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본 금강경

제18 一切同觀分

동산/혜산방 2011. 12. 9. 14:18

本文(18 一切同觀分)

73)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에게는 肉眼이 있는가.74)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여래께는 肉眼이 있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에게는 天眼이 있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여래께는 天眼이 있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에게는 慧眼이 있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여래께는 慧眼이 있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에게는 法眼이 있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여래께는 法眼이 있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에게는 佛眼이 있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여래께는 佛眼이 있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커다란 강가강에 많은 모래가 있으니, 여래는 그 모래에 대해 설하였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그렇습니다. 여래께서는 그 모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강가강이 있으며, 그 모든 강에 있는 모래알만큼의 세계가 있다고 하자. 그 세계의 수는 많다고 할 수 있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그렇습니다. 그들 세계는 무수히 많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그들 세계에 있는 모든 유정의 여러 가지 상태의 마음가짐을 나는 안다. 왜 그런가. 수부티야, 마음가짐, 마음가짐이라는 것, 그것은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한다. 그러므로 마음가짐으로 불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75)

73) [18장 일체동관 분]

74) 없다(상의 제거)” 있다의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부각되는 대목이 五眼 說 대목이다. 이 대목의 중요성은 지대하여 자세한 소개를 해 본다. 우선 金剛經은 기본적으로 없다라는 판단을 내린다.

 

[3장 대승정종 분] 열반한 중생(=열반)이 없음.

() 如是滅度 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중생계에서 알려지는 그 모두를 나는 무여열반계로 멸도 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무수한 중생을 멸도 시켰다 하더라도 실은 어떠한 중생도 반열반한 자는 없다.

 

[7장 무득무설 분] 阿耨多羅三藐三菩提가 없음. 가르친 법이 없음.

()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堤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堤. 亦無有定法如來可說.

()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다. 라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이라도 있는가. 또 여래가 가르친 어떠한 법이라도 있는가.”

이와 같이 설하였을 때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세존이 말씀하신 의미를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여래께서 이 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다. 라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은 없습니다. 또 여래께서 가르치신 어떠한 법도 있지 않습니다.

 

[9장 일상무주 분] 수다원 내지 아라한이 없음.

() 須陀洹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 須陀洹名爲入流. 而無所入.”

() “수부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류자(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에게 나는 예류과(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를 성취했다라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예류자(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에게 나는 예류과(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를 성취했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0장 장엄정토 분] 연등불에게서 배운 법이 없음.

() “如來 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於法實無所得.”

()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곁에서 어떠한 법을 얻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부티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디팡카라 여래 응공 정등각자의 곁에서 여래께서 얻은 법은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13장 여법수지 분] 설한 법이 없음.

() “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如來 有所說法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 無所說.”

()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부티야, 여래가 설한 어떠한 법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부티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17장 구경무아 분] ⋯Ⅰ.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없음. . 보살이 없음.

. ()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者.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有法阿耨多羅三藐三菩堤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燃燈佛所,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 “왜냐하면 수부티야, 실은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있다고 라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이 있는가.”

이와 같이 설하셨을 때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이해한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디팡카라 여래의 곁에서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

 

. () “須菩堤,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須菩堤 實無有法名爲菩薩 .”

() “왜냐하면 수부티야, 도대체 보살로 불릴만한 그 어떤 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로 불릴만한 그 어떤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1장 비설소설 분] 설한 법이 없음.

()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법을 설했다라는 것이 여래에게 있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여래께는 내가 법을 설했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22장 무법가득 분] 阿耨多羅三藐三菩提가 없음.

() “佛 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爲無所得耶? 如是如是.”

()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원만히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떠한 법이 과연 있는가.”

수부티 존자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여래께는 내가 법을 설했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25장 화무소화 분] 해탈된 중생이 없음.

() “我當度衆生, 須菩堤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如來度者.”

() “과연 여래에게 나는 중생을 해탈케 했다라는 것이 있겠는가. 실로 수부티야, 결코 그와 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여래에 의해 해탈된 중생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다라는 표현도 일종의 없다와 같다. 서양말과 印度 말이 지닌 약점 중에 이다있다의 구별이 없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두 없다고만 하는데 (經典을 믿는 사람이 있다. 있다는 이 의 위대함에 대한 莊嚴[포장]의 범주이므로 같이 보면 아니 된다.) 오직 [18 일체동관 분]에서만 肉眼 내지 佛眼을 두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상의 판단구조를 떠올려 보자.

