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正道와 八解脫과 沙門四果의 관계
팔정도(八正道)와 팔해탈(八解脫)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되면 이제 팔정도와 팔해탈과 사문사과(沙門四果)의 관계에 대하여도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팔정도는 어떻게 팔해탈과 만나게 되며 사문사과와는 어떤 관계에 있나. 우리가 불교대학과정에서 팔정도(八正道)에 대하여 배우고 나면 그다음은 八正道라는 말은 사라지고 그 어디에서도 八正道라는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사찰을 찾아가 보아도 그 어디에도 八正道라는 이야기는 없고 겨우 주춧돌을 팔각으로 만들어서 팔각의 각 면(面)에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겨우 볼 정도이다.
그림에도 없으며 설명도 없다. 그 어디에서도 八正道를 찾아볼 수 없으며 설명들을 기회조차 없는 것이 八正道라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일반 재가불자에게 하는 법문을 들어보면 八正道에 의해서 생활하라고 하면서 마치 재가불자가 일반수행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 八正道인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일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물론 팔정도는 일반 재가자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행하는 데에도 팔정도의 수행이 적용될 수 있도록 방편으로 의설로서 설명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八正道의 본래의 깊은 뜻은 그렇게 쉬운 일반적인 수행에 필요한 단계가 아니라 전문적인 수행자가 그것도 색계(色界)의 단계에 오른 수행자가 무색계(無色界)로 가기 위한 37조도수행의 마지막 단계가 八正道임을 안다면 깜짝 놀랄 일일 것이다.
37조도수행이란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도와주는 보조수행법으로 4념처. 4정근. 4신족. 5근. 5력. 7각지. 8정도를 말하며 항목의 수가 모두 합하여 37가지가 된다고 하여 37조도수행이라고 한다.
본래 팔정도(八正道)는 부처님이 설한 해탈을 위한 수행중의 한 부분이며 팔해탈(八解脫)이란 지혜(智慧)차원에서 분류한 해탈의 과정을 설명한 내용이며 이 과정에서 수행자가 수행의 결과를 얻는 과정을 인시설로 분류한 것이 사문사과(沙門四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팔해탈(八解脫)과 팔정도(八正道) 그리고 사문사과(沙門四果)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정견(正見):
정견(正見)은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 단계로서 색계4선의 B그룹에서 관지(觀智)가 발생하는 단계가 정견(正見)인 것이다.
팔해탈(八解脫)의 첫 번째 단계가 관지(觀智)인데 이 상태에서는 정견(正見)으로 보기 시작된 것이며 이제 팔정도의 수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면 팔해탈(八解脫) 중에서 의성지(意成智)가 발생하는 단계에 들어야 한다.
그 단계를 알려면 먼저 첫 번째 해탈이라고 할 수 있는 색계(色界)에서 처음으로 얻는 지혜인 관지(觀智)를 알아야 하며 그래야 八正道의 정견(正見)의 단계란 바로 팔해탈(八解脫)의 관지(觀智)를 얻은 단계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관지(觀智):
색계4선의 A구릅은 색계3선에서 본 18계의 실상(實相)과 하나가 됨으로서 실상(實相)이 보이는 단계 즉 실상의 內面을 아는 단계(18界가 됨으로서 實想의 내면을 아는 단계로서 어떤 對象을 완전히 알려면 그 對象이 되어보는 것이 완전한 앎이라는 뜻)이다.
즉 대상으로서의 실상(實相)과 실상(實相)발견의 주체가 하나 되는 것에 의해서 지혜(智慧)가 발생하니 이것이 관지(觀智)이다.
다시 말하면 색계4선의 A구릅에서 무운천(無雲天). 복생천(福生天). 광과천(廣果天)으로 깊어지면서 실상(實相)을 중층 구조인18界로 보는 단계에서 사대(四大)와 단층구조인 육계(六界)로 분석되면서 육법성(六法性)이 살아지는데 이는 想이 살아진 것이며 이때 관지(觀智)가 발생하며 이 단계가 색계4선의 무상천(無想天)이다.
