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大乘正宗分)
本文 (제3장 大乘正宗分)
24)세존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이와 같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어떤 것은 누르고 어떤 것은 일으키는 복합의 뉘앙스가 함께 느껴져야 함)
곧 수부티야. 유정의 세계에 있는 유정에 포섭되는 유정으로서 알에서 태어난 것이든 태에서 태어난 것이든 습기로부터 태어난 것이든 변화하여 태어난 것이든25) 색을 지닌 것이든 색을 지니지 않은 것이든26) 생각이 있는 것이든 생각이 없는 것이든 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이든27)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유정계에서 알려지는 그 모두를 나는 무여열반계28)로 멸도 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무수한 유정을 멸도 시켰다 하더라도 실은 어떠한 유정도 반열반 한 자는 없다.29)30) (부정하는 부분. 부정은 하지만 답은 주지 않음. 왜냐하면 자신이 알아내야하는 사항이기 때문임. 단지 암시만 줄 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수부티야. 만일 보살에게 유정이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그는 보살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왜 보살에게 유정이라는 생각이 전개되면 안 되는 것인가요?)
그것은 왜냐하면 수부티야. 자아라는 생각 또는 유정이라는 생각 또는 영혼이라는 생각 개인이라는 생각31)이 전개된다면 그는 보살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4) [제 3장 대승정종 분]
25) 욕계 입장에서의 분류
26) 색계 입장에서의 분류
27) 무색계 입장에서의 분류
28) 界 곧 dhatu라는 말이 꼭 붙어 있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은 중층적 복합구조를 지닐 때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29) “허공에서 아무리 많은 비가 내린다 하더라도 그 비로 인하여 大海가 줄어들거나 충만 하는 일은 없다. 그와 같이 아무리 많은 比丘들이 無餘涅槃界에 般涅槃한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涅槃界가 줄어들거나 늘어나는 일은 없다.”
아함부의 이 경설에 입각하면 涅槃의 世界는 絶對的인 世界로 그 位相을 분명히 인정받고 있다. 大海가 언제나 변함없이 영속성을 유지하며 존재하듯이 涅槃의 世界도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이 永續性을 유지하며 窮極的인 世界로 存在함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이 아함부의 경설은 지금 우리가 살피는 대승 금강경의 표현과 아주 밀접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곧 修行者가 나아가는 目的地를 ‘無餘涅槃界’라고 표현한 것과 많은 修行者가 그곳으로 반열반 한다는 前提도 아주 類似한 것이다. 그러나 阿含의 經說은 涅槃界의 無窮無盡함을 설하여 그 絶對性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金剛經의 경우 涅槃에 든 衆生은 한명도 없다고 함으로서 涅槃 그 자체를 非實在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30) 사실 이 대목을 원어에 입각해 축자적 번역을 하면 “실은 반열반한 자로 되지 못한다.”이다. 이것은 有情이 반열반한 聖者로 바뀌었다고 보면 안 된다는 뜻이다. 外道들의 경우 실천법의 핵심은 “닦음”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실천원리가 “바뀜”에 있다. 그러나 반야부에 오게 되면 “유정”이 “처음부터 열반에 든 존재”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金剛經의 본 대목은 그 涅槃조차도 永遠한 것으로 執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31) 想이란 항상 하는 一者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함. 여기서 생각(samjna)은 “합친(sam) 앎(jna)이라는 어원적 분석이 가능한 말로 가변적 구조에 대해 그 구성 요소를 합쳐 있다고 보아(sam) 불변적 구조로 판단(jna)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想이란 執着이므로 그 속에는 邪見이 必含되어 있다. 그럼에도 想(samjna)이란 표현을 택한 것은 반야부의 주요 주제인 반야(prajna) 그 자체와 의 대비를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想은 곧 “잘못 보는 것”을 뜻한다. 그럼 무엇을 잘못 보는 것일까? 첫째 “실체 아닌 것을 실체로 잘못 보는 것”이고 둘째 “실체를 실체인 줄 몰라보는 것”이다.
