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깊은 이야기

自燈明 法燈明

동산/혜산방 2011. 2. 18. 18:38

自燈明 法燈明(불교는 공부하는 종교요 스스로 알아가는 종교이다.)

 

우리가 불교신자로서 생활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보시나 남을 돕는 보살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는 을 짓는 일로서 부처님도 항상 강조하신 것입니다. 金剛經에서도 무려 다섯 개 품에서 에 대하여 강조하신 것을 보면 짓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강조하여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간다면 을 짓는 일이 우리를 輪回에서 解脫시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을 많이 지으면 다음 에 좀 더 나은 여건에 태어나서 正法을 다시 만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現世에서 깨달음을 얻어 輪回에서 解脫 涅槃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불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함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는 보리 즉 깨달음을 항상 구하는 생활을 하면서 중생에게도 권선(勸善)하여 함께 깨닫게 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재가불자들은 중생에게 勸善하고 보시하며 짓는 일은 열심히 하지만 깨달음을 구하는 일은 좀 멀리하는 것 같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출가하라고 하실 줄 모르지만 출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깨달음을 포기한다면 언제 이 輪回에서 벗어나시겠습니까.

 

또 불교는 상구보리는 스님들만이 하고 하화중생은 재가신도가 하는 분업화한 종교가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도 내가하는 것이고 중생제도를 하는 것도 내가하는 것이지 나를 대신해서 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유마힐 거사는 세속에 살면서도 부처님제자들을 힐난(詰難)할 정도로 깨달음을 證得한 사실이 경전을 통해서도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깨달음 쪽으로 노력하면서 보살행도 함께하는 불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을 앞두고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유명한 가르침을 내린 사실에 입각하여 부처님의 뜻을 이해해 보고 불교 전반과정을 섭렵해보고자 自燈明 法燈明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불교수행 전반에 관한 내용을 써보았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여러분의 수행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自燈明 法燈明

 

부처님이 涅槃을 앞두고 있을 때 아난존자는 부처님에게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이 涅槃하시고 나면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따르라고 하시겠습니까. 이때 부처님의 대답이 그 유명한 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말이지만 이것은 구마라집 스님이 中國語로 번역할 때 본래의 뜻과 비슷하면서 중국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용어로 바꾸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본래 초기불교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을 섬으로 하고 自身을 섬으로 하여 修行을 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본래 印度사람은 등불에 비유하는 것보다는 섬에 비유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修行煩惱의 탁류를 건너는데 비유하여 설명하기를 좋아하셨으며 따라서 을 섬으로 하고 自身을 섬으로 하라는 말씀은 극히 자연스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법 또는 섬으로 하라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法燈明이라는 말 즉 을 섬으로 하라고 할 때의 은 어떤 을 말하는 것일까요. 부처님의 은 많고도 많습니다. 그중에 어떤 을 말하는 것인가? 초기불교의 열반경에는 그 에 대하여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맑은 10淨法에 의지하여라.”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10淨法은 무엇인가?

 

1. 戒律 2. 多聞 3. 知足 4. 四禪 5. 神足通 6. 天耳通 7. 他心通 8. 宿命通 9. 天眼通 10. 漏盡通

 

이렇게 10가지를 들고 스스로 이 10淨法을 얻도록 노력할 것이며 이 10淨法을 완전히 터득한 比丘가 있다면 그 比丘를 나를 보듯이 하고 그에게 歸意하고 의지하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결국 불교는 自身에게 의지하고 에 의지하여 스스로 修行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修行을 해나가는 것이 부처님의 뜻에 맞게 修行하는 것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의문점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인가.

 

