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깊은 이야기

佛敎에서의 阿含經의 위치

동산/혜산방 2023. 9. 17. 16:47

佛敎에서의 阿含經의 위치

우리 재가불자들이 처음 불교를 접했을 때 어렵다고 느끼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은 불교의 중간단계부터 접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처음 설법을 아함경부터 하셨다. 그래서 불교는 중생들을 점진적으로 단계별로 가르침을 주시면서 해탈의 경지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특히 우리나라는 대승불교를 표방하므로 소승불교의 경전인 아함경을 도외시하였다. 그러니 초심자가 불교를 이해하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불교는 본래 3단계의 교설이다. 처음 아함경으로 실상을 깨닫고 이어 제2단계인 반야부 경전으로 더 깊은 경지인 반야바라밀다를 깨닫고(보살의 깨달음) 이어 3단계로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깨달음(成佛의 단계)으로 이어지는 3단계의 교설인 것이다.

이것을 갑자기 2단계의 반야부 경전의 단계를 설명하면 초심자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解脫*로서의 阿含法問이라는 글이 있어 재가불자들이 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싣고자 한다.

 

解脫· 로서의 阿含 법문

 

阿含解脫· 이다. 阿含經2가지를 함께 가르치는 것이니 解脫을 가르치고 解脫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 過程結果를 다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을 解脫· 라고 한다.

바닷물의 비유 중 解脫味(vimutti rasa)가 의미하는 解脫이다. 즉 부처님 은 바다와 같으니 바다는 그 어느 곳을 찍어서 맛을 보아도 짠맛으로 한맛이듯이 부처님 은 그 어느 곳을 찍어서 맛을 보아도 解脫味로서 한맛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阿含經解脫의 맛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없는 經典이다.

그런데 金剛經涅槃을 부정하고 다시 涅槃에 드는 것이니 이는 곳 解脫을 벗어나서 다시 解脫에 드는 것이므로 따라서 金剛經阿含解脫로부터 한 번 더 解脫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解脫은 크게 한 가지에서 解脫하는 것이고 또는 3가지에서 解脫하는 것이고 자세히는 5가지에서 解脫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에 解脫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크게 한 가지에서 解脫에서의 한가지란 괴로움[苦痛]을 말하는 것이다. 解脫이란 괴로움[苦痛]으로부터 解脫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阿含解脫이 과연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解脫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無色界煩惱로부터 解脫하는 것이 阿含經解脫이다. 그러므로 般若部 經典의 단계가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괴로움이란 그 괴로움을 주는 原因이 있고 그 原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괴로움인데 그 原因에는 세 가지가 있다.

 

@ 그 원인 3가지로부터의 解脫이란 1. 外道 2. 惡業 3. 煩惱로부터의 解脫을 말하는 것이고 解脫은 이 煩惱에서 解脫核心인데 이 煩惱에는 다시 3가지가 있으니 1) 欲界 煩惱2) 色界 煩惱3) 無色界 煩惱가 있다.

 

@ 그래서 종합하면

1. 外道로 부터의 解脫 = 外道에 대한 부정

2. 惡業에서의 解脫

3. 欲界 煩惱에서의 解脫

4. 色界 煩惱에서의 解脫

5. 無色界 煩惱에서의 解脫이다.

5가지에서 順次的으로 解脫하므로 서 모든 苦痛으로부터 解脫하게 된다(經典에 있는 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드시 순차적으로 解脫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 敎理는 점진성에 바탕을 둔 것이 특징이다.

 

@ 이것을 法門 또는 敎說 體系에 배당하면

1. 外道로부터의 解脫 = 外道 비판

2. 惡業으로부터의 解脫 = 십이처· 십업설 법문

3. 欲界 煩惱로부터의 解脫 = 육육법설 법문

4. 色界 煩惱로부터의 解脫 = 오온· 사제설 법문

5. 無色界 煩惱로부터의 解脫 = 십이 연기설 법문이 된다.

 

1. 外道로부터 解脫(외도 비판)

 

1). 有神論. 宿命論. 偶然論에 미련을 두지 말고 그야말로 그러한 것들을 부정하고 解脫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그 근거는 딴것은 다 제처두고 그 어느 주장도 人間罪惡과 그 책임소재 및 처벌에 대해서조차 합당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3). 도처경의 부처님 말씀을 보면 存在를 보았는가. 또는 어디에 存在하는가 하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罪惡과 그 책임 소재 및 처벌의 문제 등을 論據하여 有神論을 비판하고 있다.

4). 罪惡問題는 가벼운 問題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무엇보다도 苦痛하게 하는 크나큰 問題이다. 人間은 모두 자기 보호 및 방어 기제가 있다.

그래서 를 은폐하려는 그리고 자신은 어찌 되었든 無罪임을 변호하려는 경향이 하다. 그런 경향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思考方式이며 그것이 바로 이상의 세 가지 外道 思想이다.

5). 희대의 殺人犯 유영철을 변호한 유## 변호사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認定하지않는 사람을 死刑시키는 것은 단지 같은 殺人일 지언 정 그 罪人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그 罪人을 처벌하려면 그가 죄지었음을 是認하게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라는 것은 是認할 때 모든 問題가 풀리게 된다.

6). 佛敎에서는 를 지으면 를 사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認定하게 하고 책임을 지게하고 다시는 같은 를 짓지 말라고 다짐하며 다시는 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論理가 부처님 당시에 그 父王을 죽인 아자타삿투(마가다국 왕) 에게까지 적용되고 있다.

7). 그런 問題를 해결 못 하는 宗敎眞理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8). 外道 思想을 부정 비판해야 함도 一種解脫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장 먼저 解脫할 것은 邪見 外道 思想으로부터의 解脫일 것이다.

 

어떠한 사람을 信者 또는 宗敎人 이라고 하는가 하는 것은 宗敎學에서는 宗敎人은 그 마음에 信仰 體制가 갖추어졌는가. 갖추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宗敎人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한다.

信仰체제란 信仰이 버릇이 된 것을 말한다. 부지불식간에 그것에 대한 해석이 그 사람의 信仰 體制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를 들어서 길을 가다 넘어졌을 때 아이 재수가 없어서라고 한다면 이것은 運命論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外道 思想에서 벗어나는 것도 一種의 조그마한 解脫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자신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라고 알게 되면 이제 惡 業에서 解脫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악업에서의 해탈(십이처· 십업설 법문)

 

#[일체경] - 運命偶然도 없다. 存在하는 것은 認識 主體인 나 자신 곧 六根認識 대상인 나머지 六境 들 뿐이다. 外道 思想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벗겨라.

말하자면 自身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自身에 따라 일어나는 것을 自覺하고 다른 것에 핑계를 대지 않는 生活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佛敎에서의 他力 信仰이란 동반자관계이다. 마치 窋啄同時(줄탁동시) 처럼 느끼려는 나와 하려는 그분과 同時에 그 問題에 대한 일치가 이루어졌을 때 他力 信仰이 완성되는 것이지 절대 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닌것이다. 따라서 佛敎他力 信仰100% 他力 信仰이 아니다.

이에 비하여 基督敎에서의 他力은 그야말로 創造神에 의해서 許容되고 決定完全他力을 의미하는 것이다.

宗敎學에서의 信仰人이란 信仰이 버릇이된 것을 信仰 人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불교 인이라면 길을 가다 넘어져도 재수가 없어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때문에 넘어졌다고 自覺해야 한다는 것이다.

 

# [내무상경] - 六根(六境 )은 모두 無常하고 괴롭고 無 我이다. 그래서 영원해지려고 하고 즐겁기 위해서 活動을 일으키니 그것이 이다.

 

# 그런데 은 두 가지이니 하나는 惡 業이고 하나는 善 業이다. 여기서 善 業은 말할 것없이 굳건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惡 業에서 解脫하지 않고는 괴로움에서 解脫할 수 없다.

