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본 금강경

제21 非說所說分

동산/혜산방 2011. 12. 30. 11:12

本文(21 非說所說分)

78)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법을 설했다1)(원전의 표현; ‘나에 의해서 법이 설해졌다’)라는 것이 여래에게2) 있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여래께는 내가 법을 설했다(원전의 표현; ‘여래에 의해서 법이 설해졌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누군가가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진실이 아닌 것에 집착해 나를 비방3)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설법, 설법이라고 하지만, 설법이라고 할 만한 어떤 4)도 존재하지 않고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5)

이와 같이 설하셨을 때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장래 후세에 오백년 후에 바른 법이 소멸해 갈 때 이와 같은 법을 듣고 누군가 그것을 믿는 유정이 있겠습니까.6)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그들은 유정도 아니며, 유정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유정, 유정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모두 유정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며, 그러므로 유정으로 불리기 때문이다.7)

78) [21장 비설소설분]

 

漢譯本

<21>非說所說分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則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無法可說, 是名說法, 爾時慧命須菩提, 白不言,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1) 如來십호에서 如來를 빼고 navaguna(부처님의 호칭)를 주장하는 남방 상좌부의 논거 중에는 如來는 부처님이 본인을 지칭할 때 나라고 할 수 없어서 如來라고 한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호칭이 아니라는 見解가 있다.

 

그러나 위(maya<나에 의해> dhamo<법이> desita<설해졌다>)에 보듯이 부처님은 자신을 그냥 나라고 얼마든지 표현하신다. 그리고 조금 밑에 보면 수보리가 오히려 부처님이 나라고 했던 부분을 如來로 바꾸어서 지칭하고 있다.(tathagatena dharmo desita; 부처님에 의해서 법이 설해졌다)

따라서 如來라는 용어를 부처님이 당신을 부를 때만 사용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지이다.

 

2) 7 無得無說分에서는 그냥 如來가 가르친() 어떠한 법이라도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수보리의 답이 연결되는데 비해 이곳 제21 非說所說分에는 如來에게라고 하는 범위의 한정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前者說法을 껍데기로 보아 보편적으로 부정하는 분위기라면 後者如來라는 한정을 둠으로서 그러한 부정이 진실로 可能存在如來뿐이라는 분위기를 일깨운다.

아울러 如來해도 한다는 意識을 굳이 가질 필요 없이 물 흐르듯이 잠자고 밥 먹고 옷 입듯이 자연스럽게 그래서 굳이 意識하지 않은 채 說法行이 이루어진다는 意味도 아울러 추가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제7 무득무설분 에서처럼 說法이라는 事件도 껍데기이므로 추호도 存在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입장으로 해석함이 온당하다.(부처님의 出現은 절대出現이며 모든 衆生에게 의 비를 내리려고 온 것이다. 라는 생각이 중요함.)

 

3) 誹謗(비방)한다는 표현은 제17 구경무아분에서 如來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如來誹謗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미 나온 적이 있다. 사실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으셨고 또 부처님은 하신 것이 맞다.

 

그러나 부처님도 껍데기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껍데기이고 說法도 껍데기이어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도 理解가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 說法했다고 말하는 것을 두고 如來를 진실 아닌 것에 입각해 誹謗한 것이라고 질타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고 說法한 것은 분명 歷史的 事實로서 그것이 아무리 껍데기라 하더라도 事實 아닌 것에 執着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부처님을 찬탄(讚嘆)한 것이지 誹謗한 것일 수 없다.

 

굳이 비율로 따져도 역사적 사실이 얻는 점수는 최소한 95점이고 그것이 껍데기여서 감할 수 있는 점수는 5점이니 95 : 5이다. 그런 5%를 가지고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은 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반야부 經典을 보는 안목이 있다.

 

첫째, 일단 阿含의 가르침을 마스터해야한다는 점이다. 阿含의 가르침을 마스터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般若敎說은 괴이하기 짝이 없는 말이 되고 만다.

둘째, 阿含敎說을 마스터 했을 때는 비록 남은 문제의 볼륨이 5%정도의 규모밖에 아니 된다고 해도 나아가 0.00005%밖에 아니 된다고 해도 반드시 그것까지 완전히 해결지어야 된다는 요청이 들어있다.

