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본 금강경

(제2장 先現起請分)

동산/혜산방 2011. 8. 19. 18:54

本文 (2先現起請分)

19)그런데 수부티가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부티 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세존이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선서시여,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여래 응공 정등각 자께서 이와 같은 지극한 보살핌20)을 보살 마하살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일이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선서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여래 응공 정등각 자께서 이와 같은 지극한 사명21)을 보살 마하살들에게 부촉하고 계시는 일이 그러합니다.”

19) [2장 선현기청 분]

20) 반야바라밀다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설시(說示)

21) 대승의 홍포(弘布)

 

그때 많은 比丘들이 世尊이 계신 곳으로 왔다. 라는 대목에서 보면 菩薩 摩阿薩은 등장하지 않고 比丘들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比丘들의 日常生活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에 瞑想을 하고 이제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문안 인사차 모여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菩薩一般 在家者일 확률이 높다.

 

比丘들이 부처님에게 와서는 世尊의 두발에 자신의 머리로써 절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예를 올린 후에 한쪽에 앉는 광경이 보이는 듯 느껴진다.

 

原語abhivadeti(공손히 절함: 비구들이 부처님을 만나서 예의를 표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예를 표하는 방법이 신분에 따라 다 다르므로 출가한 比丘들이 부처님을 만나서 하는 예를 특별하게 말할 때 쓰는 용어임)인 것을 당시의 예법에 따라 번역된 것이다.

그런데 모든 經典에서 弟子들은 부처님에게 를 올린 후에 반드시 앉는 것으로 표시되지만 天神들은 반드시 한쪽에 서는 것으로 妙思된다는 사실을 특기할만하다.

 

다음 부처님을 呼稱할 때 반드시 如來十號 중 일정방식에 의해서 순서에 입각해서 부른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如來十號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직접 如來는 이렇게 불러야 한다는 名稱을 직접 하신 것으로 보아 그 이름에 큰 뜻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如來十號如來 應供 正邊智 明行足 善逝 間解 上事 調御丈夫 天人師 世尊으로서 반드시 순서대로 불러야 하며 다 못 부를 경우는 3부분으로 나누어서 앞부분에서 如來 중간부분에서 善逝 뒷부분에서 世尊을 부르기도 한다.

本經에서는 如來 應供 正等覺者라는 호칭은 如來十號 중 앞부분을 부른 것으로서 부르는 순서에 있어서 적절한 표현이다.

如來十號는 그냥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깨달음의 순서 내지 과정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如來十號의 앞부분 3개와 중간부분 3개는 此岸에서 彼岸으로 가서 다시 彼岸에서 此岸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으로 짜여 진 것이다.

 

佛敎此岸(苦海. 世間)에서 修行을 통하여 涅槃()으로 깊어지고 다시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彼岸(반야바라밀다. 大明)에 도달한 후에 그곳의 價値를 가지고 다시 涅槃()을 거쳐서 此岸으로 돌아와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과정으로 도식화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러므로 앞부분의 3개는

如來(tathagata): 그렇게 온

應供(arahat): 동등한

正邊智(samgaksambuddha): 바르고 원만히 깨달은 분

으로서

 

如來 그렇게 온이란 어떤 價値觀을 가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온 것을 뜻하는 말이 된다.

 

應供(arahat) 同等한 이란 彼岸淸淨함을 가지고 此岸함에서도 淸淨함을 잃지 않고 살려면 최소한 同等價値觀을 발견해 내어야 가능한 것이니 同等함이란 그 價値觀彼岸此岸價値觀同等함을 發見하여 確立한 상태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正邊智 즉 바르고 圓滿한 깨달음이라는 것은 彼岸의 반야바라밀다를 가지고 此岸으로 와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즉 無上正等覺을 얻은 분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중간 부분의 3개는

明行足(vidya carana sampana): 밝힘에의 進行을 완성함(여기서의 進行을 의미하는 행임. 그러므로 을 향하여 가는 것이 滿足스럽게 完成된 것을 의미함.)