곧 괴로움에서 解脫하기 위한 실질적인 첫 단계의 解脫이다.

[의도경의 말씀 중에] “意圖的으로 하였고 또 쌓아 두었던 그 일<惡 業>結果를 받지도 않은 채 괴로움을 끝낸다. 라고는 나는 결단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열 가지 일<惡 業>이 있는데 이들은 더럽고 비뚤어졌고 不善意圖하여져 괴로움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果 報를 지니는 것들이다.”

부처님은 이처럼 惡 業은 반드시 고통스러운 果 報를 가져온다고 설하고 계시는 것이다.

 

# 그러면 惡 業에서 解脫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意圖에서 解脫하는 것이다. 절대 에서의 解脫이란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에 있는 我執要素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善 業我執에서 表出하는 것이기 때문에 問題가 없는 것은 아니나 善 業이 가지고 있는 利益 되는 바가 훨씬 크기 때문에 그 작은 我執表出이라는 問題는 크게 問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善 業에서의 그 작은 我執의 표출이라는 문제의 해결 방법은 그것은 곧 煩惱(번뇌)이니 그것은 煩惱除去할 때 除去하면 되는 것이다.

 

# 악한 의도에서 해탈하려면 먼저 악한 의도를 알아야 하는데 意圖에는 열 가지가 있다.

1. 殺生한 의도 2. 훔치려는 한 의도 3. 邪淫(사음)에의 한 의도 4. 거짓말하려는 한 의도 5. 험담하려는 한 의도 6. 욕하려는 한 의도 7. 실없이 말하려는 한 의도 8. 9. 10. (이들은 煩惱에서 解脫을 언급할 때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理由는 이것이 바로 本格的煩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 가지를 말한다.

 

# 1. 살생의 악한 의도

2. 훔치려는 악한 의도

3. 사 음에의 악한 의도

4. 거짓말하려는 악한 의도

5. 험담하려는 악한 의도

6. 욕하려는 악한 의도

7. 실없이 말하려는 악한 의도

 

실없이 말하려는 意圖란 때가 아닐 때 말하는 것을 말하며 利益이 없으면 때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眞實을 말해도 利益이 없으면 때가 아니니 그때 말하면 실없이 말하려는 意圖를 지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意圖조차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해라. 意圖行爲<惡 業>는 동전의 兩面과 같아 서로 상승시킨다. 그러므로 行爲뿐만 아니라 한 의도로부터 解脫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意圖조차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면 行動이 줄게 되고 行動이 줄게 되면 意圖가 약해지고 한 의도가 약해지면 行動이 더 줄고 行動이 더 줄게 되면 한 의도는 더 약해진다.

 

이렇게 서로 계속하여 줄어들어 가면서 비로소 惡 業에서 解脫하게 되고 괴로움의 끝을 한 토대가 보장된다.

 

<번뇌로부터의 해탈>

涅槃解脫의 차이를 살펴보면 一般的凡夫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過程에 중점을 두고 보면 解脫이고 그 完成結果에서 보면 涅槃이 되는 것이다.

煩惱를 분석하면 종적으로 煩惱種類. 煩惱强度. 煩惱次元으로 구분되는데 다시 欲界煩惱色界煩惱無色界煩惱로 나눌 수 있으며 횡적으로는 각 煩惱의 안에는 貪 瞋 癡 3가지의 범위를 설정할 수 있는데 이 貪 瞋 癡煩惱도 각각 그 깊이에 3단계가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 될 것이다.

 

먼저 欲界 煩惱로부터의 解脫이라는 말은 있을 수 있으나 外道로부터 解脫이니 惡 業으로부터의 解脫이라는 主題가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부처님 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하고 그 用語 使用에 아주 꼼꼼하다는 南方 上座部解脫 論에도 惡 業에 관한 解脫論議되고 있다. 內容은 다음과 같다.

 

解脫에는 5가지가 있으니

1). 一向 解脫(Tadanga-vimutti): 欲界 善 業成就

2). 伏 解脫(Vikkhambhana-vimutti): 禪定成就

3). 斷 解脫(Samuccheda-vimutti): 成就

4). 安息 解脫(Patipassaddhi-vimutti): 成就

5). 出離 解脫(Nissavana-vimutti): 涅槃成就(完成解脫)

 

3) 번에서 5) 번까지는 한통속의 이야기로서 禪定으로부터 그 結果까지를 얻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一向 解脫이란 惡 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意味하며 伏 解脫에서의 은 일어나려는 愛慾을 일단 누르는 것을 意味한다. 愛慾을 누르는 방법으로써 出家 削髮染衣(출가 삭발염의)에 의해서 일단 누르는 것이다.

 

六六法說 法門의 마지막이 渴 愛(갈애)인데 渴愛煩惱에서 欲界煩惱에 대한 설명이 經典에 명확히 나와 있음.

 

3. 욕계 번뇌로부터의 해탈(육육법설 법문)

 

첫 단계로서 外道 思想에 대해 미련 없이 否定했고 둘째 단계惡 業으로부터 自由로워 졌다면 이제 셋째 단계 欲界 煩惱에서 解脫해야 한다.

그런데 欲界 煩惱에서의 解脫에 왜 六六法說 法門이 해당하는가? 六六法의 구성은 六根 - 六境 - 六識 - 六觸 - 六受- 六愛 渴愛로 끝난다. 渴愛欲界愛慾이 지니는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五蘊說도 그 끝은 이고 12 緣起說도 끝은 죽음이지 渴愛愛慾이 아닌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欲界이건 色界이건 無色界이건 煩惱의 형태적 모습은 바로 . . 이다. 그래서 惡 業에서의 解脫을 다룰 때 8. 9. 10. 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거니와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 本格的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六六經]의 문장을 참고 함으로써 확실히 알 수 있다.

 

#[탐욕과 분노와 우둔함의 성립]

比丘들 아! 눈과 여러 에 기대어 眼識이 발생한다. 이 세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發生한다. (여기까지가 六受 단계까지 온 것임)

그런데 누군가 즐거운 느낌에 부닥쳐 있을 때 그는 기뻐하고 인사하고 執着하여 머문다. 그러면 그에게는 貪着이 잠재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괴로운 느낌에 부닥쳐 있을 때 그는 슬퍼하고 피곤해하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悲痛 해 하고 우둔함에 빠진다. 그러면 그에게는 瞋恚가 잠재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에 부닥쳐 있으면서 그 느낌의 집기와 사라짐과 맛과 환난(患難)과 출리(出離)를 여실히 알아내지 못한다. 그러면 그에게는 무명(無明)이 잠재하게 된다.”

 

여기서 貪着이고 瞋恚이고 無明에 해당된다는 것은 基本的으로 알 것이다.

# 그런데 이곳 六六法 六根- 六境- 六觸 -六受- 六愛 로 구성된 六六法專門家世界이다. 다시 말해서 六六法의 전개 과정에서 六受 支分에서 세 가지 느낌을 설정하고 있다.

六受 다음에는 渴愛(갈애)가 나와야 하는데 六六法 法門인데도 불구하고 渴愛의 언급이 없다. 渴愛란 좋은 것에 대한 執着特徵的으로 나타낸 말이다.

그런 渴愛라는 말을 넣는 대신에 즐거운 느낌에 執着하면 貪着이 잠재하고 괴로운 느낌에 執着하면 忿怒가 잠재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끄달리면 無明이 잠재한다. 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六愛라는 말을 하지 않고 貪 瞋 癡로 대신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를 六受 支分에 넣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는 느낌이므로 탐 진 치가 발생하는 것은 다른 단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貪 瞋 癡六愛에서 發生했다는 최초의 貪 瞋 癡에 대한 최초의 發生處(발생처)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惡 業外 行動 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貪 瞋 癡內 行動이다. 당사자의 內面世界에서 벌어지는 내용인것이다.