 

이정도면 됐다고 하며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은 아니 된다. 반드시 마지막 남은 미세한 문제까지 모두 해결지어야 하는 것이다. 완전하지 않으면 마치 전혀 진척되지 않은 것과 같다는 입장이다.

 

그런 것이 煩惱의 성격이다. 아주 조그만 煩惱의 흔적이라도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큰 불길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철저하고 완전하게 괴멸시키지 않으면 煩惱로부터의 究竟解脫不可能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佛敎解脫은 반드시 智慧를 수단으로 필요시 하는 것이다.

 

사실 解脫貪慾(탐욕)이나 瞋恚(진에)나 간에 정서적인 전환으로 해결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럼에도 癡暗(치암)煩惱로 잡아 智的淨化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정서적인 측면의 완벽한 淨化智慧의 칼을 빌지 않고는 아니 된다는 측면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래서 반야부는 般若야말로 煩惱淨化하는 가장 훌륭한 德目임을 강조하는 敎義에 해당하는 것이다.

 

4) 事件(설법)에 들어감을 보이는 이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事件存在에 비해 그 중량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事件을 떠나서 存在를 잡을 수도 없는 법이고 그 규모가 미세해질수록 存在事件未分化를 보이기 때문에 事件을 하나의 으로 잡지 않을 수는 없다.

 

5) 앞서 제7 무득무설분 에서는 설해진법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na-asti)”라는 표현을 썼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서는 잡을 수 없고(agrahya) 말할 수 없다.(anabhilapya)”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제21비설소설분과 제22 무법가득분에서는 설법아뇩다라삼먁삼보리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고 얻을 수 없다.”라는 표현을 쓴다.

 

이중에서도 설법에 대해서는 (nasti sa kascid dharmo yo dharmadesana namopalabhyate; 더 정확히 해석하면 설법이라고 얻을 수 있는 어떤 법도 없다.)라는 표현을 쓰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서는 (nasti sa Bhagavan kascid dharmo yas tathagatenanuttaraim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h. Bhagavan aha ; evam etat subhute evam etat, anur api tatra dharmo na samvidyate nopalabhyate. tenocyate 'nuttara samyaksambodhir iti.)라는 주목할 만한 표현을 쓰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의 차이에는 몇 가지 주의할 내용이 있다. 22무법가득분의 해당부분에서 좀 더 분명히 살펴볼 것이다.

 

6) 이 질문이 나오는 경우는 제6 정신희유분과 제14 이상적멸분을 들 수 있다. 6 정신희유분은 청정한 한마음이 언급된 중요한 품이고 제14 이상적멸분은 수보리의 눈물이 흐르는 품이다. 아울러 이들 품의 분위기는 한 결 같이 믿음의 중요성도 강조된다.

理解가 아니 되면 믿기라도 해야 한다. 언제나 이야기 하지만 너무 믿음에 골몰하여 맹목적인 분위기를 띠는 것이 문제이지 믿음 그 자체가 금기시되어서는 아니 된다.

 

아울러 제6 정신희유분에서는 진실하다는 생각(bhutasamjna)을 일으키는 자가 있느냐고 질문하고 제14 이상적멸분에 오면 진실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자分別信解(avakalpayamy adhimucye)하는 法門受持 讀誦 廣爲人說 하는가 있느냐고 질문한다.

 

그런데 여기 제21 비설소설분에서는 믿을 (abhi-srad-dadhasyanti)”가 있느냐고 질문한다. 이를 통해 믿음의 뜻을 “bhutasamjna” “adhimucue” “abhi-srad- dadhasyanti”의 세 술어를 통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21품에서 믿을 자라는 단어는 제6정신희유분에서의 진실하다는 생각 이라든가 제14 이상적멸분에서의 분별 신해하는 자라는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전반부에서는 (1) buta-samjna (2)adhimukti 를 사용한 반면 후반부에서는 (3)sraddha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srad(가슴에)-dha(놓다)라는 뜻으로 믿는다.” 라는 뜻의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단어의 차이는 이 경전이 사실상 수보리와 부처님의 대화라는 증거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7) 衆生衆生이 아니고 說法說法이 아니며 그렇게 衆生도 없고 說法도 없으니 믿는다는 일도 없다. 지금도 얻을 수 없고 500세에도 얻을 수 없다. 이 대목에 이르러 도대체 무슨 소식을 덧붙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