善逝(sugata): 잘 간 [ su: . 좋은 gata: . 가버린]

世間解(loka-vid): 세상을 아신 분(loka는 이 세상을 말하며 vid 라는 말은 깨달음에 육박하는 앎을 뜻하는 단어임)

 

明行足이란 彼岸 에서 일단 을 향하여 만족하게 간 것을 뜻하며

 

善逝으로부터 此岸으로 다시 가는데 있어서 잘 간 것을 말하며(실제로 청정함을 가지고 탁함으로 오는 데는 정말 잘 가야 할 것임)

 

世間解는 그렇게 잘 옴으로서 世間을 완전히 잘 알아낸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간의 이름은 다시 한 번 彼岸으로부터 此岸으로 오는 과정의 내용을 확인하여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나머지 뒷부분은

無上事(anuttara): 더 이상 없는

調御丈夫(purusa-damya-sarathin): 장부를 길들이는

天人師(deva-manusa-sastr): 천신과 인간의 스승인

佛 世尊(buddha-bhagavat): 깨달은 어른

으로서 그대로 現世의 부처님을 수식하는 형용사로서 마지막 을 수식하는 형용사들로 구성된 말이다.

 

특히 주의할 것은 佛世尊世尊을 떼어서 해석해야 바른 해석이 된다고 할 수 있으니 世尊이란 어른또는 정도의 존칭어로서 부처님 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如來十號는 그렇게 온, 동등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밝힘의 진행을 완성한, 잘 간, 세간을 아는, 더 이상 없는, 장부를 길들이는, 천인과 인간의 스승이신, 부처님으로 해석해야 한다.

 

世尊이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善逝시여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의 대목에서 漢譯經典에는 희유한 일입니다. 지극히 희유한 일입니다. 라고 번역되는 대목이다.

이 대목의 원어는 ascaryam bhagavan parama-ascaryam sugata 로서 ascaryam은 경탄스러움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이는 전에는 없었던 일이 지금 발생할 때 놀라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희유(드믄 일)하다. 미증유(일찍이 있었던 일이 없었음)의 일이다. 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놀라운 일인가? 놀라운 일이 두 번 거듭해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처음도 놀라운 일인데 두 번째는 지극히 놀라운 일로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 놀라운 일은 如來께서 菩薩摩何薩들에게 지극한 보살핌을 베풀어주시는 일이고

두 번째 지극히 놀라운 일은 如來께서 菩薩摩何薩들에게 지극한 使命咐囑(부촉)하고 계시는 일이라고 했다.

 

첫 번째 지극한 보살핌이란 이제까지 涅槃을 얻으면 끝으로 생각했고 반야바라밀다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에게만 해당되는 일로 알고 등한시 해 왔었는데 이제 涅槃을 얻고 나니까 반야바라밀다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음을 설하시고 너희 菩薩摩何薩(보살마하살)에게 해당하는 깨달음의 과정임을 선포하시니 놀라운 일이고

 

두 번째 지극한 使命咐囑(부촉)했다함은 이제 너희 菩薩摩何薩들이 반야바라밀다를 거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나서는 衆生들을 제도하여 나와 똑같은 길을 걷는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부촉하시니 지극히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감히 꿈도 꾸지 못하였던 부처가 되라는 이야기 이니 지극히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반야바라밀다 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 너무 자주 들어온 이야기 이므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거나 나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고 있거나 그냥 그런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涅槃境地에 든 자로서는 지극히 놀라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衆生知的으로 無知하고 情緖的으로는 오만하고 意志的으로는 나약한 것이 衆生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49일 동안 침묵하신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지하고 오만하고 나약한 人間에게 최상승의 甚深 微妙 法인 깨달음의 내용을 했을 때 人間이 오히려 알지 못하면서 부처님을 비방하면 惡趣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하지 않음만 못한 것 아닌가를 심사숙고하였기 때문이다.