惡 業은 그 대상이 밖에 있으나 貪 瞋 癡外的인 요소가 原因이 되어 발생했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自己 內面과의 싸움이요 自己 內面의 정체 파악에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六受 支分過程에서 이제 자기 內面世界로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六根六境을 대하여 六識이 발생하고 이 3 支分이 합하여 六觸發生하고 六觸에 의해서 느낌[受 支分]이 발생하니 . . 不苦不樂의 느낌이다. 이 느낌에서 煩惱가 발생하니 貪 瞋 癡이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설정이며 그 의 결박이니 逆流니 하는 것은 응용 부분인 것이다.

 

[六六經] 비구들아! 너희들을 위해 처음도 좋고 가운데도 좋고 끝도 좋으며 意味文句를 갖추었으며 온통 充滿하고 순결한 梵行(범행)을 밝히고 설하겠으니 그것은 곧 육육법(六六法)이다. 그것을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이제 하겠다.”

라는 내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부처님 스스로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붓다는 이렇게 설하셨다. 이에 比丘들은 뜻을 잡았으며 매우 기뻐하였다. 실로 이 가르침이 베풀어질 때 60명가량의 比丘들이 취착함()이 없이 逆流하는 煩惱[]로부터 心 解脫하였다.”

이라고 經典의 마무리가 지어지는 것을 볼 때 이 傳道宣言 前에 베풀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核心 經典이다.

 

# [탐욕과 분노와 우둔함의 성립] 앞서도누군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부닥쳐 있을 때 ······ 그에게는 무명(無明)이 잠재하게 된다.”

이 부분을 언급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그도 저도 아닌 느낌은 모두 欲界 次元의 것들이다. 그래서 煩惱欲界 次元煩惱일 수밖에 없다.

 

# 欲界次元煩惱를 살피는 데 있어서 1. 欲界意味 2. 煩惱의 말 뜻 3. 煩惱强度 4. 欲界煩惱動機와 모습 등 네 가지로 살피면 될 것이다.

 

1) 欲界의 의미 : 愛慾이 지배하는 領域으로서 愛慾(kama)이란 異性에 대한 性的慾求特徵的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보아도 일단은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煩惱의 말뜻 :

본래 印度에서 日常的으로 쓰는 煩惱라는 말은 klesa라고 해서 汚染된 것을 나타낸 말이지만 佛敎에서는 專門的인 용어로서 3가지로 분리하여 사용하고 있다.

anusaya(잠재된 나쁜 버릇); 위에서 번뇌의 결성 즉 [탐욕과 분노와 우둔함이 성립]에서도 無明이 잠재한다는 말이 있음.

여기서 anu; ··· 을 따라서 또는 ···을 닮게 saya; 눕는 것. 그러므로 anusaya隨眠[따라서 잠을잠]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A라는 나쁜 버릇이 B라는 正常的인 마음을 따라서 눕는 것을 의미한다.

samyojana(정상적인 마음에 대한 결박): sam; 함께 yojana; 묶음. 결박(結縛)

그러므로 正常的인 마음을 따라 누운 나쁜 버릇이 이제 正常的인 마음을 칭칭 감아서 묶어버림으로써 어느 것이 나쁜 버릇이고 어느 것이 正常的인 마음인지 구별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asrava(거꾸로 치솟아 흘러 대는 것):

srava; 흐름 a: 어두 a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强調하는 뜻과 하나는 方向逆轉시키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方向逆轉시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나쁜 버릇이라도 正常的인 마음에 따라 눕고 묶어서 그대로 따라 흐르고 있으면 별 問題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이제 正常的인 흐름을 妨害하고 거꾸로 치솟아 흐르려고 허기 때문에 問題가 되어서 이 煩惱除去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쁜 버릇도 나의 마음이고 正常的인 마음도 나의 마음이다.

 

<마음이란 하나의 흐름인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存在는 하는데 왜 實體的으로 파악되지 못하느냐 하면 강물이 흐르듯이 끝없이 흐름의 연속을 마음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냥 얌전히 正常的인 마음을 따라서 흐르고 아무 妨害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煩惱일까?

흐름을 하게 한다고 하여서는 問題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逆流하고 치솟아 오르려고 하는 것이 問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般若心經顚倒 夢想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번뇌란 貪慾이라는 나쁜 버릇이 잠재(潛在)되어 正常的인 마음을 꽁꽁 묶어서 거꾸로 흐르게 하니 그 나쁜 버릇을 煩惱라고 한다.

그러므로 欲界煩惱愛慾과 관련된 나쁜 버릇이 潛在되어 正常的인 마음을 꽁꽁 묶어서 거꾸로 흐르게 하니 愛慾關聯된 그 나쁜 버릇을 欲界 煩惱라고 한다.

그러므로 修行을 그렇게 쉬운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煩惱除去하는 것이므로 닦는다는 表現으로는 부족하고 그야말로 처절한 싸움이라고 할 것이다.

 

3). 煩惱의 강도

煩惱强度는 얼마나 한가? 이는 마치 中毒 症勢와 같다. 그래서 이를 除去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理由는 나쁜 버릇도 나의 마음이고 正常的인 마음도 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자신의 意志에 의해서 이를 除去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出家에 의한 削髮染衣(삭발염의)에 의해서 社會로부터 원천 分離시키는 것이다.

 

4). 欲界 煩惱의 동기와 모습

이렇게 强度가 높은 煩惱 欲界 煩惱動機와 모습에는 3가지가 있다. [六六經]의 해당 부분에 欲界 煩惱動機6즉 느낌으로 명시되어 있었거니와 이때의 느낌도 바로 愛慾前提로 한 느낌이라고 보아야 한다.

즐거운 느낌 - 탐욕의 동기

괴로운 느낌 - 진에의 동기

중립적 느낌 - 치암의 동기가 된다는 六六經의 제시는 물론 愛慾前提한 것이다.

 

#정리하면

(1) 愛慾을 전제한 즐거운 느낌 - 애욕과 관련한 탐욕의 번뇌[欲界 貪 慾 煩惱]

(2) 愛慾을 전제한 괴로운 느낌 - 애욕과 관련한 진에의 번뇌[欲界 瞋 恚 煩惱]

(3) 愛慾을 전제한 중립적 느낌 - 애욕과 관련한 치암의 번뇌[欲界 癡 暗 煩惱]

 

@ 그래서 經典에서는 持續的으로 欲界를 구성하는 六根 六境 六識 六觸 六受 渴愛에 대해서 無常 하다고 보아야 하고, 싫어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瞋恚煩惱愛慾前提되어서 貪慾이 되고 貪慾前提되어서 忿怒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忿怒가 불길처럼 타오르게 된다. 이 단계가 되면 이제 瞋恚煩惱라고 부르는 것이다.

癡暗 煩惱도 이와 같다. 어떤 일(괴롭거나 즐거울 때)이 있을 때는 意識狀態活潑하게 움직이다가도 괴롭거나 즐거운 일이 없을 때는 멍하게 있는 상태가 癡暗煩惱이다. 아무 일도 없을 때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의 意識이 깨어있기가 매우 힘들다. 이것이 우둔함이며 바로 癡暗煩惱이다.

惡 業은 그 結果가 우리를 괴롭히지만, 煩惱煩惱 自體만으로도 우리를 타는 듯이 괴롭히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다.

 

# 애욕의 번뇌에서 해탈함

@ 이것이 可能하려면 基本的으로 愛慾보다 强力魅力 덩어리가 提示되어야 한다. 欲界貪 瞋 癡는 예를 들어 愛慾의 즐거움에 대한 貪慾은 그 自體를 두고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痲藥 中毒처럼 愛慾의 즐거움에 대한 執着 欲界 煩惱는 목숨 끊기보다 끊기 어렵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목숨을 바칠 만큼 지독하다. 마치 밭에서 잡초를 없애려 아무리 애를 써도 또 나고 또 나는 것과 같다.