왜 실체라는 말을 가져왔느냐? 四相(想)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想하되 곧 잘못 보되 그 잘못 보는 주체를 자아(我) 개인(人) 유정(衆生) 영혼(壽者)로 잡고 있다. 이들은 모두 중생들이 실체시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기불교에서는 外道들이 實體(dravya)로서 사용하던 개념이었다.
먼저
1. “실체 아닌 것을 실체로 잘못 본 것”으로서의 想이란 무엇인가? “실체 아닌 것”이란 “凡夫나 聖者가 경험하는 一切의 精神的 物質的 存在나 事件”을 뜻한다.
@ 실체 아닌 것 Q를 1) (시간적으로) 永遠하다고 보는 것.
2) (공간적으로) 獨存하다고 보는 것.
3) (내용적으로) 充滿하다고 보는 것. = = = samjna
@ 그러나 실제 Q는 1) (시간적으로) 永遠하지 않고 無常하다.
2) (공간적으로) 獨存하지 않고 共存한다.
3) (내용적으로) 充滿하지 않고 껍데기이다. = = = prajna
2. “실체를 실체인 줄 물라보는 것”으로서의 想은 무엇인가? 앞 문단에서 진행한 논변의 결론은 “Q 는 껍데기이다.”라는 진술이다. 껍데기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알맹이라는 말이 전제된다. 실체는 바로 우리말로 알맹이 이다. 이 알맹이를 알맹이라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想이다.
그러면 알맹이란 무엇일까? 그 알맹이에 대한 정보 제공이 바로 범본 金剛經에서 상설된다. 해당 부분의 주를 다시 참고 하기 바란다.[주)73 참조]
“어떤 衆生이든 有情界에서 알려지는 그 모두를 나는 無餘涅槃界로 滅度 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무수한 有情을 滅度 시켰다 하더라도 실은 어떠한 有情도 般涅槃한 者는 없다.”
이 부분이 涅槃을 부정하는 부처님의 충격요법인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누르고 무엇을 일으켜야하는 지를 암시하는 부분이다.
如是語經에 나와 있는 有餘涅槃과 無餘涅槃의 차이는 肉身의 有無로 구별하는 관점인데 이는 남방 상좌부계통의 관점이다.
남방 상좌부라면 부처님의 뜻을 변화 없이 받아 전수하고 있다는 부파인데 涅槃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처님이 그렇게 說한 적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그렇게 설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經典에 고쳐서 넣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큰 판단이다. 그렇다면 왜 부처님은 이런 설명을 하였을까 하는 것을 사추해내어야 하는 것이다.
키포인트는 有餘涅槃은 반드시 阿那含果에만 사용하지 預流果나 舍多含果(一來果)에는 涅槃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有餘涅槃이라는 用語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시하여야 한다.
衆生은 業의 相續者이면서 業의 主人이다. 지은 福은 빼앗을 수 없고 받을 禍는 피할 수 없다. 오늘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 이다.