18界로 봄은 덩어리로 보는 것이고 사대(四大)로 본다는 것은 이를 분석해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덩어리로 보는 것을 想이라고 하는데 이를 분석해서 봄으로 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18界에서는 육근 육경이라는 주관과 대상의 이분법적 관념에서 地水火風의 四大로 봄에 따라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이 사라지는 단계가 된다.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면 18계차원의 번민(煩悶)과 열뇌(熱惱)는 사라짐으로 오취온(五聚蘊)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무상천(無想天)이 진행된다.
이 단계까지는 육법성이 사라진 주관과 객관이 사라진 想이 없는 그러한 단계이다. 따라서 想이 사라지는 것이 무상천(無想天)의 단계이다. 色界를 주관하는 것은 의(意)이고 無色界를 주관하는 것은 상(想)이라고 하였다(참조; 디가 니카야 실라칸다 왁가 P342-24<최 봉수 저>).
그러나 이 무상천(無想天)은 순간적으로 생했다가 순식간에 살아지게 되므로 해서 무상천(無想天)이 오정거천(五淨居天)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며 색계 17天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존재하지 않으니 있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있기는 있으니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가 된다(참조: 디가 니카야 실라칸다 왁가P113-68<최 봉수 저>. 無想天 衆生은 생각이 일어나면 죽는다. 無想天은 過渡期的이고 찰나적이다).
그 이유는 四大와 六界로 분석함으로서 想이 사라지는 것도 잠시이고 이는 다시 五蘊(색 수 상 행 식)으로 분석되면서 오취온(五聚蘊)으로 상(想)이 다시 나타나게 되니 무상천(無想天)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즉 四大로 분석함에 따라 六界가 나타나면서 이를 잘못 봄에 따라 五蘊이 발생하는데 여기에 애착이 붙어 오취온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想은 색계3선에서의 想과는 좀 다른 경지가 깊어진 그런 想이 된다(想도 진화한다).
정견(正見):
이 오취온은 사라져야하는 것인데 이때 오취온도 괴로워서 無我라는 것은 이제 자동으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진아(眞我)는 어디에 있을까하고 삼매(三昧)에 들게 된다. 이것이 정정(正定)에 해당하게 된다.
이 오취온(五聚蘊)이 사라지려면 팔정도의 정견(正見)이 시작되어야하니 이것이 바로 경전에 있는 “五聚蘊을 無我라고 보는 것을 正見이라고 한다.” 라고 되어있는 것이다.
즉 “五聚蘊은 無常하기 때문에 결국은 苦이며 無常하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정견(無我正見)이라는 것이며 팔정도는 사제법(四諦法) 중에서 도제(道諦)에 속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고(八苦) 즉 生. 老. 病. 死의 苦와 구득불고(求得不苦). 애별이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와 마지막에는 반드시 취요언지 오음성고(取要言之 五陰盛苦)라고 되어있다.
즉 取要言之 五陰盛苦라는 말은 “요약해서 말하자면 五聚蘊이 苦”라는 뜻이다. 오음(五陰)이 성(盛)해서 고(苦)라는 뜻이 아니다. 오취온은 무상해서 결국은 고(苦)라는 뜻이다.
이처럼 오취온은 무상해서 苦이며 따라서 無我라고 보는 것이 正見이라는 것이며 여기에서 의성신(意成身)이 만들어지면서 의성지(意成智)가 발생하며 색계4선의 C구릅으로 넘어가서 선현천(善顯天). 선견천(善見天) 즉 “잘 봄이 있는(善顯天).” “잘 보인(善見天).” 라는 뜻의 하늘이름이 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계속해서 37조도법의 팔정도가 수행되면 그 경지가 깊어져서 색계2선의 삼매를 거쳐서 색계3선이 되듯이 색계4선 C구릅의 마지막 단계인 색구경천(色究竟天)에 가서 八正道의 8번째 단계인 정정(正定)에 의해서 신족통(神足通)이 발생하게 되며 따라서 무색계(無色界)로 넘어가게 된다.
따라서 이 팔정도의 正見은 色界4禪의 C구릅에 속하며 정정(正定)은 無色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意成智: 해당경전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또 그는 이와 같이 三昧에 들어 순백(純白)하고 순결(純潔)하고 흠이 없고 때가 없고 부드럽고 能動的이고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뜻으로 이루어진 몸을 향하여 마음을 쏟고 기울이게 되오.
