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수행에관한 법문

수행에 관한 법문

동산/혜산방 2018. 2. 21. 11:31

 

(1)영원한 자유--수행의 종류

(1)영원한 자유--수행의 종류

 

수행의 종류

외도의 수행법과 다른 종교의 수행법 같은 것들은 모두 제외 하고 순수하게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세 가지로 나뉩니다. 이것들은 모두 경전에 근거한 것이며 또한 경전에 근거한 것은 이것들입니다.

첫째 관법으로는 일출관, 월출관, 백골관, 자비관, 수식관, 비파사나 등등 이 있습니다.

둘째 념념 상속법으로는 염불, 주력, 범위를 넓히면 독경(차라리 관법이나 더 낮은 수행법에 가깝지만 잘 하면 념념 상속법의 효과를 조금은 볼 수 있습니다.) 정도가 있습니다.

셋째 의심법으로는 격외도리인 화두를 가지고 의심하는 화두법과 능엄경 25원통법문의 화두법에 해당하는 수행법(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를 찾는 것 같은)이 있습니다.

 

이 방법들은 각기 그 쓰임이 있습니다.

관법은 무지몽매한 중생이 집착과 탐욕에 잠겨 있어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르고 헤매일 때 정신을 차리게 해 줍니다.

념념 상속법은 일단 정신을 차린 수행자가 그 깨어 있는 삼매의 영역을 확보 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의심법은 영역은 확보되어 큰 번뇌는 없으나 깊은 삼매에 들지 않아 미세번뇌가 빠져나오는 수행자가 깊은 삼매에 들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이러한 쓰임은 각각의 수행법의 고유한 특성에 기초한 것이므로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특성과 자세한 의미는 다음 글에 밝히겠습니다.

이러한 수행법의 의미를 모른다면 자신의 수행법으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며 어느 수행단계에서 어떻게 이용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므로 수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철큰스님 법문--[1]수행의 종류

성철큰스님 법문--[1]수행의 종류

 

수행의 종류

외도의 수행법과 다른 종교의 수행법 같은 것들은 모두 제외 하고 순수하게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세 가지로 나뉩니다. 이것들은 모두 경전에 근거한 것이며 또한 경전에 근거한 것은 이것들입니다.

 

첫째 관법으로는 일출관, 월출관, 백골관, 자비관, 수식관, 비파사나 등등 이 있습니다.

둘째 념념 상속법으로는 염불, 주력, 범위를 넓히면 독경(차라리 관법이나 더 낮은 수행법에 가깝지만 잘하면 념념 상속법의 효과를 조금은 볼 수 있습니다.) 정도가 있습니다.

셋째 의심법으로는 격외도리인 화두를 가지고 의심하는 화두법과 능엄경 25원통법문의 화두법에 해당하는 수행법(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를 찾는 것 같은)이 있습니다.

 

이 방법들은 각기 그 쓰임이 있습니다.

관법은 무지몽매한 중생이 집착과 탐욕에 잠겨 있어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르고 헤매 일 때 정신을 차리게 해 줍니다.

념념상속법은 일단 정신을 차린 수행자가 그 깨어 있는 삼매의 영역을 확보 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의심법은 영역은 확보되어 큰 번뇌는 없으나 깊은 삼매에 들지 않아 미세번뇌가 빠져나오는 수행자가 깊은 삼매에 들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이러한 쓰임은 각각의 수행법의 고유한 특성에 기초한 것이므로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특성과 자세한 의미는 다음 글에 밝히겠습니다.

이러한 수행법의 의미를 모른다면 자신의 수행법으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며 어느 수행단계에서 어떻게 이용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므로 수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철큰스님 법문--[2] 중생은 왜 중생인가?

성철큰스님 법문--[2] 중생은 왜 중생인가?

 

중생은 왜 중생인가.

중생이 왜 중생입니까?

번뇌 와 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번뇌 와 무기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자유로워집니까?

하나의 번뇌인 방편으로 잡다한 번뇌를 평정하고 무기에 빠지지 않게 해 나가는 것이 바로 자유로워지는 과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신은 정말로 의심스럽습니까?

