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解脫(수행차원의 분류)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의 차이
아함부 경전을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라고 한다면 이는 해탈과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 경전으로서 해탈 ․ 도( 解脫 · 道)라고 할 수가 있다.
아함은 오로지 해탈을 가르치고 해탈에 이르는 길(道)을 가르친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이라는 용어에 들어가면 둘의 관계가 그리 쉽게 설명되지 않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涅槃과 解脫이라는 말을 죽음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스님이 열반 했다고 이야기하는데 해탈했다라고 하면 곧 이생(以生)에서 떠난 것으로 잘못알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보고 듣고 있다.
그러나 열반이나 해탈이라는 말은 죽음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죽음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인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죽음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불교에서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형태적인 변화를 의미할 뿐 멸(滅)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반(涅槃)이란 무엇일까. 열반(涅槃)이란 깨달음을 증득(證得)한 상태를 말 하는 것으로서 어떤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정신세계를 뜻하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고 열반(涅槃)이 무엇이냐고 설명하라고 하면 설명할 길은 없는 그런 용어가 열반이라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열반을 말 하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열반에 이를 것인가?
부처님도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는 자세한 설명을 하시지 않는다. 단지 우다나[自說經]에서 부처님은
“열반이란 어떤 곳인가. 그곳에는 옴이 없다. 감도 머물음도 죽음도 재생도 없고 윤회도 없다. …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라고 설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열반(涅槃) 대신에 해탈(解脫)이라는 말은 이제 여러 가지로 설명이 가능한 말로서 해탈(解脫)의 경지(境地)를 앎으로서 열반(涅槃)의 경지(境地)를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解脫 · 道로서의 아함 법문
따라서 아함은 解脫 · 道로서의 교설인 것이다. 즉 아함경은 2가지를 함께 가르치는 것이니 해탈을 가르치고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것으로서 과정과 결과를 다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解脫 · 道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 法에 대한 바다물의 비유 중에서 해탈 미(解脫 味; vimutti rasa)가 의미하는 그런 맛의 교설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 법은 바다와 같으니 바다는 그 어느 곳을 찍어서 맛을 보아도 짠맛으로 한맛이듯이 부처님 법은 그 어느 곳을 찍어서 맛을 보아도 해탈 미(解脫 味)로서 한맛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함경은 해탈의 맛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경전인 것이다.
그런데 대승경전의 금강경(金剛經) 같은 것을 보면 열반(涅槃)을 부정하고 다시 열반(涅槃)에 드는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는 곳 해탈(解脫)을 벗어나서 다시 해탈(解脫)에 드는 것이므로 따라서 금강경은 아함의 해탈로부터 한 번 더 해탈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해탈은 크게는 한 가지에서 해탈하는 것이고 또는 3가지에서 해탈하는 것이고 자세히는 5가지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에 해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게 한 가지에서 解脫이란 말에서의 한가지란 괴로움[苦痛]을 말하는 것이다. 해탈이란 괴로움[苦痛]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함의 해탈이 과연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무색계번뇌(無色界煩惱)로부터 해탈하는 것이 아함경의 해탈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의 반야부 경전 수행단계 즉 육바라밀 수행단계가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괴로움이란 그 괴로움을 주는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데 그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 3가지 원인으로부터의 해탈이란 첫째가 외도(外道)로부터 해탈이며 둘째가 악업(惡業)으로부터의 해탈이며 셋째가 번뇌(煩惱)로부터의 解脫을 말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해탈은 이 번뇌(煩惱)로부터의 해탈이 핵심인데 이 번뇌에는 다시 3가지가 있으니 첫째 욕계번뇌(欲界煩惱)이며 둘째 색계번뇌(色界煩惱)이며 셋째 무색계번뇌(無色界煩惱)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합하면
1. 외도로 부터의 해탈 = 外道에 대한 부정
2. 악업에서의 해탈
3. 욕계번뇌에서의 해탈
4. 색계번뇌에서의 해탈
5. 무색계번뇌에서의 해탈
로서 다섯 가지 해탈 즉 五 解脫인 것이다.
이 5가지에서 순차적(順次的)으로 해탈함으로서 모든 고통(苦痛)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드시 순차적으로 해탈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순서를 뒤집거나 바꾸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 교리는 점진성에 바탕을 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법문 또는 교설체계에 배당해 보면
1. 외도로부터의 해탈은 외도 비판 설에 해당하며
2. 악업으로부터의 해탈은 십이처· 십업설 법문에서 이루어지며
3. 욕계번뇌로부터의 해탈은 육육법설 법문에서 이루어지며
4. 색계번뇌로부터의 해탈은 오온 · 사제설 법문에서 이루어지며
5. 무색계번뇌로부터의 해탈 은 십이연기설 법문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다섯 가지 해탈(解脫)을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外道로부터 解脫(외도비판)
외도(外道)로 부터의 해탈이란 유신론. 숙명론. 우연론에 미련을 두지 말고 그야말로 그러한 것들을 부정하고 해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는 딴것은 다 제처 두고라도 그 어느 주장도 인간의 죄악과 그 책임소재 및 처벌에 대해서조차 합당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도처경의 부처님 말씀을 보면 神의 존재를 보았는가. 또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죄악과 그 책임 소재 및 처벌의 문제 등을 논거 하여 유신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죄악의 문제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무엇보다도 고통하게 하는 크나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 보호 및 방어 기재가 있다. 그래서 죄를 은폐하려하고 그리고 자신은 어쨌든 무죄임을 변호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할 것이다. 그런 경향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사고방식이며 그것이 바로 이상의 세 가지 外道思想인 것이다.
불교가 이야기 하는 罪에 대해서는 희대의 살인범 유 영철을 변호한 유## 변호사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罪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死刑시키는 것은 단지 같은 殺人일 뿐 진정 그 罪人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그 罪人을 처벌하려면 그가 罪지었음을 시인하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 罪를 처벌하는 것이다.”라고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罪라는 것은 시인하고 참회할 때 모든 문제가 풀리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罪를 지으면 罪를 사하는 방법은 단한가지 뿐이다. 罪를 인정하게하고 그 책임을 지게하고 다시는 같은 罪를 짓지 말라고 다짐 하며 다시는 罪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논리가 부처님 당시에 그 부왕을 죽인 아자타삿투(마가다국왕)에게 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문제를 해결 못하는 종교는 眞理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外道思想을 부정 비판하는 것도 일종의 解脫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해탈할 것은 邪見 즉 外道思想으로부터의 해탈일 것이다.
어떠한 사람을 종교적으로(그 종교의 신자 또는 종교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때 종교학에서는 그 사람의 마음에 신앙체제가 갖추어졌는가. 갖추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그 종교인을 판단하는 기준이이라고 한다.
신앙체제란 신앙(信仰)이 버릇이 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부지불식간에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이 그 사람의 신앙체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길가다 넘어졌을 때 “아이 재수가 없어서” 라고 한다면 이것은 운명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불자라면 “아 이것은 나의 전생의 작은 業 때문에 일어난 일이로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惡業을 짓지 않도록 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外道思想에서 벗어나는 것도 일종의 조그마한 해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자신의 業 때문에 이러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제 惡業에서 해탈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惡業에서의 解脫(십이처· 십업설 법문)
[일체경]에 보면
“신도 운명도 우연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인식주체인 나 자신 곧 六根과 인식대상인 나머지 六境들 뿐이다. 외도사상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벗겨버려라.”
라고 설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신의 業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고 자각하고 다른 것에 핑계를 대지 않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他力信仰이란 동반자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줄탁동시(窋啄同時)라는 말처럼 느끼려는 나와 응(應)하려는 그분과 동시에 그 문제에 대한 일치가 이루어 졌을 때 타력신앙이 완성되는 것이지 절대 神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타력신앙은 100% 타력신앙이 아닌 것이다. 이에 비하여 기독교에서의 타력은 그야말로 창조신에 의해서 허용되고 결정된 완전한 他力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종교학에서의 신앙인이란 “信仰이 버릇이 된 사람을 信仰人” 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불교신자라면 길가다 넘어져도 재수가 없어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業 때문에 넘어졌다고 자각 하는 것이 버릇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무상경]이라는 경전에 보면
“육근(과 육경들)은 모두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이다. 그래서 영원해 지려고 하고 즐겁기 위해서 활동을 일으키니 그것이 업이다. 그런데 업은 두 가지이니 하나는 악업이고 하나는 선업이다. 여기서 선업은 말할 것 없이 굳건히 지켜야한다. 그러나 악업에서 해탈하지 않고는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없다.”
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한 실질적인 첫 단계의 해탈인 것이다.