그리하여 그는 이 몸으로부터 다른 몸을 바꾸어내게 되오. 곧 色을 지니고 뜻으로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부분들이 모두 갖추어 지고 感官이 열등하지 않는 몸을 바꾸어 내게 되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갈대 껍질로부터 갈대 속을 뽑아내고 ‘이것은 갈대 껍질이고 이것은 갈대 속이다. 갈대의 껍질과 갈대의 속은 서로 다르다. 갈대 껍질로부터 갈대 속이 뽑혀 나온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오.
또는 어떤 사람이 칼집에서 칼을 뽑고는 ‘이것은 칼이고 이것은 칼집이다. 칼과 칼집은 다르다. 칼집으로부터 칼이 뽑혀 나온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오. 또는 어떤 사람이 뱀의 허물을 벗겨내고는 ‘이것은 뱀이고 이것은 허물이다. 뱀과 허물은 다르다. 뱀으로부터 허물을 벗겨낸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오.
이와 같이 大王이여 그 比丘가 三昧에 들어 純白하고 純潔하고 흠이 없고 때가 없고 부드럽고 能動的이고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뜻으로 이루어진 몸을 향하여 마음을 쏟고 기울이게 되오.
그리하여 그는 이 몸으로부터 다른 몸을 바꾸어 내게 되오. 곧 色을 지니고 뜻으로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부분들이 모두 갖추어지고 感官이 열등하지 않는 몸을 바꾸어 내게 되오.”(참조: 디가 니카야 실라칸다 왁가<최 봉수 저> 87번 단락)
여기서 이 몸에서 나왔으며 이 몸과 는 다르나 이 몸으로부터라야 나온다는 뜻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 뜻으로 이루어진 몸(意成身)에서 나온 智慧 즉 의성지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수행을 통해서 밝혀야할 문제이다.
의성지(意成智)란 뜻으로 됨의 앎을 말하며 이 의성지(意成智)를 얻으려면 의성신(意成身)을 이루어야 하는데 의성신이란 색신(色身)으로부터 뽑혀져 나온 뜻으로 된 몸을 말하는 것이다.
의성지(意成智)를 얻게 되면 여기에서 미묘한 어떤 흐름에 의해서 색계4선의 C구릅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 意成智로부터 시작하여 C구릅으로 넘어가서 까지 작용하는 것이 37조도품의 마지막단계인 팔정도(八正道)의 수행을 적용하게 되는데 그중에 정견(正見)은 觀智에서 이미 이루었으므로 정사유(正思惟)의 단계가 이 단계에서 적용되며 이 결과에 의해서 신족통(神足通)을 얻게 되어 그 결과로 無色界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팔정도의 내용은 따로 떼어내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이 단계에서 오취온과 연관되어 설명되어야 마땅하다.
팔정도의 순서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정 삼매)인데 정견(正見)의 내용은 오취온(五聚蘊)을 무아(無我)라고 보는 것을 正見이라고 했다.
정사유(正思惟):
정사유(正思惟)의 원어는samyak-samkalpa 로서 samyak 는 바르다는 뜻이고 samkalpa에서 sam은 함께 라는 뜻이나 kalpa 는 사유(思惟)라는 뜻보다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구조적인 뉘앙스가 있다.
본래 kalpa 는 kappa 즉 겁파 = 겁이라는 단어에서 온 말로서 공간적으로 우주와 연결되는 시간단위의 이야기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mentro formation 즉 정신적인 변혁작용의 뜻이 담겨 있다.
이는 세상의 변화와 중생의 인식의 변화는 같이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다시 말하면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그렇게 인식하는 중생이 그 인식하는 순간에 변화된다는 말이 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kalpa는 무언가 변화된 어떤 틀 속에 인식의 주체를 맞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인지능력에다가 새로운 환경에 익숙하도록 맞추는 것의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正見한 주체(主體)로 구조적 대상(對象)에 일치시키는 것 즉 맞추는 것(예; 내 몸에 옷이라는 대상을 일치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주체가 정견을 통하여 바로 본 대상에 주체를 맞추는 것으로서 정신적 인지능력을 正見을 통하여 인식된 대상이 가지고 있는 구조에 맞추어 넣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정어(正語): 언어적인 생활도 새로운 정신적인 환경에 맞추는 것.