실체 아닌 것 Q1) (시간적으로) 永遠하다고 보는 것.

2) (공간적으로) 獨存한다고 보는 것.

3) (내용적으로) 充滿하다고 보는 것. = = = samjna() 에서

 

3) (內容的으로) 充滿하다고 보는 것인 에 대해 內容的으로 充滿하지 않다고 보는 般若를 거쳐 결국 充滿法性實存에 이르는 無生法忍이 설해지듯이. (空間的으로) 獨存한다고 보는 것으로서의 에 대해 空間的으로 共存한다고 보는 般若를 거쳐 모든 것이 共存하는 世界의 모습에 이르는 無生法忍이 설해진 것이다.

 

이러한 共存하는 世界에 대한 無生法忍에 이르러야 없다가 아니고 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있다가 아니고 함께(sam) 있다(vidyate)”이다. 肉眼 天眼 慧眼 法眼 佛眼그것으로 認識되는 境界은 결국 서로 연결되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앞서 한 주(23)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반야부의 경우 이다라는 술어와 있다라는 술어는 실체적인 것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1)永遠하지 않고 (2)獨存하지 못하고 (3) 充滿하지 못한 것은 實體가 아니고 그런 것은 그것이다.”라고 표현될 수 없으며 그것이 있다라고도 표현될 수 없다.

오직 (1)永遠하고 (2) 獨存하고 (3)充滿한 것만이 그것이다.”라고 표현될 수 있으며 그것이 있다.”고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럴 때 여기서 가장 까다로운 표현은 오히려 獨存이라는 표현이다. 실은 獨存하는 것은 없다. 그래도 문제는 없다. 共存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共存全貌를 보는 일이다.

五眼 說共存하는 全貌를 보는 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있다.”라는 표현을 주는 것이다.

 

75) (時間的으로) 永遠하다고 보는 것으로서의 에 대해 時間的으로 無常하다고 보는 般若를 거쳐 모든 時間帶가 한 찰나에 구족됨을 認知하는 無生法忍(암시적으로나마) 설해진 것이다.

 

우리가 金剛經을 읽을 때 제18 一切同觀分에 와서 須菩提가 그동안에는 모든 質問에 없다고만 대답하다가 五眼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問題意識을 느껴야 한다.

 

반야부 經典時間的空間的次元的으로부터 般若를 거쳐 반야바라밀다에 到達하게 한다는 것은

(1)時間的으로 永遠하다고 보는 으로부터 時間的으로 永遠하지 않다고 보는 般若 그리고

(2)空間的으로 獨存한다고 보는 으로부터 空間的으로 獨存하지 않고 共存한다고 보는 般若 그리고

(3)次元 내지 內容的으로 充滿하다고 보는 으로부터 次元 내지 內容的으로 充滿하지 않다고 보는 般若를 거쳐서 반야바라밀다에 到達하는 것이 般若部 經典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같은 질문에 어떻게 여기 와서 肉眼이 있느냐 라고 묻는 순간 있다고 대답할 수가 있단 말인가? 대답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러나 漢譯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이 대답에 대한 의문이 梵本에서 發見할 수 있다.

 

보통 梵語에서 一般的있느냐의 단어는 asti이다. 이는 일반적인 存在에 대한 있다의 단어로서 sat라는 말도 이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제18 一切同觀分에서 부처님이 須菩堤에게 질문한 것은 asti 가 아니다. 만약 asti라고 질문 했다면 당연히 없다고 해야 옳다. 그러나 부처님은 질문을 “samvidyate(함께 있느냐)”라고 묻고 있다.

 

samvidyate라는 單語에서 vidyate는 특별한 用語이다. vidya()이라는 단어와 vedana()라는 單語도 이 vidyate에서 나온 單語로서 vidya()이라는 單語는 진짜 있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英語exist의 뜻을 가진 말이고 vedana()는 있음에 대한 一次的인 판단을 말하는 것으로 英語에서 findknow의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veda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veda는 지식을 말하는데 지식이란 참 존재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 을 말하기 때문이다.