당신 자신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당신의 의심이 풀릴 때까지

 

 

성철큰스님 법문--[3] 수행의 단계

성철큰스님 법문--[3] 수행의 단계

 

수행의 단계

수행의 단계가 중요한 까닭은

첫째 단계를 이르지 못하고도 자신의 수행이 나아간 것으로 착각을 하거나 혹은

견성을 했다고 하므로 그것을 밝혀야 하며

둘째 각 단계에 따라 그에 맞는 수행과 선지식의 지도 등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품은 단계가 없지만 중생의 마음은 두꺼운 번뇌와 무기의 구름에 가려 있어 그것을 물리쳐 없애는데 정도에 따라 단계가 생긴 것입니다.

 

1.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 일여(語默動靜一如)

걸어 다닐 때나 머무를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말할 때나 말을 들을 때나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나 항상 삼매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깨어 있을 때는 항상 삼매에 들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중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말할 때 삼매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인이 수행과정에서 만나는 세 가지 고비 즉 상기, 말할 때 삼매 유지, 내외명철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아주 어려운 경지입니다.

이 단계를 통과하는 데는 묵언수행이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이 단계만 통과하면 조금 후에 설명할 오매일여까지는 무난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2. 몽중일여(夢中一如)

삼매가 깨어 있을 때 완벽하게 유지가 되면 나중에는 꿈속에서도 깨어 있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삼매가 유지가 됩니다. 이것을 몽중일여라 합니다.

 

3. 숙면일여(熟眠一如)

공부가 몽중일여가 되고 나면 의식이 끊어진 깊은 잠에서도 삼매가 유지되는 숙면일여의 경지까지 가게 됩니다. 이 경지를 오매일여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매일여가 되면 추 번뇌는 모두 없어지게 되어 일반 중생과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단계를 불퇴전의 경지라고 합니다.

즉 다시는 중생의 삶으로 퇴전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경지에도달하면 보통 성인이라고 이름 합니다. 또한 이 단계는 선지식이 수행을 점검하는 중요한 점검법이 되어 이 단계를 통과하지 못한 가짜 부처를 가려내는 수단의 하나입니다.

 

4. 내외명철(內外明徹)

공부가 오매일여가 되면 6추의 번뇌는 모두 없어지게 되고 3세의 번뇌만 남습니다. 이 때 더욱 수행에 박차를 가하게 되면 3세의 번뇌도 서서히 소멸되고 수행이 극치에 이르면 무기와 번뇌가 밝음으로 꿰뚫어지는 내외명철이 되게 됩니다. 수행의 가장 중요한 단계로 수행인이 최후에 넘어야 할 어려운 관문입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는 데는 장좌불와가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이때는 스승의 도움이 거의 절대적입니다.

 

5. 돈오(頓悟)

방편을 들고 수행하다가 내외명철이 되면 다른 번뇌와 무기는 밝음으로 꿰뚫어지고 오직 방편 하나만 남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그 방편이 돈제(頓除)되면서 바로 방편 하나가 나오던 곳, 즉 의식의 주체인 불성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돈오라고 이야기합니다.

보통 頓悟내외명철과 동시에 일어납니다. 돈오를 견성이라고도 합니다. 見性 成佛이므로 이것으로 곧 부처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內外明徹의 단계가 없거나, 통과했다고 착각하더라도 다시 번뇌와 무기가 있어 그것을 없애 나가는 수행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것은 頓悟가 아니라 착각입니다.

 

 

성철큰스님 법문--[4] 무기와 번뇌

성철큰스님 법문--[4] 무기와 번뇌

 

무기와 번뇌

육조단경에 안으로 迷惑하면 無記 空에 떨어지고 밖으로 迷惑하면 에 집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禪家에서는 參禪修行 時 無記 空警戒하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또한 경전에도 妄想昏沈으로 마음을 표현합니다. 과연 無記란 무엇이며 衆生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나머지 하나인 煩惱는 무엇입니까?

1. 무기

흔히 불교에서 수많은 煩惱만을 다루고 無記는 수행중의 경계할 상태로 주의만 시킬 정도로 많이 이야기되어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無記는 자신이 無記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無記인줄을 잘 모른다는 점 때문입니다.

물론 煩惱修行을 허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煩惱에 빠져 있는지 모르지만 無記는 바로 생각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자각을 허기 힘든 것이지요.