 

 

本文

세존이시여, 양가의 아들딸로서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있는 자는 어떻게 서야(22)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와 같이 말했을 때 세존은 수부티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수부티야, 네가 말한 대로이다. 수부티야, 여래는 지극한 보살핌을 보살 마하살들에게 베풀고 있으며 여래는 지극한 사명을 보살 마하살들에게 부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부티야, 잘 듣고 골똘히 생각하라. 처음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가 어떻게 서야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23)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설하겠다.

예 세존이시여.”라고 하며 수부티 존자는 세존께 응답하였다.

22) 일반적으로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 가로 해석하는 대목이지만 반야부 경전에서 머문다.”라는 표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사용이 제한된다. 이 대목은 처음 대승에 들어온 사람이 대승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서 있는 자세를 유지하는 가라는 뜻이 강하다.

우리가 배나 수레에 올라타면 우선 균형을 잡고 서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의 단어는 pra-stha이고 실제 머물다. 라고 해석해야 하는 예를 들어 제 4 묘행무주분이 應無所住라고 흔히 해석하는 의 원어는 prato-stha로 다른 것을 주의해야 한다. 다음의 두 영역자의 번역을 참조할 것.

막스 뮬러의 번역

"How then, O Bhagavat, should the son or the daughter of a good family, after having entered on the path of the Bodhisattvas, behave, how should he advance, and how should he restrain his thoughts?"

에드워드 콘즈의 번역

“How then, O Lord, should a son or daughter of good family, who have set out in Bodhisattva-vehicle, stand, how progress, how control their thoughts?"

 

23) 구마라즙 본에는 이 부분의 질문은 없다. 범본에도 어떤 종류는 이 부분이 빠진다. 그러나 티베트 본에는 반드시 질문이 세 가지이다.

 

양가의 아들딸로서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있는 자는이라는 문장에서 구마라집 漢譯 本에서는 發 阿耨多羅三邈三菩提心 者[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 이라고 번역되어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표현은 菩薩乘으로 나아가 서 있는 와는 그 근기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보살승에 나와 서있는 자는 初發意 菩薩이다. 수보리가 처음 시작되는 법문에 대하여 질문할 때 최종에 나오는 불퇴전보살이나 일생보처보살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질문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金剛經에서는 초발심보살이나 행 육바라밀보살이나 일생보처보살이라는 계위를 나타내는 용어는 없지만 法門의 심도로 보면 초반부에는 大乘에 갓 나온 자를 위한 법문이 주가 되며 중간부분에는 행 6바라밀보살[6바라밀을 수행하는 보살]을 대상으로 하여 법문이 진행되며 마지막부분에 가서는 대표적으로 無生法印하는 것으로 보아 고도의 수행을 완성한 불퇴전 보살이나 일생보처보살을 대상으로 하는 법문이 언설되고 있다.

 

따라서 金剛經초두에서 말하는 菩薩乘으로 나아가 서있는 자는 그야말로 聲聞緣覺을 거쳐 처음으로 菩薩乘으로 나온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산스크리트 본에 있는 그 대목은 bodhisattva-yana-samprasthitena로서 bodhisattva菩薩이라는 뜻이고 yana(탈것)이라는 뜻이며 sampra: (나아가) sthitena :(닿아 선 자) 라는 뜻으로서 菩薩을 언급했다는데 상당한 무게중심을 두어야 한다.

 

경전에 따라서 bodhisattva 대신에 maha(. 위대한)nava(새로운)것과 prathama(처음으로)라고 사용된 것 중 maha-大乘으로 nava-는 새로운 으로 菩薩乘이라는 말과 별 차이가 없지만 prathama-yana의 경우는 처음으로 에 나와 서있는 자가 되어 聲聞緣覺을 거쳐 이제 막 菩薩乘에 나온 자라는 뉘앙스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初發意 菩薩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아래에 있는 문건 내용을 보면 대지도론에서 초발의 보살에게는 반야바라밀의 隨喜(수희)에 대하여 설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질문할 때의 내용은 初發意 菩薩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질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먼저 초발의 보살이란 어떤 보살을 말하는 것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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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發意 菩薩 (참고문건)