첫 번째로 戒律을 들고 있습니다. 불교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 살생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을 말하지 말라. 술을 먹지 말라. 이러한 戒律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修行者가 되면 집단의 일원이 되므로 더 많은 계율이 필요하게 되지만 이는 수행자 단체를 운영하기 위한 戒律이므로 기본적인 戒律은 위의 다섯 가지가 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多聞을 들고 있습니다. 聲聞僧이라는 말이 있듯이 경전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매우 어려운 宗敎입니다. 그 이유는 人生問題를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쉽다면 宗敎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45년간을 계속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많이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판단을 하려면 많이 들어서 지식을 충분히 쌓은 상태에서 판단하는 것이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세 번째가 知足하라는 것입니다. 現在에 만족하지 않으면 항상 불만이고 불만이 쌓이면 분노가 불길처럼 일어나서 修行을 한다는 것 자체가 不可能할 지도 모릅니다. 知足하는 마음이라야 大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四禪입니다. 四禪이란 네 단계의 三昧를 뜻하는데 三昧에 들어 離生喜樂이라는 제1. 定生喜樂이라는 제2. 舍念樂住라는 제3. 그리고 舍念淸淨이라는 제4의 네 가지 수행과정인데 이 四禪의 과정에서 觀智意成智. 그리고 神足通을 얻어서 無色界로 갈 수 있는 과정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는 六神通을 말하는 것인데 제4의 말미에서 얻는 神足通으로부터 無色界에 들어와서 얻는 天耳通. 他心通. 宿命通. 天眼通. 漏盡通六神通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無色界空無邊處. 識無邊處. 無所有處. 非想非非想處. 그리고 想受滅의 단계에 와서야 六神通의 마지막 단계인 漏盡通을 얻을 수 있으며 이 六神通을 완성한 修行者를 초기불교에서는 阿羅漢이라고 하는 것이며 공경을 받을 만하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大乘佛敎에서는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阿羅漢이 되어도 아직 微細煩惱가 남아있으니 다시 菩薩行 즉 육바라밀 을 하여 究竟涅槃證得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반야바라밀다 또는 無生法忍을 얻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修行을 하는 修行者를 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般若部 經典에서 설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究竟涅槃證得하면 끝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成佛의 과정아뇩다라삼먁삼보리證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했던 모든 단계인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닦아야 할 修行이 있으니 그것은 육바라밀에 이어서 4바라밀이 추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라밀. 方便바라밀. 바라밀. 그리고 바라밀4가지를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證得하라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고 알고 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漢譯에서는 知見이라고 해서 佛之知見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法華經의 단계에서 설하는 내용으로 佛敎는 이렇게 단계별로 證得하는 내용의 단계도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단계를 살펴보면 이렇게 단계별로 설정되어 있으며 얻어야 할 내용도 점진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佛敎修行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修行을 하면서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修行至上主義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修行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무조건 벽만 보고 앉아서 만 하면 누구든지 어느 날 탁 깨달음을 얻는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佛敎修行修行으로서 意味를 가지려면 實相緣起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제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제 修行을 하는 사람도 實相緣起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조예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修行을 하면 많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淨法에는 첫 번째 戒律을 들고 나서 두 번째가 多聞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實相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본래모습은 實相存在 永遠存在로서 참 存在였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 虛想存在 輪回하는 存在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참 存在로서 즐거움의 存在였었는데 우리가 우리의 實相에 대하여 착각했거나 배반했거나 잘못 보았기 때문에 이것을 종합해서 無明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잘못된 無明에 의해서 輪回하는 存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즐거움의 存在요 참 存在가 아니고 원래부터 輪回하는 存在였다면 아무리 修行을 해도 實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無意味할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로 우리는 본래 實相存在였기 때문에 참 存在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또 하나는 우리가 輪回하는 存在가 된 것은 無明이라는 原因에 의해서 輪回하는 存在가 되었으니 그 無明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참 存在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해결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참 存在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修行을 한다 해도 實相存在가 보장될 수가 없으며 돌아가 보았자 지금과 다름이 없다면 부처님은 가르침을 베풀 생각을 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본래부터 참 存在가 아니라면 어떻게 참 存在로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본래가 참 存在였는데 어쩌다보니 無明에 가려져서 輪回하는 存在가 되어버렸으니 그 無明만 제거하면 다시 참 存在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불교 즉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佛敎修行實相緣起라는 原理를 떠나서는 存在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實相緣起原理를 완벽하게 알고 그리고 이어서 修行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修行小乘的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만 戒律三昧智慧를 얻어서 解脫만 하면 된다는 관점은 小乘的 觀點인 것입니다. 大乘的 觀點은 내가 戒律三昧智慧를 얻어서 解脫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하기위한 노력까지도 포함한 修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法華經에서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완전한 修行이란 衆生이 함께 깨닫는 修行이라야 진정한 修行이라는 것입니다.

 

宗敎의 색깔은 完全性에 있습니다. 宗敎는 완전해지지 않으면 그 修行은 안하는 것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에 완전한 解脫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음 에도 修行을 계속하겠다는 을 세워 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4 아승지10만겁 동안 修行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을 우리는 잘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같은 분도 4 아승지 10만겁동안 修行해서 부처를 이루었는데 우리 같은 衆生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조급하게 당장. 이번 에 끝내겠다는 생각은 무리이며 욕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下心하고 知足하며 조급함은 버리고 느긋하게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에서 知足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知足의 덕목이 살아가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지만 수행에 도움을 주는 정도는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혼자만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깨달음을 얻어야 하며 모두가 깨달음을 얻어서 함께 實相存在 즉 참 存在가 되어야 비로소 부처님의 뜻이 완료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는 모두가 연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불교용어로는 重重無盡이라고 하는데 먼저 우리는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로 묶여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모가 또는 자식이 衆生 界에서 輪回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 마음이 어떠할 까요? 과연 즐거움으로 충만할 수 있을 까요?

부처님도 전생에 수미산에서 호명보살로 있으면서 衆生들이 괴로워함을 보고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음을 설하고 있으며 이를 불교에서는 慈悲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慈悲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大乘佛敎에서는 菩薩行이라고 하며 육바라밀이라고 하는 菩薩修行을 실천하여 감으로서 다시 한 번 究竟涅槃證得하고 이어서 좀 더 修行(물론 여기부터는 수행이라고 하지 않고 방편문 이라고 함)을 함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成佛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法華經의 단계에서 설하는 부처님의 뜻인 것이니 이런 총체적인 단계를 모두 섭렵하여야 비로소 부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佛敎는 공부하는 宗敎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이요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받들고 쫒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정한 뜻은 이렇게 自身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法華經 方便品의 부처님의 一大事因緣을 설명한 산스크리트 원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샤리푸트라야, 여래. 응공. 정등각자가 이 세상에 출현하는 목적이 되는 여래의 유일한 목적. 유일한 일 또 위대한 목적. 위대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여래의 알고 보는 바를 중생들에게 함께 받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다. 여래의 알고 보는 바를 중생들에게 함께 보여주려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또 여래는 여래의 알고 보는 바에 의해 중생들을 건너게 하기 위하여() 출현한 것이다. 또 여래는 여래의 알고 보는 바를 중생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다. 또 여래는 여래의 알고 보는 바의 길로 중생들을 건너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開 示 度 悟 入이라고 해야 하며 부처님의 진정한 뜻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成佛하여 實相存在가 되어야 함을 원하고 계신 것이며 그래서 그 길로 가도록 그리고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뜻을 받들어 여기에 대응하는 불자로서 할 도리인 信 解 行 證 莊嚴으로 오로지 成佛을 목표로 修行해 나가야 할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릴 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며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誓願이 필요한 것입니다. 깊이 통찰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東山 法師團 惠山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