無記는 생각이 없는 깊은 잠이라든가, 기절한 상태라든가, 때때로 생각이 끊어져 멍한 상태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눈에 보이는 상태 뿐만 아니라 무기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생각과 생각사이에는 반드시 짧지만 無記를 거쳐 다음 생각으로 나아갑니다. 아침의 몽롱한 상태에서는 수시로 꿈과 無記를 오락가락합니다. 또한 평상시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거나 잡다한 생각만을 일으키는 사람은 항상 無記에 덮여 있는 생활을 합니다.

 

無記는 편안하고 밝습니다.

無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우선 편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게으름을 부리며 無記를 조장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修行中無記 空은 절대 경계해야 합니다.

무기는 생각에 힘이 없는 중생뿐만 아니라 수행자에게 더욱 깊은 본질적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수행자는 삼매의 힘이 있으므로 하나의 방편에 몰두하게 되지만 그 방편을 놓치거나 혹은 처음부터 방편이 없는 수행을 한다면 대번 무기 공으로 빠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무기의 밝고 편안한 상태와 또한 순식간에 시간이 건너뛴다는 속성 때문에 무기를 삼매로 착각하게 됩니다.

주의한다면 무기에 빠지기 전에 자신의 수행에 방편이 사라지는 것과 수행을 망각하고 편안함에 마음을 맡기는 순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빠졌더라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무기조장의 과보는 천제입니다.

무기를 조장하면 지혜가 사라지므로 축생으로 태어나고 사람이 되더라도 바른 법을 구분할 줄 몰라 방탕한 삶을 살거나 사마외도의 법에 빠집니다. 또한 그것이 지나치면 선근의 종자가 끊어져 영영 성불을 허기 힘든 천제(이찬티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보가 아니더라도 생각에 힘이 없어져 쾌락에 쉽게 무너지는 약한 인간이 되므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덧없는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성철큰스님 법문--[5] 무기와 번뇌 (번뇌)

성철큰스님 법문--[5] 무기와 번뇌 (번뇌)

 

무기와 번뇌 (번뇌)

2. 번뇌

번뇌란 당신의 모든 생각을 말합니다.

화를 내며 욕심을 내고 어리석어도 번뇌이며 기쁘고 즐겁고 평화로워도 번뇌입니다. 게으르게 하루하루를 지내도 번뇌이며 화두를 들며 열심히 수행을 해도 번뇌입니다.

당신이 무기에 빠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번뇌입니다. 수행의 방편 역시 번뇌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번뇌를 없앨 것입니까?

당연히 없앨 것입니다. 번뇌와 무기의 두꺼운 구름을 하루빨리 불어 제켜 참 성품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 . . 아닙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길바닥의 돌과 같은 무정지물에 다를 바 없습니다. 수행을 하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함이지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멍청히 아무생각 없이 편안히 앉아 무기만 기르는 것을 절대 경계하십시오.

 

번뇌를 없앤다 함은 번뇌의 속성을 없앤다 함입니다. 생각 생각에 집착하여 얽매이는 중생의 속성을 모든 생각에 자유로운 부처의 속성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여 이 법을 비방하지 말고 수행을 하여 직접 보십시오.

그 방법은 한 번뇌를 일으켜 수많은 잡다한 번뇌를 막고 큰 번뇌로부터 시작하여 미세번뇌까지 모두 평정하여 마지막 들고 있던 방편마저 사라질 때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생각이 나쁜 것이 아니라 번뇌가 나쁜 것입니다. 부처도 생각을 하니 생각을 없애 부처가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또한 수행은 바로 이 번뇌를 가지고 해 나가는 것입니다. 화두의 의심이 바로 번뇌이며 염불의 부처님이름이 바로 번뇌이며 진언의 소리들이 바로 번뇌입니다.

 

생각은 이용할 것이지 없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잡다한 생각을 일으켜 정신을 혼미하게 하며 집착에 그대로 붙잡혀 있으면서 수행을 한다 하면 그 사람의 근기가 낮은 탓이니 노력하여 나아질 때까지 기다릴 뿐입니다.

 

 

성철큰스님 법문--[6] 수행의 방편

성철큰스님 법문--[6] 수행의 방편

 

수행의 방편

수행의 방편이란 직접 수행을 해 나가기 위하여 일으키는 그 번뇌를 말합니다.