의도경에 있는 말씀 中에
“의도적으로 행하였고 또 쌓아 두었던 그 일<惡業>의 결과를 받지도 않은 채 괴로움을 끝낸다. 라고는 나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몸과 말과 뜻으로 行하는 열 가지 일<惡業>이 있는데 이들은 더럽고 비뚤어졌고 불선한 의도로 행하여져 괴로움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과보를 지니는 것들이다.”
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이처럼 惡業은 반드시 고통스러운 果報를 가져온다고 설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 惡業에서 해탈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악한 의도에서 해탈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절대 業에서의 해탈이란 말은 하지 않는다. 業이란 이미 저질러진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善業에 있는 아집의 요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善業도 아집에서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善業이 가지고 있는 이익 되는바가 훨씬 크기 때문에 그 작은 아집의 표출이라는 문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善業에서의 그 작은 아집의 표출이라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그것은 곧 煩惱이니 그것은 번뇌를 제거할 때 제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악한 의도에서 해탈하려면 먼저 악한 의도를 알아야 하는데 악한 의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악한 의도에는 열 가지가 있다.
1. 살생의 악한의도 2. 훔치려는 악한 의도 3. 사음하려는 악한 의도 4. 거짓말 하려는 악한 의도 5. 험담하려는 악한 의도 6. 욕하려는 악한 의도 7. 실없이 말하려는 악한 의도 (8.탐 9.진 10.치)의 악한 의도
이렇게 열 가지를 말하는 것인데 이중에서 탐 진 치의 3가지 의도는 번뇌에서의 해탈을 언급할 때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본격적인 번뇌이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잘 이해가 안가는 항목이 7번의 항목일 터인데 실없이 말하려는 악한 의도란 때가 아닐 때 말하는 것 을 말하며 이익이 없으면 때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이익이 없으면 때가 아니니 그 때 말하면 실없이 말하려는 악한 의도를 지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악한 의도조차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라는 것이며 악한 의도와 악한 행위<악업>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서로 상승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행위뿐만 아니라 악한 의도로부터도 해탈하려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악한 의도조차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면 악한 행동이 줄게 되고 악한 행동이 줄게 되면 악한 의도가 약해지고 악한 의도가 약해지면 악한 행동이 더 줄고 악한 행동이 더 줄게 되면 악한 의도는 더 약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계속하여 줄어들어 가면서 비로소 惡業에서 해탈하게 되고 괴로움의 끝을 향한 토대가 보장되는 것이다.
[3] 번뇌(煩惱)로부터의 解脫
지금까지는 外道로 부터의 해탈과 惡業으로부터의 해탈에 대하여 음미해 보았다.
이는 잘못된 邪見을 가지고 있으면 정법에 들 수가 없으니 먼저 외도의 사견(邪見)으로부터 해탈하여야 하는 것을 뜻하며 그런 다음에 모든 악업으로부터 해탈하여야 진정한 열반에 들 수 있는 단초가 제공되는 것이니 外道와 惡業으로부터의 해탈을 먼저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번뇌로부터 해탈을 하여야 하는데 이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열반이라는 말과 해탈이라는 말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열반과 해탈이란 결과와 과정을 뜻하는 것으로 보면 정확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과 해탈의 차이를 살펴보면 일반적인 범부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보면 해탈이고 그 벗어난 상태라는 결과에서 보면 열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부의 상태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번뇌를 제거하여야 하는데 그러자면 먼저 번뇌가 무엇인가를 알아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번뇌를 알려면 번뇌를 분석하여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번뇌를 분석하면 종적으로는 번뇌의 종류. 번뇌의 강도. 번뇌의 차원으로 구분이 되며 번뇌의 차원이란 욕계의 번뇌와 색계의 번뇌 그리고 무색계의 번뇌로 나누는 것을 말하며 횡적으로는 각 번뇌의 안에 탐 진 치 3가지의 범위를 설정할 수 있고
또 이 탐 진 치의 번뇌도 각각 그 깊이에 3단계가 있어서 욕계의 탐 진 치와 색계의 탐 진 치 그리고 무색계의 탐 진 치로 분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 될 것이다.
먼저 욕계번뇌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말은 있을 수 있으나 外道로부터 해탈이니 악업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주제가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다시 말하면 네가 만들어낸 말 아니냐 하고 말할 수 있지만 부처님 법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하고 그 용어사용에 아주 꼼꼼하다는 남방 상좌부의 해탈 론에도 악업에 관한 해탈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부처님 당시부터 거론되는 해탈의 종류로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해탈에는 5가지가 있으니
1). 일향해탈(一向解脫; Tadanga-vimutti): 욕계선업의 성취
2). 복 해탈(伏 解脫; Vikkhambhana-vimutti): 선정의 성취
3). 단 해탈(斷 解脫; Samuccheda-vimutti): 도의 성취
4). 안식해탈(安息解脫; Patipassaddhi-vimutti): 과의 성취
5). 출리해탈(出離解脫; Nissavana-vimutti): 열반의 성취(완성된 해탈임)가 있다.
3)번에서 5)번까지는 한통속의 이야기로서 선정으로부터 그 결과까지를 얻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일향해탈이란 악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의미하며 복 해탈에서의 복(伏)은 일어나려는 애욕을 일단 누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욕을 누르는 방법으로서 출가 삭발염의(削髮染衣)에 의해서 아예 애욕의 기회자체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해탈의 첫 번째 단계가 사견(邪見)으로부터의 해탈인데 실제로 사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함경에서는 최고 경지인 상수멸의 단계에 가서 아집(自我)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 단계로 진입이 불가능하므로 당연히 外道로부터 해탈이 되어야 최종의 해탈이 가능한 가능태(可能態)가 되는 셈이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 단계가 惡業으로부터의 해탈인데 악업을 무수히 지으면 그 악업에 의한 과보를 마땅히 받아야 함으로 해탈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설하셨다. “만약 고의로 업을 지은 자는 그 과보를 받게 되는데 현생에서 다 받지 않고 남은 것이 있다면 내생에서 받게 된다.” 라고 설함으로서 三世 輪回說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악업에서 해탈하지 못하고는 다음 단계의 3해탈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업에서의 해탈이 이루어 졌다면 이제 번뇌에서 해탈을 해야 하는데 이 번뇌에는 욕계의 번뇌와 색계의 번뇌 그리고 무색계의 번뇌가 있으며 먼저 욕계의 번뇌에서 해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욕계의 번뇌로부터의 해탈에 대해서 음미해보도록 하자.
[3] - (1) 욕계번뇌로부터의 해탈(六六法說 法門)
첫 단계로서 외도사상(外道思想)에 대해 미련 없이 부정했고 둘째 단계로 악업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면 이제 셋째 단계 곧 욕계번뇌(欲界煩惱)에서 해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욕계번뇌(欲界煩惱)에서의 해탈에 왜 육육법설 법문이 해당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육육법설에 대하여 잠시 설명하면 십이처십업설 법문을 완전히 정통하고 나면 다음 단계의 법문이 설해지는데 그것이 소위 육육법설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육법설 법문이란 십이처의 육근과 육경에다가 다시 육식. 육촉. 육수. 육애 등이 이어지는데 이렇게 여섯 가지 인자로 구성된 한 무리의 법이 여섯 번 거듭됨으로서 “六六”이라고 하는 六字를 거듭 사용한 그런 이름을 지닌 교법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안근(眼根)이 색경(色境)을 대하면 안식(眼識)이 일어나는데 이와 같이 안 이 비 설 신 의가 각각 색 성 향 미 촉 법을 대하면 각각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여섯 개의 식(識)이 발생하여 각각의 촉. 수. 애로 이어지기 때문에 모두 六이라는 숫자로 되어 있으므로 육육법설(六六法說)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다른 이름으로 六根과 六境과 六識으로 이루어진 법문이라고 하여 18界 법문(18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진 법문)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법문은 오온사제설(五蘊四諦說) 법문으로 가는 중간단계가 되는 법문으로 우리가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 비로소 계(界)의 구조(構造)로 보게 하는 기본 틀을 형성하는 법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단계에서 촉(觸)에 대하여 완전한 이해(이를 초기의 깨달음이라고도 함)를 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다음단계의 진행이나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계(界)의 구조를 가진다는 말도 모든 사물은 단층 구조를 가지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층의 구조를 가진다는 내용을 말하는데 그러나 여기서 그 내용을 전부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이런 내용이라는 개략적인 설명을 한 것이다.
