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깊은 이야기

般若心經을 바로 보면 佛敎가 보인다.

동산/혜산방 2012. 3. 26. 10:32

般若心經을 바로 보면 佛敎가 보인다.

 

불교대학과정에서 반야심경을 공부하고 매일 반야심경을 외우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반야심경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나만의 일이었을까?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실제 한역반야심경을 접하였을 때 그 뜻을 이해하고 외어온 재가불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많이 있었다.

산스크리트 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Mahaprajnaparamitahrdayasutram)을 공부하면서 우선 제목에서부터 내가 생각해온 반야심경이 실제와 너무나도 차이가 나게 알고 있었음을 솔직히 반성하고 있다.

통상 반야심경(般若心經)하면 자는 마음 심자 이므로 반야의 마음을 얻게 하는 경전 정도로 생각하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부끄러운 상태에서 반야심경을 외우고 써왔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을 나타내는 뜻이 아니라 생명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가 심장(心臟)이듯이 바라밀다를 설한 경전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만 모아놓은 심장과 같은 핵심이 되는 위대한 경전이라는 뜻으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詞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maha위대한 또는 장엄한의 뜻이며 prajna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가는 앎이란 뉘앙스를 담고 있는 말로서 반야부 경전에서 말하는 머물지 말고 계속 가라는 뜻을 품고 있는 앎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야란 진행적인 지혜(智慧)요 머물지 않는 智慧인 그야말로 진행의 지혜이며 바로 열반에 머물지 말고 피안[彼岸(究竟涅槃)]으로 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 중에서도 가장 후기인 4세기경에 만들어진 경전으로서 그 내용은 아함부 차원에서 열반(涅槃)을 증득한 수행자에게 구경열반(究竟涅槃)을 가르치고자하는 뜻이 담겨있는 온화하지만 그 내용이 깊은 그리고 가장 짧은 경전으로 되어 있다.

 

반야심경은 먼저 부처님은 심오한 깨달음에 듦이라는 삼매에 들어계신 상태에서 부처님의 삼매 속에서 관자재보살이 사리불에게 설명한 내용을 7지 보살이 6지 보살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제부터 설명할 내용이 아함부 차원에서 설명하든 내용을 부정하는 내용이 됨으로 해서 이율배반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부처님 대신 보살이 설명하도록 짜여 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느 보살이 설명하더라도 관계가 없겠지만 그 이름이 걸 맞는 보살이 있다면 그 보살을 선택할 것이다. 이렇게 선택된 것이 관자재보살인 것이다.

관자재보살의 원어는 avalokita-isvara bodhi sattvo로서 아래로 굽어보는 보살이란 뜻으로 아래로 분석하여본다는 반야심경의 내용에 가장 유사한 이름을 가진 보살이므로 관자재보살이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산스크리트 본에는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께 절하옵니다.”라는 구절이 먼저 나와 있고 이어서 거룩한 관자재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하실 때 살펴보시니라고 존칭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역경전에는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께 절하옵니다.”라는 대목과 거룩한이라는 보살의 존칭어가 누락되어 있다. 여기서 거룩한이란 죽음이 극복된 존재이거나 죽음이 극복될 것이 확실시 된 존재에게만 붙일 수 있는 수식어이다. 따라서 관자재보살이 여기서는 8지 보살의 단계인 것이다.

 

관자재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행하실 때 살펴보시니(照見)”의 문장에서 조견(照見)의 원어는 vi-ava-lokayati로서 avalokita와 가장 닮은 단어이므로 avalokita-isvara bodhi sattvo[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이어서 다섯 가지 근간(五蘊)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성품이 모두 비었음을 보셨느니라.”라는 하대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보살은 7지 보살이며 듣는 자는 6지 보살임이 증명되는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온이 공하다라고 할 때의 과 그 뒤에 나오는 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반야심경을 바로 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또 오온이 하다고 본 것은 7지 보살 때이고 8지 보살이 되면 달라질 수 있는 개연성이 상존하는 설명인 것이다.

앞에서의 슌야(sunya)라는 단어로서 그야말로 없다라는 뜻이지만 그냥 없다가 아니고 처음부터 없었음을 뜻하는 술어[術語(기술적인 전문용어)]이다.

 

그러나 뒤에 오는 슌야타(sunyata)라는 단어로서 이는 부정의 부정으로서 부정할 것을 모두 부정한 후에 남는 것으로서 없었던 것을 모두 부정한 끝에 얻는 그 무엇을 뜻하는 단어로서 공성(空性)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는 한역 반야심경에서는 찾아낼 길이 없으며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는 반야심경을 해석하는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면 한역반야심경에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구절에서 舍利子 앞에 여기에서라는 단어와 舍利子 뒤에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생략되어서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다른 것임의 구별에 실패한 까닭인 것이다.