세존이시여, 양가의 아들딸로서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어떻게 서야하며 어떻게 나아가야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초발의 보살은 新發意. 新發心. 初發心 菩薩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이 菩薩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관점은 無上正等覺에 처음으로 마음을 일으킨 보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초발의 또는 초발심에서의 발심을 發菩提心의 준말로 理解하게 한다. 실제 大智度論을 보면

 

보살이 처음으로 발심하는데 無上를 의지하여 나는 마땅히 부처를 이룰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을 보리심이라고 이름 한다.”<大智度論 41[大正藏 25,p,362]>라고 논술되어 있거니와 이것은 초발심의 발심을 發菩提心의 의미로 보게 하는 것이다.

 

初發意 또는 新發心 등의 發意 發心無上正等覺을 얻어 부처를 이루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의 意味로 보아서 안 될 것은 없지만 般若部 經典에 입각하는 한 初發意發意는 좀 더 자세한 면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初發意의 산스크리트 原語navayana-samprasthita” 또는 “prathanayana-samprasthita”등으로 되어 있거니와 이것은 發心 또는 發意의 대상을 無上正等覺이 아니라()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大乘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반야부 경전이 外道보다는 오히려 小乘을 부정하고 있을 정도로 大乘이라는 새로운 佛敎를 선양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과 매우 상응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예를 든 두 가지 原語 中"prathanayana"최초로()라고 하는 뜻으로 해석되므로 初發意 또는 初發心 라는 의미에 부합된다. navayana-samprasthita새로운 에 나아가 서 내는이라는 해석이 더 어울리는 것이다.

 

새로운 이란 바로 아함경차원의 聲門乘(sravaka-yana) 辟支佛乘(pratyekabuddha-yana)과 다른 大乘 또는 菩薩乘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初發意 菩薩의 단계는 단순히 無上正等覺에 마음을 처음 일으킨 菩薩이라는 의미보다는 보다 구체적으로 새로운 불교로서의 大乘(菩薩乘)에 처음으로 마음을 낸 보살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좋을 것이다.

 

이러한 初發意 菩薩은 그 수준이 어떠할까? 이에 대해 大智度論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의 隨喜에 대한 뜻을 新學菩薩 앞에서는 설하지 말라. 왜냐하면 福德善根이 작은 자가 畢竟空(필경공)을 듣는다면 곧 에 집착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일체법이 필경공이어서 無所有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 福德을 지어야 하겠는가?’ 그리하여 곧 善根忘失한다.

그러므로 新發意 菩薩 앞에서는 取相隨喜를 가르쳐라. 점차 방편력을 얻게 한 뒤에 무상의 隨喜를 행하게 하라.”<大正藏 25,p,489]>

 

初發意 菩薩은 반야바라밀다와 道理에 정통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들을 수 있는 능력조차 지니지 않은 자가 그 속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大乘菩薩 中에는 초보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維摩經(유마경)같은 데서도 볼 수 있다.

 

神通을 얻은 菩薩은 스스로의 형체를 변화하여 42천 유순을 이루어 獅子座에 앉는데 여러 新發意 菩薩과 큰 제자들은 모두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하다.<維摩經 [大正藏14.P,546]>

 

新發意 菩薩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대해 듣게 되면 허물어져 不信하게 되고 三惡道을 심게 되고 그 因緣으로 오랫동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어려워진다.”<大品般若經 45 聞持品[大正藏8.p.314]>

 

初發意 菩薩의 미숙함이 역시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初發意 菩薩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 또는 肯定的인 묘사가 오히려 반야부 경전에 있어서는 主流를 이루므로 우리는 이 菩薩의 그러한 면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반야부 경전에 나타나는 初發意 菩薩의 행상(akara)과 특징은 3가지 정도로 나눠서 살필 수 있다.

 

첫째는 窮極的 깨달음을 얻기 위해 修行을 하거니와 그 수행의 내용이 초발의 보살일 경우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衆生을 교화하기 위한 자세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불국토를 정화하는 功德에 대해서 살피면 될 듯하다.