다음 이야기는 如是語經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서 이것은 해석을 아주 잘 하여야한다. 해석의 방향이 그 내용을 크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比丘들아. 무엇이 有餘涅槃界인가? 比丘들아. 여기 漏가 다한 … 阿羅漢 比丘가 있는데 그에게 다섯 感官이 아직 斷絶되지 않아 머무르면서 마음에 맞거나 맞지 않은 것을 경험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感受한다. 그렇지만 貪着과 瞋恚와 癡暗은 滅盡되었다. 比丘들아. 이를 이름 하여 有餘涅槃界라고 한다.”61)
“比丘들아 무엇이 無餘涅槃界인가? 比丘들아. 여기 漏가 다한 ⋯⋯ 阿羅漢 比丘가 있는데 그에게는 모든 느낌이 더 이상 기쁘지 않고 차가워 질 것이다. 比丘들아. 이를 이름 하여 無餘涅槃界라고 한다.”62)
위 내용에서 여기에 漏가 다한 阿羅漢 比丘가 있는데 그에게는 모든 느낌이 더 이상 기쁘지 않고 차가워질 것이다. 라는 내용을 죽음과 결부시켜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그냥 阿羅漢 이 죽음을 맞았을 때라고 설명하지 굳이 돌려서 차가워졌을 때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如是語經에서의 (1)의 관점에서 설명한 내용 중에 다섯 感官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煩惱는 다하였으나 五根이 남아 있으면 有餘涅槃이며 五根이 남아있지 않으면 無餘涅槃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를 梵僧 민군 사야도는 五蘊으로 결부시켜서 생각하고 있으나 크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五根(眼. 耳. 鼻. 舌. 身)을 왜 五蘊이라고 생각하는지 理由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분석해보면 五蘊에는 色. 受. 想. 行. 識의 다섯 感官의 作用이 있는데 이것을 五根에 비유하여 좀 더 깊이 성찰한 것이며 이중에 行만은 諸行으로서 여러 개(최소 한 개 이상)의 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五蘊이 斷絶되었다함은 諸行이 단절된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며 行이 벌어진 法을 有爲法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行이 사라진 法을 無爲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行이란 samskara로서 行의 作用이 남아 있으면 有餘涅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涅槃이란 無漏法만으로는 涅槃이 될 수 없고 無爲法까지 가야 涅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爲가 남아있으면 有餘涅槃이고 爲가 남아있지 않으면 無餘涅槃인 것이다.
또 “모든 느낌이 더 이상 기쁘지 않고 차가워질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차가워진다는 말을 죽음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차가워진다는 말은 諸行이 단절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단절 되었는가 단절되지 않았는가는 바로 “諸行이 단절 되었는가 되지 않았는가?” 가 중요한 것이며 諸行의 단절여부가 有爲냐 無爲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煩惱는 다하였으나 行의 作用이 남아있으면 有餘涅槃이며 行의 作用까지도 모두 滅했으면 그 단계에서는 無餘涅槃인 것이다.
그렇다면 煩惱가 다한 것과 行의 作用까지도 모두 다한 것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心理的인 것과 構造的인 것은 終局的인 곳에서는 거의 같은 時間에 발생하므로 心理的인 것과 構造的인 것이 同時에 이러난다고 할 수 있지만 분명 心理的인 것과 構造的인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心理的인 無漏와 構造的인 無爲가 사라지는 것은 時間的으로 同時일 뿐이지 同一事件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국에는 心理的인 것과 構造的인 것의 차이가 극히 짧아서 心理的인 것이 곧 構造的인 것이지만 論理상으로는 분명이 차이가 있는 것으로서 심리적인 해결이 구조적인 것의 해결과 같은 것은 아니므로 이를 구분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煩惱를 이야기 하는 것 즉 無漏라는 표현으로 당연히 行까지 除去된 것이기 때문에 無爲라는그 이야기는 생략되었지만 論理상 한번은 분명이 線을 그어줄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기쁘지 않고 차가워진다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 涅槃界라는 표현은 煩惱가 다하였다 하여도 五蘊 즉 五蘊 중에서도 諸行에 해당하는 行인 五下分結이라는 煩惱와 이 煩惱에 의한 行도 滅하여서 그 단계에서는 涅槃이라고 할 수 있으나 五上分結에 따른 行 즉 12緣起의 行이 아직 滅하지 못하였으므로 有餘涅槃이라고 분명하게 구분을 지어주는 설명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六根 六境 六識 六觸 六受 六想 六思에서 六思는 의도적이지만 아직은 생각에 머물러있는 단계로서 行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어떤 단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精神에서도 어떤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의 증거인 것이며 이것 때문에 佛敎가 唯物論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을 알아야 行을 알았다고 認可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몸이라는 것은 늘 構造的인 왜곡의 有爲法을 상징한다. 그러나 無爲와 有爲의 차이는 아주 작은 時間差異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無爲라고 하면 無漏가 이미 인테일(내포하는 것)된다. 