 

위의 구절을 원문대로 적어보면

 

여기에서 사리불아 색은 빈 것()이고 빈 것은 또한 색이니

[왜냐면] 색을 떠나 빈 것이 없고 빈 것을 떠나 색이 없어[없으며]

색이 바로 빈 것이요 빈 것이 바로 색이다. [색의 본질이 빈 것이오. 빈 것의 표상이 색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란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도달하고 나서라는 뜻이며 따라서 피안에 도달한 후라야 피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시간상으로도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또 이 대목에서 관계대명사로 되어있는 산스크리트어의문장을 한역에서는 나타낼 수 없으므로 해서 생략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가 계속되며 그 참뜻을 얻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인도의 삼단 논법에 의해서 (슌야타)을 설명한 내용으로서 손해를 각오하고 표현해 본다면 본질(本質)과 표상(表象)이라는 숨은 뜻을 간접화법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는 중요한 대목이며 이 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하며 생각이나 눈으로 보려고 해서는 안 되는 대목인 것이다.

 

슌야타 참뜻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란 바로 슌야타에 대한 한문 식 문학적인 설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본질과 표상이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고 관계대명사라는 특별한 수단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현하였을 까?

 

이는 인간의 사고의 한계가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인데 말이란 어떤 두 개의 사항을 동시에 말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반드시 앞에 또는 뒤에 하여야 함으로 이를 하나가 아닌 2개로 인식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사실을 부처님은 너무나도 잘 아시고 계신 때문인 것이다.

 

그리하여 간접화법을 통하여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며 이것은 또한 2개로 보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강조이기도 하다. 또한 을 오온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음도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다. 위와 같이 해석함이 확실하다는 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 증명되고 있다.

 

舍利子 是諸法空相([여기에서] 사리불아 모든 법은 빈 것을 나타내나니)이라는 대목이다. 이대목에서도 舍利子 앞에 여기에서라는 말이 한역경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 말이 있고 없고는 앞의 설명에 연속되는 것이 아니고 다시 시작됨을 뜻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연결문장인 것이다.

다음으로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으로 이어진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不生不滅이다.

이문장의 원어에는 모두 과거분사 형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한 일도 없었고 한 일도 없었다.” 라고 해석하여야하며 이는 태초(太初)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뜻이 되는데 불교에서는 태초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장이 가능한 것이다.

이 말의 진의는 태초를 느끼게 함으로서 태초는 바로 본질을 말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하려는 고도의 암적으로 뜻을 전달하려는 의지의 문장이다.

그래서 그 옛날 서산대사는 不生不滅不定生 不定滅이라고 그의 저서 선귀감에 적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오온에 비유하여 공성(空性)을 멋들어지게 설명하고 나서는 12처와 육육법과 18계라는 아함부의 전 과정에 비유하여서도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주목해서 살펴야 할 부분은 無無明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亦無老死盡의 대목인 것이다.

이 대목은 아함부에서 반야부로 넘어오는 대목으로서 실제로 한역경전에는 도 없고 이 아닌 것도 없고 의 멸진(滅盡)도 없다라는 구절이 생략된 것으로서 아함부 경전에서 그처럼 중요시하던 조차 에 비유하면 없는 것이나 같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역경전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無無明亦無無明盡乃至 無老死亦無老死盡이라는 대목이 마치 12연기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12연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명에서 노사까지는 12연기를 뜻하는 것이지만 이 12연기가 없어진 상태를 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없어진 것이라면 의 멸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 멸진(滅盡)이라는 말은 아함부에서는 할 수 없는 설명으로서 반야부에서만 설명이 가능한 부분인 것이다.

 

이어서 고집멸도를 부정하고 알음과 얻음까지 부정하고 있는데 오온사제법에 속하는 고집멸도(苦集滅道)가 그 몇 단계 후에 오는 보다도 후에 부정되는 원인은 바로 에 있는 것이다.

는 알음이 있은 후에나 없어지는 것이며 알음은 얻음이 있은 후에는 없어지는 것으로서 얻음이 있다면 그 단계에 머물음을 말하는 것이니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얻을 때까지는 그 어떤 얻음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며 그렇게 얻음에 머물지 않고 정진을 계속하여야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얻게 된다는 부처님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보살을 설명함에 있어서

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蜜多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따라서 얻음이 없는 까닭에 보살에게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다.

마음에 가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열반을 다하였다.”

라고 반야바라밀다를 오온연기에 의한 설명을 하면서도 이를 숨기고자 환멸문적인 연기만을 나타냄으로서 반야바라밀다를 실상론을 바탕으로 설명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위 보살을 설명하는 구절에서 오온연기의 항목을 찾아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보살(菩薩)이란

1. 얻음이 없음

2.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물음.