 

우선 大品般若經의 제4 往生品을 보면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초발의 보살 때에 첫째禪定 내지 넷째선정을 얻고 四無量心을 얻고 四無色定을 얻는다. 또한 四念處 내지 十八不共法을 닦는다.”<大正藏8,p,226>라고 설해져 있다.

 

여기서 四念處 내지 十八不共法 속에 생략된 수행덕목은 四正勤. 四如意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三十七 助道法. 無相. 無作意 三解脫門 그리고 六波羅蜜 그리고 부처의 十力. 四無所畏. 四無礙智. 大慈大悲 등이 들어간다.

따라서 初發意 菩薩이 닦는 修行德目阿含部의 수행덕목(四禪부터 三解脫門)과 반야부(六波羅蜜多)의 그것과 法華 華嚴部(十力부터 十八不共法)修行德目들을 모두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初發意 菩薩菩薩四位의 최초 단계에 불과하지만 窮極的인 깨달음을 얻기 위한 修行에 있어서 어느 한 곳에 치우친다거나 제한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록 初發意 菩薩 단계에서 이들 修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나 이 모든 修行을 빠지지 않게 전제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같은 품에는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초발의 보살 때부터 보살의 불퇴전에 도달할 때까지 항상 十善行을 버리지 않는다.”<大正藏8,P.226>

 

라고 설해져 있듯이 단순히 出世間的修行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善業의 실천에도 소홀히 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善業의 실천이 이 菩薩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역시 다른 衆生들을 敎化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본래의 이유가 있다. 대중 또는 사회 속에서의 삶을 조절하고 화합시키는 원리는 역시 業說의 원리에 지니는 것이 드물기 때문이다.

같은 품에는 菩薩이 사회 大衆을 떠나지 않음을 이렇게 설한다.

 

보살은 欲界. 色界. 無色界에 태어나지 않고 항상 衆生利益 되게 할 수 있는 곳에 태어난다.”<大正藏8,p.226>

 

그리고 衆生利益 되게 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다.

 

또한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초발의 보살 때에 문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法輪을 굴리어 한량없는 아승지 衆生들에게 두터운 이익을 준 뒤에 無餘涅槃에 든다. 이 부처님이 般涅槃 하신 뒤에 남긴 법은 일또는 일약간 못 미치게 머문다.”

 

초발의 보살 때 문득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은 舊譯 華嚴經에서 보듯이 初發心時變正覺과 같은 大乘極致에 가서 理解되는 敎義이긴 하지만 함부로 初發意 菩薩을 가볍게만 보지는 못하게 한다.

 

끝으로 우리가 初發意 菩薩을 살필 때 이 菩薩淨化하려고 애쓰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초발의 보살 때에 반야바라밀다와 상응하여 수없이 많은 백 천억의 보살들과 함께 한 부처님 국토에서 다른 부처님 국토로 다니니 부처님 국토를 정화하기 위해서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참고문건 끝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大乘의 근본 목표가 전 衆生건설이라고 한다면 國土 정화라는 것은 그러한 정토건설의 전초가 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上正等覺을 성취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土 淨化에 곧 바로 뛰어 들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질문이 어떻게 서야하며인 것이다.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이 대목은 金剛經이 초기대승경전임을 증명하는 대목이 되는 셈이다.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직접 초발보살이 나아 갈 바를 질문하는 내용으로서 후기에 만들어진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답만 적어놓은 것이며 대품반야경에는 그 질문의 내용이 들어있다.

 

대품반야경에서의 질문내용은 다음과 같아 金剛經의 질문에 비해서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질문되어진 것이라고 하며 반야부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묻는 질문으로 되어있다.

 

대품반야부경전의 질문내용.

 

" yah kulaputro va kuladnhita va asyam gambhirayam

prajnaparamitayam caryam camtukamo kutham siksaryah ?"

 

선남자 선 여인으로서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향하여 가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그러나 金剛經에서는 양가의 아들딸로서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어떻게 서야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gam 이나 caryam가다앞에 목적지를 놓고 가다라고 할 때 쓴다.