그러므로 有爲냐 無爲냐는 無漏냐 有漏냐 한가지로 표현해도 되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아주 미세한 차이이기 때문에 無漏라고 해도 이미 無爲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無漏라고만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중에서 가장 먼저의 것이 無漏 즉 煩惱를 除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佛敎가 唯物論과 구별되는 것은 行 때문이다. 精神과 物質에서 物質은 原因이 되지만 精神은 原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唯物論의 주장이다. 그러나 佛敎에서는 기존의 物質的 에너지에 精神이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事件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物質界에 存在하지 않았던 새로운 에너지가 나온 것이 증명되어야 하는데 物質構造 自體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반하여 자기 뜻대로 가져갈 수 있는 能力을 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物質에서 나온 에너지는 분명히 아니므로 精神에서 어떤 에너지가 나와서 物質構造에서 生成되는 에너지에 반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므로 이것을 物質에서 나왔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精神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精神이 物質의 原因으로 作用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物質 外의 어떤 것이 개입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物質的 構造를 변형시키는 것이 行이며 精神的 構造 속에 머무는 것이 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苦行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物質的 構造의 왜곡을 해결해야하기 때문인 것이다. 物質的 構造의 歪曲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며 이 物質的 構造의 歪曲이 풀린 것을 無爲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涅槃의 世界에 가까이 갈수록 精神的인 문제解消와 物質的인 問題解消와의 時間的 差異가 극히 작아지므로 無爲가 無漏이고 無漏가 無爲 이므로 하나만 언급해도 되기 때문에 주로 煩惱에 중점을 두어 無漏만을 언급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無漏만 얻은 것은 有餘涅槃 이고 無漏에 이어서 無爲까지 해결한 것을 無餘涅槃이라고 하는 것이다.
佛敎에서는 煩惱가 있으므로 行도 있다는 論理가 成立한다. 그러므로 煩惱가 사라지면 行도 사라진다는 것인데 문제는 煩惱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煩惱의 단계가 2단계에 걸쳐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行에도 2개의 行이 있다. 그것은 五蘊에서의 行과 12緣起에서의 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煩惱가 다함으로 行 또는 爲가 다하고 그 결과가 涅槃에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2개의 行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바로 五蘊에서의 行은 五下分結이라는 煩惱에 의한 것이며 12緣起에서의 行은 五上分結이라는 煩惱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五下分結에 의한 行까지 除去한 것은 阿那含果로서 저세상에서 涅槃한다고 규정한 것이며 일단 그 단계에서는 行까지 除去한 境地이므로 일단은 涅槃이라는 뜻에서 有餘涅槃이라고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12緣起의 五上分結에 의한 行까지 除去한 것을 阿羅漢이라고 함으로서 그 단계에서는 모든 煩惱와 行까지 모두 除去한것[無爲와 無漏]이므로 無餘涅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四門四果에서 預流果 一來果 不還果 阿羅漢果에서 보면 4단계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預流果 一來果 不還果 가 3단계로서 서론. 본론. 결론의 모양을 갖추었으며 阿羅漢果도 初入阿羅漢 住法阿羅漢 不動阿羅漢 의 3단계로서 서론. 본론. 결론의 모양을 갖추었으며 預流果에서 不還果까지에서 五蘊 단계의 煩惱(五下分結)와 그 行이 消滅하는 것이며 阿羅漢의 3단계에서 12緣起의 煩惱(五上分結)와 그 行이 모두 消滅하여 無餘涅槃을 證得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五下分結의煩惱는 다하였으나 12緣起의 行즉 五上分結에 의한 行은 滅하지 못하였다면 有餘涅槃이므로 2개의 有餘涅槃이 있으니 有餘涅槃界라는 用語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金剛經(大乘)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阿含 次元의 無餘涅槃을 얻었더라도 그것은 완전한 無餘涅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은 남은 微細煩惱가 남아있으니 그것은 想이라고 하는 微細煩惱이며 그것마저 모두 除去하여야 完全한 涅槃(究竟涅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大乘의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阿含經차원에서의 無餘涅槃과 金剛經차원의 究竟涅槃에 이르지 못한 微細煩惱에 의한 行이 제거되지 못한 境地로서의 無餘涅槃이 있으니 이를 無餘涅槃界라고 하면서 完全한 涅槃이 아니라는 뜻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究竟涅槃이라고 함은 이미 阿含經차원에서 無餘涅槃이라는 用語를 사용하였으므로 이와 差別하기 위하여 究竟涅槃이라는 새로운 用語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결코 究竟涅槃界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에 注意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聖人들은 無爲法에 통달해 있다는 이야기가 經典에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며 이것을 모르고서는 無爲法에 통달했다고 할 수가 없으며 당연히 究竟涅槃에 들 수가 없는 것이다. 無爲法에 대한 해당 내용의 法門은 아래와 같다.