여하튼 육육법의 진행방향은 우리가 사물을 보고 그 마음의 진행이 이루어지는 순서를 정확히 밝혀놓은 법문으로서 우리 마음의 진행구성을 살펴보면 육육법의 구성은 육근 - 육경 - 육식 - 육촉 - 육수- 육애 즉 갈애(渴愛)로 끝이 나는데 이 갈애가 욕계(欲界)의 애욕이 지니는 한 형태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 이유는 오온 설도 색 수 상 행 식이라고 해서 그 끝은 식(識)이고 12연기설도 끝은 죽음이지 갈애나 애욕이 아닌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욕계이건 색계이건 무색계이건 번뇌의 형태적 모습은 바로 탐. 진. 치 인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惡業에서의 解脫을 다룰 때 惡業 중에서 [8. 탐 9. 진 10. 치]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거니와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탐색을 시작하여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는 다음의 [육육경]의 문장을 참고함으로서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탐욕과 분노와 우둔함의 성립]
부처님은 육육법설 법문에서
“比丘들아! 눈과 여러 色에 기대어 眼識이 발생한다. 이 세 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觸)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여기까지가 六受단계까지 온 것임)
그런데 누군가 즐거운 느낌에 부딪쳐 있을 때 그는 기뻐하고 인사하고 집착하여 머문다. 그러면 그에게는 탐착이 잠재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괴로운 느낌에 부딪쳐 있을 때 그는 슬퍼하고 피곤해 하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비통해 하고 우둔함에 빠진다. 그러면 그에게는 진에(瞋恚)가 잠재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에 부딪쳐 있으면서 그 느낌의 집기와 사라짐과 맛과 환난(患難)과 출리(出離)를 여실히 알아내지 못한다. 그러면 그에게는 무명(無明)이 잠재하게 된다.”
여기서 탐착(貪着)이 탐(貪)이고 진에(瞋恚)가 진(瞋)이고 無明이 치(癡)에 해당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 육육법의 전개과정에서는 육수 지분(六受 支分)에다가 세 가지 느낌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六受 다음에는 갈애가 나와야 하는데 육육법설 법문인데도 불구하고 갈애의 언급이 없다. 갈애란 좋은 것에 대한 집착(執着)을 특징적으로 나타낸 말인 것이다.
그런 갈애라는 말을 넣는 대신에 즐거운 느낌에 집착하면 탐착이 잠재하고 괴로운 느낌에 집착하면 분노가 잠재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끄달리면 無明이 잠재 한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육애(六愛)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탐 진 치로 대신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니 이를 육수 지분에 넣을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受)는 느낌이므로 탐 진 치가 발생하는 것은 다른 단계인 까닭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탐 진 치가 육애(六愛)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탐 진 치에 대한 최초의 발생 처(發生 處)를 이야기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惡業은 외 행동(外 行動)인 것이다. 그러나 이 탐 진 치는 내행동(內 行動)으로서 다시 말하면 당사자의 내면세계에서 벌어지는 내용인 것이다.
악업은 그 대상이 밖에 있으나 탐 진 치는 외적인 요소가 원인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자기내면과의 싸움이요 자기내면의 정체파악에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육수지분(六受支分)의 과정에 오면 이제 자기 내면세계로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六根이 六境을 대하여 六識이 발생하고 이 3支分이 합하여 육촉(六觸)이 발생하고 육촉(六觸)에 의해서 느낌[受 지분]이 발생하니 고· 낙· 불고불락(苦 · 樂 · 不苦不樂)의 느낌인 것이다.
이 느낌에서 번뇌가 발생하니 탐 진 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설정이며 그 외의 결박이니 역류니 하는 것은 응용부분인 것이다.
[탐욕과 분노와 우둔함의 성립]
그렇다면 탐욕과 분노와 우둔함은 어떻게 발생하고 성립하는 것일까? 앞에서
“누군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부딪쳐 있을 때 그에게는 무명(無明)이 잠재하게 된다.”
라고 언급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그도 저도 아닌 느낌은 모두 욕계차원(欲界次元)의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도 욕계차원(欲界次元)의 번뇌(煩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욕계차원의 번뇌를 살피는 데 있어서는
1). 욕계의 의미
2). 번뇌의 말 뜻
3). 번뇌의 강도
4). 욕계번뇌의 동기와 모습
등 네 가지로 살피면 될 것이다.
욕계번뇌(欲界煩惱)의 분석
앞에서는 욕계번뇌로부터의 해탈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진행 상태를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육육법설 법문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이 외적인 대상에서 우리의 내부로 깊숙이 진행되어왔음을 보았고 이제 우리의 내부의 번뇌와의 싸움이 수행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제 이 번뇌와의 싸움을 위해서는 번뇌를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하였으니 어려운 번뇌와의 싸움인데 번뇌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이 싸움을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먼저 번뇌에 대하여 자세히 살피기 위하여 먼저 욕계의 의미. 번뇌의 말 뜻. 번뇌의 강도. 번뇌의 동기와 모습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욕계번뇌인 애욕에서 해탈하는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욕계(欲界)의 의미(意味)
먼저 욕계의 의미를 살펴보면 욕계란 애욕이 지배하는 영역을 말하는데 애욕(愛慾; kama)이란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구를 특정적으로 언급하는 용어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욕계라고 하는데 우리는 통상 오욕(五慾)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5욕이란 식욕(食慾). 성욕(性慾). 수면욕(睡眠慾). 재욕(財慾). 권력욕(權力慾)을 말하는데 식욕. 성욕과 수면욕은 가장 근본이 되는 욕심이고 재욕과 권력욕은 앞의 3가지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식욕(食慾)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기본적인 생명유지에 필요한 수단으로서 모든 衆生이 원하는 기본욕심이며 성욕(性慾)은 자기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려는 종족번식의 기본적인 욕심이며 수면욕(睡眠慾)이란 좀 더 편안해지려고 하고 쉬려고하는 기본적인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구를 충족하려고 노력하는 행위를 업(業)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런데도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므로 해서 번뇌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욕계의 의미를 왜 애욕(愛慾)에 한정되어 특정적으로 보는 것인가? 그 이유는 식욕(食慾)이나 수면욕(睡眠慾)은 비교적 외 행동(外 行動)으로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비하여 성욕(性慾)은 외 행동(外 行動)을 반드시 수반하는 욕심이라는 것이다.
내 행동(內 行動)은 業을 지을 확률이 낮은데 비하여 외 행동(外 行動)은 반드시 業 그중에서도 惡業을 수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성욕(性慾)을 기준으로 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2) 번뇌(煩惱)의 말뜻
본래 印度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번뇌라는 말은 klesa라고 해서 오염(汚染)된 것을 나타낸 말이지만 불교에서는 전문적인 용어로서 3가지로 분리하여 사용하고 있다.
<1> anusaya(잠재된 나쁜 버릇); 위에서 말한 것처럼 번뇌의 결성 즉 [탐욕과 분노와 우둔함의성립]에도 무명이 잠재한다는 말이 있지만 anusaya에서의 anu는 ···을 따라서 또는 ···을 닮게 라는 뜻이며 saya는 눕는 것.
그러므로 anusaya를 수면(隨眠; 따라서 잠을 잠)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A라는 나쁜 버릇이 B라는 정상적인 마음을 따라서 눕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samyojana(정상적인 마음에 대한 결박): 어원분석을 하면 sam; 함께 yojana; 묶음. 결박(結縛)이란 뜻이 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마음을 따라 누운 나쁜 버릇이 이제 정상적인 마음을 칭칭 감아서 묶어버림으로서 어느 것이 나쁜 버릇이고 어느 것이 정상적인 마음인지 구별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 asrava(거꾸로 치솟아 흐르는 것): srava; 흐름이라는 뜻이고 어두 a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강조하는 뜻과 하나는 방향을 역전시키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방향을 역전시키는 뜻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쁜 버릇이라도 정상적인 마음에 따라 눕고 묶어서 그대로 따라 흐르고 있으면 더 강하게 흐른다고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제 정상적인 흐름을 방해하고 거꾸로 치솟아 흐르려고 하기 때문에 번뇌라고 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 번뇌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쁜 버릇도 나의 마음이고 정상적인 마음도 나의 마음인 것이다. 마음이란 하나의 흐름인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는 하는데 왜 실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하느냐하면 마음이란 강물이 흐르듯이 끝없이 흐름의 연속을 마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냥 얌전히 정상적인 마음을 따라서 흐르고 아무 방해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번뇌이겠는가? 흐름을 강하게 한다고 하여서는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역류(逆流)하고 치솟아 오르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란 “탐욕이라는 나쁜 버릇이 잠재(潛在)되어 정상적인 마음을 꽁꽁 묶어서 거꾸로 흐르게 하니 그 나쁜 버릇을 번뇌”라고 하는 것이다.
