 각 經典에 가장 많이 登場하고 있는 부처님이 바로 이 練燈佛인 것이다. 그런데 이 練燈佛의 원어가 Dipankara 로서 dipan은 등불이라는 뜻이고 kara는 만드는 者로서 등불을 만드는 者이므로 등불은 練燈佛에 의해서 授記된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練燈佛의 이름을 지으신 부처님이 석가모니부처님이므로 석가모니부처님 자신이 등불로 불리기를 은연중 願하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 練燈佛 辭를 보면 書頭에 “네 번의 無量劫과 십만劫 前의 일이었다. 라고 적고 있는데 네 번의 無量劫이란 印度神話에 이전 세상은 적어도 4번의 유가(세상이 한 번의 성주괴공의 단계를 거친 단위)는 거쳤을 것이다.”라는 印度의 哲學的인 양상에서 온 것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부처님 법에는 반드시 4 아승지 십만劫이라는 꼬리가 붙는다는 차이를 볼 때 이 數字에 어떤 뜻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따라서 練燈佛이 어떤 부처님인가 하는 것을 다음 문건을 참조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練燈佛 (燈光佛. 錠光佛. 定光佛; Dipankara) (참조 문건)
1 -1. 불종성경 연등불 사1)
네 번의 無量劫과 십만劫 前이 일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僧團의 주인이며 世間의 指導者이신 練燈佛을 모신 뒤 그분께 귀의 했다. 사람들이 귀의할 때 如來는 모든 것을 분명히 하셨다.
모두에게 五戒와 十善業을 가르치셨다. 沙門의 道理와 네 가지 最上의 結果(四諦說)를 說하셨다. 법을 모르는 자들에게 사무외(四無畏)를 제공하셨다. 사람들 중 황소 같은 그 분은 모두에게 여덟 가지 출중한 禪定을 설하셨다. 세 가지 밝힘(三明)과 여섯 가지 神通도 알려 주셨다.
위대한 聖者는 그런 방식으로 군중들을 하교하셨다. 그리하여 世間의 指導者가 說해주신 가르침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큰 턱과 황소의 어깨를 지닌 練燈佛의 이름만으로 많은 군중들은 苦海를 건넜고 惡趣에서 解脫했다. 깨달을 만한 사람을 보게 되면 비록 10만 요자나의 먼 거리에 있어도 한 순간에 달려가 위대한 聖者는 그를 깨닫게 하셨다.
첫 번째 현관(특별법회)에서 부처님은 10억 명을, 두 번째 현관에서 주인은 9억 명을 깨닫게 하셨다. 세 번째 현관에서 부처님은 天神의 宮殿에서 法을 說해 9천억 명을 깨닫게 하셨다.
이렇게 스승 練燈佛께서는 세 번의 모임이 있었다. 그리고 1조의 衆生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회상이 있었다.
다시 승리자가 나라다山의 정상에서 初禪에 드셨을 때 逆流하는 煩惱를 다하고 때를 제거한 10억 명이 모였다. 위대한 英雄 위대한 聖者는 수다싸나 바위山에서 9천억 명을 위해 자자를 베푸셨다.
이십만 명을 위해서도 법의 현관이 있었고 한명 두 명을 위해서도 법의 현관이 있었으니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練燈佛의 맑고 깨끗한 가르침은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받들게 되었고 번창하고 가득 차게 되었다. 여섯 神通과 위대한 神足을 얻은 40만 명이 世間을 아는 練燈佛을 언제나 시종했다.
그때 누구든 사람 몸을 버리는 자로서 마음이 아직 窮極에 도달하지 못하고 더 배울 것이 남은 자라면 그는 비난받았다. 練燈佛처럼 역류하는 煩惱를 다하고 더러운 때를 除去한 阿羅漢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활짝 피게 했으니 그분의 말씀은 언제나 빛을 발했다.
그러한 스승 練燈佛이 탄생한 王都는 랑마와티 市였고 아버지는 수데와. 어머니는 수메다데위. 스스로는 王族이었다. 1만년을 집에서 살되 最上의 宮殿 세 곳에서 지냈다. 宮殿의 이름은 백조의 宮殿. 백로의 宮殿. 공작의 宮殿이었다. 3만년을 잘 단장된 여인들과 지냈는데 그 중 아내의 이름은 파두마였다. 그리고 아들 이름은 우사바칸다였다.
네 가지 모습을 보고는 코끼리 수레를 타고 출가하셨다. 그리고 勝利者는 꼭 열 달 동안을 노력 精進했고 精進修行을 마친 뒤 마침내 聖者는 마음으로 깨달으셨다.
고요하며 위대한 聖者 練燈佛은 부라만 神의 요청을 받으셨다.(인도 최고의 神이 진리 앞에 머리를 숙인 것을 뜻함) 위대한 영웅은 난다라마의 시리가라에서 법의 바퀴를 굴리셨고 시리사 나무 아래에 앉아 外道들을 물리치셨다.
練燈佛께는 수망갈라와 티싸가 최고의 比丘였고 사가타가 치고의 侍者였다. 난다와 수난다가 최고의 比丘尼였고 보리수 이름은 핍팔라였다. 타푸싸와 발리카가 최고의 信者였고 시티마와 코나가 최고의 女信者였다.
위대한 聖者 練燈佛의 키는 80 완 척 이었으니 활짝 핀 디파 나무 또는 살라 왕 나무처럼 빛나셨다. 위대한 先人 연등불의 壽命은 10만년이었으니 그 세월 동안 많은 群衆을 濟度하셨다.
바른 法을 가르쳐 많은 사람을 濟度하신 뒤 比丘들을 앞에 두고 涅槃하셨으니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그 융성함 그 名聲 그리고 발바닥의 보배바퀴 무늬까지 모두 사라졌고 모든 結合作用(行;sankara)이 조용해졌다. 勝利者이며 스승인 練燈佛은 나다라마에서 涅槃에 드셨다. 그곳에 勝利者를 위한 높이 60요자나의 탑이 세워졌다.
1) <<불종성경(佛種性經. Buddha-vamsa)>> 연등불편[Khud.N. 제7권. p.319~ 322(N.D.P.); P.T.S판 불종성경 p.17 ~18]
2) <<불종성경(Buddha-vamsa)>>의 <수메다의 희구편> [Khud.N. 제7권 p.305 ~319(N,D,P,);P.T.S.판 불종성경 p.6 ~17.]
1 -2. 불종성경 수메다 희구 사2)
練燈佛이 敎化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그때 아름답고 유쾌한 都市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아마라와타였다. 열 가지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飮食이 풍족했다. 코끼리소리. 말소리. 북소리. 나팔소리. 차 소리. 먹 으시오. 마 시오 하는 소리 그리고 음식 때문에 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도시는 모든 것이 具備되어 있었고 모든 職業이 갖추어져 있었다. 일곱 보배가 가득했고 여러 사람들이 무리지어서 福된 일을 하며 살았으니 마치 天神의 都市처럼 번성했다.