金剛經의 가다는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가다를 말한다. 즉 가기는 가되 입구를 통과해서 가다이다. 그러므로 최초에 보살승으로 나온 초심자의 나아갈 바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마라즙 번역의 漢譯經典에서처럼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조복 받아야 하는가? 라는 번역은 지양 되어야 한다.

 

八正道pratipad로서 오솔길을 의미하며 苦集滅道marga로서 큰길(처음에는 오솔길이다가 많은 사람이 다니므로 해서 커진 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라는 질문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가의 뜻이다.

 

新發意 보살의 섬 나아감 마음을 잡아냄

 

<tat katham bhagavan bodhisattvayana-samprasthitena kulaputrena va kuladuhitra va sthatavyam katham pratipattavyam katham cittam pragrahitavyam?>

 

*선남자 선 여인으로서 처음으로 보살승에 나아가 닿아선 자는

*어떻게 서야하며(당연히어떻게 제대로 서야하며”) - 균형을 잡고 서 있어야 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당연히 어떻게 제대로 나아가야 하며”) - 단순히 간다라고 하면 "prajnaparamitayam caramano" "gate gate paragate(반야심경)"에서 보듯이 gate도 있고 carya도 있다. 그런데 여기의 pratipad간다.” 에도 주의해야 하지만 다음 두 가지에도 주의해야 한다.

 

1. “입구(入口)”(entrance)라는 뜻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新發意 보살이 이제 大乘의 탈 것을 몰고 나아가야하니 당연히 입구부터 잘 찾아야 한다. 여기서도 지금 수보리 질문의 주체가 新發意 보살이 아니면 아니 됨을 알 수 있다.

新發意 보살이 아니라하더라도 최소한 新發意 보살이 그곳에 포함되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入口(와 종착점)가 갖추어진 큰 = marga,<원래는 path 곧 오솔길이었는데 다니다 보니 큰 길이 되는 것.>

 

2. 근본적으로 (way. path)”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적절한 길을 찾아 제대로 나아가야 하는가?” 라는 취지로 理解해야 한다.

 

# “의 중요성#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road= marga, path= pratipad : 대로 신작로가 아닌 오솔길의 의미.

(1) 처음부터 大路라면 누가 그 길을 못갈까? 또는 헷갈릴까? 우리가 가야하는 길 자체가 넓은 대지 위에 사통팔달로 길을 낼 수 있는 여건에서가 아니고

(2) 처음부터 험한 바다나 지형이어서 겨우 낸 길로서의 생명선과 같은 길임을 뜻한다.

(3) 이런 길은 길이 있다고 그냥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조심해서 가야한다. 그래서 알뜰한 보살핌(parama-anugraha)이 필요하다.

(4) 비록 십분 양보하더라도 여러 길 중에 제일 빠른 길을 찾지 않으면 실패이다.

 

부처님의 說障道無所畏란 수행에 장애되는 길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말하는데 수행에 장애되는 길이란.

<1> 단순히 수행을 막고 방해하고 역효과를 내는 것도 障道이지만

<2> 더딘 길도 障道이다.

 

이는 불교만이 길이라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결국 불교만이 귀의할 종교임을 선언하는 idea 로서 가장 빠른 길은 한 길뿐이고 그 길은 불교이다.”라는 선언이다.

 

*어떻게 마음을 잡아내어야 합니까? 당연히 제대로 마음을 잡아야 한다. 결코 마음은 항복 또는 조복 받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라는 질문에는 어떤 길입니까? 라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阿含에서 이제 갓 大乘으로 올라온 초발의 보살이기 때문에 阿含에서의 과정과 어떻게 다른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阿含에서의 修行過程 中에서 9차제정은 버리고 37助道法은 가지고 般若部로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9차제정은 이미 이루어 낸 境地이니 가지고 올수 없으며 반야부의 목표는 究竟涅槃(반야바라밀다)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법인 37助道法은 가지고 와야 다시 究竟涅槃을 향해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똑같은 境地는 아니지만 6바라밀이라는 修行37助道法에 의해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의 질문이다.