 

vedana()는 있음에 대한 일차적인 느낌을 말하며 存在란 느낌이기 때문에 느낌은 곧 存在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vidyate는 실제로 存在하는 것 즉 그런 느낌까지도 주는 그 무엇을 나타낼 때 쓰이는 用語이며 더구나 앞에 sam(함께)라는 전치사를 쓰고 있다.

 

이는 함께 라는 뜻으로서 肉眼이 그냥 있느냐가 아니라 肉眼이 다른 것들과 함께 있느냐라는 질문이 되는 것이다. 空間的으로 獨存한다고 보는 것인데 般若獨存하는 것이 아니고 共存한다고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五眼을 가지고 있음은 당연한 상식이므로 있다라는 대답을 유도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問答하는 부처님의 眞情한 뜻은 17 究竟無我分에서 無生法忍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이어서 제18 一切同觀分에 와서는 法性遍滿해서 그 끝이 없다는 말처럼 肉眼으로 본 世界(苦海)天眼 世界(天上) 내지 佛眼으로 본 世界(實相) 共存한다.”라는 無生法忍의 일부내용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맹이 라고 하면 무언가 껍질로 둘러싸인 속에 든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데 法性은 그런 고정된 그런 형태로 存在하는 것은 아니다.

 

法性獨存이 아니라 共存하는 것이다. 그래서 法性은 함께 存在하는 것이라면 옆으로 크고 넓어[廣大無邊] 즉 그 끝이 없어 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法性森羅萬象은 따로 그 境界가 없어 廣大無邊하다는 말로도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法性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에나 또는 보이지 않는 虛空 속에도 充滿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범어에서 있다라는 단어는 3 가지가 있다.

asti - 그냥 있다라고 할 때 쓰인다.

bhavati - “(곧 변할 것이) 있다.” 라고 할 때 쓰인다. 無常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시간적 차원의 正見을 가질 때 가능함.)

sam vidyate - (함께)있다. 틀림없이 있는 것을 있다.”라고 말할 때 쓰임.(공간적 차원의 正見을 가질 때 가능함.)

 

18 一切同觀分에서 五眼 說肉眼부터 佛眼까지의 이야기는 空間的 共存次元轉變을 보여준다면 過去心. 未來心. 現在心의 이야기는 時間的 次元轉變을 보여주는 것이다.

肉眼이란 主觀을 뜻하므로 主觀客觀(대상. )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境界 色境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天眼. 慧眼. 法眼. 佛眼과도 함께 存在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肉眼衆生이 보는 世界이므로 苦海(부처님이 추천하는 용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각 意味하는 뜻은 다음과 같다.

肉眼 苦海

天眼 天上(修行者禪定에 들어서 天上을 경험하는 것은 禪定天上이라 하고 실제로 天上에 가서 태어나는 것을 實際天上이라고 한다.)

慧眼 涅槃

法眼 彼岸(般若世界)

佛眼 實相

 

佛眼에서 볼 때 肉眼에서 法眼 까지는 虛想이 된다. 이를 佛敎에서는 方便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苦海天上涅槃彼岸實相이 함께 있는 構造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술과 식초가 함께 存在한다고 보는 것이 된다. 식초가 된 경우는 술이 存在하지 않고 술로 있을 때는 식초는 아직 存在하지 않다고 보는 阿含의 단계에서는 理解하기 어렵지만 般若에 오면 함께 존재한다는 理論法性次元의 이야기로 進行 되면서 成立하게 된다.

 

물론 제18 一切同觀分의 말미에 過去心. 未來心. 現在心 不可得이라고 하면서 심지어는 現在心도 잡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본다. 이는 時間的 次元의 이야기로서 各各을 따로 잡으려한다면 잡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마음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야 한다. 마음은 본래 하나임으로 過去. 未來. 現在로 나눌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는 法性次元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마음 또한 無常하므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별개의 공간으로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별개의 공간으로 보는 안목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過去 未來 現在라는 개념은 분필을 예로 든다면 그 분필의 現在는 분필이지만 그 분필의 過去는 석회석이며 未來는 또 다른 어떤 물질이라고 보는 개념으로 생각 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들을 함께 보아야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따로 잡으려 한다면 결코 잡을 수 없다는 理論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過去 未來 現在가 이미 sam-vidhyate 한다고 보는 理論이 깔려있는 것이므로 五眼의 이야기와 같은 次元의 이야기인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함께 存在함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法性共存한다法性次元의 설명인 것이다.