3. 마음에 가림이 없음. - 최초 지분에 해당.

4. 두려움이 없음. - () 지분에 해당.

5.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 () 지분에 해당.

6. 열반을 다하였다. - ()과 식() 지분에 해당.

1번과 2번 항은 3번 항과 동시에 일어나는 사항으로서 3번 항을 설명하는 내용인 것이다. (1번과 2번이 최초지분이 아닌 이유)

 

이를 뒤집어 보면 중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얻음이 있음

2.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물지도 못함.

3. 마음에 가림이 있음.

4. 두려움이 있음.

5. 뒤바뀐 생각이 있음. 이어서 뒤바뀐 행동이 있음.

6. 대승의 죽음에 떨어짐.

 

여기서 중생은 5번 항 다음에 지분에 해당하는 뒤바뀐 행동이 있음으로 인해서 이어서 6번 항으로 진행된다.

실제로 반야부의 오온연기를 대승적으로 설명함으로서 중생과 보살의 차이를 보이면서도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반야 바라밀다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다음 삼세제불의 설명은 보살과 부처의 차이를 단지 반야바라밀다에 머무느냐 머물지 않느냐의 차이에 의해서 구별하면서도 머물다(viharaty)”라는 특수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머물다라는 단어는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을 의미하며 다음단계가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단어로서 한역으로는 영원히 머무는 것과 구별할 수 없으므로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얻으면 다시 다음 단계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邈三菩提)가 있으니 반야바라밀다에 영원히 머물지 말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邈三菩提)를 얻을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삼세제불 그 어느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고 부처가 된 분은 결코 없다는 뜻으로 만약 중생이 반야바라밀다에 도달한다면 즉시 수기를 해주시겠다는 부처님의 뜻이기도 한 것이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지 못한 보살의 단계에서 이렇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한 것으로서 이것이 반야부 경전의 내용도 불설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며 또한 부처님의 크나큰 자비심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다. 마음에 가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열반을 다하였다.”라는 단락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그 원어가 trasta(떨림)로서 진동(振動)할 수밖에 없는 중생으로부터 피안에 이르기까지의 가장 길게 늘어진 중층구조를 가진 계()의 구조를 나타내는 내용과 피안에 도달하지 못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동시에 나타내는 내용으로서 한역에서는 이를 한쪽만 나타내서 공포(恐怖)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반야심경에는 그 설명이 오온연기의 형태로 설해졌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반야심경에서 오온연기를 설했다는 사실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것인가? 오온연기로 설해졌다함은 연기라는 사실보다는 오온연기의 구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12연기의 구조는 단일구조로 되어있는 반면에 오온연기는 중층적인 계()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러한 사실은 반야바라밀다(구경열반)의 구조가 그러한 구조라는 암적인 설명임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구경열반은 중생으로부터 초보적인 열반을 지나 구경열반에 이르는 가장 늘어진 중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사유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떨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떨림이 있고 구경열반에 이르지 못하면 대승의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인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시할 내용은 시대명주(是大明呪; maha vidya mantro)라는 내용이다. maha라는 말은 웅장한 또는 장엄한의 뜻이니 웅장한 또는 장엄한 이라는 내용으로서 일반적인 이 있고 장엄한 이 있다는 내용은 바로 열반(涅槃)과 구경열반(究竟涅槃)이 있음을 설명하는 내용으로서 이 바로 장엄한 이며 이곳이 바로 구경열반(究竟涅槃) 즉 반야바라밀다 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는 반야바라밀다에 와서야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뜻이며 마지막 진언 부분은 이보다 간략하면서도 반야심경의 내용을 담은 진언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구경열반의 내용은 이미 설명되었으므로 오직 정진할 것을 부탁하신 부처님의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진언이기 때문이다.

 

揭提 揭提 波羅揭提 波羅僧揭提 菩提 娑婆.”

가니, 가니 건너가니 건너편에 닿으니 깨달음이 있네. 좋구나.”

 

나는 여기서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한 생에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겁을 두고 하는 것임을 느꼈으며 부처님은 중생을 지극히 사랑하사 여러 겁 후에라도 성불하도록 수기를 해 주시고 성불의 방법과 내용까지를 모두 설명해 주신 것을 알았다.