정리해서 이야기 하자면 욕계의 번뇌란 “애욕과 관련된 나쁜 버릇이 잠재되어 정상적인 마음을 꽁꽁 묶어서 거꾸로 흐르게 하니 애욕과 관련된 그 나쁜 버릇을 욕계 번뇌”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그렇게 쉬운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므로 닦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그야말로 번뇌와의 처절한 싸움인 것이다.
3). 번뇌(煩惱)의 강도
그렇다면 번뇌의 강도는 얼마나 강한 것일까. 이는 마치 중독증세(中毒症勢)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마약의 중독이란 무엇인가? 이것도 또한 우리의 마음이 마약의 중독임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를 제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 이유는 나쁜 버릇도 나의 마음이고 정상적인 마음도 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意志)에 의해서 이를 제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욕계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출가에 의한 삭발염의(削髮染衣)에 의해서 사회로부터 원천분리 시키는 것이다.
4). 욕계번뇌의 동기와 모습
이렇게 강도가 높은 번뇌 중에서 욕계번뇌의 동기와 모습에도 3가지가 있다. 六六經의 해당부분에 욕계번뇌의 동기는 3가지의 느낌으로 명시되어 있었거니와 이때의 느낌도 바로 애욕을 전제로 한 느낌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1) 애욕을 전제한 즐거운 느낌 -애욕에 관련한 탐욕 번뇌[欲界貪慾煩惱]
(2) 애욕을 전제한 괴로운 느낌 -애욕과 관련한 진에번뇌[欲界瞋恚煩惱]
(3) 애욕을 전제한 중립적 느낌 -애욕과 관련한 치암번뇌[欲界癡暗煩惱]
라고 분석할 수 있으며 그래서 경전에서는 지속적으로 욕계를 구성하는 육근 육경 육식 육촉 육수 갈애에 대하여 무상(無常)하다고 보아야 하고 싫어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진에(瞋恚)의 번뇌도 애욕이 전제되어서 탐욕이 되고 탐욕이 전제되어서 분노(忿怒)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분노가 불길처럼 타오르게 되는데 이단계가 되면 이제 진에(瞋恚)의 번뇌라고 부르는 것이다.
치암번뇌(癡暗煩惱)도 이와 같다. 어떤 일(괴롭거나 즐거울 때)이 있을 때는 의식상태가 활발하게 움직이다가도 괴롭거나 즐거운 일이 없을 때는 멍하게 있는 상태가 치암(癡暗)의 번뇌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을 때를 가장 조심해야한다고 하는 것이며 이럴 때 우리의 의식(意識)이 깨어있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우둔함이며 바로 욕계에서의 치암(癡暗)의 번뇌라고 하는 것이다.
악업은 그 결과가 우리를 괴롭히지만 번뇌는 번뇌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타는 듯이 괴롭히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5) 애욕(愛慾)의 번뇌에서 해탈하는 방법.
그렇다면 이렇게 강력한 애욕의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본적으로 애욕보다도 강력한 매력덩어리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욕계의 탐 진 치는 예를 들어 애욕의 즐거움에 대한 탐욕은 그 자체를 두고 아무리 없애려고 애를 써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약중독처럼 애욕의 즐거움에 대한 집착 곧 욕계번뇌는 목숨 끊기보다도 끊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목숨을 바칠 만큼 지독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 밭에 잡초를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또 나고 또 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욕계의 번뇌도 잡초와 같아서 죽이면 죽일수록 더 강한 놈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종교에서도 다 금욕하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애욕의 즐거움을 포기하라고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에 의해 애욕의 즐거움을 떨쳐내는 것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위대함은 그 대안론에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부정할 때에는 <1> 부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와 <2> 부정하고 난 뒤의 자리를 채울 대안(對案)을 제시하는데 있다.
이처럼 욕계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욕계의 애욕보다 더 강하고 질 좋은 즐거움을 안겨다 주는 무엇을 성취(成就)하는 길 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대안으로서 오로지 하나뿐인 色界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것만이 욕계의 집착(執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예로서 부처님의 사촌이자 부처님 제자중의 하나인 난다비구의 이야기에서 대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난다비구는 얼굴이 아주 잘생겼고 그 부인 역시 절세의 미인이었으며 금슬 또한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런 절세미인의 부인을 두고 출가를 하였으니 매일 부인 생각에 잠을 못 이루고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를 불쌍히 생각한 부처님이 하루는 난다비구를 데리고 원숭이 나라로 가신다. 그곳에서 마침 화재가 나서 얼굴과 몸뚱이에 화상을 입은 늙은 암컷 원숭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자 부처님이 난다에게 묻는다. 저 늙고 화상을 입은 암컷 원숭이와 네가 출가하기 전의 그 부인과 누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느냐? 난다가 기가 막혔겠지만 당연히 자기의 부인이 더 예쁘다고 대답한다. 내심 어디다가 비유 하십니까? 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음에는 난다를 데리고 33天으로 올라가서 천상무희(天上舞姬)를 구경시켜준다. 천상무희(天上舞姬)는 천녀(天女) 중에서도 가려 뽑은 천녀이니 그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난다에게 묻는다. 처 천상무희와 네 부인 중 누가 더 예쁜가?
그러자 난다가 대답한다. 아! 부처님 저 천상무희와 제 아내의 비유는 먼저 제 아내와 저 원숭이 나라의 화상 입은 늙은 암컷원숭이와의 비유와 같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만약 깨달음을 이룬다면 천상무희 500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다.
그 이후 난다는 부인의 생각도 잊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비구들이 난다를 놀린다. 난다는 장사꾼이다. 난다는 장사꾼이다. 도(道)를 팔아서 천상의 무희(舞姬)를 얻고자 하는구나. 그러나 난다는 개의치 않고 용맹정진 하여 깨달음을 얻고야 말았다.
그러자 깨달음을 인가하는 자리에서 부처님은 난다에게 말씀하신다. 500의 천상무희를 받겠느냐? 그러자 난다는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방편(方便)인줄 이미 알았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아름다움이란 비교 미(比較 美; 다른 것과 비교해서 아름답게 느끼는 것)일 뿐이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아니라는 것을 난다비구는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色界의 즐거움만 얻는다면 욕계의 탐욕(貪慾)과 진에(瞋恚)와 치암(癡暗)은 씻은 듯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욕계의 번뇌는 그보다 더 즐거운 색계의 즐거움만이 이를 제거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색계의 즐거움을 안 후 에는 욕계의 즐거움이란 나를 찌르는 가시라고 알게 된다고 한다. 색界의 즐거움만 얻는다면 욕계의 탐욕과 진에와 치암은 씻은 듯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중소현(定中所現)의 색계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정중소현 이란 삼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며 색계의 즐거움에는 정중소현의 색계즐거움과 육근미생 전(六根未生 前)의 즐거움(색계의 탐 진 치를 일으키는 근거가 되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중소현의 즐거움과 육근미생 전의 즐거움은 그 강도가 같다는 것이다.
색계의 2가지 즐거움 중에서도 육근미생 전의 즐거움이 색계번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지만 더 이상 설명은 색계번뇌의 단계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어찌되었건 색계의 즐거움만이 욕계의 번뇌를 제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3] - (2) 색계번뇌(色界煩惱)에서의 해탈(五蘊 四諦說 法門)
첫 단계 外道思想에 대해 미련 없이 부정했고 둘째 단계 惡業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셋째 단계 곧 욕계번뇌에서의 해탈이 이루어 졌다면 넷째 단계는 색계번뇌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색계차원의 번뇌를 살필 때에도 1). 색계의 의미 2). 번뇌의 말뜻 3). 번뇌의 강도 4). 색계번뇌의 동기와 모습 등 4가지를 살피면 될 것이다.
1). 색계(色界)의 의미 :
색계란 색집(色執)이 지배하는 영역으로서 색집(色執. rupa)이란 물질적 존재 그 자체의 맛에 대한 집착을 특징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색집 이란 존재에 대한 집착을 뜻하는 것이다. 색계의 色과 가장 닮은 色은 색 수 상 행 식(五蘊)에서의 色 인 것이다.
색계란 색집이 지배하는 영역으로서 오온사제설과 색계를 연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무색계(無色界)도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물질적인 집착이 없는 세계라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에 편한 것이다.
그래서 색계에서의 존재의 맛이란 물질 그 自體가 뿜어내는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존재란 자기 자신의 바탕 즉 색으로 되어있는 몸을 바탕으로 번뇌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자신의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業은 자신과 대상이 주고받아야 발생하는데 비하여 욕계의 번뇌는 발생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 밖에 있으면서 그 원인 때문에 자신의 내부에서 번뇌가 발생했지만 색계에 와서는 아예 외부와는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의 내부에서 물질적 바탕의 토대위에서 발생하는 집착으로 인한 번뇌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색계(無色界)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物質的 토대이외의 그 무엇이 대상이 되어서 발생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란 物質的 토대위에 작용하는 精神的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물질과 정신은 항상 함께 해야지 단독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후(死後)에 정신과 몸이 떨어져서 존재하는 시간은 없으며 바뀌어 질 때는 무간등(無間等)이라고 하는 것이다.