정업(正業): 행동도 새로운 정신적인 환경에 맞추는 것. 正業의 원어는 karmant로서 業의 끝 즉 궁극적인 業을 뜻함으로 이는 몸의 業을 뜻하는 것이 되므로 행동(行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正業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직업을 正業이라고 한다고 설한 경우도 있다. 여기까지는 身 口 意 三業처럼. 정사유는 의업(意業)에 해당하고 正語는 구업(口業)에 해당하며 正業은 신업(身業)에 해당한다.
정명(正命): 모든 생활자체가 새로운 정신적인 환경에 맞추는 것.
정정진(正精進): 위의 단계를 익숙해질 때 까지 계속하는 것.
정념. 정정(正念. 正定)은 사념처(四念處)에서 배운바와 같이 당연한 순서로서 간단히 설명하면 正念은 삼매의 바른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며 정정은 그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견을 하고 정념. 정정에 의해서 다음 단계로 가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나 이곳에서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등의 단계를 넣은 것은 이제까지 생각하고 생활하든 모든 습관 때문에 어떤 익숙해 질 때까지의 훈습과정(薰習過程)이 필요한 것 같다.
부처님의 많은 경설이 이 단계에 맞추어져서 설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마도 그 당시 제자들도 이 단계에서 많은 애로를 격은 것 같다. 따라서 無色界로의 넘어감은 神足通이라는 통(通)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智慧가 발생해야 함으로 매우 힘든 과정으로 생각 된다.
色界 第4禪 B구릅의 말미 무열천(無熱天)에서 오취온(五聚蘊)이 무아(無我)라고 봄에 의해서 비록 관지(觀智)를 넘어서 의성지(意成智)를 성취한 正見까지를 갖추었다고 하여도 正見만으로는 습관에 의한 결속은 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이루어진 행동에 의한 구조적인 왜곡을 풀 수는 없으므로 색계 제4선의 C구릅에서는 팔정도(八正道)에 의한 正定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색계4선의 C구릅의 말미에 정정(正定)에 의해서 신족통(神足通)을 얻게 되며 그 결과가 예류과(預流果)에 들게 되는 것이니 비로소 불완전하지만 어떤 열매라고 할 수 있다하여 부처님은 처음으로 과(果)라고 불러 주었으며 이때의 지혜(智慧)부터는 智慧라고 하지 않고 통(通)이라고 불러주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예류과에 든 수행자에게는 최소한 삼악취(三惡取; 지옥. 축생. 아귀의 生)에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주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때의 삼매부터는 정(定)이라고 하지 않고 처(處)라고 불러주고 있다.
따라서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순서와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상수멸과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는 서로 각각 그 순서가 유지되지만 별개가 아니고 각 단계가 서로 상관되는 보완적인 원인과 결과와 그 三昧의 이름 또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설명은 경전에 있는 신족통(神足通)의 설명을 음미해보면서 감지해야 할 것이다.
신족통(神足通):
“하나로 있다가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으로 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한다. 나타났다가 또 사라진다. 벽을 넘고 담을 넘고 산을 넘어 가기도 하니 마치 허공에서와 같다. 땅으로부터 솟기도 하고 잠기기도 하니 마치 물에서와 같다. 물에서는 빠지지 않고 가기도 하니 마치 허공에서와 같다.
허공에서는 가부좌를 한 채 나아가기도 하니 마치 날개 달린 새와 같다. 또한 저토록 큰 신통이 있고 저토록 큰 위엄이 있는 달과 해를 손으로 만지기도 한다. 그리고 범신(梵神)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 지배력을 미친다.”
라는 說明 중에서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다.(참조; 디가 니카야 실라칸다 왁가<최 봉수 저> p174.89 )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地水火風의 개념이 와해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地水火風과 허공이라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구조나 성질의 인식이 와해되는 것이다. 이는 흐름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흐름에 따른다는 것은 거기에는 근심. 걱정 등이 흐름에 따라 순응하는데 나타날 수 있는 불안이 있다.