(본인생각: 이 부분의 漢譯過去心. 現在心. 未來心 하면서 순서대로 적고 있어서 어찌 보면 자연히 흘러가는 것으로 느끼게 하여 시간이라는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부분이 있으나 梵本에서는 분명히 과거심. 미래심. 현재심이라고 하여 당연히 흘러가는 것이라는 의식구조를 깨트리고 있어서 마음을 보라는 부처님의 안배로 보인다.)

 

천태지의대사가 十界護具說을 주장하는 것도 法性次元의 이야기로 共存한다는 理論 이다. 문제는 五眼能力으로 본다면 肉眼으로부터 佛眼까지가 함께 存在(共存)理解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肉眼에서 天眼을 얻었으나 天眼을 얻었다고 肉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慧眼이나 法眼이나 佛眼도 이와 같다. 그러나 그 境界가 함께 存在(共存)한다는 것은 理解하기 매우 難解한 문제이다.

 

肉眼으로 볼 때는 苦海만이 보이는 것이고 天眼으로 볼 때는 天上만 보이는 것이며 慧眼으로 보면 涅槃만 존재하며 法眼으로 보면 彼岸만 존재하며 佛眼으로 볼 때만이 實相으로 보이는 것인데 그 境界 苦海天上涅槃彼岸實相共存 한다는 것은 難解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獨存할 수는 없으니 共存하는 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해답이 바로 無生法忍의 내용인 것이다. 無生法忍을 얻었을 때만이 이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본인생각; 佛眼을 얻은 후 實相을 보는 것 자체가 모두가 共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므로 實相에 가서야 비로소 모두가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다는 것은 佛眼을 얻지 못해도 天眼만 얻은 상태에서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苦海로 보든 관점이 天上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五 境界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모래처럼 하찮은 것 즉 衆生執着할 만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하여는 한 적이 있다고 須菩提는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모래에 譬喩한 이야기가 몇 이나 되는 가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5이 있었다.

 

모래의 비유가 나오는 품.

 

11 無爲福勝分

세존이 물으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큰 강인 강가강의 모래알만큼의 강가강이 있다고 하자. 그 많은 강들에 있는 모래알은 많다고 하겠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 강가강들 만하더라도 많습니다. 하물며 그 많은 강가강에 있는 모래알 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내가 너에게 말하겠으니 잘 이해하도록 하라. 여인 또는 남자가 누구든지 그 많은 강가강에 있는 모래알만큼의 세계를 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워 여래 응공 정등각자 들에게 그것을 보시한 다고 하자.

13 如法受持分

실로 수부티야, 여인 또는 남자가 어떤 사람이든 매일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기 자신의 몸을 바쳐 공양한다고 하자. 이와 같이 공양하기를 강가강의 모래알만큼의 겁 동안을 계속한다고 하자.

15 持經功德分

또 실로 수부티야, 어떤 사람이 아침에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치고 낮에도 마찬가지로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치며 저녁에도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친다고 하자. 이렇게 해서 백 천억 나유타라는 많은 겁 동안 자아로 여겨지는 존재를 바친다고 하더라도

18 一切同觀分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커다란 강가강에 많은 모래가 있으니 여래는 그 모래에 대해 설했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그렇습니다. 여래께서는 그 모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가강의 모래알만큼 강가강이 있으며 그 모든 강에 있는 모래알만큼의 세계가 있다고 하자. 그 세계의 수는 많다고 할 수 있는가.”

수부티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그렇습니다. 그들 세계는 무수히 많습니다.”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그들 세계에 있는 모든 유정의 여러 가지 상태의 마음가짐을 나는 안다.

(yavantah subhute tesu lokadhatusu sattvas tesam aham nanabhavam cittadharam prajanami. tat kasya hetoh? cittadhara cittadhareti subhute adharaisa tathagatena bhasitas. tenocyate cittadhareti. tat kasya hetoh? atitam subhute cittam nopalabhyate, anagatam cittam nopalabhyate, pratyutpannam cittam nopalabhyate.)