欲界 煩惱도 잡초와 같아 죽이면 죽일수록 더 한 놈이 나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다른 宗敎에서도 다 禁慾하라고 한다. 다시 말해 愛慾에의 즐거움을 포기하라고 한다. 그러나 具體的으로 어떤 방법으로 愛慾의 즐거움을 떨쳐내는 것에 成功할 수 있겠는가?

@ 부처님 經說의 위대함은 代案 論에 있다. 무언가를 부정할 때는 (1) 부정할 수밖에 없는 根據(2) 부정하고 난 뒤의 그 자리를 채울 代案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欲界 煩惱除去하기 위해서는 欲界愛慾보다 더 하고 질 좋은 즐거움을 안겨다 주는 무언가를 成就하는 길인 것이다.

바로 이런 것 딱 한 가지만이 欲界 煩惱에서 解脫하게 해준다고 말한 것으로서 그것은 바로 色界의 즐거움이다. 이것만이 欲界執着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 로서 부처님 四寸이자 제자인 난다比丘 이야기가 있다.

이 난다比丘에게는 天下絶色婦人 있었는데 이런 婦人을 두고 出家하였다. 그러나 出家 後에도 그 아내 생각에 전혀 修行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난다比丘煩惱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먼저 원숭이 나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는 늙고 눈먼 암컷 원숭이가 있는데 마침 그 원숭이 나라에 불이 났으며 그 늙고 눈먼 원숭이는 불을 피하지 못해서 火傷을 입은 채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여주고 나서 난다比丘의 아내와 그 불에 火傷을 입은 늙고 눈먼 암컷 원숭이와 比較해서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우냐고 묻는다. 당연히 아내가 더 아름답다고 대답한다.

 

다음으로 33으로 데리고 가서 天女 중에서도 으뜸인 天上舞姬를 보여준다. 그리고 天上舞姬와 난다比丘의 아내를 比較하게 한다. 그러자 난다比丘天上舞姬와 아내와의 比較는 아내와 火傷 입은 눈먼 암컷 늙은 원숭이의 比較와 같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네가 깨달음을 얻으면 天上舞姬 500명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날부터 난다比丘는 아내는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修行에만 勇猛精進(용맹정진)을 한다. 그러자 다른 比丘들이 난다比丘를 비방하기를 난다는 장사꾼이다. 를 팔아서 愛慾을 구하려 한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난다 比丘는 개의치 않고 勇猛 精進하여 드디어 깨달음을 얻고서야 모든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認可를 받는 자리에서 부처님이 500명의 天上舞姬를 받겠느냐고 하자 빙긋이 웃으며 부처님의 그 말씀은 方便임을 이미 알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欲界煩惱는 그보다 더 즐거운 色界의 즐거움만이 이를 除去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色界의 즐거움을 안 에는 欲界의 즐거움이란 나를 찌르는 가시라고 알게 된다고 한다.

@ 色界의 즐거움만 얻는다면 欲界貪慾瞋恚癡暗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정확히 말하면 定中所現色界 즐거움이다.

앞으로 분별하겠지만 色界의 즐거움에는 定中所現色界 즐거움과 六根未生前色界 즐거움(色界貪 瞋 癡를 일으키는 根據가 되는 즐거움)이 있다. 定中所現의 즐거움과 六根未生前色界 즐거움은 그 强度가 같다. 强度는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해탈의 다섯 단계에 대해서 알아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解脫의 다섯 단계는 外道에서의 解脫惡業에 의한 苦果에서의 解脫欲界 煩惱에 의한 苦受에서의 解脫色界 煩惱에 의한 苦諦에서의 解脫無色界 煩惱에 의한 苦蘊에서의 解脫로 되어 있지만 大乘에서는 미세 煩惱에 의한 苦厄에서의 解脫金剛經에서 말하는 解脫인지도 모른다.

 

@ 1) 첫째 定中所現色界 즐거움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 이 중 定中所現色界三昧를 뜻하고 色界三昧色界四禪을 뜻하며 이 境地를 얻으려면 예비 修行 다섯 단계(계본방호. 감관방호. 정념정지. 소욕지족. 원리오개)助道修行(四念處로부터 八正道까지) 일곱 단계를 마스터해야 한다.

이 조도수행은 色界4에서 중간중간에 실시되는 것이지 아예 미리 조도수행을 끝내고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2). 色界三昧 속에서 느껴지는 存在의 맛煩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三昧는 그 자체로 煩惱除去하는 修行이므로 맛이 있다 하더라도 맛에 執着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맛을 느낄 뿐이지 그 맛에 執着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본래 執着이란 執着할만한 것을 執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執着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뿐만 아니라 色界 차원의 修行者들도 色界 三昧 속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에는 執着하지 않는다.

이는 執着할 수 없는 일종이 보호막을 형성하고 즐거움이 進行되기 때문이다. 色界三昧修行으로 얻어지는 즐거움은 단지 그 아랫 단계의 煩惱制壓하는 공능 만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惡 業에서의 解脫善 業成就함으로써 惡 業에서 解脫할 수 있고 欲界 煩惱에서의 解脫色界 三昧의 즐거움을 成就하므로 서 解脫할 수 있다.

@ 2) 둘째 六根未生 前의 즐거움愛慾보다도 强度하므로 더 强力. . 癡 煩惱가 예상된다. 色界 煩惱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色界 煩惱와 그 解脫에 대해서 살펴보자.

 

4. 색계 번뇌에서의 해탈(五蘊 四諦說 法門)

 

첫 단계 外道 思想에 대해 미련 없이 부정했고 둘째 단계 惡 業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셋째 단계 欲界 煩惱에서 解脫했으면 넷째 단계色界 煩惱에서 解脫하는 것이다. 이것이 解脫· 이고 阿含經이다.

 

色界 次元煩惱를 살필 때도 1. 色界意味 2. 煩惱의 말뜻 3. 煩惱强度 4. 色界 煩惱動機와 모습 등 4가지를 살피면 된다.

 

1). 색계의 의미 : 色界色執이 지배하는 領域으로서 색집(rupa)이란 物質的 存在 그 자체의 맛에 대한 執着을 특징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色界과 가장 닮은 色 受 想 行 識(五蘊)에서의 이다. 色界色執이 지배하는 領域으로서 五蘊 四諦說色界連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無色界物質이 존재하지 않는 世界가 아니라 物質的執着이 없는 世界라고 理解하는 것이 훨씬 理解하기에 편한 것이다.

그래서 色界에서의 존재의 맛이란 物質 自體가 뿜어내는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存在란 자신의 바탕 즉 으로 되어있는 몸을 바탕으로 煩惱가 발생하고 있다. 이제 外部로부터 완전히 자신의 內部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自身對象이 주고받아야 發生했으며 欲界煩惱는 발생의 原因이 되는 對象이 밖에 있으면서 그 原因 때문에, 自身內部에서 煩惱發生했지만, 色界에 와서는 아예 外部와는 斷絶된 상태에서 자신의 內部에서 物質的 바탕의 土臺 위에서 發生하는 執着으로 인한 煩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無色界物質存在하지않는 世界가 아니라 物質的 土臺 이외의 그 무엇이 對象이 되어서 發生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가 있게 된다.

生命이란 物質的 土臺 위에 作用하는 精神的 作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物質精神은 항상 함께 있어야지 單獨으로 存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死後精神과 몸이 떨어져서 存在하는 時間은 없으며 바뀌어 질 때는 이라는 것이다.

 

2). 번뇌의 말뜻: 欲界 煩惱와 같다.

3). 번뇌의 강도

煩惱强度欲界 煩惱보다 더 해졌다, 라고 알면 된다. 强度比較欲界의 즐거움에 비해 色界存在 自體의 맛은 월등히 뛰어나다.