아마라와티 市에 이름이 수메다(善慧;화엄경의 善慧童子가 나온다. 제9지보살이 수메다임)인 바라문이 살고 있었으니 數億의 돈을 쌓아 놓았고 財産과 곡식도 매우 많았다. 연구에 종사했으며 呪文을 지녔으며 세 가지 베다에 정통했으며 觀相學과 歷史學과 바른 法에 통달했다. 수메다는 그때 홀로 고요히 앉아 이와 같이 생각했다.
“再生이란 실로 괴로움이다. 肉身의 부서짐도 역시 괴로움이다. 누구나 와 같이 태어난 자로서 나는 반드시 늙고 병들 것이다. 나는 이제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안온한 涅槃을 찾아야겠다.
죽은 것으로 가득 찬 썩은 이 몸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고 願하는 것도 없이 나아가겠다. 그러한 길은 있다. 있어야만 한다. 없을 수가 없다. 再生으로 귀결되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그 길을 찾아야겠다.
괴로움이 存在하면 즐거움 역시 存在한다. 그와 같이 再生으로 귀결되는 것이 存在한다면 再生을 차단하게 되는 것도 기대할 만하다. 뜨거움이 存在하면 차가움 역시 달리 存在한다.
그와 같이 세 가지 불이 存在한다면 그 불이 불어 꺼진 涅槃도 기대할 만하다. 惡이 存在하면 善도 또한 存在한다. 그와 같이 탄생이 存在한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도 기대할 만하다.”
“분뇨 속에 빠진 者가 물로 가득 찬 못을 보고도 그 못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못의 잘못이 아니다. 그와 같이 煩惱를 씻어 줄 佛事의 못이 있는데도 그 못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佛事의 못의 잘못이 아니다.
적들에 의해 포위당한 者가 나아갈 길을 발견했는데 그 길로 도망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길의 잘못이 아니다. 그와 같이 煩惱에 의해 포위당한 자가 안온한 길을 발견했는데 그 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안온한 길의 잘못이 아니다.
病에 걸린 사람이 醫師를 발견했는데도 그 病의 치유를 醫師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醫師의 잘못이 아니다. 그와 같이 煩惱의 病에 의해 괴로워하고 煩悶하는 자가 스승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指導者의 잘못이 아니다.”
“자신의 목에 시체가 걸려 있다면 그것을 혐오하여 벗어버리고 갈 것이다. 그러면 그는 즐겁고 自由롭고 自在로 울 수 있다. 그와 같이 여러 가지 죽은 것이 모여 있는 이 썩은 몸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이 나아가겠다.
男女가 쓰레기장에 오물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이 원하는 것도 없이 나아간다. 그와 같이 여러 가지 죽은 것을 가득 찬 이 몸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이 원하는 것도 없이 나아간다.
그와 같이 여러 가지 죽은 것으로 가득 찬 이 몸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이 願하는 것도 없이 나아가겠다. 오래되고 파손되어 물이 새는 배를 배주인은 바라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이 버리고 간다. 마치 그 늙은 배의 주인과 같이 아홉 구멍으로 점액이 흐르는 이 몸을 나는 버리고 가겠다.
물건을 휴대한 사람이 도적과 함께 길을 가게 되면 스스로 물건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도적을 보내버리고 나아간다. 그와 같이 이 몸은 큰 도적과 같은 것이어서 善함을 잃을까 두렵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몸을 버리고 가야겠다.”
수메다는 이상과 같이 생각하여 數百億의 財産을 緣故가 있는 者 및 緣故가 없는 자에게 주어버리고 雪山으로 들어갔다. 雪山 가까이에 담미카라는 山이 있었다. 수메다는 그곳에 庵子를 잘 지었으니 나무 잎으로 집을 잘 꾸몄다.
그곳에서 다섯 가지 허물이 제거되고 여덟 가지 功德이 갖추어진 경행處를 시설했다. 그리하여 神通의 힘을 획득 했다. 아울러 수메다는 아홉 가지 허물이 있는 세속의 옷을 버리고 열두 가지 功德을 갖춘 나무껍질 옷을 입었다.
그리고 다시 여덟 가지 허물로 가득 찬 나뭇잎 집을 버리고 열 가지 功德을 갖춘 나무뿌리 위로 갔다. 씨 뿌려 길러서 얻은 곡식은 남김없이 버리고 여러 가지 功德을 갖춘 나무열매만을 취했다. 그곳에서 앉고 서고 경행하며 노력 精進하던 수메다는 7일이 지나지 않아 神通의 힘을 얻었다.
수메다가 完成에 이르고 가르침에서 자재하게 되었을 때 勝利者이며 世上의 지도자인 練燈佛이 출현하셨다. 再生하고 誕生하고 깨닫고 法을 說하시는 데도 禪定을 즐기며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네 가지 모습을 보지 못했다. 변방의 지역으로 練燈佛을 초청하여 놓고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때 수메다는 庵子에서 나와서 나무껍질 옷을 벗어 든 채 空中으로 날아갔다. 감격하고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고서 空中에서 내려와 물었다.
“많은 군중들이 만족하고 기뻐하며 감격하고 있소. 누구를 위하여 길을 청소하며 도로를 고르고 있으시오.”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답했다.
“더 높은 이가 없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었소. 勝利者이시며 世上의 指導者이신 練燈佛께서 세상에 出現하시었소. 그분을 위하여 길을 청소하며 도로를 고르고 있는 것이요.”
부처님이라는 말을 듣자 수메다 에게는 곧바로 기쁨이 일어났다. 부처님. 부처님이라고 되 뇌이면서 나는 安定感을 느꼈다. 그곳에 선 채 滿足感과 敬畏感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지금 씨앗을 심자. 기회를 헛되이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 “만일 여러분이 부처님을 위해 청소한다면 나에게도 작은 장소를 베풀어 주시오. 나 또한 길을 청소하며 도로를 고르고자 하오.”
그러자 그들은 청소하고 고를 만한 장소를 베풀었다. 부처님.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수메다는 길을 고르며 청소했다. 청소를 아직 끝내지도 못했는데 위대한 聖者 練燈佛이 수메다가 청소하던 길에 도달하셨다. 勝利者는 여섯 神通을 갖추고 역류하는 煩惱를 다하고 때를 제거한 40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오셨다.
많은 사람들이 마중했고 많은 북들을 쳐 울렸다. 사람과 天神들이 歡喜하며 좋다고 소리 내었다. 天神들은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天神을 보면서 양쪽 모두 合掌을 한 채 부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天神들은 하늘의 樂器를 사람들은 人間의 樂器를 양쪽 모두 演奏하면서 부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虛空에 올라간 天神들이 하늘의 만다라와 꽃과 연꽃과 파리찻타카 꽃을 여러 곳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虛空에 올라간 天神들이 하늘의 찬다나 나무 가루와 온통 고상한 香을 여러 곳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참파카 나무와 사랄라 나무와 니파 나무와 나가 나무와 푼나가 나무와 케타카 꽃을 여러 곳으로 던지고 있었다.