28 不受不貪分

그리고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이 강가강의 모래알만큼의 세계를 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우고 이것을 여래 응공 정등각자께 보시한다고 하자.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떤 보살이 무아의 無生法忍을 얻었다고 하자. 이것이야말로 그 인연으로 훨씬 많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복덕을 생기게 할 것이다. 그러나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그 복덕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모래처럼 많은 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가짐을 안다.” 라고 하면서 마음가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제18 一切同觀分 마지막 구절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분석해 보기로 하자.

 

수부티야, 그들 세계에 있는 모든 유정의 여러 가지 상태의 마음가짐을 나는 안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마음가짐, 마음가짐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여래는 가짐이라고 하지 않는다.1) 그러므로 마음가짐으로 불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과거2)마음얻을 수 없고3),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cittadhareti subhute adharaisa tathagatena bhasitas. tenocyate cittadhareti. tat kasya hetoh? atitam subhute cittam nopalabhyate, anagatam cittam nopalabhyate, pratyutpannam cittam nopalabhyate.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1) 먼저 마음가짐이라는 말에 대하여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存在를 부정하는 방법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存在자체를 바로 부정하는 방법이고 하나는 事件을 부정하므로 써 存在를 부정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마음가짐을 부정하는 방법도 두 가지로서 하나는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짐을 부정하는 것이다. 마음을 부정하는 것은 存在 을 부정하는 것이고 가짐을 부정하는 것은 事件을 부정하는 것이다.

 

구마라즙의 漢譯本에는 가짐이라는 事件은 두드러지지 않고 마음이라는 存在만이 언급되고 있지만 철저한 부정에 이르려면 存在뿐만 아니라 事件에 대해서도 부정의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된다.

 

이와 비슷한 유형의 부정이 상호의 부정과 관련해서 벌어진다. 앞으로 살필 제20 離色離相分에서는 色身의 구족을 한꺼번에 부정하면서 굳이 色身이라는 존재의 법에만 국한되지는 않지만 제5 如理實見分의 경우는 상호의 구족(laksana-sampad)이라는 표현을 身相이라는 存在으로만 축소해서 번역한 측면이 있다.

 

사실 제5 如理實見分의 전개는 이렇다. 먼저

상호 구족으로 如來를 보는 것은 아니다.” ← ②상호 구족상호 구족이 아니다.” ← ③상호상호가 아니다.” < 여기서 왜냐 하면의 뜻임.>

 

여기서 存在을 포함해 事件구족함이라는 動作도 분명히 부정의 대상으로 넣고 있다. 그런 뒤 에서 본격적으로 存在의 법인 상호를 부정하여 마무리 한다.

 

이에 비해 구마라집의 변역은 不可以身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의 구성을 보이거니와 보다시피 구족이라는 動作을 거론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여기 마음가짐과 관련해서도 원문은 보다시피

모든 유정의 여러 가지상태의 마음가짐을 나는 안다.” 마음가짐은 마음가짐이 아니다.” 과거 마음도 얻지 못하고 미래 마음도 얻지 못하고 현재 마음도 얻지 못한다.”

 

인데 이를 구마라집 본에서는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라고 하여 가짐의 동작은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범본에서의 부정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存在事件을 모두 부정하고 에서는 存在만을 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存在事件을 모두 부정하였으므로 이제 存在를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事件을 부정함으로서 事件의 주체인 存在를 부정할 수도 있고 또는 存在를 부정함으로서 그 存在가 일으키는 事件을 부정할 수도 있지만 存在事件 양방향의 부정이 모두 언급되어야 完全한 부정에 이를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2) 두 번째는 過去. 未來. 現在라는 時間槪念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18 一切同觀分에는 次元的인 측면. 空間的인 측면. 時間的인 측면을 모두 다루고 있어서 無生法忍의 내용을 짐작해 내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肉眼. 天眼. 慧眼. 法眼. 佛眼 과 그 각 認識하는 世界次元的인 범주나 內容的인 범주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모래알의 가 많다 적다, 크기가 크다 작다, 라는 말은 空間的인 범주의 이야기 이다. 그러나 過去마음. 現在마음. 未來마음이라는 이야기는 時間的次元의 이야기 이다.