이는 사신족(四神足)의 제3항의 근심. 걱정등과 닮아있다. 사신족 제4항에서는 이에 대한 논리적인 사색(思索)과 사려(思慮)가 뒤따르며 이를 완성하였을 때 라 야 모든 걱정이나 근심이 사라진다.
위의 의설(義說)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사유(思惟; manasikara)하지 않아” 라는 말속에는 생각들의 사유(思惟; manasikara)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고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는 설명으로서 이는 나중에 진아(眞我)를 발견하는데 문제가 됨에 따라 식무변처(識無邊處)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일 것이다.
신족통(神足通)이 발생함에 따라 無色界의 첫 번째 하늘인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게 되는데 이를 예류과(預流果)라고 하며 이는 신족통에 의해서 모든 상(想)이 사라졌지만 곧 공무변(空無邊)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에 이단계의 이름을 공무변처 정(空無邊處 定)이라고 함으로써 문제제기와 힌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수행단계의 이름으로 작용하게 함은 창조적인 착상이라고 할 수 있다.
空이 끝도 가도 없이 무한하다는 이 문제는 공무변처(空無邊處)의 문제 제기이며 이 말속에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힌트가 있다. 물론 공무변처에 대한 별도의 의설(義說)이 있다.
경전에서의 공무변처(空無邊處) 설명
1. 모든 色에 관한 생각을 넘고 (色想 rupa-sanna)
2. 걸림에 관한 생각을 넘고(걸림의 想 patigha-sanna)
3. 여러 가지 생각(想)을 사유(manasikara)하지 않아(想. 思惟)
4. 그래서 “虛空은 무한하다.”라고 보는 무한한 허공의 포섭처 에 든다.
위의 의설(義說)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사유(思惟; manasikara)하지 않아” 라는 말속에는 생각들의 사유(思惟; manasikara)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고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는 설명으로서 이는 나중에 식무변처(識無邊處)에서 문제가 된다.
이 공무변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천이통(天耳通)이라는 智慧가 필요하게 된다. 천이통(天耳通)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사문사과 경(四門四果 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이통(天耳通):
“비구는 삼매에 들어 순백하고 순결하고 흠이 없고 때가 없고 부드럽고 능동적이고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하늘 귀의 계층을 얻기 위해 마음을 쏟고 기울이게 되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깨끗한 하늘 귀를 가지고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하늘과 인간의 소리를 모두 듣소.”
그러나 위의 경설은 의설로서 천이통(天耳通)에 대한 비유이지 법설은 아니며 법설은 어디까지나 공무변처정이 법설이다. 다만 위에 있는 의설에서 주의 할 부분은 “하늘귀의계층(階層)을 얻는다.”라는 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천이통(天耳通)을 달성하면 이를 일래과(一來果)라고 하며 바로 닥치는 문제가 식무변(識無邊) 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를 식무변처 정(識無邊處 定)이라고 명칭을 부여한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는 확실한 명칭으로서 문제제기이며 힌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식무변(識無邊) 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심통(他心通)이라는 智慧가 필요하게 되며 타심통(他心通)에 대한 설명을 사문사과 경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타심통(他心通):
“비구는 이와 같이 삼매에 들어 순백하고 순결하고 흠이 없고 대가 없고 부드럽고 능동적이고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마음을 파악하는 앎을 얻기 위해 마음을 쏟고 기울이게 되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중생들과 다른 인간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파악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내게 되오. 곧 ‘탐착이 있는 마음은 탐착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내고 탐착을 떠난 마음은 탐착을 떠난 마음이라고 알아낸다. 성냄이 있는 마음은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내고 성냄을 떠난 마음은 성냄을 떠난 마음이라고 알아낸다.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은 어리석음을 지진 마음이라고 알아내고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은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이라고 알아낸다. 집중된 마음은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아내고 혼란한 마음은 혼란한 마음이라고 알아낸다.
위가 있는 마음은 위가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내고 위없는 마음은 위없는 마음이라고 알아낸다. 삼매에 든 마음은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알아내고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은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라고 알아낸다.