2). 번뇌의 말뜻: 욕계번뇌와 같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면 본래 印度에서 日常的으로 쓰는 煩惱라는 말은 klesa라고 해서 汚染된 것을 나타낸 말이지만 佛敎에서는 專門的인 용어로서 3가지로 분리하여 사용하고 있다.
anusaya :(잠재된 나쁜 버릇); 위의 결성에서도 잠재한다는 말이 있음.
anu; …을 따라서 또는 …을 닮게 saya; 눕는 것. 그러므로 anusaya를 隨眠(따라서 잠을 잠)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실제는 A라는 나쁜 버릇이 B라는 正常的인 마음을 따라서 눕는 것을 의미한다.
samyojana :(정상적인 마음에 대한 결박); sam; 함께 yojana; 묶음. 결박(結縛)
그러므로 正常的인 마음을 따라 누운 나쁜 버릇이 이제 正常的인 마음을 칭칭 감아서 묶어버림으로서 어느 것이 나쁜 버릇이고 어느 것이 正常的인 마음인지 구별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asrava :(거꾸로 치솟아 흘러대는 것);
srava; 흐름 a: 어두 a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强調하는 뜻과 하나는 方向을 逆轉시키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方向을 逆轉시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3). 번뇌의 강도
번뇌의 강도(强度)는 욕계번뇌보다 더 강해졌다라고 알면 될 것이다. 그 강도의 비교가 욕계의 즐거움에 비해 색계의 존재 그 자체의 맛은 월등히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육근이 육경을 보고 느끼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느끼는 맛에는 둔감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느낄 수 있는 단계가 있다. 이 느낌은 자신의 존재가 무너지려고 할 때 에야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경전에서는 존재의 맛이란 존재 그 자체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상상하기 어려운 오묘(奧妙)한 맛을 뜻하는데 굳이 비유를 들면 다음과 같다.
빚에서 벗어남. 병에서 회복됨. 감옥에서 풀려남. 종의 신분에서 해방됨. 그리고 귀도(鬼道)에서 탈출함 등을 말한다.
욕계에서 벗어나 얻게 되는 색계의 존재가 지니는 맛은 비유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곧 욕계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빚이고 병(病)이고 감옥이고 종이고 귀도라는 것이다. 색계는 그곳에서 벗어난 안심(安心)의 경지(境地)이니 그것이 존재 그 자체가 지니는 깊은 맛인 것이다.
4). 색계번뇌의 동기와 모습
이런 존재의 맛은 2가지 경우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1) 정중소현의 즐거움(맛) 과 (2) 육근미생 전의 즐거움(맛)의경우로서 그중에서도 번뇌의 동기가 되는 것은 당연히 (2)번의 육근미생 전의 맛에 집착하는 색집(色執)인 것이다.
육근미생 전이란 바로 오취온 이라는 것이다. 오취온이란 12연기에서 육처(六處)가 발생하기 이전의 이야기 이므로 당연히 육근미생 전이 되는 것이다. 현장스님의 신역(新譯) 이전에는 온(蘊; skanda)을 음(陰)이라고 번역하고 있었다.
음(陰)이라고 한 이유는 육근 육경이 양(陽)의 세계이라면 음(陰)이란 그 이전의 세계를 의미하며 숨어서 들어나지 않은 세계를 뜻하므로 오음(五陰)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에 쉽다고 할 수 있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면 양(陽)은 공간적으로 들어난 세계이고 음(陰)은 숨은 세계라면 이는 시간적으로는 지금세계와 이전의 세계로 치환할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육근 육경이 지금의 세계라면 오온은 과거의 세계 즉 육근 육경의 앞에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취전경[五蘊四諦說 법문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주는 경전]이라는 경전은 색계번뇌와의 관련이 깊은 경전인 것인데 이 취전경은 앞의 육육경보다 더 전문적인 경으로서
1>. 육근과 육경 이전의 소식인 오음(五陰)에 대하여 밝게 알고 얻음을 통해 정등각자가 되었다는 전문과
2>. 수취온(受聚蘊) - 육수신(六受身). 식취온(識聚蘊) - 육식신(六識身) 등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육근과 육경이전의 소식임을 알 수 있으며 육육경을 근거로 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육육경을 마스터 한 뒤에나 이 經을 공부하게 된다는 순서가 느껴지는 그러한 경전이다.
그런데 오취온 단계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맛에는 집착을 하게 되는데 그리고 그 맛도 오취온이 무상하므로 변화가 있게 되며 이 변동이 있으므로 분노하는 번뇌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색계번뇌의 연구인 것이다.
그러나 색계에는 즐거움만 있고 즐거움이 깨어지는 경우만 있지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색계의 탐 진 치가 발생하는가?
색계에서는 색계 定中所現의 즐거움에는 집착하지 않는데 반해서 六根未生 전의 즐거움에는 강력하게 집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색계삼매에서의 즐거움에는 수행이라는 반작용이 있으므로 집착하지 않지만 육근미생 전은 수행이 없는 단계이니 피피낙착 이란 말처럼 바로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강력한 집착의 대상인 즐거움이 항상 얻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색계의 진에번뇌가 發生하게 되는데 색계의 진에번뇌는 육근미생 전의 즐거움이 강력한 만큼 이 색계의 진에번뇌 또한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다.
# 육근미생 전의 색집(色執)과 3가지 상태
욕계번뇌의 동기에 3가지가 있어 욕계 탐 진 치의 3가지 번뇌가 성립했듯이 색계번뇌에도 그 동기에 3가지가 있어서 색계 탐 진 치의 3가지 번뇌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 3가지 동기가 발생하는 것은 물질적 존재에 3가지 상태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욕계에서 애욕을 전재로 할 때에는 즐거움. 괴로움. 중립상태의 3가지 느낌이 있었지만 색계에서의 물질적 존재 그 자체를 두고 살펴보면 1> 안정상태(安定狀態) 2> 불안상태(不安狀態) 3> 붕괴상태(崩壞狀態)의 3가지 상태가 있다. 그리하여
1> 안정상태 - 색계 탐욕번뇌
2> 불안상태 - 색계 진에번뇌
3> 붕괴상태 - 색계 치암 번뇌가 각각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오취온(五聚蘊)은 물질적으로 3가지 상태 곧 안정상태. 불안상태. 붕괴상태를 거쳐서 가게 된다. 결국 오취온은 불안상태와 안정상태를 오가다가 드디어 붕괴상태에 돌입하여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각 상태마다 그 양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色界라고 하여 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정신이 혼합(混合)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은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지만 때때로 물질이 상황을 주도하고 精神은 보조자로 있을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연상하면 色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할 경우 이제 그 3가지 경우에 대한 마음의 상태는 다음과 같게 된다.
@ 첫째 안정되었을 때는 오로지 존재의 맛에 대한 즐거움을 추구한다.
@ 둘째 불안할 때는 처절하게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 셋째 결국 붕괴를 맞이하는데 이때는 상상할 수 없는 멸무(滅無)에 대한 공포(恐怖)와 절망감(絶望感)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 멸무(滅無)에 대한 공포(恐怖)와 절망감(絶望感) 속에서 좌절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것이며 치암번뇌(癡暗煩惱)라고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 안정상태 시 오로지 물질적 존재의 맛에 대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상황을 우리는 색계 탐욕번뇌라고 부르는 것이며.
둘째 불안정상태 시 불안한 마음으로 처절하게 안정을 추구하는 상황을 색계 진에번뇌(瞋恚 煩惱)라고 부르는 것이다.
셋째 붕괴상태에 들면 멸무(滅無)에 대한 공포와 절망 속에 좌절하거니와 그것을 색계 치암 번뇌라고 부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색계의 번뇌란 색이 붕괴(崩壞)할 때 색집(色執)이 처절하게 요동을 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색은 부서져도 색집은 無色界4處의 처방이 없이는 절대 부서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가 계속되는 것이다.
# 색계번뇌에서 해탈하려면
이것 즉 색계번뇌에서의 해탈이 가능하려면 이제는 기본적으로 물질적 존재의 맛보다도 더 강력한 매력(魅力)덩어리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색계의 탐 진 치는 바꾸어 말하면 색계에서의 존재의 맛에 대한 탐욕은 그 자체를 두고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앞서 욕계번뇌의 해탈사와 관련된 제안을 떠올리기 바란다.