수메다는 그곳에 머리를 풀었으며 나무껍질 옷과 가죽을 펼쳤다. 그리고 엎드려 누워 생각했다. “부처님은 비구들과 함께 저를 밟고 가소서. 진흙일랑 밟지 마소서. 그리하여 저를 이익 되게 하소서.” 땅위에 엎어져 있던 수메다 에게는 다음의 생각이 일어났다.
“오늘 나는 기원한다. 나의 煩惱가 다 타서 없어지기를. 이 상태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여기서 달리 法을 證得하여 그것으로 모든 것에 대한 앎을 얻어서 天神을 포함한 세계에서 부처님이 되기를 기원한다. 나 혼자만을 겨우 건질 수 있는 인간의 힘을 보인다 한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앎을 얻어서 天神을 포함한 世界를 건지기를 기원한다. 가장 놓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러한 나의 결심에 의하여 모든 것에 대한 앎을 얻어서 많은 사람들을 건지기를 祈願한다.
輪回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再生으로 귀결되는 세 가지를 燒滅시키어 법의 배에 올라타서 天神을 포함한 世界를 건지기를 기원한다.”
여덟 조건이 갖추어져야 부처님이 되려는 결심이 완성된다. 人間이어야 하고 男性이어야 하고 原因을 갖추어야 하고 스승을 뵈어야 하고 出家하여야 하고 功德을 갖추어야 하고 奉事를 해야 하고 欲求를 지녀야 한다.
세상을 알고 供養 받을 자격을 갖춘 練燈佛은 수메다의 머리 옆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극도의 苦行을 실천한 머리 묶은 이 苦行者를 보아라. 한량없는 劫이 지난 뒤에 세상에서 부처님이 될 것이다. 그 부처님은 카필라라고 하는 즐거운 도시를 벗어나서 열심히 노력하고 하기 힘든 일을 실천할 것이다. 그 부처님은 아자팔라 나무의 뿌리 위에 앉아 그곳에서 우유죽을 공양 받은 뒤 네란자라 강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승리자는 네란자라 강에서 올라와서 우유죽을 먹고는 준비되어진 고귀한 길을 걸어서 보리수를 향해 갈 것이다. 더 높은 이가 없고 크나큰 명성을 지닌 그 부처님은 깨달음의 도량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행한 뒤 아쌋타 나무의 뿌리 위에서 깨달을 것이다.
生母의 이름은 마야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숫도다나이고 그 자신은 고타마라고 불릴 것이다. 逆流하는 煩惱를 다했고 貪着을 제거했고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렸고 禪定을 닦은 콜리타와 우파티싸가 최고의 比丘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부처님의 보리수는 아쌋타라고 불릴 것이다. 칫타와 핫탈라와카가 최고의 信者로서 부처님을 모실 것이며 웃타라와 난다마타가 최고의 女信者로서 부처님을 모실 것이다.”
비길 데 없는 큰 修行者이신 練燈佛의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 人間과 天神들은 歡喜하면서 이 사람은 실로 부처님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天神들을 포함한 一萬 世界의 사람들이 歡喜하고 박수를 치며 즐거이 웃으며 合掌하고 예배하면서 말했다.
“지금 세상의 주인이신 練燈佛의 가르침에서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未來世에는 이 고타마 부처님과 함께 하기를 祈願한다. 강을 건너는 사람이 만일 맞은편의 나루터를 보지 못해 실패한다면 아래쪽의 나루터를 사용하여 큰 강을 건넌다. 그와 같이 우리 모두는 지금의 勝利者이신 練燈佛을 놓치게 된다면 未來世에는 이 고타마 부처님과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세상을 알고 供養 받을 자격을 갖춘 練燈佛은 수메다의 行爲를 칭찬한 뒤 오른 발을 들고 떠나가셨다. 그곳에 있던 勝利者의 아들들은 수메다에게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행하고 떠나갔다. 天神과 人間과 阿修羅들도 공손히 절하고 물러갔다.
세상의 지도자와 그분의 교단이 시선에서 멀어졌을 때 수메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맺고 앉았다. 매우 즐겁고 매우 기뻤으며 喜悅로 充滿한 채 다리를 맺고 앉았다. 다리를 맺고 앉은 채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禪定에임하여 자재로 움을 얻었고 神通에 있어서 건너편에 이르렀다. 일천의 세계에서 나와 같은 修行者는 없다. 神秘한 法에서 나와 同等한 자는 없다.”
수메다가 이렇게 즐거운 일을 획득한 채 다리를 맺고 앉아 있을 때 一萬의 世界에 居住하는 者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불본행집경 제2 발심공양품 3
阿難。時彼比丘過於百千無量無數阿僧紙劫。復値一佛出現於世。號曰能作光明如來。時彼比丘供養於佛。修持禁戒。梵行淸淨。出家如前。復發此心。願我未來。藷此功德。生生世世。莫生惡道。時作光佛知彼比丘心所願已。卽與授記。語言。仁者。汝於來世。過於百千無量無數阿僧紙劫。當得作佛多陀阿伽度阿羅詞三藐三佛陀。號曰然燈。彼然燈佛作菩薩時。於末後身。生兜率天。從兜率天。降神來下。從右脇入。託於母胎。住居十月。滿十月已。一心正念。欲生之時。放於光明。照彼佛刹。皆悉遍滿。
소품반야 제2권
佛告諸天子。如是如是。昔我於衆華城燃燈佛所不離般若波羅蜜行時燃燈佛記我。於來世過阿僧之劫。當得作佛號釋迦牟尼如來應供正遍知明行足善逝世間解無上士調御丈夫天人師佛世尊。諸天子白佛言。希有世尊。諸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能攝取薩婆若。
법화경 방편품
是諸八王子 妙光所開化/ 堅固無上道 當見無數佛/ 供養諸佛已 隨順行大道/ 相繼得成佛 轉次而記/ 最後天中天 號曰燃燈佛/ 諸仙之導師 度脫無量衆/ 是妙光(Varaprabha)法師 時有一弟子/ 心常愧懈怠 貪著於名利/ 求名利無厭 多遊族姓家/ 棄捨所習誦 廢忘不通利/ 以是因緣故 號之爲求名/ 亦行衆善業 得見無數佛/ 供養於諸佛 隨順行大道/ 具六波羅蜜 今見釋師子/ 其後當作佛 號名曰彌勒/ 廣度諸衆生 其數無有量/ 彼佛滅度後 懈怠者汝是/ 妙光法師者 今則我身是/
법화경 여래수량품 16
爾時佛告大菩薩衆。諸善男子。今當分明宣語汝等。時諸世界。若著微塵及不著者3)。盡以爲塵一塵一劫。我成佛已來。復過於此百千萬億那由他阿僧紙劫。自從是來。我常在此娑婆世界說法敎化。亦於餘處百千萬億那由他阿僧紙國導利衆生。諸善男子。於是中間。我說燃燈佛等。又復言其入於涅槃。如是皆以方便分別。
3) 예를 들어보면 즉 양가의 아들들이여 오십 천만 백만 십만이라고 하는 세계에 있는 대지의 미세한 입자수와 같은 것이다. 자 어떤 사람이 이 세계에 태어나 그 미세한 입자 하나를 손에 쥐고 동방에 있어 50(천만, 백만)십만 아산케야라고 하는 세계를 넘어가 이 미세한 입자 하나를 버린다고 하자.