“세존이시여. 세존이 말씀하신 의미를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여래께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라고 원만히 잘 깨달았던 어떠한 법은 없습니다.48) 또 여래께서 가르치신 어떠한 법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원만히 잘 깨달았고 가르치셨다고 하는 법은 붙잡을 수도 없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도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무위법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49)”
따라서 아함경 차원의 涅槃과 大乘의 涅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涅槃종류 行 번뇌(無漏) 비고
究竟涅槃 ⇐ 無爲( ? 行의 제거) ⇐ 微細煩惱 제거
B涅槃 ⇐ 無爲(12緣起에서의 行 제거) ⇐ 五上分結 제거 無餘涅槃
A涅槃 ⇐ 無爲(五蘊에서의 行 제거) ⇐ 五下分結 제거 有餘涅槃
現在까지 공부한 것은 “有情(sattva)이 無餘涅槃界에 般涅槃 한다.”는 구절 중에서 無餘涅槃界에 대하여 공부한 것이다. 여기서 “般涅槃 한다.” 라는 이야기는 “無餘涅槃界에 든다.” 라는 이야기로 대치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의 설명은 無餘涅槃을 부정하는 내용으로서 현재의 상태는 아직은 완전한 無餘涅槃이 아니라는 이야기 이다. 따라서 目的地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고 나서 기계적으로 부정해야하는 것이 主體 즉 有情에 대한 부정을 함으로서 이 문장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되는 셈이다.
위의 산스크리트 경전의 내용을 漢譯經典과 비교하여보면 상당히 다름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漢譯經典에는 “만일 보살에게 유정이라는 생각이 전개된다면 그는 보살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생략되면 내용상 연결이 되지 않는다.
먼저 有情이라는 생각을 부정하는 내용으로서 그다음 내용은 有情이라는 생각의 부정에 대한 이유로서 我相. 人相. 壽者相. 衆生相이 전개되면 보살이 아니라는 내용이므로 앞의 것을 생략하면 연결이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1. 보살에게 유정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2. 왜냐하면 보살에게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無餘涅槃도 부정되고 有情도 부정되니 般涅槃 한 者는 당연히 없다는 뜻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有情이라는 생각”을 “有情이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어도 되는데 이 말은 有情이 있다면 有情이 修行을 해서 涅槃에 들 수 있으므로 有情과 涅槃에 든 衆生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有情이 별도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有情은 본래부터 涅槃의 存在 즉 본래 부처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부처인 有情이 煩惱(사견과 집착)를 제거하고 五眼의 과정을 차례로 바꾸어 깨달음을 얻으면 곧 부처라는 것이 大乘佛敎의 思想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내용은
我想에서의 我(atman) - 부라만 교에서 주장하는 내용.
人想에서의 人(pudgala) -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는 내용(몸 둥이. 물질이지만 자발적인 활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사상).
壽者想에서의 壽者(jiva) - 아스위카 思想에서 주장하는 내용.