現在 우리는 六根六境을 보고 느끼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自身存在에 대하여 느끼는 맛에는 둔감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을 느낄 수 있는 단계가 있다. 이 느낌은 自身存在가 무너지려고 할 때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經典에서는 存在의 맛이란 存在 自體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상상하기 어려운 奧妙한 맛을 뜻하는데 굳이 比喩를 들면 다음과 같다.

 

빚에서 벗어남. 병에서 회복됨. 감옥에서 풀려남. 종의 신분에서 해방됨. 그리고 鬼道에서 탈출함이다.

 

欲界에서 벗어나 얻게 되는 色界存在가 지니는 맛은 비유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欲界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빚이고 이고 監獄이고 종이고 鬼道라는 것이다.

色界는 그곳에서 벗어난 安心境地이니 그것이 存在 自體가 지니는 깊은 맛이다.

 

4). 색계 번뇌의 동기와 모습

이런 存在의 맛2가지 경우로 느껴진다.

그것은 (1) 定中所現 (2) 六根未生 前의 경우로서 그중에서 煩惱動機가 되는 것은 당연히 (2) 번의 六根未生 前色執이다.

六根未生 前이란 바로 五聚蘊이라는 것이다. 五聚蘊이란 12緣起에서 六處發生하기 以前의 이야기 이므로 당연히 六根未生 前이 되는 것이다. 현장스님의 新譯 以前에는 (skanda)이라고 번역했다.

 

이란 六根 六境世界라면 이란 그 以前世界를 의미하며 숨어서 드러나지 않은 世界를 뜻하므로 五陰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훨씬 理解하기에 쉽다고 할 수 있다.

原理를 받아들이면 空間的으로 드러난 世界이고 은 숨은 世界라면 이는 時間的으로는 지금 世界以前世界로 치환할 수가 있다. 따라서 六根 六境이 지금의 世界라면 五蘊過去世界 六根 六境의 앞에 있는 世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취전경(五蘊四諦說 法門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주는 經典)이라는 經典色界 煩惱와의 관련 속에 소개한 것이다. 한번 읽어보자.....

 

취전경은 앞의 육육경보다 더 專門的이다. 1>六根六境 以前의 소식인 五陰에 대하여 밝게 알고 얻음을 통해 正等覺者가 되었다는 全文2> 受聚蘊 - 六受身. 識聚蘊 - 六識身 등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라.

육육경을 마스터한 뒤에나 이 을 공부하게 된다는 순서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五聚蘊 단계에서 느껴지는 存在의 맛에는 執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맛도 五聚蘊無常하므로 變化가 있게 되며 이 變動이 있으므로 憤怒(분노)하는 煩惱도 생긴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色界 煩惱의 연구이다.

 

色界에는 즐거움만 있고 즐거움이 깨어지는 경우만 있지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는 없는데 어떻게 色界貪 瞋 癡가 발생하는가?

 

色界 三昧에서의 즐거움에는 執着하지 않는데 반해서 六根未生 前의 즐거움에는 强力하게 執着하게 된다. 그 이유는 色界의 즐거움에는 修行이라는 반작용이 있으므로 執着하지 않지만 六根未生 前修行이 없는 단계이니 피피낙착으로 바로 執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强力執着의 대상인 즐거움이 항상 얻어지지 않음에 의해서 色界瞋恚 煩惱發生하게 되는데 色界瞋恚六根未生 前의 즐거움이 强力한 만큼 이 色界瞋恚煩惱 또한 매우 强力하다.

 

# 육근미생전의 色執3가지 상태

欲界 煩惱動機3가지가 있어 欲界 貪 瞋 癡3가지 煩惱가 성립했듯이 色界 煩惱에도 그 動機3가지가 있어서 色界 貪 瞋 癡3가지 煩惱成立한다.

3가지 動機物質的 存在3가지 상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欲界에서 愛慾을 전제로 이야기할 때는 즐거움. 괴로움. 중립상태의 3가지 느낌이 있었지만, 物質的 存在 自體를 두고 살펴보면 1> 安定狀態 2> 不安狀態 3> 崩壞狀態(붕괴상태)3가지 狀態가 있다. 그리하여

1> 安定상태 - 色界 탐욕 번뇌

2> 不安상태 - 色界 진에 번뇌

3> 崩壞상태 - 色界 치암 번뇌가 각각 상응하게 된다.

 

五聚蘊物質的으로 3가지 상태를 거쳐 간다.

安定狀態. 不安狀態. 崩壞狀態이다. 不安狀態安定狀態를 오가다가 결국 崩壞狀態突入하여 끝이 난다. 그러나 각 狀態마다 그 양상이 다르다.

왜냐하면 色界라고 하여 物質만 있는 것이 아니라 物質精神이 혼합(混合)해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은 精神物質을 지배하지만 때때로 物質이 상황을 주도하고 精神補助者로 있는 경우 가 있다.

이러한 경우를 연상하면 色界理解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러할 경우 이제 그 3가지 경우에 대한 마음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 첫째 안정되었을 때오로지 存在의 맛에 대한 즐거움을 추구한다.

@ 둘째 불안할 때처절하게 安定 추구한다. 그러나

@ 셋째 결국 붕괴를 맞이하는데 이때상상할 수 없는 滅無(멸무)에 대한 恐怖絶望感에 빠져든다. 滅無에 대한 恐怖絶望感 속에서 좌절하는 것無明이라고 하는 것이며 癡暗 煩惱(치암 번뇌)라고 한다.

여기서

첫째 安定狀態 時 오로지 物質的 存在의 맛에 대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상황을 色界 貪慾 煩惱라고 부른다.

둘째 不安定狀態 時 불안한 마음으로 처절하게 安定을 추구하는 상황을 色界 瞋恚 煩惱라고 부른다.

셋째 崩壞狀態에 들면 滅無에 대한 恐怖絶望 속에 좌절하거니와 그것을 色界 癡暗 煩惱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色界煩惱 崩壞할 때 色執 처절하게 요동을 치는 것이다.

은 부서져도 色執無色界 4의 처방이 없이는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 그래서 輪回를 계속하는 것이다.

 

# 色界 煩惱에서 해탈함

이것이 可能하려면 이제는 基本的으로 物質的 存在의 맛보다 强力 魅力 덩어리가 提示되어야 한다.

色界貪 瞋 癡는 예를 들어 存在의 맛에 대한 貪慾은 그 自體를 두고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앞서 欲界 煩惱解脫事와 관련된 제안을 떠올리기 바람.)

이처럼 色界煩惱除去하기 위해서는 色界의 맛보다 더 하고 질 좋은 즐거움을 안겨주는 무언가를 成就하는 길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無色界의 즐거움이다. 이것만이 色界煩惱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

無色界의 즐거움만 얻는다면 色界貪慾瞋恚癡暗은 씻은 듯 사라진다. 정확히 말하면 定中所現無色界 즐거움이다.

앞으로 分別하겠지만 無色界의 즐거움에도 定中所現無色界 즐거움五蘊未生 前無色界 즐거움이 있다.

여기서

1) 첫째 定中所現無色界 즐거움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 定中所現無色界三昧를 뜻하고 無色界三昧四無色處를 뜻하며 이 境地를 얻으려면 豫備修行 5단계(계본방호. 감관방호. 정념정지. 소욕지족. 원리오개)助道修行(四念處 .... 八正道)일곱 단계 色界四禪마스터해야 한다.

<2> 無色界 三昧 속에서 느껴지는 自我의 즐거움(나라고 하는 그 自體의 즐거움)煩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空無邊處. 識無邊處. 無所有處. 非想非非想處進行하는 모습은 煩惱持續的으로 털어내는 모습이지 그것에 묶이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色界三昧 속에서 存在의 맛에 대한 耐性을 가지는 것처럼 無色界三昧 속에서는 自我의 즐거움이 뿜어대는 喜悅(희열)에 대한 耐性이 있다.