이 방법에 의해 몇 천만, 백만, 십만 카르파 동안 (계속 버려) 그 사람이 모든 세계를 대지가 없게 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들 대지의 미세한 입자 모두를 이 방법에 의해 또 상술한 방법으로 동방에 버린다고 하자.
그 경우 양가의 아들들이여,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들 세계(의 대지의 입자의 수)를 누가 추측하거나 계산하거나 또는 비교하거나 하는 일이 가능하겠느냐.
상기의 練燈佛에 관련한 법문에 의해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하며 이 이야기가 자신의 過去에 대한 최초의 설명임을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경전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최초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3대목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10業說法門의 因果法인 것이다.
3대목은 다음내용이다.(위의 문건에 있는 수메다의 희구사중 해당내용을 다시 기재한 것임)
“再生이란 실로 괴로움이다. 肉身의 부서짐도 역시 괴로움이다. 누구나 와 같이 태어난 자로서 나는 반드시 늙고 병들 것이다. 나는 이제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안온한 涅槃을 찾아야겠다.
죽은 것으로 가득 찬 썩은 이 몸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고 願하는 것도 없이 나아가겠다. 그러한 길은 있다. 있어야만 한다. 없을 수가 없다. 再生으로 귀결되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그 길을 찾아야겠다.
괴로움이 存在하면 즐거움 역시 存在한다. 그와 같이 再生으로 귀결되는 것이 存在한다면 再生을 차단하게 되는 것도 기대할 만하다. 뜨거움이 存在하면 차가움 역시 달리 存在한다.
그와 같이 세 가지 불이 存在한다면 그 불이 불어 꺼진 涅槃도 기대할 만하다. 惡이 存在하면 善도 또한 存在한다. 그와 같이 탄생이 存在한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도 기대할 만하다.”
“분뇨 속에 빠진 자가 물로 가득 찬 못을 보고도 그 못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못의 잘못이 아니다. 그와 같이 煩惱를 씻어 줄 佛事의 못이 있는데도 그 못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佛事의 못의 잘못이 아니다.
적들에 의해 포위당한 자가 나아갈 길을 발견했는데 그 길로 도망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길의 잘못이 아니다. 그와 같이 煩惱에 의해 포위당한 자가 안온한 길을 발견했는데 그 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안온한 길의 잘못이 아니다.
病에 걸린 사람이 醫師를 발견했는데도 그 病의 치유를 醫師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醫師의 잘못이 아니다. 그와 같이 煩惱의 病에 의해 괴로워하고 煩悶하는 자가 스승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指導者의 잘못이 아니다.”
“자신의 목에 시체가 걸려 있다면 그것을 혐오하여 벗어버리고 갈 것이다. 그러면 그는 즐겁고 자유롭고 자재로 울 수 있다. 그와 같이 여러 가지 죽은 것이 모여 있는 이 썩은 몸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이 나아가겠다.
男女가 쓰레기장에 오물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이 원하는 것도 없이 나아간다. 그와 같이 여러 가지 죽은 것을 가득 찬 이 몸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이 원하는 것도 없이 나아간다.
그와 같이 여러 가지 죽은 것으로 가득 찬 이 몸을 버리고 바라는 것도 없이 願하는 것도 없이 나아가겠다. 오래되고 파손되어 물이 새는 배를 배 주인은 바라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이 버리고 간다. 마치 그 늙은 배의 주인과 같이 아홉 구멍으로 점액이 흐르는 이 몸을 나는 버리고 가겠다.
물건을 휴대한 사람이 도적과 함께 길을 가게 되면 스스로 물건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도적을 보내버리고 나아간다. 그와 같이 이 몸은 큰 도적과 같은 것이어서 善함을 잃을까 두렵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몸을 버리고 가야겠다.”
위에서 보면 수메다는 練燈佛을 만나기 전에 이미 죽음의 극복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괴로움이 있다면 즐거움이 있듯이 재생으로 귀결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을 벗어나는 것도 존재할 것”
이라고 하는 이 思想은 再生에 대한 괴로움이라는 것과 서로 반대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存在한다는 般若部 思想을 이미 터득하고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般若部의 思想은 서로 반대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存在함을 설명한 것으로서 어떻게 서로 반대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균형점을 발견하여 存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점은 오로지 하나뿐인 것이다.
그것은 반야바라밀다로서는 그 무엇과도 대립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論理는 自說經에서 涅槃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비구들아 涅槃이란 어떤 곳인가./ 그곳에는 誕生과 存在와 業과 有爲에 대한 부정이 있다./ 비구들아 탄생과 존재와 업과 유위에 대한 부정이 참으로 없다면/ 탄생과 존재와 업과 유위 그 자체도 없어야 한다./ 비구들아 탄생과 존재와 업과 유위에 대한 부정이 참으로 있기에/ 탄생과 존재와 업과 유위로부터 벗어남이 알려지는 것이다.”
“涅槃이란 어떤 곳인가. 그곳에는 옴이 없다. 감도 머물음도 죽음도 再生도 없고 윤회도 없다. ⋯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이처럼 수메다 희구사에서 이야기 한 내용이 완성된 형태로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論理는 반야부의 論理로서 阿含部는 관계된 것 사이에서의 균형을 이야기 한 것이라면 般若部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 사이에서의 균형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수메다가 이미 이 부분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또 하나 肉身을 혐오하고 버려야함을 강조함으로서 肉身은 동지가 아니고 적임을 일깨우고 있다. 肉身의 선택에 끄달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色界에서 色에 대한 執着[色執]에서 벗어남을 가르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알고 난 다음에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 다시 말하면 판단에서 행동으로의 進行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수메다는 이상과 같이 생각하여 數百億의 財産을 緣故가 있는 者 및 緣故가 없는 자에게 주어버리고 雪山으로 들어갔다. 雪山 가까이에 담미카라는 山이 있었다. 수메다는 그곳에 庵子를 잘 지었으니 나무 잎으로 집을 잘 꾸몄다.
그곳에서 다섯 가지 허물이 제거되고 여덟 가지 功德이 갖추어진 경행處를 시설했다. 그리하여 神通의 힘을 획득 했다. 아울러 수메다는 아홉 가지 허물이 있는 세속의 옷을 버리고 열두 가지 功德을 갖춘 나무껍질 옷을 입었다.
그리고 다시 여덟 가지 허물로 가득 찬 나뭇잎 집을 버리고 열 가지 功德을 갖춘 나무뿌리 위로 갔다. 씨 뿌려 길러서 얻은 곡식은 남김없이 버리고 여러 가지 功德을 갖춘 나무열매만을 취했다. 그곳에서 앉고 서고 경행하며 노력 精進하던 수메다는 7일이 지나지 않아 神通의 힘을 얻었다.