화두의 심법에는 화두요, 관법에는 관할 대상의 상이요, 염불 법에는 부처님의 이름이요, 진언에는 그 진언입니다.

방편이 무슨 역할을 하는가, 바로 한 번뇌를 일으켜 다른 번뇌를 일어날 틈을 안 주고 무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 중생의 속성인 무기와 번뇌를 평정하여 성불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방편이 없는 수행법으로는 수행이 미천한 단계에서는 수많은 번뇌에 끄달릴 것이며, 수행이 나아간 단계에서는 무기에 빠져 접신을 하는 등 순간적으로 마음이 평안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지 모르지만 영영 마구니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한 가지 방편을 일으키기가 힘들다 하여 편안한 길을 택한다 함은 자신의 업장이 얼마나 두껍게 쌓여 있는지는 모르고 그것에 더 큰 짐을 쌓는 것입니다.

 

방편은 뗏목에 비유할 수 있는데 강을 건너기 위해선 뗏목이 필요하고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립니다. 성불을 하면 방편을 버리며 그때 퇴전이 된다면 그것은 견성이 아닙니다. 수행 중 어떠한 경계에서도, 방편을 놓치지 않을 것이며 놓친다 하더라도 곧 다시 잡아야 합니다.

방편으로 쓰이는 번뇌의 종류에 따라 수행방법이 달라지며 그것은 그 단계와 쓰임에 따라 적절히 쓰여야 합니다. 반드시 바른 선지식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크게 관법, 념념 상속법, 의심법의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그것을 알아봅시다.

 

 

성철큰스님 법어--[7] 관법

성철큰스님 법어--[7] 관법

 

관법

< 관법 >

관법은 어떤 한 가지 대상을 생각함으로써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는 공부 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은 수행이 전혀 되지 않은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일깨워 정신을 차리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 상은 복잡한 번뇌를 파생시키기 쉽고 깊은 삼매로 들기에는 미약하여 정신을 차리게 한 후에는 더욱 수준 높은 수행이 필요합니다.

또한 관법의 단계도 거치지 못한 사람이 다음의 수행방법으로 들어간다면 수시로 방편을 망각하며 잡다한 번뇌와 집착에 휩싸일 것이며 그것을 일깨울 아무 제한이 없으므로 수행이 매우 더딜 것입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관법 3가지를 알아봅시다.

 

첫째 백골관(白骨觀)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욕심이 많은 사람에게 시키는 공부방법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살이 검어지고 고름이 생기며 살이 썩어 들어가 벌레가 꼬이며 나중에는 백골만 남는 것을 차례로 관()하게 합니다.

욕심이 일어 집착을 일으킬 때 무상함을 일깨워 그것을 깨뜨리니 세속에 집착하는 사람을 위한 낮은 차원이지만 좋은 수행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자비관(慈悲觀)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성내는 마음이 많은 사람에게 시키는 공부방법입니다. 지장경에 나오는 지옥의 참담한 모습을 떠올려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내는 마음으로 마음이 평정을 잃었을 때 주의를 돌이켜 성냄에 집착하지 않도록 합니다.

 

셋째 수식관(數息觀)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중생에게 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름대로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을 숫자를 세며 관찰하는 공부방법입니다. 방법으로 호흡에 맞추어 1부터 시작하여 100까지를 세게 하고 다음에는 거꾸로 100부터 1까지 다음에는 홀수만 세게 하고 다음에는 짝수만 세게 하기 도 합니다.

호흡에 주의를 떼지 않으니 다른 관법보다는 훨씬 집중되며 번뇌가 분화되지 않으며 주기적으로 숫자를 셈으로써 다른 번뇌를 일으키거나 무기에 빠지는 마음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어려우니 그나마 근기가 조금은 되는 중생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비파사나 수행법을 굳이 분류하면 관법으로 넣을 수가 있는데 그 순간순간 행

하는 행동과 마음에 집중하여 그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주로 기후가 무더워 한 가지

방편을 들고 수행하기가 너무 힘든 지방에서 행하는데 번뇌의 분화가 크기는 하지만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일으키는 방편의 의미가 약해 무기에 빠지기 쉬워 권할만한 방법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이든 약간씩 섞어 하거나 가끔씩 한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중 어느 때이든 끊임없이 한 가지 방편을 꾸준히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철큰스님 법문--[8] 념념 상속법

성철큰스님 법문--[8] 념념 상속법

 

념념 상속법

< 념념 상속법 >

이 방법은 공부가 관법의 수준을 넘어서 '정신을 차린' 수행인에게 '수행의 영역을 확보' 허기 위해 시킵니다.