2) 둘째 五蘊未生 前의 즐거움은 그 强度하므로 더 强力貪 瞋 癡 煩惱가 예상된다. 無色界 煩惱가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煩惱發生 순서로 보면 당연히 無色界 煩惱가 먼저 생기는 것이고 그다음에 色界煩惱. 欲界煩惱. 惡業을 짓고 邪見發生하는 것이다.

이것이 12緣起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治療하기 위해서 밖에서부터 邪見. 惡業. 欲界 煩惱. 色界 煩惱. 無色界 煩惱를 치료하여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無色界 煩惱와 그 解脫에 대하여 살펴보자.

 

5. 無色界 번뇌에서의 해탈(십이 연기설 법문)

 

# 첫 단계 外道 思想에 대해 미련 없이 부정했고. 둘째 단계 惡 業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셋째 단계 欲界 煩惱에서 解脫했고. 넷째 단계 色界 煩惱에서조차 解脫했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다섯째 단계無色界 煩惱에서 解脫하는 것이다. 이것이 解脫· 이고 阿含經이다.

그러나 無色界 煩惱에서 解脫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바로 微細 煩惱마저 잡아내야 하니 그 과정이 대승의 육바라밀 法門이요 金剛經의 가르침이니 대승 반야부 경전의 가르침인 것이다.

 

# 無色界 次元煩惱를 살필 때도 1. 無色界意味 2. 煩惱의 말뜻 3. 煩惱强度 4. 無色界 煩惱動機와 모습 등 4가지를 살피면 된다.

 

1). 무색계의 의미 : 無色界無色執이 지배하는 領域으로서 無色執(arupiya)이란 한마디로 我執이다. 我執이란 自我와 관련된 에 대한 執着特徵的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리하여 無色界이 없는 世界라고 해서는 안 된다. 精神만이 獨存하는 世界存在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我執이 지배하는 世界라는 意味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我執色執을 불러오고 色執慾執(欲界貪慾)을 불러온 것이다.

 

2). 번뇌의 말뜻: 欲界色界의 경우와 같다.

 

3). 번뇌의 강도

無色界 煩惱强度色界 煩惱보다 더 해졌다, 라고 알면 된다. 强度比較欲界의 즐거움과 色界의 맛을 比較할 때처럼 色界의 맛이 빚. . 감옥. . 鬼道라면 無色界境地가 주는 즐거움은 그것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4). 무색계 번뇌의 동기와 모습

이러한 無色界의 즐거움(我執덩어리)2가지에서 나타난다.

1> 정중소현 2> 五蘊未生 前무색계의 즐거움이다.

그중에서 煩惱動機가 되는 것은 당연히 五蘊未生 前에 발생한 我執이다.

@ 欲界 煩惱動機에는 3가지가 있어 欲界 탐 진 치의 3가지 煩惱成立했듯이 無色界 煩惱에도 그 動機3가지가 있어서 色界 貪 瞋 癡3가지 煩惱成立한다.

@ 3가지 動機我執 덩어리(自我關聯)3가지 상태가 있기 때문이다. 愛慾을 전제로 할 때는 즐거움. 괴로움. 중립상태의 3가지 느낌이 있었고 色執을 전제로 할 때는 안정상태. 불안상태 붕괴상태가 있었는데 我執 덩어리(自我와 관련된 )에도 (1) 安定狀態 (2) 불안상태 (3) 붕괴상태의 3가지가 있다.

그래서 色界의 경우와 같이

(1) 安定狀態 - 無色界 탐욕 번뇌

(2) 不安狀態 - 無色界 진에 번뇌

(3) 崩壞狀態 - 無色界 치암 번뇌가 각각 상응하게 된다.

 

이처럼 色界無色界는 그 動機에 있어 형태상 닮은 데가 있으므로

<1> 傳統的으로 欲界區別해서 上二界로 통칭하여 부르고

<2> 欲界 天神deva라고 부르고 있는데 비해 色界無色界 天神은 묶어서 brahman이라고 表現하기도 했다. (본래는 色界 初禪天天神brahman이라고 한다.)

 

# 경전공부

자 이쯤에서 경전 공부를 해보자.

앞서 無色執自我와 관련된 에 대한 執着이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서 我執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단계의 我執色界 存在의 맛을 초월하는 즐거움을 지닌다는 점이다.

 

想受滅에서 얻는 즐거움이 眞我의 즐거움이다. 眞我(實相)의 즐거움만이 自我의 즐거움을 制壓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眞我의 즐거움이 워낙 强力하기 때문에 비록 眞我歪曲했다 하더라도 假我의 즐거움이 色界의 즐거움을 능가하기 때문에 假我執着하게 되어 我執發生하는 것이다.

어떻게 我執이 즐거움을 지니는가?

 

我執에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나 아닌 것나라고 잘못 보는 我執

둘째 나인 것(實相)나 아니라고 잘못 보는 我執이다.

실제 나인 것(實相)을 나 아니라고 잘못 보는 我執 前提되었기 때문에 나 아닌 것을 나로 보는 我執成立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인 것이라는 表現은 바로 實相(眞我)을 말한다. 實相不生不滅을 속성으로 한다. 이런 實相을 보고도 그것이 實相인 줄 모르는 것 곧 實相이 아니라고 잘못 보는 것으로서 바로 나인 것을 나 아니라고 잘못 보는 我執의 내용이다.

現實과 같은 日常的 次元 또는 表面的 次元에서의 我執은 첫째 단계의 我執이고(예를 들어 六根을 나라고 執着하는 것 등) 지금 無色界와 같은 奧妙境地에서 언급하는 我執은 바로 이 두 번째 性格我執을 말한다.

나인 것에 해당하는 實相前提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바로 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實相이 뿜어내는 莫强한 즐거움의 영향권에 드는 것이다.(이는 일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執着執着할만하니까 執着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켜서 貪 瞋 癡發生 되지만 그 執着最初 發生하는 단계에서는 좋은 것에 대해 좋기때문에 執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無色界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2가지 즐거움 중에 五蘊未生 前의 즐거움이 있다는데 그 五蘊未生 前은 어떤 段階인가? 그것은 바로 12緣起無明 行 識 支分을 암시하는 것이다.

12緣起(無明 - - - 名色 - 六處 - - - - - - - 老死)에서 六根 未生 前의 소식은 六處 以前의 단계가 된다.

따라서 五蘊 未生 前이라면 五蘊支分名色에 해당하는데 五蘊行支分이 있어서 12緣起行 支分에 해당한다고 우겨도 제아무리 올라가도 行 支分 까지 밖에는 올라가지 못하므로 12緣起에는 五蘊未生 前의 소식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 단계의 이러한 즐거움의 上向性九次第定의 점진적인 敎說內容에서 確認할 수 있다.

다섯 가지 愛慾을 연해 즐거움과 安心함이 한다. 愛慾의 즐거움보다는 -1의 즐거움 - 2의 즐거움 -3- 4- 空無邊處 - 識無邊處 - 無所有處 - 非想非非想處 - 想受滅具足 하여 지내는 즐거움이 가장 높다.”라는 經說이다.

 

五蘊未生 前이라는 단계는 바로 十二緣起無明 - - 識 支分暗示한다. 五蘊十二緣起에서 名色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名色은 반드시 無明 - - 識 支分前提해야 한다. 따라서 無色界煩惱五蘊未生 前의 모습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緣起 關聯經은 앞의 취전경보다 더 專門的이며 阿含에 있어 가장 窮極的이다. 이를 깨달음의 이라고 이름 붙인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無明 行 識 등의 단계에서는 執着自我에서 뿜어 나오는 즐거움에 執着하게 된다. 그리고 그 執着自我變動이 있으므로 忿怒하는 煩惱도 생긴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無色界 煩惱의 연구이다.

@ 집착된 自我 또한 3가지 상태를 거쳐 간다.

@ 安定狀態. 不安狀態. 崩壞狀態이다.

@ 不安狀態安定狀態를 오가다가 결국 崩壞狀態突入하여 끝난다.