이 대목은 버리는 과정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먼저 큰 것부터 버리기 시작하여 점차로 사소한 것 까지 버리고 있다. 심지어 처음에는 庵子를 지었으나 나중에는 그 집마저 버리고 나무뿌리에 의지하여 지내는 것으로 점차 自然의 삶에 모든 것을 맞기고 있는 현상이 보인다.
그리하여 精進力으로 최대의 힘을 발휘하여(정진력의 비결; 물은 100도에서만 끓는다. 99.99도에서는 뜨거운 물일뿐이다.) 神通力을 얻었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神通力이란 神足通을 비롯하여 天眼通까지를 일컫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수메다가 完成에 이르고 가르침에서 자재하게 되었을 때 勝利者이며 世上의 지도자인 練燈佛이 출현하셨다. 再生하고 誕生하고 깨닫고 法을 說하시는 데도 禪定을 즐기며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네 가지 모습을 보지 못했다. 변방의 지역으로 練燈佛을 초청하여 놓고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때 수메다는 庵子에서 나와서 나무껍질 옷을 벗어 든 채 空中으로 날아갔다. 감격하고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고서 空中에서 내려와 물었다.
“많은 군중들이 만족하고 기뻐하며 감격하고 있소. 누구를 위하여 길을 청소하며 도로를 고르고 있으시오.”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답했다.
“더 높은 이가 없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었소. 勝利者이시며 世上의 指導者이신 練燈佛께서 세상에 出現하시었소. 그분을 위하여 길을 청소하며 도로를 고르고 있는 것이요.”
부처님이라는 말을 듣자 수메다 에게는 곧바로 기쁨이 일어났다. 부처님. 부처님이라고 되 뇌이면서 나는 安定感을 느꼈다. 그곳에 선 채 滿足感과 敬畏感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지금 씨앗을 심자. 기회를 헛되이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 “만일 여러분이 부처님을 위해 청소한다면 나에게도 작은 장소를 베풀어 주시오. 나 또한 길을 청소하며 도로를 고르고자 하오.”
부처님은 前生에도 부처님을 만난 적이 있으나 수기를 받은 사실은 練燈佛과의 만남에서 처음으로 授記를 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왜인가?
그것은 “부처님이라는 말을 듣자 수메다 에게는 곧바로 기쁨이 일어났다.”라는 대목에서 말해주듯이 가슴으로 부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道가 높다고도 하고 因緣이 닿았다고도 하지만 根本的인 것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받아들였을 때 그때가 비로소 授記를 받는 時期인 것이다.
그러면서 수메다는 부처님. 부처님이라고 되 뇌이면서 나는 安定感을 느꼈다. 그곳에 선 채 滿足感과 敬畏感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지금 씨앗을 심자. 기회를 헛되이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 라는 대목에서의 씨앗이란 바로 불종자로서 自身이 씨앗이 되어 심는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또 위에서 “기회를 헛되이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 라는 대목에서 기회란 어떤 때를 이야기 하는데 그 때란 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인가?
때란 因緣이 화합하였을 때를 말하는데 그 因緣이라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因緣이 同時에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때가 지나서 다시 같은 때를 만난다는 것은 不可能 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衆生이 佛種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수메다가 바로 佛種子라는 것이다. 수메다 = 佛種子 라는 것은 수메다가 바로 부처가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佛種子란 授記를 받은 修行者를 지적한 것이다. 그 이유는 수메다 희구사 중 다음文章에서 찾을 수가 있다.
“오늘 나는 祈願한다. 나의 煩惱가 다 타서 없어지기를 . 이 상태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여기서 달리 法을 證得하여 그것으로 모든 것에 대한 앎을 얻어서 天神을 포함한 世界에서 부처님이 되기를 祈願한다. 나 혼자만을 겨우 건질 수 있는 人間의 힘을 보인다한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앎을 얻어서 天神을 포함한 世界를 건지기를 祈願한다.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러한 나의 결심에 의하여 모든 것에 대한 앎을 얻어서 많은 사람들을 건지기를 祈願한다. 輪回의 흐름을 斷切시키고 再生으로 歸結되는 세 가지를 燒滅시키어 法의 배에 올라타서 天神을 포함한 世界를 건지기를 祈願한다.”
이러한 수메다의 祈願이 바로 수메다가 佛種子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수메다의 희구사의 내용을 보면 佛敎最初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大乘佛敎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練燈佛의 예언에서 最高의 比丘2명의 이름과 最高의 比丘尼 2명의 이름과 最高의 信者2명의 이름과 最高의 女信者 2명의 이름이 거론 되므로 서 이미 四部大衆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練燈佛史 나 수메다의 희구사는 불교최초의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阿含에서는 언급되지도 않는 比丘尼나 在家佛子가 언급되고 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내용으로 볼 때 佛敎는 이미 최초부터 大乘佛敎로 發展 進行될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불본행집경 제2 발심공양품3에는 練燈佛에게 授記를 준 부처님의 이름이 作光明 如來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소품반야 2권에서는 練燈佛이 수메다에게 授記를 준 것은 반야바라밀行에서 떠나지 않고 修行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되어있다.
또 法華經 方便品 에서는 妙光부처님시절에 八 王子가 있었는데 順次的으로 모두 成佛하고 마지막 여덟 번째 王子가 成佛하니 그 이름이 練燈佛이라고 하고 있으며
또 妙光法師 에게는 한 弟子가 있었는데 그 육바라밀修行이 늦고 깨달음이 늦어 석가모니불을 본 후 授記를 받아 成佛하니 그 이름이 彌勒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때의 妙光法師가 지금의 석가모니불 自身이라고 하고 있다.
法華經 如來壽量品 16에서는 석가모니불 自身이 成佛한지는 백천만억 아승지겁 이 되었으며 그 이후 백천만억 아승지 國의 衆生들을 說法 敎化하였는데 그중에 練燈佛 등에게 說法하였느니라. 그리고 再次 말하지만 涅槃은 모두 方便이었느니라. 라고 說하고 있음을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제9 一相無住分 까지는 기껏해야 아함경차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반하여 이 莊嚴淨土分에 오면 갑자기 法華 華嚴 淨土 즉 大乘經典 次元으로 갑자기 올라와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위 문장에서 如來가 練燈佛 곁에서 어떠한 法을 얻은 것이 없다는 대목에서 法을 부정하고 나중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반야부 경전의 목적은 반야바라밀다를 成就하는 것이고 이를 成就하고 나서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成就하여야하는데 그 目的地를 부정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반야부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授記의 資格이라는 問題를 제기하고 있다. 아함경 次元에서는 없는 이야기 이다. 또 반야부 경전에서 授記의 資格을 이미 論하였기 때문에 法華部 經典에서는 授記品이 있음에도 授記의 資格에 대하여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기록의 자료는 아래 자료와 같다.