이처럼 색계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색계의 맛(존재의 맛)보다 더 강하고 질 좋은 즐거움을 안겨주는 무언가를 성취(成就)하는 길 뿐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무색계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것만이 색계의 번뇌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무색계의 즐거움만 얻는다면 색계의 탐욕과 진에와 치암은 씻은 듯 사라질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중소현의 무색계 즐거움인 것이다.
앞으로 분별하겠지만 무색계의 즐거움에도 정중소현의 무색계 즐거움과 오온미생 전의 무색계 즐거움이 있다.
여기서
1) 첫째 정중소현의 무색계 즐거움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 정중소현은 무색계삼매를 뜻하고 무색계삼매는 사무색처(四無色處)를 뜻하며 이 경지를 얻으려면 예비수행 5단계(계본방호. 감관방호. 정념정지. 소욕지족. 원리오개)와 조도수행(사념처 … … 팔정도)일곱 단계 및 색계사선을 마스터해야 하는 것이다.
<2> 무색계삼매 속에서 느껴지는 자아의 즐거움(나라고 하는 그 자체의 즐거움)은 번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로 진행하는 모습은 번뇌를 지속적으로 털어내는 모습이지 그것에 묶이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색계삼매 속에서는 존재의 맛에 대한 내성을 가지는 것처럼 무색계삼매 속에서도 자아의 즐거움이 뿜어대는 희열(喜悅)에 대한 내성이 있다.
2) 둘째 오온미생 전(五蘊未生 前)의 즐거움은 그 강도가 강하므로 더 강력한 탐 진 치 번뇌가 예상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무색계번뇌가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번뇌의 발생순서로 보면 당연히 무색계번뇌가 먼저 생기는 것이고 그다음에 색계번뇌 욕계번뇌 악業을 짓고 사견(邪見)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12緣起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밖에서부터 사견. 악업. 욕계번뇌. 색계번뇌. 무색계번뇌의 순서로 치료하여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무색계번뇌와 그 해탈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3] - (3) 무색계번뇌에서의 해탈(十二緣起說 法門)
첫 단계 外道思想에 대해 미련 없이 부정했고. 둘째 단계 惡業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셋째 단계 곧 欲界煩惱에서 해탈했고. 넷째 단계 色界煩惱에서조차 해탈했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다섯째 단계로 무색계번뇌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이것이 解脫 · 道이고 아함경인 것이다.
그러나 무색계번뇌에서 해탈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바로 미세번뇌(微細煩惱) 마저 잡아내야 하니 그 과정이 大乘의 육바라밀 법문이요 金剛經의 가르침이며 大乘 반야부 경전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무색계차원의 번뇌를 살필 때에도 1)무색계의 의미 2)번뇌의 말 뜻 3)번뇌의 강도 4)무색계번뇌의 동기와 모습 등 4가지로 분류해서 살피면 될 것이다.
1) 무색계(無色界)의 의미 :
무색계란 무색집(無色執)이 지배하는 영역으로서 무색집(無色執; arupiya)이란 한마디로 아집인 것이다. 아집이란 자아와 관련된 상에 대한 집착을 특징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리하여 무색계를 色이 없는 세계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신만이 독존하는 세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단지 아집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집이 색집(존재의 맛)을 불러오고 색집이 욕집(욕계의 탐욕)을 불러온 것이다.
2) 번뇌의 말뜻: 욕계나 색계의 경우와 같다.
3) 번뇌의 강도:
무색계번뇌의 강도는 색계번뇌보다 더 강해졌다라고 이해하면 정확할 것이다. 그 강도의 비교가 욕계의 즐거움과 색계의 맛을 비교할 때처럼 색계의 맛이 빚. 병. 감옥. 종. 귀도라면 무색계의 경지가 주는 즐거움은 그로부터 벗어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무색계번뇌의 동기와 모습:
이러한 무색계의 즐거움(아집덩어리)도 2가지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1> 무색계의 정중소현의 즐거움 과 2> 오온미생 전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중에서 번뇌의 동기가 되는 것은 당연히 오온미생 전에 발생한 아집인 것이다.
색계번뇌의 동기에는 3가지가 있어 색계 탐 진 치의 3가지 번뇌가 성립했듯이 무색계번뇌에도 그 동기에 3가지가 있어서 무색界 탐 진 치의 3가지 번뇌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 3가지 동기는 아집덩어리(자아와 관련된 상)에 3가지 상태가 있기 때문이다. 욕계에서 애욕을 전제로 할 때에는 즐거움. 괴로움. 중립상태의 3가지 느낌이 있었고 색계에서 색 집을 전제로 할 때는 안정 상태. 불안상태 붕괴상태가 있었는데 아집덩어리(자아와 관련된 상)에도 (1) 안정상태 (2) 불안상태 (3) 붕괴상태의 3가지가 있다.
그래서 색계의 경우와 같이
(1) 안정상태 - 무색계 탐욕번뇌가 상응하며
(2) 불안상태 - 무색계 진에번뇌가 상응하며
(3) 붕괴상태 - 무색계 치암 번뇌가 각각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색계와 무색계는 그 동기에 있어 형태상 닮은 데가 있으므로
<1> 전통적으로 욕계와 구별해서 上 2界로 통칭하여 부르며
<2> 욕계천신은 deva라고 표현하는데 비해서 색계와 무색계 천신은 묶어서 brahman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본래는 色界初禪天의 天神을 brahman이라고 함)
아집에 대한 분석
이쯤에서 아집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해보도록 하자.
앞에서 무색집(無色執)은 자아와 관련된 상에 대한 집착이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서 아집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단계의 아집은 色界의 존재의 맛을 초월하는 즐거움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아집 즉 자아의 즐거움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아집을 제거할 수 있는 그것은 상수멸(想受滅)에서 얻는 즐거움인 진아(眞我)의 즐거움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아(實相)의 즐거움만이 자아의 즐거움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으로 생각하면 진아(實相)의 즐거움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비록 진아(實相)를 왜곡(歪曲)했다하더라도 가아(假我)의 즐거움이 색계의 즐거움을 능가하기 때문에 가아(假我)에 집착하게 되어 아집(我執)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집이 즐거움을 지니는가? 아집에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는 나아닌 것을 나라고 잘못 보는 아집과
둘째 나인 것(實相)을 나 아니라고 잘못 보는 아집의 2가지인 것이다.
실제로는 나인 것(實相)을 나 아니라고 잘못 보는 아집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나 아닌 것을 나라고 잘못 보는 아집이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인 것이라는 표현은 바로 실상[實相(진아)]을 말하는 것이며 실상은 불생불멸을 속성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실상을 보고도 그것이 실상인줄 모르는 것 곧 실상이 아니라고 잘못 보는 것으로서 바로 나인 것을 나 아니라고 잘못 보는 것이 아집의 내용인 것이다.
현실과 같은 일상적 차원 또는 표면적차원에서의 아집은 첫째 단계의 아집이고(예를 든다면 六根을 나라고 執着하는 것 등) 지금 무색계와 같은 오묘(奧妙)한 경지에서 언급하는 아집은 바로 이 두 번째 성격의 아집 즉 나(實相)인 것을 내가 아니라고 잘못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잘못 보는 것도 실제 나인 것에 해당하는 實相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바로 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實相이 뿜어내는 막강한 즐거움의 영향권에 드는 것이다. 이는 개기일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집착은 집착할만하니까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켜서 탐 진 치를 발생시키지만 그 집착이 최초 발생하는 단계에서는 좋은 것에 대하여 좋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색계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2가지 즐거움 중에 오온미생 전의 즐거움이 있다는데 그 오온미생 전은 어떤 단계인가?
그것은 바로 12연기의 무명 행 식 지분을 암시하는 것이다. 12연기(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처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에서 육근 미생 전의 소식은 육처이전의 단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五蘊미생 전이라면 五蘊지분은 12연기의 名色에 해당하는 것인데 五蘊에는 行 지분도 있어서 이 行 지분이 12연기의 行 지분에 해당한다고 우겨도 제아무리 올라가도 行 지분 까지 밖에는 올라가지 못하므로 12연기에는 오온미생 전의 소식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 단계의 이러한 즐거움의 상향성은 九次第定修行의 점진적인 교설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다섯 가지 애욕을 연해 즐거움과 안심함이 생한다. 애욕의 즐거움보다는 -제1선의 즐거움 - 제2선의 즐거움 -제3선 - 제4선 -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 - 비상비비상처 - 상수멸을 구족하여 지내는 즐거움이 가장 높다.” 라는 경설인 것이다.