 

반야부 경전은 구경열반까지의 과정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정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그 과정이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계신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邈三菩提)의 과정은 법화경에 가서야 설명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이를 법화경에서는 불지견(佛知見) 또는 일체종지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성불이 한 번의 에서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음은 부처를 여래 응공(如來 應供)이라고 하는 여래십호 중의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여래(如來) 즉 그렇게 온 이란 뜻은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얻은 후에 그것을 가지고 다시 차안(此岸)으로 돌아온 것을 뜻하는 내용으로서 길게 늘어진 중층 구조인 피안(彼岸)에서의 내용을 가지고 차안으로 돌아옴은 피안 과 차안이 함께 있음을 뜻하므로 이는 마치 중생과 열반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면서 둘인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구조가 단일구조로 바뀜에 따라 진동(振動)과 공포(恐怖)가 있을 수 없음이며 이것이 如來요 동등하다는 뜻의 응공(應供)은 차안과 피안의 그 어떤 가치가 동등함을 발견한 것을 뜻하기 때문에 보살로서 존재하다가 차안으로 와서 부처가 됨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주열반(不住涅槃)이라는 말은 이 단계에서의 설명으로 보인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단계에 닿아야 중생과 열반을 자유자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랬고 부처가 되면 삼천대천세계에 한분 부처가 있음을 경전은 강조하고 있으니 동시 동처에 두 부처님이 존재할 수 없는 이치는 성불하면 중생제도를 해야 하므로 해당 중생이 있는 다른 삼천대천세계로 가야하니 同時同處 不在佛의 원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 될 자와 보살될 자가 따로 있고 부처될 자가 따로 있다는 상좌부계통의 설명은 그 수행의 범위를 한 생으로 놓고 본 단견으로 생각되며 대승불교는 이를 여러 겁으로 놓고 보는 시각의 차이에 의해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반야심경을 바로보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면 반야파라밀다를 얻어 보살이 될 수 있고 여러 겁()의 수행 후에는 성불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반야심경을 바로 보면 진정한 佛敎(부처님의 가르침)가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작은 지식이나마 여러분들의 수행에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성불하십시오.

불기2553 년 월 일 東山 佛敎大學 法師 團 惠山 李 勝 老 合掌

참고로 산스크리트 경전의 반야심경과 한역 반야심경의 차이를 함께 표기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께 절하옵니다.<한역경전에는 누락된 부분>

 

거룩한 관자재(관세음)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알아냄이 건너편에 이른 것)

<?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행하실 때(를 향하여 가실 때) 살펴보시니

<照見>

 

다섯 가지 근간()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성품이 모두 비었음을 보셨느니라.

<五蘊 ???皆空(度一切苦厄)> (度一切苦厄 이라는 말은 없음)

 

여기에서 사리불아 색은 빈 것()이고 빈 것은 또한 색이니

<? 舍利子 ???>

 

(왜냐면) 색을 떠나 빈 것이 없고 빈 것을 떠나 색이 없어(없으며)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이 바로 빈 것 이오 빈 것이 바로 색이다.(색의 본질이 빈 것 이오. 빈 것의 표상이 색이기 때문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느낌과 생각과 결합(작용)과 식별 또한 이와 같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여기에서 사리불아 모든 법은 빈 것을 나타내나니

<舍利子 是諸法空相>

 

생하거나 멸한 일이 없었고 더럽거나 깨끗한 일이 없었고 모자라거나 가득 찬 일이 없었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그러므로 사리불아 빈 것에는 색이 없고

<是故 ?? 空中無色>

 

느낌 생각 결합 식별이 없다.

<無受想行識>

 

눈 귀 코 혀 몸 의지가 없고

<無眼耳鼻舌身意>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 없다.

<無色聲香味觸法>

 

눈의 계층이 없고 이어 의지 식별의 계층에 이르기까지 없다.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밝힘과 밝힘 아닌 것이 없고 밝힘의 멸진과 밝힘 아닌 것의 멸진이 없으며

<?? 無無明 ?? 亦無無明盡>

 

이어 늙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없고 늙고 죽음의 멸진에 이르기까지 없다.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괴로움 집기 멸함 길이 없다.

<無苦集滅道>

 

알음이 없고 얻음[과 얻음 아닌 것]도 없다. <적색부분은 대품반야경에만 있는 내용임>

<無智 亦無得>

 

따라서 얻음이 없는 까닭에 보살에게는

<以無所得故 菩堤薩>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다.

<依般若波羅蜜多 心無罣礙>

 

마음에 가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無罣礙故 無有恐怖>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열반을 다하였다.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삼세의 모든 부처는

<三世諸佛>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依 般若波羅蜜多故>

 

다시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셨다.

<得 阿耨多羅三邈三菩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반야바라밀다의 큰 진언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큰 밝힘의 진언 다시없는 진언 동등함이 없는 진언은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는

<能除一切苦>

 

진실로 반야바라밀다에서 설한 진언이니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그것은 다음과 같다.

<卽說呪曰>

 

가니, 가니 건너가니 건너편에 닿으니 깨달음이 있네 사바하.

<揭提 揭提 波羅揭提 波羅僧揭提 菩提 娑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