반야부의 授記와 관련된 몇 가지 주요 자료
(1) 소품반야 제2권
佛告諸天子。如是如是。借我於衆華城燃燈佛所不離般若波羅蜜行時燃燈佛記我。於來世過阿僧祗劫。當得作佛號釋迦牟尼如來應供正遍知明行足善逝世間解無上士調御丈夫天人師佛世尊。
위문장에서 不離般若波羅蜜行時의 해석을 아직 반야바라밀다를 이루지 못해서 이를 行하고 있는 중에 燃燈佛로부터 授記를 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는 般若心經에서 보면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라고 하지 不離般若波羅蜜行時라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般若波羅蜜多를 이미 證得한 상태에서 般若波羅蜜多을 떠나지 않고 行할 때라고 理解하여야 한다.
그러고 내가 衆華城의 연등불의 곁에 있을 때 반야바라밀다는 이미 證得한 상태에서 반야바라밀다를 떠나지 않고 行할 때 연등불이 나에게 授記를 주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授記를 주는 것은 般若波羅蜜多를 證得한 修行者에게만 授記해주는 것으로 理解하여야 하는 것이다.
(2) 「大品般若 제46 魔事品」에는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신다.
“만약 보살이 아직 法位의 가운데 들지 못했다면 여러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기별을 주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다가 설해지는 것을 들을 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가운데는 내 이름이 없어 마음이 淸淨하지 않다.’라고 한다. 이것은 보살에게 나타난 惡魔의 일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에 수보리가 말씀드린다.
“어떤 因緣으로 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가운데에 이 보살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까.”
다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아직 반드시 부처님이 되리라는 授記를 받지 못한 보살에게는 모든 부처님이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授記를 받는 보살은 法位에 든 보살로 일찌감치 규정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처님은 授記를 받은 菩薩에게만 이름을 불러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이 이름을 말하는 菩薩은 授記를 받은 菩薩이며 法位에 든 菩薩에게만 이름을 말한다. 라고 하면서 授記의 條件을 法位에 든 菩薩로 한정하고 있다.
여기서 法位란 반야바라밀다에 이른 菩薩 즉 究竟涅槃(大明. 空)을 證得한 菩薩을 말하는 것이다.
(3) 법위 (法位 dharmaniyamata)는 常住法界 또는 法住法界(dharmasthiti, dharmadhatu)라는 말과 같이 쓰이는 말이고 이 말이 아함경에서는 緣起法과 三法印에 대해서 사용된다.
곧 緣起法은
“如來가 세상에 출현하든 하지 않던 관계없이 이 界(dhatu)는 머물고 있으니 法으로서 머물고 있으며( 法住法界, dharmasthiti, dharmadhatu) 法으로서 결정된 것(法位,dharmaniyamata)이다.”
라고 설명되고 있다. 여기서 이 界(dhatu)는 머물고 있으니 에서 이 界는 곧 眞理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法이 있기 때문에 法이 있느냐 라고 묻는 것이지 法이 애초에 없다면 法이 있느냐 라고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法을 부정하므로 서 法이 있다는 結論을 이끌어내는 기법에서 이것을 理解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國土莊嚴문제를 理解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法을 부정하고 난 다음에 바로 國土莊嚴의 문제를 꺼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이야기를 듣는 修行者의 地位가 無生法忍을 얻은 상태 곧 8地 以上임을 알아야 한다. 8地 以上임은 究竟涅槃을 證得한 상태라는 이야기 이며 이는 바로 空의 상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空의 상태에서는 法이라고 특정 지을만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法이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本文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만일 어떤 보살이 ‘나는 국토장엄57)을 성취하리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국토장엄 국토 장엄’이라는 것. 그것은 장엄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한다. 그러므로 국토장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디팡카라 如來의 곁에서 어떠한 法을 얻은 것 이라는 말은 授記를 의미하는 말로서 이것을 부정한 것인데 이제 國土莊嚴을 論하는 것은 바로 法華. 華嚴. 淨土로 이어지는 흐름. 즉 法華. 華嚴. 淨土를 아우르는 事件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마저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 배웠던 3가지 즉 이것이라고 하려면 獨存해야하고 항상 해야 하며 自存해야한다는 條件이 成就되지 않으므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理解할 수도 있으나 이 제10莊嚴淨土分에서는 좀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法華의 華는 pundarika(白蓮)를 뜻하므로 滿開한 연꽃은 부처님을 뜻하는 말인데 華嚴의 華는 ganda로서 여기서는 그냥 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莊嚴의 뜻을 가져오기는 매우 어렵다.
본래 ganda라는 말은 몸에 나는 종기를 뜻하는데 이를 상위개념으로 보면 맺힌 것이 되며 이것을 식물에 적용하면 꽃망울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꽃망울을 의미한다면 이는 꽃 봉우리를 뜻하므로(또는 雜花라고도 함) 아직 피지 않은 연꽃(봉우리) 또는 雜花라고 번역했다면 ganda라는 말은 만개한 白蓮을 莊嚴하는 것이므로 부처님을 莊嚴하는 人 施設을 나타낸 것으로서 菩薩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華嚴經의 莊嚴은 菩薩의 莊嚴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菩薩은 무엇을 莊嚴하는 것인가. 이는 부처님을 莊嚴할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開花한 흰 연꽃을 莊嚴하는 것이 菩薩을 뜻하는 봉우리 또는 온갖 꽃으로 본다면 그런 의미에서 譯經家 들은 이를 雜花라고 번역한다.
그러므로 華嚴經은 보살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나타내는 經典이므로 華嚴經에서는 10地品이 중요하며 主體가 菩薩이므로 菩薩의 깨달음의 과정을 설명하는 경전인 것이다.
부처님은 莊嚴의 대상이지 무엇을 莊嚴하러 다니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白蓮을 雜花가 莊嚴하는 것이므로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의 理念을 菩薩이 옹위하고 보위하는 것이 된다. 이어서 莊嚴이라는 말이 極樂莊嚴經에 나타난다.
그런데 다음 연결된 제10장엄정토분은 아미타 부처님의 國土를 莊嚴하는 것이므로 菩薩이 莊嚴하는 對象을 나타낸 經典이다. 그러므로 푼다리카가 부처님의 상징인 佛敎의 基本理念을 나타낸다면 이제 菩薩은 이 基本理念을 옹위하고 보위하며 莊嚴하는 存在이며 그러한 國土를 佛國淨土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剛經에서 菩薩이 佛土를 莊嚴한다는 말(菩薩佛土莊嚴)은 菩薩은 부처를 莊嚴하고 佛土를 莊嚴한다는 뜻이 되므로 이 말은 授記부터 佛土莊嚴까지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내용(法華에서 華嚴 淨土까지를 아우르는 大乘佛敎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授記를 받는다는 事件과 國土를 莊嚴한다는 事件은 따로따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이 전체는 한 事件으로서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야하는 것이다.
授記를 받지 않고 國土莊嚴을 할 수 없으며 國土莊嚴을 한다는 것은 이미 授記를 받았음을 나타낸 말이 되는 것이다. 授記를 받는 순간 이미 國土莊嚴에 들어간 것이니 두 사건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認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를 하나 든 것이 그다음 대목으로서 수미산만한 몸뚱이를 가진 存在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存在라고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授記에서 成佛直前까지의 전 과정을 부정하므로 서 應無所住以生其心라고 하면서 이런 모든 것이 執着할 바가 없는데 그 어떤 것에 마음 둘 것이 있겠느냐 하는 내용으로 最終結論이 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대목을 살펴보자.