@ 그런데 각狀態 마다 양상이 다르다.

@ 첫째 안정되었을 때오로지 自我의 즐거움에 한없이 執着한다.

@ 둘째 不安할 때처절히 安定을 추구한다.

@ 그러나 셋째 결국 붕괴를 맞이하는데 이때는 상상할 수 없는 滅無에 대한 恐怖絶望感에 빠져든다.

@ 여기서 첫째 安定狀態 時 自我의 즐거움에 한없이 執着하는 狀況無色界 貪慾 煩惱라고 부른다.

@ 둘째 不安定狀態 時 不安한 마음으로 오로지 安定을 추구하는 狀況無色界 瞋恚 煩惱라고 부른다.

@ 셋째 崩壞狀態에 들면 滅無에 대한 恐怖絶望 속에 좌절하거니와 그것을 無色界 癡暗 煩惱라고 부른다.

 

# 무색계 번뇌에서 해탈함

@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이제는 基本的으로 執着自我가 뿜어내는 즐거움보다 强力魅力 덩어리提示되어야 한다.

@ 그것은 바로 實相과의 合一의 즐거움이다. 이것만이 無色界煩惱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 實相과의 合一의 즐거움만 얻는다면 無色界貪慾瞋恚癡暗은 씻은 듯 사라진다.

@ 이처럼 實相과의 合一의 즐거움(영향권에만 들어도 그 즐거움이 엄청난데 그것과 合一했다는 것은 즐거움 自體가 되어 버렸다는 뜻 아니겠는가?)을 얻는 상태를 實相合一狀態라고 말하는 것이고

三昧의 입장에서는 想受滅 이라고 말하고

智慧의 입장에서는 漏盡通 이라고 말하고

境地의 입장에서는 涅槃이라고 말하고

人 施設의 입장에서는 阿羅漢이라고 말하고

解脫· 의 입장에서는 不動心 解脫 또는 非時 解脫이라고 말한다.

바로 生死 輪回에서 解脫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 에서는 惡魔(mara; 죽음이 )軍隊에게 勝利했다는 偈頌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阿含解脫· 完成되고 大乘에서 指摘하는 문제[微細煩惱에서 오는 苦厄]除外한 어떤 問題發生하지 않는다.

 

微細煩惱 때문에 苦厄發生하니 이 苦厄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大乘에서는 成就를 요구하고 있다. 이란 말 그대로 가는 것이다.

어떻게 가는 것이란 말인가?

이란 이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涅槃에 머무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머무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것이 般若部 經典에서 이야기하는 內容인 것으로서 어떻게 가는 것이 涅槃에 머물지 않고 가는 것인가? 이것이 大乘의 가르침의 내용인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인 점교성을 바탕으로 한 敎說이다. 따라서 大乘 특히 初期大乘經典非 佛說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發想이다.

여기(阿含)서도 어떻게 解脫할 것인가가 問題인데 그것을 解決하는 方法三昧法인 것이다.

이제 삼매법에 대하여 관찰해보자.

 

三昧法

1. 정의:

善心一境性(kusala-citta-ekaggata; kuaala-citta-eka-agra-ta)으로서의 三昧道德的價値를 지닐 때만 三昧라고 부른다. 그래서 善心일 때만이 三昧라고 할 수 있으며 善心이란 부처님의 을 실천할 때만을 善心이라고 할 수 있다.

戒律이라는 말도 cilla라는 말인데 이는 버릇을 뜻하는 말로서 좋은 버릇을 戒律이라고 하는 것이다.

 

2. 날개:

善心一境 性目的地까지 날아가게 하는 수단이므로 날개라 한다. 三昧를 둘로 나누면 이다.

三昧智慧를 얻기 위한 수단이며 智慧 또한 解脫을 위한 수단이지 三昧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특별한 경우 戒定慧처럼 智慧까지만 설명하는 경우는 目的이 되지만 佛法에서 智慧解脫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善心一境 性을 몸통이라면 移送手段으로서 目的地 까지 移送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날아가는 것이고 날아가려면 날개가 있어야 하니 날개로 하여 三昧에 드는 것을 말한다.

 

1) (samatha; 살피다가 멈추는 것): 그냥 멈추는 것이 아니고 살피다가 멈추는 것.

2) (vipasyana; 멈추어 있다가 살피는 것): 멈추어 있다가 살피는 것.

 

따라서 멈춤과 살핌이 항상 함께 있어야 하며 三昧의 몸통이 結果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날개짓을 해야 하는 것이 날개의 의미이니 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하는 한 set인 것이다.

 

3. 전제:

1) 有尋有伺 三昧(- vitarka; 세세한 사유<義說을 다 살피는 것 - 책으로 치자면 전체 내용을 다 살피는 것>)

2) 無尋有伺 三昧(- vicara; 굵직한 사유<法說만을 짚고 가는 것 - 주제만 훑고 지나가는 것>)

法說이란 부처님 主題를 말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五蘊. . . . 이라고 하는 것은 法說이고 을 다시 세세하게 설명한 것을 義說이라고 한다.

3) 無尋無伺 三昧(義說法說을 다 살피고 나서 더 이상 思惟할 것이 없으면 멈추어 集中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이 三昧集中이요 또한 善心一境 性이다.)

 

3三昧뜻하는 것은 三昧에는 반드시 前提가 되는 바로 치밀한 論理的 思惟가 있음을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오리무중의 마음 길을 더듬는 것은 참으로 위태롭다. 이때 論理的 思惟는 바른길을 안내하는 유일한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有尋有伺無尋有伺思惟의 단계이지 三昧라고 할 수 없으나 이것을 三昧라고 불러주는 理由三昧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과정이므로 三昧라고 불러주는 것이다.

참고로 色 受 想 行 識 등은 法說이며 四大라든가 四大造色이라든가 육식신 육유신 육상신 등과 같이 자세한 내용은 義說이라고 하는 것이다.

 

4. 연습: 삼매에 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 연습 대상으로서 의욕(chanda). 정진(virya). 마음(citta). 사유(vimamsa)의 삼매가 있다.

 

1) 意慾; 하고 싶은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의미의 三昧.

2) 精進; 해야 할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의미의 三昧(통일. 집중. 정돈).

3) 마음; 이때의 마음은 感情的 領域의 마음을 특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서 감정의 흔들림의 三昧(자제. 통제. 억제):사량의 삼매라고도 함; 감정의 흔들림 - 병적일 경우는(우울증 조울증)이 발생함. 병적일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웃었다 울었다가 너무 자주 반복되면 아니 된다. 감정조절의 상태에서 삼매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임.

언제나 옅은 미소로 일관하는 얼굴표정(감정의 외적 형태 = 얼굴 표정의 내적 형태 감정 표현; 마치 안의 말이 생각이고 바깥으로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말인 것처럼)

4) 思惟; 理性의 흔들림의 三昧(자제. 통제. 억제): 理性의 흔들림 - 지나친 空想. 妄想 또는 멍하니 넋 놓고 있는 것.

또는 지나치게 樂觀的으로 생각하거나 悲觀的으로 생각(근심. 걱정)하는 경우. 병적일 경우 자폐(자기 생각의 세계에만 사로잡히는 것. 이런 일들을 제대로 처리해야 한다.

 

方法: 쓸데없는 공상에 빠진다고 판단되면 제일 좋은 방법은 염불하는 것이다. 놀 때. 잘 때. 깰 때. 세 때에 염불해라. 그리하여 思惟能力을 하나로 集中하라.

三昧三要素로서 入定 定中 出定이 있는데 出定이란 自意에 의해서 出定해야 三昧이지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妨害를 받아서 出定한다면 三昧가 아니라는 말이다.

 

5. 모습: 三昧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기쁨의 충만함(piti-pharanata): 精神的인 즐거움을 기쁨이라함.