오온미생 전이라는 단계는 바로 십이연기의 무명 - 행 - 식 지분을 암시하는 것이다. 五蘊은 십이연기에서 명색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명색은 반드시 무명 - 행 - 식 지분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색계의 번뇌는 오온미생 전의 모습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기 관련경은 앞의 취전경 보다 더 전문적이며 아함경에 있어 가장 궁극적인 경이다. 이를 깨달음의 경이라고 이름붙인 데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명 행 식 등의 단계에서는 집착된 자아에서 뿜어 나오는 즐거움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착된 자아에 변동이 발생하므로 분노하는 번뇌도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무색계번뇌의 연구인 것이다.
※ 집착된 자아 또한 3가지 상태를 거쳐 간다. 곧 안정상태. 불안상태. 붕괴상태 인 것이다. 불안상태와 안정상태를 오가다가 결국 붕괴상태에 돌입하여 끝이 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각 상태마다 양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첫째 안정되었을 때는 오로지 자아의 즐거움에 한 없이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불안할 때는 처절하게 안정을 추구하게 되며 그러나 셋째 결국 붕괴를 맞이하는데 이때는 상상할 수 없는 멸무(滅無)에 대한 공포와 절망감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 안정상태 時 자아의 즐거움에 한없이 집착하는 상황을 무색계 탐욕번뇌라고 부르는 것이다.
※ 둘째 불안정상태 時 불안한 마음으로 오로지 안정을 추구하는 상황을 무색계 진에번뇌라고 부르며.
※ 셋째 붕괴상태에 들면 멸무(滅無)에 대한 공포와 절망 속에 좌절하거니와 그것을 무색계 치암번뇌 라고 부르는 것이다.
# 무색계번뇌에서 해탈하려면
이 무색계번뇌에서의 해탈이 가능하려면 이제는 기본적으로 집착된 자아가 뿜어내는 즐거움보다 강력한 매력(魅力)덩어리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實相과 합일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것만이 무색계의 번뇌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實相과 합일의 즐거움만 얻는다면 무색계의 탐욕과 진에와 치암은 씻은 듯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實相과 합일의 즐거움이란 實相의 영향권에만 들어도 그 즐거움이 엄청난데 그것과 합일했다는 것은 즐거움 자체가 되어 버렸다는 뜻 아니겠는가.
따라서 實相과 합일의 즐거움을 얻는 상태를 實相과 합일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고 삼매의 입장에서는 상수멸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지혜의 입장에서는 누진통(漏盡通)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경지(境地)의 입장에서는 열반(涅槃)이라고 말하고 인 시설(人 施設)의 입장에서는 아라한이라고 말하며 解脫 · 道의 입장에서는 부동심해탈 또는 비시해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생사윤회에서 해탈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 경에서는 악마(惡魔; mara;죽음의 신)의 군대에게 승리했다는 게송(偈頌)으로 마무리 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아함의 解脫 · 道는 완성되고 大乘에서 지적하는 문제[미세번뇌에서 오는 고액]을 제외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차원에서 분류한 5해탈(五 解脫)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함을 기반으로 해서 대승경전인 반야부 경전으로 진행된 것이며 반야부 경전에서는 미세번뇌를 주제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미세번뇌 때문에 고액이 발생하니 이 고액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大乘에서는 행의 성취를 요구하고 있다. 행이란 말 그대로 가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는 것이 행이란 말인가?
행을 반야부 경전에서는 상(相)이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주(住; 열반에 머무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머무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것이 반야부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인 것으로서 어떻게 가는 것이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고 가는 것인가? 이것이 大乘의 가르침의 내용인 것이다.
불교는 이처럼 점진적인 점교성을 바탕으로 한 교설인 것이다. 따라서 大乘 특히 초기 大乘經典을 비 불설(非 佛說)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아함(阿含)에서도 어떻게 해탈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삼매 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삼매 법에 대하여도 알고 가야 할 것이다.
삼매 법(三昧 法)
1. 정의:
선심일경성(善心一境性; kusala-citta-ekaggata; kuaala-citta-eka-agra-ta)으로서의 삼매란 도덕적인 가치를 지닐 때만 삼매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선심(善心)일 때만이 삼매라고 할 수 있으며 善心이란 부처님의 법을 실천할 때만을 선심(善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율(戒律)이라는 말도 cilla가 계(戒)라는 말인데 이는 버릇을 뜻하는 말로서 좋은 버릇을 계율(戒律)이라고 하는 것이다.
2. 날개:
선심일경성을 목적지까지 날아가게 하는 수단이므로 날개라 한다. 三昧를 둘로 나누면 지(止)와 관(觀)이라고 할 수 있다.
삼매는 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며 지혜 또한 해탈을 위한 수단이지 삼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특별한 경우 계 정 혜처럼 지혜까지만 설명하는 경우는 목적이 되지만 불법에서 지혜란 해탈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선심일경성을 몸통이라면 止와 觀은 이송수단으로서 목적지 까지 이송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날아가는 것이고 날아가려면 날개가 있어야 하니 止와觀을 양 날개로 하여 삼매에 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 지(止: samatha; 살피다가 멈추는 것): 그냥 멈추는 것이 아니고 살피다가 멈추는 것이며.
2) 관(觀: vipasyana; 멈추어 있다가 살피는 것): 멈추어 있다가 살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멈춤과 살핌이 항상 함께 있어야하며 삼매의 몸통이 결과에 이를 때 까지 쉬지 않고 날개 짓을 해야 하는 것이 양 날개의 의미이니 止와觀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하는 한 set인 것이다.
3. 전제:
1) 유심유사 삼매(有尋有伺 三昧)(심(尋) - vitarka; 세세한 사유<義說을 다 살피는 것 - 책으로 치자면 전체 내용을 다 살피는 것>)와 굵직한 사유를 다 살피는 것.
2) 무심유사 삼매(無尋有伺 三昧)(사(伺) - vicara; 굵직한 사유<法說만을 짚고 가는 것 - 주제만 훑고 지나가는 것>)
法說이란 부처님 법의 주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이라고 하는 것은 法說이고 색을 다시세세하게 설명한 것을 義說이라고 하는 것이다.
3) 무심무사 삼매(無尋無伺 三昧): 義說과 法說을 다 살피고 나서 더 이상 사유(思惟)할 것이 없으면 멈추어 집중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이 삼매요 집중이요 또한 선심일경성인 것이다.
이 3종의 삼매가 뜻하는 것은 三昧에는 반드시 전제가 되는 바로 치밀한 논리적 사유가 있음을 보여주는 가르침인 것이다. 오리무중의 마음 길을 더듬는 것은 참으로 위태롭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논리적 사유는 바른 길을 안내하는 유일한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유심유사나 무심유사는 사유의 단계이지 삼매라고 할 수 없으나 이것을 삼매라고 불러주는 이유는 삼매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과정이므로 삼매라고 불러주는 것일 뿐이다.
참고로 색 수 상 행 식 등은 법설이며 사대라든가 사대조색이라든가 육식신 육수신 육상신 등과 같이 자세한 내용은 의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4. 연습: 삼매에 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습대상으로서 의욕(chanda). 정진(virya). 마음(citta). 사유(vimamsa)의 삼매가 있다.
1) 의욕(意慾); 하고 싶은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의미의 三昧.
2) 정진(精進); 해야 할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의미의三昧(통일. 집중. 정돈).
3) 마음; 이때의 마음은 감정적 영역의 마음을 특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서 삼매에 들기 전에 감정의 흔들림이 나타나면 자제. 통제. 억제하여야 하는데 이를 사량의 삼매라고도 한다.
이 감정의 흔들림이 병적일 경우는 우울증 조울증 등 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병적일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웃었다 울었다가 너무 자주 반복되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조절의 상태에서 삼매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옅은 미소로 일관하는 얼굴표정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얼굴 표정이란 내적 형태인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감정의 외적 형태이기 때문이며 이는 마치 안의 말이 생각이고 바깥으로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말인 것과 같은 논리인 것이다.
4) 사유(思惟); 이성의 흔들림의 三昧(자제. 통제. 억제를 하는 삼매): 이성의 흔들림이란 지나친 공상. 망상 또는 멍하니 넋 놓고 있는 것. 또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거나 비관적으로 생각(근심. 걱정)하는 경우.
병적일 경우 자폐(자기 생각의 세계에만 사로잡히는 것.)하게 되는데 이런 일들을 제대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방법: 쓸데없는 공상에 빠진다고 판단되면 제일 좋은 방법은 염불하는 것이다. 놀 때나 잘 때나 깰 때도 항상 염불해라. 그리하여 사유의 능력을 하나로 집중하라는 것이다.