本文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무엇엔가 머물러 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색에 머물러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머물러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수부티야,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갖추어진 몸이며 거대한 몸이 있으니 마치 수메루 산과 같은 크기의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는 거대하다고 하겠느냐.”
수부티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거대합니다. 선서시여, 그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58)는 거대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라고 하지만 그것은 存在가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라고 부를 수는 있습니다. 실로 세존이시여 그 存在는 存在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제10 장엄정토분에서 漢譯文과 原文과 해석을 모두 실어 그 내용을 심층 분석한 것이다.
10. 莊嚴淨土分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昔在燃燈佛所,於法有所得不, 不也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實無所得, 須菩提於意云何, 菩薩莊嚴佛土不, 不也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身是名大身
*漢譯經典에는 국토장엄의 대목을 부처님이 묻고 수보리가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原典에서는 부처님이 묻고 부처님이 모두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10-1.
Bhagavan aha : tat kim manyase subhute, asti sa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 dipankarasya tathagatasya arhatah samyaksambuddhasyantikad udgrhitah? Subhutir aha : no hidam Bhagavan, nasti sa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 dipankarasya tathagatasyarhatah samyaksambuddhasyantikad udgrhitah.
10-2.
bhagavan aha : yah kascit subhute bodhisattva evam vaded : aham ksetravyuhan nispadayisyamiti, sa vitatham vadet. tat kasya hetoh? ksetravyuhah ksetravyuha iti subhute, `vyuhas te tathagatena bhasitah, tenocyante ksetravyuha iti.
10-3
tasmat tarhi subhute bodhisattvena mahasattvenaivam apratisthitam utpadayitavyam yan na kvacit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na rupa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na sabda gandha rasa sprastavya dharma 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tad yathapi nama subhute puruso bhaved upetakayo mahakayo yat tasyaivamrupa atmabhavah syat tad yathapi nama sumeruh parvataraja, tat kim manyase subhute api nu mahan sa atmabhavo bhavet? Subhutir aha : mahan sa Bhagavan mahan sugata sa atmabhavo bhavet. tat kasya hetoh? atmabhava atmabhava iti. Bhagavan abhavah sa tathagatena bhasitah, tenocyata atmabhava iti. na hi Bhagavan sa bhavo nabhavah. tenocyata atmabhava iti.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곁에서 어떠한 법을 얻은 것1)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곁에서 여래께서 얻은 법은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만일 어떤 보살이 ‘나는 국토장엄2)을 성취하리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국토장엄 . 국토장엄’ 이라는 것. 그것은 장엄3)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한다. 그러므로 국토장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무엇엔가 머물러 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수부티야,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갖추어진 몸이며 거대한 몸이 있으니 마치 수메루 산과 같은 크기의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는 거대하다고 하겠느냐.”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거대합니다. 선서시여, 그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4)는 거대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실로 세존이시여 그 존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5)
1) “법을 얻는다.” 라는 말은 아함부의 차원에서 보면 授記를 받는 것을 말 한다. 본 金剛經에서도 제17<구경무아분>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언급되고(dipankarasya tathagatasyantikad anuttaram samyaksambodhim abhhisambuddhah)아울러 授記가 언급된다.(bhavisasi tvam manavanagate 'dhvani sakyamunir nama tathagato 'dhvani sayaksanbuddha iti).
그리고 <제17구경무아분>에는 “莊嚴淨土”에 대한 언급도 있어 이<제10장엄정토분>을 살피는데 자세히 천착해야 한다.
2) 앞서 언급한 “授記 받음”과 이곳에서 언급되는 “佛土莊嚴”이 원만히 成就되어 “成佛”이라는 結果를 불러들인다고 一般的으로 여기고 있다. 제17<구경무아분>에 의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成就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 생각을 허물고 있다.
3) 極樂莊嚴은 佛土를 즐거움으로 莊嚴한 것이고 雜花莊嚴은 부처님을 菩薩의 꽃으로 莊嚴한 것이다. 이처럼 莊嚴은 그때그때 필요한 莊嚴이 등장한다. 그런데 佛土를 莊嚴할 경우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그것이 僧團의 組織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僧家야말로 진정한 佛土이고 이 佛土를 莊嚴한다는 것은 僧家의 律法과 敎法이 바로 선 것을 뜻한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4) atma-bhavo. 말 그대로는 “自我로 되는 것 또는 自我가 된 것” 우리가 自我라고 부르는 것은 自我가 아니라 自我로 여겨지는 것이므로 부처님은 아예 “自我로 여겨지는 것”이라고 우리를 부른다.
5)
①. 제10 莊嚴淨土分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고 그 어디에도 執着하지 말아야 한다는 金剛經 情神을 가장 적극적이고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品으로 보인다. 우선 佛敎의 지고의 경지인 成佛을 전제로 그것마저 執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함으로써 그 나머지 도대체 무엇에 執着할 것인가를 再論하지 못하게 한다.
나아가 수미산 크기의 몸 동아리를 보고도 그것에 전혀 마음이 기울어진다든지 걸린다든지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여 실로 그 感覺을 現實性 있게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②. 授記의 意味와 佛土莊嚴의 意味를 따로 구별하여 추구한다면 그것은 결코 認定할 수 없다. 授記가 있고 내지 佛土莊嚴이 모두 한줄기로 연결될 때 비로소 成佛이라는 結果가 얻어진다. 그러므로 全體的으로 파악할 때는 모두 意味가 있지만 그것을 따로 떼어내어 部分的으로 個別的으로 取扱한다면 모두 否定되고 만다.
이는 想 중에 空間的 次元의 想이다. 곧 모든 것은 共存할 뿐이지 獨存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제10장엄정토분의 應無所住而生其心은 결코 個別的 執着을 막는데 意味가 없을 수 없다.
③. 授記 내지 佛土莊嚴에 의해 成佛하는 것까지 認定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tasmat) 그런 경우에는(tarhi) 그 어떤 것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일으켜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시 말해 成佛이라는 至高의 事件도 認定할 수 없다면 도대체 그 어디에 머물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 취지가 웅변적으로 설해져 있다.
④. 그리고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그 무엇도 마음에 넣어두지 않는다는 뜻과도 통한다. 그 무엇도 마음에 넣어두지 않는다는 말을 비유로 설하길. 수미산 같은 크기의 몸을 보고도 그것을 마음에 넣어두지 않아야 한다는 뜻과 같다.