2) 즐거움의 충만함(sukha-pharanata): 肉體的인 편안함을 말함.

3) 의도의 충만함(ceto-pharanata): 意圖를 말함. 機敏함을 가지고 있어야 함. 方向自由自在로 바꿀 수 있고 自由自在 해야 함.

4) 빛의 충만함(aloka-pharanata):知的으로도 情緖的으로 意志的으로 肉體的으로 充滿 했을 때 나타나는 表情에 나타나는 환함을 말함.

따라서 情緖的充滿함을 기쁨의 충만함이라고 하고 肉體的으로 情緖的으로 充滿함을 즐거움의 충만함이라고 하고 意志的으로 충만함을 意圖充滿함이라고 표현하는데 의도는 반드시 意圖라야 한다.

5) 성찰의 모습(paccavekkhana-nimittam):知的部分充滿함을 성찰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임.

 

6. 절차(覺支) - 가장 一般的인 절차

1) - 2) 澤法 - 3) 精進 - 4) 기쁨<> - 5) 경안 6) 삼매 - [7) ()각지]

 

1) 기억(); 삼매에 들려면 우선 부처님의 말씀을 의미 있는 방법까지 記憶해야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이 필요하면 책을 보면 된다. 그러나 옛날 부처님 당시에는 책이 없었다. 오직 記憶하는 방법 뿐 이었다.

따라서 記憶하는데 있어서의 네 가지 범주(四念處)[한마디로 괴로움과 그 괴로움에서의 해탈과 관련된 범주였다. 왜냐하면 四念處(신수심법) 1> 괴로움의 발생과정. 2> 괴로움의 성립. 3> 해탈의 동인. 4> 해탈의 성취]라는 네 가지 범주의 부처님 말씀들을 완벽하게 記憶하고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것이다.

2) 택법; 그 다양한 말씀 중에서 당회의 坐禪에서 살필 을 선택하는 것. 그래서 念法 다음에 擇法이 나온 것이다.

3) 정진; 主題意味가 확연해질 때까지 불굴의 의지로 勇猛 精進한다.

4) 기쁨; 그렇게 勇猛精進하면 精神的安定感과 기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5) 경안(즐거움); 精神的安定感과 기쁨이 오면 이어서 肉體的인 편안함과 즐거움이 느껴진다.

6) 삼매; 이상의 다섯 가지 要件들이 순차적으로 圓滿하게 벌어졌을 때 비로소 色界수준의 三昧가 시작된다.

 

부처님의 正 三昧는 언제나 똑같은 즐거움에 드는 상황이 와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잘못된 수순이 된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발견되어야 한다.

 

7. 절차(법성): 惡 業에의 연루 가능성이 있는 자는 다음 순서에 입각하여야 함.

1) 계율 지킴 2) 후회 없음 3) 마음의 편함 4) 마음의 기쁨 5) 몸의 편함 6) 몸의 즐거움 7) 삼매

戒定慧의 확장일 수 있음.

 

8. 절차(정도): 생활인을 위한 절차를 포함한 순서

1) 정견 2) 정사유 3) 정어 4) 정업 5) 정명 6) 정정진 7) 정념 8) 정삼매

생활인을 위한 절차라고 한 이유는 正業定命 때문이다. 여기서 正業職業을 뜻한다. 正命은 바른 生活을 뜻한다.

 

9. 단계: 구차제정의 아홉 단계.

 

10. 요소: 삼매(samadhi)에는

1). 입정(samapatti):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삼매에 드는 것을 入定이라고 말함.

2). 정중(thiti): 이것이 三昧에 들어있음을 말함. 이는 나중에 持續力이라는 지속시간과 연관됨.

3). 출정(vutthana): 自意에 의한 出定이라야 적법한 三昧라고 할 수 있음.

4). 상응(kallita): 주변 여건이 三昧에 들 수 있는 적정성을 유지할 것. 여건이 좋지 않으면 自意에 의한 出定을 이룰 수 없음. 특히 出定妨害받지 않을 與件이 필요함.

5). 대상(arammana): 택법에 의해서 선택된 법. 大乘에서는 話頭가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음. 위파사나에서는 業處(kammatthana)가 대상임. 예를 들면 지수화풍. 청황적백 등이 삼매의 대상이 된다. 여하튼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만이 대상이 된다.

6). 행경(gocara): 유효 반경을 뜻함. 어떤 三昧나 그 三昧가 카바 하는 범위가 있다. 예를 들어 色界4B구릅에서 意成智神足通. 空無邊處에서 天耳通 識無邊處에서 他心通 하는 식으로 유효한 범위가 주어져 있다. 이러한 유효범위를 행경이라고 한다.

7). 인발(abhinihara): 그래도 三昧는 그자체로 스트레스이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니 스트레스 일 수밖에 없다. 그 스트레스를 참으라는 것. 이것이 발전한 것이 忍辱 바라밀인데 忍辱이란 三昧에서의 지극한 스트레스를 참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라는 덕목이 하나 추가 된 것이다.

8). 품위(sakkaccakari): 道德的 價値品位를 가져야 한다는 것. [道場莊嚴된 것도 이 뜻일 것 같음.]

9). 지속력(sataccakari): 三昧란 그 持續時間이 매회 最小 50분은 되어야 三昧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結果趺坐(결과부좌)가 필요한 것이다. 힘의 分散圓滿하기 때문에 오래 持續할 수 있다.

10). 적응력(sappayakari): 三昧는 고형화되어 딱딱한 것이 아니고 유들유들한 유연한 형태이어야 하는 것. 變形可能하고 變化可能適應力을 갖춘 것이어야 한다는 것. 참고로 구차제정을 참작해보자.

 

구차제정

중니카야 29P 74

다섯 가지 愛慾해 즐거움과 안심함이 생긴다. 愛慾의 즐거움보다는 - 1의 즐거움 - 2의 즐거움 - 3의 즐거움 - 4의 즐거움 - 空無邊處 - 識無邊處 - 無所有處 -非想非非想處 - 想受滅具足 하여 지내는 즐거움이 가장 높다.

우리의 목표가 離苦得樂 이듯이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1은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 함 - 2이 그의 극복임

2은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 함 - 3이 그의 극복임

3은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 함 - 4이 그의 극복임

4은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 함 - 空無邊處가 그의 극복임

空無邊處는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 함 - 識無邊處가 그의 극복

識無邊處는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 함 - 無所有處가 그의 극복

無所有處는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 함 - 非常非非常處가 그의 극복

非常非非常처마저도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 함 - 想受滅이 그의 버림(pahana); 想受滅 에는 조금의 結縛도 볼 수 없음.

 

1에 들고 제1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2에 들고 제2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3에 들고 제3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4에 들고 제4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空無邊處에 들고 空無邊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識無邊處에 들고 識無邊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無所有處에 들고 無所有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非想非非想處에 들고 非想非非想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想受滅에 들어 지내고 智慧로 보아 諸漏를 다한다. (삼매)에서 記憶을 갖춘 채 일어나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없다가 合生한 것이고 있으면서 느껴진 것이라고 안다.

그리하여 그런 일들에서 解脫한다. 더 이상의 出離는 없다고 알아낸다. 더 지어야 할 것이 그에게는 없다. 舍利弗스러운 戒 定 慧 解脫에 있어 自在를 얻고 건너편에 이른 이고 世尊의 아들이고 相續 者이다.

 

1을 구족 하여 지낼 때 正士- 世尊께서는 제1을 갖춤에서 渴愛를 떠남을 말씀하셨다. - 라고 생각하여 正士渴愛를 떠남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제1을 갖춤에서 自讚毁他(자찬훼타) 하지 않는다.

2- 3- 4-空無邊處 - 識無邊處 - 無所有處 - 非想非非想處 - 正士非想非非想處을 넘어 想受滅具足 하여 지낸다. 그는 智慧로 보아 諸漏를 다한다. 比丘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어디에서도 무엇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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