衆生想에서의 衆生(sattva) - 生命體라는 내용으로서 有情이라는 뜻. 위의 3개와는 다른 맥락의 용어이다.
아상. 인상. 수자상 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 모두 實窮極的 體로 연결되므로 永遠性을 말하는 것이다.
2. 모두 精神的 活動性을 나타내는 用語이다.
그러나 衆生(sattva)이란 말은 일반 生物 즉 生命體라는 내용으로서 生命體가 되기 위해서는 atman이나 pudgala나 jiva가 있어야 sattva(衆生)이 되므로 衆生이 되기 위한 條件 즉 生命體를 生命體이게 하는 根源的인 條件이라고 볼 수 있다.
부라만 思想의 atman은 永遠한 存在인 神의 靈魂이 나뉘어져서 모든 生命體나 모든 物體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비하여 基督敎에서의 靈魂이라는 개념은 神이 創造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또 기독교에서는 精神과 靈魂과 肉體라는 3개의 槪念으로 生命體를 파악하고 있다. animal spirit(동물의 정신)이라는 말이 基督敎에서 주장하는 내용인데 이는 動物에게는 肉體와 animal spirit는 있지만 靈魂은 없으며 靈魂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人間뿐이라는 敎理이다.
그러므로 動物은 殺生하여 잡아먹어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敎理이다. 이는 pudgala와 매우 닮아있는 개념이다.
金剛經에서는 생각이라는 용어를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金剛經에서는 생각이라는 單語와 執着이라는 單語와 邪見이라는 單語를 同義語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집착(graha)에는 邪見(drsti)과 이 邪見이 반복된 Vasana(버릇) 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邪見이란 잘못 보는 것인데 執着의 안에는 잘못 보는 것과 잘못 보는 것이 버릇이 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執과 見과 想(samjna)을 모두 같은 뜻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의 見과 佛知見이나 解脫知見 할 때의 見은 그 原語가 darshana로서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邪見(drsti)의 見은 좋지 않은 쪽의 것을 뜻한다.
金剛經에서의 想은 어떤 사실이 같은 것을 다르다고 보는 쪽이 아니라 사실상 다른 것을 같다고 보는 것을 뜻한다. 想이라는 용어 속에는 이미 아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samjna라는 용어를 사용할까? 金剛經에서는 我相 人相 壽者相 衆生相과 我見 人見 壽者見 衆生見과 我執 人執 壽者執 衆生執이 같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거의 同義語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想(samjna)이란 표현을 택한 것은 반야부의 주요 主題인 반야(prajna) 그 자체와 의 對比를 위해서이다.(想과 相의 문제는 본래 想이라고 써야 하는데 구마라즙이 번역에 相으로 하였기 때문에 我相 人相 壽者相 衆生相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되었음은 相想 즉 相에 대한 想이라는 말이 나올 때 혼동됨을 보면 알 수 있다.)
주 31번을 살펴보자
31) 想이란 항상 하는 一者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함. 여기서 생각(samjna)은 “합친(sam) 앎(jna)이라는 어원적 분석이 가능한 말로 가변적 구조에 대해 그 구성 요소를 합쳐 있다고 보아(sam) 불변적 구조로 판단(jna)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想이란 執着이므로 그 속에는 邪見이 必含되어 있다. 그럼에도 想(samjna)이란 표현을 택한 것은 반야부의 주요 주제인 반야(prajna) 그 자체와 의 대비를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想은 곧 “잘못 보는 것”을 뜻한다. 그럼 무엇을 잘못 보는 것일까? 첫째 “실체 아닌 것을 실체로 잘못 보는 것”이고 둘째 “실체를 실체인 줄 몰라보는 것”이다.
왜 실체라는 말을 가져왔느냐? 四相(想)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想하되 곧 잘못 보되 그 잘못 보는 주체를 자아(我) 개인(人) 유정(衆生) 영혼(壽者)로 잡고 있다. 이들은 모두 중생들이 실체시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기불교에서는 外道들이 實體(dravya)로서 사용하던 개념이었다.