사실 우리가 덩치가 큰 사람을 보면 그것이 마음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키지 어떻게 그것을 보지도 않은 체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수미산 크기의 몸을 보더라도 마치 아니 본 것처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될 때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窮極的으로 授記를 받고 佛土를 莊嚴하는 成佛을 위한 事件에 대해서조차 일단은 空間的으로 個別的 事件에 초점을 두어 마음을 두지 말아야 되는 것으로 진행되니 다시 말해 부정해야하고 나아가 內容的으로는 成佛이라 하더라도 껍데기이니 반드시 긍정한다던지 머문다던지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아니 된다.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무엇엔가 머물러 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라는 대목에서 앞부분은 apratisthitam (citham) utapadayitavyam으로서 머무는바가 없는 마음을 일으켜야한다는 뜻이며 이어서 na kvacitpratisthitam cittam utpadayitavyam 의 대목은 그 어디에든 머무는 바가 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와 같이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가 모든 것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다시 “그 어디에든 머무는 바가 있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라고 하면서 論理的으로 완벽하게 빠져나갈 수 없게 모든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漢譯에서는 應如是生淸淨心 이라고 하면서 本文에 없는 淸淨心을 일으켜야한다고 하면서 應無所住而生其心 으로 응당 머무는바 없는 마음을 일으켜야한다. 라고 하면서 일으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佛敎는 하지 말라는 말이 우선이다. 그리고 하지 말라는 條件에 論理的으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조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漢譯은 論理的으로 느슨한 느낌을 주고 있다. 여기서 不應住色生心은 不應生住色心이라고 해야 정확한 해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에 대하여 論하고 있는데 여기서 自我로 여겨지는 存在는 原語로 atma-bhavo 로서 “自我로 되는 것” 또는 “自我가 된 것” 이라는 뜻인데 漢譯에서는 이것이 身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身이라는 말은 atma-bhavo에서는 바로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은 自己가 自己를 볼 때는 精神. 마음으로 보지만 남을 볼 때는 몸(身)으로 본다. 물론 이때의 身은 六根의 身과는 다른 身이다. 이 身은 pudgala로서의 身 즉 살아있는 몸뚱이로서의 身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볼 때는 身으로 본다는 해석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아야 한다.
이 身은 pudgala를 말하는데 pudgala라는 말에 근접한 西洋 쪽의 말에는 佛語에서 elan vital(活氣)라는 말의 뜻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pudgala는 人相에서 物質과 분리하기 위하여 살아서 돌아다니는 몸뚱이로서 永遠한 存在라고 생각하는 자이나교의 理念으로 唯物論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설명하는 槪念으로 사용한 말이다.
주5)번에서 제10莊嚴淨土分의 취지를 볼 수가 있다.
제1항에서는 수미山만한 몸뚱이를 예로 들면서 생각 속에서만 설명하면 感覺的으로 느끼지 못하므로 그 感覺을 現實性 있게 피력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 수미산만한 몸뚱이가 있다면 그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 너 자신 있느냐” 라고 현실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제2항에서는
“授記의 意味와 佛土莊嚴의 意味를 따로 구별하여 추구한다면 그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 授記가 있고 내지 佛土莊嚴이 모두 한줄기로 연결될 때 비로소 成佛이라는 結果가 얻어진다.” 의 내용에서 授記가 있고 내지 佛土莊嚴 이라는 내용 중 내지에는 많은 내용이 생략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授記는 法位에 든 菩薩에게만 해주는 것인데 法位에 든 菩薩이란 華嚴經 10地品에서는 8地菩薩에 해당한다. 法位에 든 菩薩은 모든 것을 살펴 볼 줄 아는 能力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는 다음단계에 더 즐거운 世界가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었으나 이 단계에서는 다음 단계는 五濁惡世로 回向하는 것이므로 다음에 더 좋은 世界가 있다고 할 수가 없다.
또 이 단계에 이른 菩薩은 淸淨한 마음을 이미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此岸의 世界에 있는 衆生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차서 慈悲心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五濁惡世에 들어가서 五濁惡世에 물들지 않고 衆生救濟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存在한다. 그러므로 授記를 줌으로서 五濁惡世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제거시켜줌으로서 發心(열정과 소망과 자신감을 갖게 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菩薩이 發心을 하게 되면 부처님은 이제 法藏의 전모(모든 방법과 과정)를 열어(開: 공개)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菩薩은 믿게(信)되며 부처님은 다시 그 내용을 모두 펼쳐 보여(示: 하나하나 세세하게 설명해줌)주시게 되며 菩薩은 이제 이해(解)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法華經의 開示悟入인데 原典에는 渡의 단계가 하나 더 있다. 이는 理解한 菩薩을 실천하게(渡: 건너)게 함으로서 菩薩은 실천(行)하게 되고 깨치게(悟) 해줌에 의해서 行하든 菩薩에게는 깨달음(證)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開示悟入이 아니라 開示渡悟入 이며 그때 보살은 信解行證莊嚴이 되는 것임)
그런 다음 부처님은 菩薩로 하여금 五濁惡世인 此岸에 들어가게 함(入)으로서 菩薩은 此岸에 들어와 衆生救濟를 함으로서 佛土莊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보아왔든 淸淨한 彼岸의 世界처럼 莊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각각을 따로 떼어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授記로부터 佛土莊嚴 까지를 한줄기 코스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렇게 연결된 成佛까지도 껍데기에 지나지 않음으로 그 어디에 마음을 둘 곳이 있겠느냐? 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경우에 비로소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표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授記와 佛土莊嚴의 이야기는 중간에 開 示 渡 悟 入과 授記 信 解 行 證 佛土莊嚴이 생략되어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으로 金剛經에서 授記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佛土莊嚴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開. 示. 渡. 悟. 入은 法華經에서 說하는 내용이라면 發心한 보살의 信. 解. 行. 證. 佛土莊嚴은 華嚴經과 淨土經의 내용으로 대입 될 수 있으며 이처럼 法華經의 내용과 華嚴經의 내용 및 淨土經까지의 내용이 서로 대칭으로 짝이 되어 成立하는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菩薩의 반응 부처님의 條件
佛土莊嚴 - 入 ***** 此岸 “成佛”
證 - 悟
行 - 渡
解 - 示
信 - 開
發心 - 授記 ***** 彼岸 “8地 菩薩”
華嚴經의 내용 法華經의 내용
3)항에서는 그러므로(tasmat) 그런 경우에는(tarhi)에서 그런 경우라는 뜻은 授記에서 佛土莊嚴까지를 부정한 경우라는 것으로서 이는 成佛의 原因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原因이 부정된다는 것은 結果인 成佛도 당연히 부정되는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며 成佛이라는 至高의 事件도 認定할 수 없다면 도대체 그 어디에 머물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 취지가 웅변적으로 說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을 漢譯에서는 단순히 應無所住而生其心 이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단서가 빠져있어서 蛇足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가 되며 그 深度에 있어서 原典에서 說하고 있는 내용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4)항에서는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 무엇도 마음에 넣어두지 않는다는 뜻과도 통한다. 그러므로 저 수미산만한 自我로 된 存在(身)를 예로 든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제10莊嚴淨土分에서 이야기 하고자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취지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은 알맹이가 아닐 뿐만 아니라 空間的으로도 함께 있는 것을 마치 獨存한다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며 심지어 成佛이라 하더라도 껍데기이니 긍정한다든지 머문다든지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條件에 맞추어져 있음을 深度 있게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