해탈한 마음은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아내고 해탈하지 않은 마음은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알아낸다.’ 바로 이와 같이 다른 중생의 마음을 파악하여 알아내게 되오.”(참조; 디가니카야 실라칸다 왁가<최 봉수 저>)
라고 설명하고 있는 여기서 주의 할 점은 타심통(他心通)의 단계에서 해탈한 마음을 알아낸다함은 무엇인가 비유해서 설명한 내용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타심통(他心通)을 얻으면 이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게 되는데 이를 불환과(不還果)라고 하며 여기에서 무소유(無所有)란 欲界나 色界에서의 所有의 개념이 아니라 행 또는 결합이라고 해석되는 samskhara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행유여등지(行有如等持)”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samskhara는 수행과 반대의 성질을 가진 용어이다. 즉 수행은 열반이 목적이므로 samskhara를 버리는 방향으로 바꾸어 가는 것인데 반하여 이 samskhara는 생(生)을 연장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면에서 이 samskhara가 문제가 된다. 열반을 무위법(無爲法) 그리고 生死가 있는 세상을 유위법(有爲法)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위(爲)란 samskhara가 이미 발생해버린 세계를 유위(有爲)라고 하며 따라서 samskhara가 없으면 무위(無爲)가 되며 samskhara가 있으면 유위(有爲)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하여 samskhara가 작용하면 붙게 되는데 이것이 물질적인 힘이 아니고 부처님은 이 samskhara를 지극히 정신적인 작용으로서 마음에서 온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무소유처 정(無所有處 定)을 벋어나기 위해서는 숙명통(宿命通)이라는 지혜가 필요한데 이 숙명통(宿命通)은 과거에 대한 智慧 즉 전생을 아는 智慧로서 이제까지는 空間的인 뜻의 智慧의 이름으로부터 時間的인 의미(意味)의 이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숙명통(宿命通)에 대한 설명을 사문사과 경에서 보면
숙명통(宿命通):
그 비구는 삼매에 들어 순백하고 純潔하고 흠이 없고 때가 없고 부드럽고 능동적이고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하는 앎을 얻기 위해 마음을 쏟고 기울이게 되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수많은 전생을 기억하게 되오. 곧 하나의 전생을 기억하기도 하고 또는 두 전생을 기억하기도 하고 또는 셋 전生을 기억하기도 하고 넷 전生을 기억하기도 하고 또는 다섯 전생을 기억하기도 하오.
또는 과거 열 번째 전생부터 기억하기도 하고 도는 스무 번째 전생 또는 서른 번째 전생 또는 마흔 번째 전생 또는 쉰 번째 전생 또는 백 번째 전생 또는 천 번째 전생 또는 십만 번째 전생 또는 수백 번째 전생 또는 수천 번째 전생 또는 수십만 번째 전생부터 기억하기도 하오.
또는 여러 겁의 생성과 소멸을 ‘어떤 곳에서는 이러한 이름 이러한 성씨 이러한 모습을 지녔고 이러한 음식을 먹었고 이러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었고 이만한 나이까지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어서 다른 곳에 태어났다. 그 다른 전생에서는 또 다시 저러한 이름 저러한 성씨 저러한 모습을 지녔고 저러한 음식을 먹었고 저러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었고 저러한 나이까지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어서 마침내 여기에 태어났다.’ 라고 기억하오.
이처럼 수많은 前生을 모든 면에서 조목조목 기억하고 있소.(참조; 디가 니카야 실라칸다 왁가<최 봉수 저>)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의설임을 주의해야 한다.
숙명통(宿命通)이 얻어지면 비상비비상처 정(非想非非想處 定)에 들게 되며 이때를 초입 아라한(初入 阿羅漢)이라고 하며 非想과 非非想이라는 문제제기가 행유여등지(行有如等持)라는 말과 같이 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러한 경지라는 뜻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智慧가 미래를 예측하는 智慧인 천안통(天眼通)이며 천안통을 얻으면 이를 주법 아라한(住法 阿羅漢)이라고 하며 천안통(天眼通)은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로서 사문사과 경에서 천안통(天眼通)의 설명을 보면
천안통(天眼通):
또 그 비구는 이와 같이 삼매에 들어 순결하고 순백하고 흠이 없고 때가 없고 부드럽고 능동적이고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중생들의 죽고 태어남에 관한 앎을 얻기 위해 마음을 쏟고 기울이게 되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깨끗한 하늘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며 열등하게 되거나 고상하게 되고 좋은 모습을 지니거나 추한 모습을 지니고 좋은 곳으로 가거나 나쁜 곳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되오.