념념 상속법(念念相續法)은 어떤 한 가지 번뇌를 생각 생 각 이어지게 함으로써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안 주는 공부방법입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전 육식에서 일어나는 추 번뇌를 없앨 수가 있습니다.

 

이 방법의 단계는 초발심 단계에서 어느 정도 흐린 마음을 맑게 하여 집중력이 생긴 수행자가 어묵동정일여와 몽중일여 숙면일여까지에 해당하는 단계입니다. 숙면일여 이후에는 전 육식의 모든 추 번뇌를 평정했으므로 공부의 방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심 법에서 알아봅시다.

 

이 방법을 분류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염불 법(念佛法)입니다.

부처님의 명호들, 예를 들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지장보살 등등 중의 하나만을 생각 생 각 이어지게 함으로써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안 주는 방법입니다.

 

둘째 주력 법(呪力法)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언들, 예를 들면 옴마니 반메훔, 옴 치림,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신묘장구 대다라니 등등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여 그것만을 생각 생 각 이어지게 함으로써 무기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안 주는 방법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 중 염불 법(念佛法)은 수행 중에 순수한 삼매가 아닌 부처님의 형상 같은 파생된 번뇌를 일으키게 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염불하는 부처님께 도와달라는 마음이 생기어 의지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단점이 있습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무엇엔가 의지하거나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접신하거나 마구니가 되기 쉬우므로 주의하십시오.

 

주력 법에서도 여러 주력이 있으나 너무 길어 한 삼매에 들기에는 부적합하거나, 너무 짧아 생각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좋은 방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6자 정도의 '옴 마니 반메 훔'이 적당하며, 가능한 빠르게 하여 번뇌의 틈을 없앱니다.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염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소리를 내는 것은 그것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합니다.

 

 

성철큰스님 법문--[9] 의심법 1 - 화두법

성철큰스님 법문--[9] 의심법 1 - 화두법

 

의심법 1 - 화두법

< 의심법(疑心法) 1 - 화두법(話頭法) >

이 방법은 공부가 숙면일여의 경지에 이르러 하루 중 어느 때라도 공부에 망각이 없고, 따라서 전 육식에서 일어나는 추 번뇌들은 이미 평정했을 때, 스승이 제자의 공부의 수준을 알아, 기연에 의하여, 의심을 돈발시켜 줌으로써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보아 제자가 공부가 거의 끝나갈 경지에 이르면, 이제까지 해 오던 방법으로는 제팔 아뢰야식의 3세 망념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더욱 '깊은 삼매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방법을 바꾸어 줍니다.

그것은 의심으로써 공부해 나가는 것인데 그 깊이는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든 채 그대로 삼매에 빠질 정도의 깊은 삼매에 들게 됩니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長坐不臥가 필요하며 또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은 스승이 제자와의 기연에 의해서 돈발 시켜 줍니다.

예를 들어 제자가 스승에게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마른 똥 막대기니라' 하고 대답하면, 스승에 대한 신심이 없다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스승의 말씀이 거짓일 리가 없으므로 그 이유를 의심하게 됩니다.

'마른 똥 막대기라고? 어째서 마른 똥 막대기일까?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불법이 왜 마른 똥 막대기일까? ' 하며 깊은 의심 속으로 들어갑니다.

 

깨치면 알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깨칠 때까지 계속해서 의심이 일어나 수행자를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팔 아뢰야식의 모든 번뇌 무기까지 평정되고 나면, 어떠한 경계에 닥쳐, 한순간에 頓悟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스승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둘째, 의심이 돈발 되어야 합니다. 즉 옛날 썼던 화두를 떡 주듯이 그냥 던져 주어서는 의심이 돈발 되지 않습니다. 만약 옛날 화두를 주려면 그와 비슷한 기연을 만들어 의심을 돈발 시켜 주어야 합니다.