 

空間時間의 전제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時間은 반드시 空間的인 전제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時間空間對等한 관계로 놓기에 곤란한 문제가 많다. 그래서 佛敎에서 時間이라는 것은 변화에 대한 편리한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서 時間이라는 어떤 절대성은 나타내기 어렵다.

 

그래서 過去 未來 現在라는 時間 槪念은 사실 變化를 전제하지 않고는 成立될 수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아승지 宇宙生成, 展開, 消滅, 空虛(1大劫) 라는 변화에의 각 단계에 대응하여 1 아승지씩 배열된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폈던 境界의 변화에도 바로 이러한 時間 표현이 가능하다. 따라서 苦海天上涅槃般若實相 등을 꿰뚫는 無生法忍은 그대로 과거미래현재를 꿰뚫는 智慧意味를 지니고 만다.

 

宇宙生成 展開 燒滅 空虛라는 표현은 변화에 대한 표현일 뿐 時間이 어떤 특정한 지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大前提宇宙라서 그렇지 生成을 구성하는 宇宙本質展開를 구성하고 있는 宇宙本質, 消滅을 구성하고 있는 宇宙本質, 空虛를 구성하고 있는 宇宙本質, 質的으로 다른 것 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것을 한 宇宙生成되어 展開과정을 거쳐 燒滅단계가 되었다가 空虛단계가 된다고 본다면 이는 전별설의 論理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宇宙라는 本質은 가만히 있는데 껍질만이 생성. 전개. 소멸. 공허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생성. 전개. 소멸. 공허라는 단계의 宇宙質的으로 다르다는 것 즉 本質은 가만히 있고 껍데기인 상태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質的으로 變化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過去라는 상태와 未來라는 상태와 現在라는 상태는 質的으로 전혀 다른 存在이며 상태이고 그런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따로따로 얻을 수 없고 한꺼번에 얻어야 한다는 말은 전혀 다른 存在들을 한꺼번에 얻어야 한다는 말과 같으며 이 말과 肉眼. 天眼. 慧眼. 法眼. 佛眼을 함께 얻어야 한다는 論理一脈相通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苦海라는 상태와 天上이라는 상태는 質的으로 다른 것이며 그러므로 涅槃으로 보는 世界現在라고 하면 天眼으로 보는 世界過去가 되며 法眼으로 보는 世界未來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過去心. 未來心. 現在心은 전혀 다른 質的構造를 한꺼번에 얻으려고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苦海. 天上. 涅槃. 般若. 實相이라는 質的으로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잡아야 한다는 것이니 質的으로 다른 것을 한꺼번에 잡아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無生法忍의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過去. 未來. 現在라는 말은 時間意味가 아니라 存在變化를 편리하게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過去. 未來. 現在라는 것은 A라는 상태. B라는 상태. C라는 상태일 뿐 時間意味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過去라는 존재나 상태. 未來라는 존재나 상태. 現在라는 존재나 상태만이 필요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無生法忍한 일이란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 일이 없는 것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時間이라는 카테고리는 우리의 생각을 붙들어 맬 뿐이다. 同時라는 시간의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時間은 함정일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존재나 상태를 時間으로 구분하지 않고 변화라는 認識智慧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佛敎變化觀察을 통하여 하지 않는 무엇을 잡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變化하는 過程을 세심히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마라집 漢譯本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원본 에는 반드시 과거. 미래. 현재라고 표현하므로 서 時間이라는 것이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回歸하는 것. 回轉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時間이라는 것은 變化를 나타낼 뿐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金剛經에서는 제18 一切同觀分 以外에서 時間이라는 주제가 나오지 않는 것은 時間이란 단지 變化를 나타내는 단어일 뿐 그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는 것이므로 時間이라는 單語에서는 반드시 變化라는 개념을 잡아내어 생각해야 할 것이다.

 

3) 18일체동관분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이 부분이다.

upalabhyate(얻다) :이 단어는 諸法不可得이라는 표현에서의 자의 原語이지만 그 내용은 단순히 얻다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18一切同觀分 마지막 부분의 過去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에서 중요한 것은 過去心. 未來心. 現在心不可得 얻다.”가 아니고 얻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반야부의 핵심은 諸法不可得에 있다. 그런데 諸法不可得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법도 없다가 아니고 어떤 법도 얻지 못한다(nopalabhyate).’ 인 것이다.