그래서 중생들이 업에 따라 태어남을 다음과 같이 알아내게 되오.
‘실로 이 중생들은 몸과 말과 뜻으로 악행을 행하고 성인들을 헐뜯고 삿된 견해를 지니어 삿된 견해에 입각한 업과 받음이 있다. 그들은 몸이 부서져 죽은 뒤 즐거움으로부터 떠나 있는 곳 나쁜 곳 아래로 떨어져 있는 곳 또는 지옥에 태어난다.
그리고 저 중생들은 몸과 말과 뜻으로 선행을 행하고 성인들을 헐뜯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어 바른 견해에 입각한 업과 받음이 있다. 그들은 몸이 부서져 죽은 뒤 좋은 곳 또는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 라고 알아내게 되오.(참조; 디가 니카야 실라칸다 왁가<최 봉수 저>)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천안통(天眼通)을 얻게 되면 이를 주법 아라한(住法 阿羅漢)이라고 하며 상수멸정(想受滅定)에 들게 된다. 상수멸정(想受滅定)에서는 상·수(想·受)가 멸해야 하는 것이므로 이를 위해서는 누진통(漏盡通)이라는 智慧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 智慧로서 사문사과 경의 설명을 보면
누진통(漏盡通):
또 그는 이와 같이 삼매에 들어 순백하고 순결하고 흠이 없고 때가 없고 부드럽고 능동적이고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여러 역류함을 다하는 앎(漏盡通)을 얻기 위해 마음을 쏟고 기울이게 되오.
그리하여 그는 이것을 괴로움이라고 있는 대로 알아내고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라고 있는 대로 알아내고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이라고 있는 대로 알아내고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에 이르는 길이라고 있는 대로 알아내게 되오.
또 이것들은 역류함이라고 있는 대로 알아내고 이것은 역류함의 일어남이라고 있는 대로 알아내고 이것은 역류함의 사라짐이라고 있는 대로 알아내고 이것은 역류함의 사라짐에 이르는 길이라고 있는 대로 알아내게 되오.
그는 이와 같이 알고 보아 애욕의 역류함으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하고 존재의 역류함으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하고 밝힘 아닌 것의 역류함으로부터도 마음이 해탈하오.
이렇게 해탈한 데서 해탈했다는 앎이 있으니 “나의 삶은 다하고 청정한 수행은 완성되고 지을 바는 다 지었고 이러한 상태가 다시는 없다.” 라고 알아내게 되오.(참조; 디가 니카야 실라칸다 왁가<최 봉수 저>)
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누진통(漏盡通)을 얻음에 따라 부동아라한(不動阿羅漢; 일명 三明 阿羅漢)에 이르게 되며 이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三毒心이 멸함과 無明을 벗어남과 번뇌가 다함이 동시(同時)라는 것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삼독심(三毒心)과 번뇌(煩惱)와 무명(無明)은 모두 한 뿌리로서 삼독심과 번뇌는 점차로 줄어들고 엷어져지며 無明 또한 점진적(漸進的)으로 없어지고 엷어지면서 누진통(漏盡通)을 얻음에 따라 완전히 없어지니 이것을 명(明)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無明을 없애고 明을 얻는 다는 것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바뀌어 가면서 엷어져서 최종적으로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단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겠는가?
앎은 단번에 얻을 수 있으나 번뇌와 삼독심의 멸함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번뇌 중에서 anusaya처럼 정상적인 것 사이사이에 겹겹이 누워있는 번뇌라는 뜻에서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번뇌와 삼독심이 이렇게 인과관계를 맺으며 깊은 곳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하는데 얼마마한 정진이 필요하겠는가? 무릇 衆生이 이를 제거하려면 얼마마한 시공(時空)이 필요한 것인가?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삼독심과 번뇌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정진에 의해서 원(願)으로의 바뀜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불교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발원(發願)이라는 사실이다. 대원(大願)만이 삼독심과 번뇌를 녹여 원(願)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 여러분에게 작은 참고라도 되었으면 합니다. 성불하십시오.
東山法師團 惠山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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