셋째, 돈발 된 의심을 이어갈 삼매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삼매의 힘은 화두 법으로 수행하기 전에 벌써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위의 세 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두의심 법으로 수행하게 되면 수행의 진전이 없어 공부가 매우 어렵게 됩니다.

 

 

성철큰스님 법문--[11] 단계와 수행법 - 연장의 비유

성철큰스님 법문--[11] 단계와 수행법 - 연장의 비유

 

단계와 수행법 - 연장의 비유

< 단계와 수행법 - 연장의 비유 >

 

이제까지 세 가지 수행의 방법과 그 방법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수행은 단계에 따라 정확한 지도 아래 이루어져야합니다.

수행을 하여 견성을 하는 것을 불상을 조각하는 것에 비유해 봅시다.

불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큰 나무를 커다란 도끼를 가지고 불상의 대강의 형태에 맞추어 깎아 냅니다. 그리고는 중간정도의 자귀를 가지고 어느 정도 불상의 모양을 이루도록 다듬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조각칼과 같은 세밀한 연장으로 아주 미세한 곳까지 조각을 마무리합니다.

 

여기에서 큰 나무를 도끼로 대강 다듬는 것은 관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여 아직 중생의 때를 하나도 벗지 못하고 번뇌에 휘말리며 무기에 빠져 멍청히 시간을 보내는 때가 대부분인 사람이 우선 수행의 틀을 세워 수행자로서의 변신을 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주변에 휘말리려는 마음을 관법으로 일깨워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정도의 자귀로 불상의 모양을 만드는 것은 념념상속법에 해당합니다.

어느 정도 정신은 차려 수행은 해 나가지만 아직 추 번뇌가 그대로 있어 하루 중 어느 때도 망각함이 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수행자가 그 수행의 영역을 확보하여 삼매가 이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말할 때조차 빈틈이 없다면, 깊은 잠속에서도 밝게 깨어 있다면 이 연장은 그 역할을 충분히 다한 것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밀한 조각을 하는 조각칼은 의심 법에 해당합니다.

수행이 하루 종일 이어지지만 아직 미세망념을 제거하지 못하여 성품을 보지 못하고 중생으로 살아가는 수행자가 깊은 삼매를 추구하여 미세망념을 모두 제거하고 수행이 극에 달아 돈오함으로 이끌어주는 돈교법의 결정적인방법입니다.

조사가 유전돈법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수행법은 체계적이며 필연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경전에서도 이러한 수행법이 나올 때 각 경전이 불법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보면 수천 년을 이어온 불법의 수많은 가지가 단 하나의 진리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것을 모르거나 혹은 알면서도 무지하게 수행을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불상을 조각하는데 미세한 조각도로 처음부터 집채만 한 나무를 깎아간다면 그것이 될 것입니까. 조각도는 망가질 것이며 또한 불상은 대강의 형태도 갖추기 전에 공인은 일생을 다할 것입니다. 그 얼마나 많은 노력이 도구의 선택잘못으로 헛되이 되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수행이 안 된 사람이 처음부터 화두를 든다거나 한다면 순간의 삼매는 추구할 것이나 그것이 얼마나 갈 것이며 그런 식으로 언제나 추 번뇌를 다 제거할 수가 있습니까.

추 번뇌를 그러한 고급한 수행으로 제거하는 것은 마치 험악한 돌산에 길을 내지도 않고 아스팔트만 바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요철을 다 평평하게 하지도 않고 아스팔트만 들이 붓는다면 언제나 그 산에 길을 낼 것입니까. 아스팔트는 평평하게 다듬은 길에 마지막으로 마찰이 없는 최상의 도로를 만들기 위해 바르는 것입니다.

또한 커다란 도끼로 세밀한 조각을 마칠 수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관법과 같은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충격을 주며 수행을 이어나가도록 하지만 세밀하지 못한 수행으로 미세망념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어찌 그 단의 수행자가 택할 수행이겠습니까.

바른길을 놔두고 힘들여 돌아 돌 아 일생을 허비하거나 엉뚱한 곳으로 간다면그것은 불법이 아닌 것입니다.