먼저
1. “실체 아닌 것을 실체로 잘못 본 것”으로서의 想이란 무엇인가? “실체 아닌 것”이란 “凡夫나 聖者가 경험하는 一切의 精神的 物質的 存在나 事件”을 뜻한다.
@실체 아닌 것 Q를 1) (시간적으로) 永遠하다고 보는 것.
2) (공간적으로) 獨存하다고 보는 것.
3) (내용적으로) 充滿하다고 보는 것. … samjna
@그러나 실제 Q는 1) (시간적으로) 永遠하지 않고 無常하다.
2) (공간적으로) 獨存하지 않고 共存한다.
3) (내용적으로) 充滿하지 않고 껍데기이다.… prajna
2. “실체를 실체인 줄 물라보는 것”으로서의 想은 무엇인가? 앞 문단에서 진행한 논변의 결론은 “Q 는 껍데기이다.”라는 진술이다. 껍데기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알맹이라는 말이 전제된다. 실체는 바로 우리말로 알맹이 이다. 이 알맹이를 알맹이라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想이다.
그러면 알맹이란 무엇일까? 그 알맹이에 대한 정보 제공이 바로 범본 金剛經에서 상설된다. 해당 부분의 주를 다시 참고 하기 바란다.[주)73 참조]
이상의 주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samjna(想)와 prajna(般若)를 비교하여보면 金剛經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아느냐(아는 방법)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또 한 가지는 微細煩惱의 대명사가 바로 想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有情이라는 생각”은 그 내면에 邪見이 포함되는 것을 뜻한다. 좋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안 좋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함경에서도 제일 마지막 부분에 이 想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그것이 非想非非想處의 想이며 최종단계인 想受滅의 想이 이에 해당한다.
요가의 최고단계가 無想三昧이다. 부처님은 이를 色界4禪의 無想天에 배치하고 있다.
탐 진 치의 煩惱는 感性的인 煩惱로서 거칠어서 자신이 금방 안다. 그러나 想은 情緖的인 영역으로서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다.
bhuta-samjna: 진실 하다는 생각. 생각은 작위적이기 때문에 想이라는 用語를 쓴 것이다. 想에 대한 확실한 理解를 위해 제6장 淨信希有分의 주40)을 참조해 보자.
40) 여기서의 생각도 바로 想(samjna)이다. 想을 금하는 金剛經의 입장에서 보면 의외의 표현이다. 그러기에 여기서의 想을 잘 해석해야 한다.
1. 想은 근본적으로 작위적인 성격이 있다. 실체 아닌 것을 실체로 보는 것도 작위적이다. 그래서 想이다. 그런 것처럼 未來世에 곧 부처님이 아니 계신 상황에서 이런 교설을 접하면 그것이 진실하다는 판단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는다.
그때는 비상한 각오로 이 교설을 진실하다고 밀어붙여야 하거니와 형태적으로 작위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想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간혹 불교만이 금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진술을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해서는 아니 될 생각을 금하는 것이지 아무리 想이라 하더라도 해야 할 생각이라면 비상한 각오로 진행해야 하는 법이다.
이상의 가르침이 진실하다는 이 생각은 힘들지만 큰 용기로 일으켜야 한다. 건전한 비판은 버려야할 思量分別이 아니라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드문 나침반이다. 물론 이 생각도 하나의 사건이므로 껍데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그것이라고 인정해서도 아니 되고 그것이 있다고 긍정해서도 아니 된다.[제14장 離相 寂滅分 참조] 그러나 일으켜야 된다.
善. 惡. 正. 邪. 眞. 俗. 覺. 迷가 모두 껍데기이지만 그래도 그런 줄 알면서 善. 正. 眞. 覺은 일으켜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應無所住 而生其心하는 참 뜻이 아닐까?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마하살은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제14장 離相 寂滅分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