三昧의 삼요소로서 入定 定中 出定이 있는데 출정이란 自意에 의해서 출정해야 삼매이지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방해를 받아서 출정한다면 삼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5. 모습: 삼매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기쁨의 충만함(piti-pharanata): 정신적인 즐거움을 기쁨이라함.
2) 즐거움의 충만함(sukha-pharanata): 육체적인 편안함을 말함.
3) 의도의 충만함(ceto-pharanata): 선한 의도를 말함. 또 기민함을 가지고 있어야 며 따라서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고 자유자재 해야 하는 것이다.
4) 빛의 충만함(aloka-pharanata): 지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의지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충만 했을 때 얻어지는 표정에서 나타나는 환함을 뜻한다.
따라서 지적으로 정서적인 충만함을 기쁨의 충만함이라고 하고 肉體的으로 충만함을 즐거움의 충만함이라고 하고 의지적으로 충만함을 의도의 충만함이라고 표현하는데 의도는 반드시 선한 의도라야 하는 것이다.
5) 성찰의 모습(paccavekkhana-nimittam): 지적인 부분의 충만함을 성찰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다.
6. 절차(覺支) - 가장 일반적인 절차
1) 념(念) - 2) 택법(澤法) - 3) 정진(精進) - 4)기쁨<喜> - 5)경안(輕安) - 6)삼매(三昧) - [7)사(舍)각지]
1) 기억(念); 삼매에 들려면 우선 부처님의 말씀을 의미 있는 방법까지 기억해야할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이 필요하면 책을 보면 되지만 옛날 부처님 당시에는 책이 없었으므로 오직 기억하는 방법 뿐 이었다.
따라서 기억하는데 있어서 네 가지 범주(四念處)[한마디로 괴로움과 그 괴로움에서의 해탈과 관련된 범주]였다.
왜냐하면 사념처[(신수심법) 즉 1> 괴로움의 발생과정. 2> 괴로움의 성립. 3> 해탈의 동인. 4> 해탈의 성취]라는 네 가지 범주의 부처님 말씀들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 택법; 그 다양한 말씀들 중에서 당회의 좌선에서 살필 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념법(念法)다음에 택법(擇法)이 나온 것이다.
3) 정진; 그 주제의 의미가 확연해 질 때 까지 불굴의 의지로 용맹 정진하는 것이다.
4) 기쁨; 그렇게 용맹정진하면 정신적인 안정감과 기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5) 경안(즐거움); 정신적인 안정감과 기쁨이 오면 이어서 육체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이 느껴질 것이다.
6) 삼매; 이상의 다섯 가지 要件들이 순차적으로 원만하게 벌어졌을 때 비로소 “색계” 수준의 삼매가 시작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정 삼매는 언제나 똑같은 즐거움에 드는 상황이 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잘못된 수순이 된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7. 절차(법성): 악업에의 연루 가능성이 있는 자는 다음 순서에 입각하여야 한다고 한다.
1)계율 지킴 - 2)후회 없음 - 3)마음의 편함 - 4)마음의 기쁨 - 5)몸의 편함 - 6)몸의 즐거움 - 7)삼매
계 정 혜의 확장일 수 있다.
8. 절차(정도): 생활인을 위한 절차를 포함한 순서는
1)정견 - 2)정사유 - 3)정어 - 4)정업 - 5)정명 - 6)정정진 - 7)정념 - 8)정정(정삼매) 로서 팔정도이다.
팔정도가 생활인을 위한 절차라고 한 이유는 정업(正業)과 정명(正命)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정업의 업은 직업을 뜻하며 정명은 바른 생활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9. 단계: 구차제정의 아홉 단계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색계 4단계와 무색계 5단계)
10. 요소: 三昧(samadhi)에는
1). 입정(samapatti):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삼매에 드는 것을 입정이라고 한다.
2). 정중(thiti): 이것이 삼매에 들어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지속력이라는 지속시간과 연관되고 있다.
3). 출정(vutthana): 자의에 의한 출정이라야 적법한 삼매라고 할 수 있다.
4). 상응(kallita): 주변여건이 삼매에 들 수 있는 적정성을 유지할 것. 여건이 좋지 않으면 자의에 의한 출정을 이룰 수 없다. 특히 출정에 방해받지 않을 여건이 필요한 것이다.
5). 대상(arammana): 택법에 의해서 선택된 법. 大乘의 禪에서는 화두가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빠사나 에서는 업처(業處; kammatthana)가 대상이다. 예를 들면 地 水 火 風. 청 황 적 백 등이 삼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하튼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만이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6). 행경(gocara): 유효반경을 뜻함. 어떤 삼매나 그 삼매가 커버하는 범위가 있다. 예를 들어 색계4선의 B구릅에서 의성지와 신족통. 공무변처에서 천이통. 식무변처에서 타심통 하는 식으로 유효한 범위가 주어져 있다. 이러한 유효범위를 행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7). 인발(abhinihara): 아무래도 삼매는 그자체로 스트레스이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니 스트레스 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스트레스를 참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한 것이 인욕바라밀인데 인욕이란 삼매에서의 지극한 스트레스를 참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라는 덕목이 하나 추가 된 것이다.
8). 품위(sakkaccakari): 도덕적 가치와 품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道場이 장엄된 것도 이 뜻일 것 같음.]
9). 지속력(sataccakari): 삼매란 그 지속시간이 매회 최소 50분은 되어야 삼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과부좌가 필요한 것이다. 힘의 분산이 원만하기 때문에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10). 적응력(sappayakari): 삼매는 고형 화(固形 化) 되어 딱딱한 것이 아니고 유들유들한 유연한 형태이어야 하는 것이다. 변형가능하고 변화가능한 적응력을 갖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차제정
구차제정의 교설 중에는 중니카야 2권 9절 P 74에 나오는 설명을 축약하면
“다섯 가지 애욕을 연해 즐거움과 안심함이 생긴다. 애욕의 즐거움보다는 - 제1선의 즐거움 - 제2선의 즐거움 - 제3선의 즐거움 - 제4선의 즐거움 -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 상수멸을 구족하여 지내는 즐거움이 가장 높다.
우리의 목표가 이고득락(離苦得樂)이듯이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제1禪은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함 - 제2禪이 그의 극복임
제2禪은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함 - 제3禪이 그의 극복임
제3禪은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함 - 제4禪이 그의 극복임
제4禪은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함 - 空無邊處가 그의 극복임
空無邊處는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함 - 識無邊處가 그의 극복
識無邊處는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함 - 無所有處가 그의 극복
無所有處는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함 - 非常非非常處가 그의 극복
非常非非常처마저도 부족하니 버려야하고 극복해야함 - 想受滅이 그의 버림이다(pahana); 想受滅 에서는 조금의 결박(結縛)도 볼 수 없음.
제1禪에 들고 제1禪의 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출리(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제2禪에 들고 제2禪의 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제3禪에 들고 제3禪의 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제4禪에 들고 제4禪이 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空無邊處에 들고 空無邊處의 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識無邊處에 들고 識無邊處의 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無所有處에 들고 無所有處의 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非想非非想處에 들고 非想非非想處의 法들에서 解脫한다. 더 위의 出離가 있다고 알아낸다.
想受滅에 들어 지내고 智慧로 보아 제루(諸漏)를 다한다. 그 定(삼매)에서 기억을 갖춘 채 일어나 그 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없다가 합생(合生)한 것이고 있으면서 느껴진 것이라고 안다.
그리하여 그런 일들에서 해탈한다. 더 이상의 출리(出離)는 없다고 알아낸다. 더 지어야 할 것이 그에게는 없다.”
부처님은 사리불에 대하여 “사리불은 성스런 계 정 혜 해탈에 있어 자재를 얻고 건너편에 이른 자이고 세존의 아들이고 법의 상속자이다.” 라고 하였다.
그는 제1선을 구족하여 지낼 때 정사(正思)는 갈애를 떠남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제1선을 갖춤에서 자찬훼타(自讚毁他) 하지 않는다.[세존께서는 제1선을 갖춤에서 “갈애를 떠남”을 말씀하셨다.]
제2선 - 제3선 - 제4선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 - 비상비비상처 - 정사는 비상비비상처를 넘어 想受滅을 구족하여 지낸다. 그는 智慧로 보아 제루(諸漏)를 다한다. 이 比丘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어디에서도 무엇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야 비로소 無色界에서 解脫하여 涅槃을 證得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고 아주 쉽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실제 과정을 망라해서 생각해보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며 한 生에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누겁(累劫)을 두고 수행을 쌓아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결과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 이제부터라도 부지런히 수행하여 來世 언제인가 해탈의 맛을 맛보고 열반을 증득하여야 할 것이다.
이 법문이 여러분의 修行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불하십시오. 東山 法師団 惠山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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