얻다()”의 원어가 upalabhyate 인데 얻다라고 하려면 그냥 labhyate라고만 해도 된다. 그런데도 굳이 upalabhyate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살펴보면 無常한 것 그래서 근본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다고 할 때는 반드시 upalabhyate를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upalabhyate(얻는다) . 반드시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얻다.” 라는 뜻이니 얻는듯하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諸法不可得이라고 할 때 upalabhyate(얻는듯하다)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有業報而無作者에서는 upalabhyate의 뜻이 들어있다. 그러나 참고로 제28장의 내용을 미리 보면 無生法忍을 얻는다고 할 때는 upalabhyate가 아니고 prati-labhyate(꼭 집어서 얻음)를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경전에서 그 용법을 살펴보면

 

그 유명한 제일의 공경(Paramarthasunyatasutram)에서부터 쓰인다. Caksur utpadyamanam na kutascid agacchati nirudhyamanam na kvacit samnicayam gacchati. iti hi bhiksavas caksur abhutva bhavati bhutva ca pratigacchati. asti(있다) karmasti() vipakah() karakastu(作者) nopalabhyate(얻지못한다) ya imamsca skandhanniksipati anyamsca skandhan pratisamdadhatyanyatra dharmasamketat. tatrayam dharma samketo yadutasmin satidam bhavatiti vistarena pratityasamutpadah

<눈이 할 때 어디로부터 오지 않고 할 때 어딘가로 가서 모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아, 눈은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게 된다. 그러나 는 있으나 그런데 그 作者는 얻지 못한다. 有業報 無作者에서 無作者가 아니고 作者nopalabhyate(얻지 못한다) 이다. ~~~~>

 

金剛經 내에서도 몇 차례 더 나타난다.

21 非說所說分“dharmadesana dharmadesaneti subhute, nasti sa kascid dharmo yo dharmadesana namopalabhyate으로 나타나고 <‘설법이라고 불릴만한 법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할 만한 어떤 법은 얻을 수 없다.>

22 無法可得分“anur api tatra dharmo na samvidyate nopalabhyate. tenocyate nuttara samyaksambodhir iti” 으로 나타난다. < 여기서는 samvidyatenopalabhyate가 함께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제28 不受不貪分“bodhisattvo niratmakesv(無我) anutpattikesu(無生) dharmesu() ksantim() pratilabhyate에 나오는 pratilabhyate와 비교하면 그 意味를 더 잘 알 수 있다.

 

upa-labhyate prati-labhyate를 접두사의 차이에 입각해 분석해 본다면 upa-의 경우 “~가까이라는 뜻이 성립한다. 무엇을 얻는다지만 실은 확실히 얻은 것이 아니고 얻은 듯하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러기에 nopalabhyate(na-upa-labhyte)얻은 듯하지도 못하다.”라는 뜻이요 얻은 것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라는 뜻이니 결코 얻은 것이 못 된다라는 뜻으로 귀결된다.

 

이에 비해 prati-의 경우 ‘~에 대하여, ~을 향하여의 뜻이거니와 얻을 대상을 분명히 지적하는 분위기를 보인다. 바로 하여(prati-itya)에도 이 접두사가 쓰이거니와 할 대상을 분명히 특정해주는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

 

無住相 할 때의 가 바로 prati-stha 이거니와 이때도 執着할 대상이 애매모호하지 않고 분명하고 뚜렷함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無生法忍을 얻었다라고 할 때의 얻음은 분명하고 명료하고 명확한 무언가를 꼭 집어서 얻은 것이라 해야 한다.

 

그러기에 제28 不受不貪分에서 살피겠지만 어떤 법도 얻지 못하기에(nopalabhyate) 無生法忍을 얻는다.(pratilabhyate)”라는 진술은 큰 意味로 다가온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過去心. 未來心. 現在心을 따로 얻으려 한다면 nopalabhyate 가까이 얻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이 用語에서 이미 暗示하고 있다.

 

따라서 함께 얻으려고 해야 얻을 수 있음을 暗示하면서 함께 얻는 것이 無生法忍의 내용임을 暗示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께 얻으려고 노력할 때 제28 不受不貪分에 가면 無生法忍pratilabhyate라고 꼭 집어서 얻는다고 하면서 用語 자체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