 

성철스님법문--[12] 영원의 자유 맺는 말

성철스님법문--[12] 영원의 자유 맺는 말

 

맺는 말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결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종교의 목표는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절대, 무한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고(一切苦)에서 벗어나 구경락(究境樂)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개의 종교는 超越神(초월신)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상세계에 둡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우주과학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초월신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초월신을 전제로 한 종교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만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불교는 본래부터 초월신을 부정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현실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 따로 절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불교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것을[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일진법계(一塵法界)'라고 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중도세계(中道世界)인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나 물질과학에서도 현실이대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현실의 차별만 보고 한계만 보려고 합니다. 한계 없는 절대의 세계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에 대한 한계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해도 눈 감은 봉사는 이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 전체, 삼천대천세계, 미진 수 법계 이대로가 불국토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번뇌 망상의 구름에 가려서 눈뜬 봉사가 되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그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모두 광명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볼 때는 암흑이고, 눈을 뜬 사람이 볼 때는 광명인 것처럼, 눈만 뜨면 이 처소(處所) 이대로가 모두 절대입니다. 또 동시에 사람사람이 부처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함은 중생이 진리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눈만 뜨면 내가 바로 진금 체(眞金 體)이고, 내가 사는 곳 전체가 진금체이며 극락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본래 정신 자체가 영원불멸이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불멸은 그대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공부를 하든 않든 간에 정신의 불멸은 그대로이나 그 쓰는 작용은 다르니, 공부를 않는 사람은 진흙 속에 싸인 옥()과 같아서 그 옥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항상 생전에 지은 선악(善惡)의 업력(業力)에 따라 생사 로상(生死路上)에 돌아다니며 무한한 윤회를 거듭하는 업보를 받게 되어, 조금도 자유가 없는, ()가 연속하는 생사의 불멸(不滅)입니다.

 

공부를 성취한 사람은 진흙을 다 씻어 버린 깨끗한 옥과 같아서 업력(業力)에 끄달리지 않아 생사 로상(生死路上)에서 헤매지 아니하고 모든 고()를 벗어나 영원히 자유자재한 대 활동을 하게 되는 해탈의 불멸(不滅)입니다.

비유하면 공부를 성취하기 전에는 눈 감은 장님의 생활과 같고 공부를 성취한 후에는 눈 뜬 사람의 생활과 같으니, 사람의생활은 같으나 눈 뜨고 안 뜬 생활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리의 눈을 뜰 수 있는가? 생각을 한곳에 집중해서 삼매(三昧)를 얻으면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이 현실 또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현실 자체가 틀린 것이라면 이 현실을 떠나야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바세계라고 하지만, 현실을 바로 보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결국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바세계를 극락세계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원래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현실이 곧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중도(中道)에 두고 있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또 양변이 서로 합해서 원융무애한 원리가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인 중도를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무애 자재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일체 중생에게 '각자가 본래 지닌 부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 품팔이하고 마는 정신으로는 대법(大法)을 절대 성취할 수 없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지속되고, 공간적으로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큰 세계를 바로 보려는 큰 결심을 가지고 생활 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자체가 절대적인 자유세계임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밖으로 찾아 헤매 다닌다면 끝내 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황금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돈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눈만 뜨면 영원토록 무한으로 쓸 수 있는 보물입니다. 자기 속이 광산이요, 자기 자신이 순금덩어리요, 자기가 앉은 자리, 선 자리가 전부 순금덩어리입니다. 이 광산을 개발하는 도구가 바로 화두(話頭)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성취해서 화두를 깨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화두를 깨칠 것 같으면 본래의 광산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고 미래 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이 절대세계, 진금세계, 제법실상의 세계를 중생에게 소개하려면 여러 억천만 부처님이 출세하시어 미래 겁이 다하도록 말해도 터럭만큼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결국 금덩어리에 똥칠하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금덩어리를 가진 모든 사람 가운데에 눈 뜬 사람은 적고, 눈 감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금덩어리를 던져주면 눈 감은 사람은 흙덩어리라고 하며, 오히려 그 사람을 때리고 주먹질을 합니다.

만일 어느 집에 가서 마당에 금덩어리가 있으니 파서 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믿는다면 아무리 땅이 깊어도 그것을 파서 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래 지닌 무한하고 절대적인 보배는 마당 안의 금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보배입니다. 이 처럼 우리는 보배 산에서 살고 있음을 바로 알아 보배를 바로 찾아 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