이는 어떻게 잡아내어야 합니까? 의 질문인 것이다. 漢譯經典에서는 降伏其心이라고 해서는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항복기심(降伏其心)?

어떻게 마음을 잡아내어야 합니까?(당연히 제대로 마음을 잡아야 한다.)

 

降伏其心에서 항복은 마음을 억제하고 누지른다는 분위기가 농후하다. grah(잡다)에는 분명히 그런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pra의 존재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잡아내다내다는 분명 일으킨다.” 에 가까운 어떤 구체적인 동작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그 마음을 어떻게 잡아내느냐라는 말은 궁극적으로는 그 마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 뒤에 유사한 분위기에서 마음을 어떻게 일으켜야하느냐(iha subhute bodhisattvayanasamprasthitena evam cittam utpadayitavyam <3 대승정종분>)라고 제안하거니와 그것과 비로소 통하게 된다.

 

사실 불교와 관련된 오해 중 하나가 無心을 그냥 마음 작용이 전혀 없는 상태로 보는데 큰 문제가 있다. 無 生滅心하므로서 充滿 眞如心해야 하는 것이지 이맘 저 맘 다 없애자는 뜻이 아니다.

그러면 잡아야 되는 마음은 무엇이며 내어야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좋다. 사실 하나를 잡으면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불교의 한 특징은 대안 없는 부정은 없다.”는 것이다.

 

사실 마음은 언제나 무언가와 화합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데 어찌 獨存의 뉘앙스를 붙일 수 있겠는가?

 

1. 心意識 관계 속에서 마음의 의미를 찾을 것; 志向 - 意志 - 識別

2. 마음은 최초 선택작용 - 惡心에서 나와서<pra> 善心을 잡다<gra>

惡心을 잡아 누르고<grah> 善心을 일으키다.<pra>

惡心을 항복받고 善心을 잡아내다.<pragrah>

3. 그런 식으로 邪心/正心 俗心/眞心 迷惑心/覺知心이 된다.

 

잡아내다.” 라는 말은 金剛經 안에서도 여러 군데서 쓰인다. 여기서 잡아내다잡다내다.” 2가지인데 이를 둘로 쓸 수 없는 것은 잡다와 내다가 同時이기 때문이다. 마치 구름을 벗어나니 햇살이 비친다. 라는 말에서 구름을 벗어나는 것과 햇살이 비치는 것은 同時이지만 말은 先後로 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질문은 하나이지만 답은 둘이 포함된 것이다. 잡아야 하는 마음은 무엇이며 내어야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질문은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쁜 것은 누르고 좋은 것은 선양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마치 眞如心生滅心이 두 개가 아니라 生滅心이 없어진 자리에 眞如心이 채워지는 것이지 眞如心生滅心이 동시에 存在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를 들어 <28 불수 불탐 분>에서

 

그리고 수부티야 양가의 아들딸이 강가강의 모래알만큼의 세계를 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우고 이것을 응공 正等覺者께 보시한다고 하자.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떤 菩薩無我無生法印을 얻었다고 하자. 이것이야말로 그 인연으로 훨씬 많은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福德을 생기게 할 것이다. 그러나 수부티야 보살 마하살은 그 福德을 받아들여는 안 된다.”

수부티 존자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菩薩은 생긴 福德을 진정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세존이 말씀하셨다.

수부티야. 받아들이되 그러나 붙잡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原語 本文

yas ca khalu punah subhute, kulaputro va kuladuhita va ganganadivalukasamaml lokadhatun saptaratnaparipurnan krtva tathagatebhyo arhadbhyah samyaksambuddhebhyo danam dadyat, yas ca bodhisattvo niratmakesv anutpattikesu dharmesu ksantim pratilabhate, ayam eva tato nidanam bahutaram punyaskandham prasaved aprameyam asamkhyeyam. na khalu punah subhute bodhisattvena punyaskandhah parigrahitavyah. ayusman Subhutir aha : nanu Bhagavan bodhisattvena punyaskandhah parigrahitavyah? Bhagavan aha : parigrahitavyah subhute nodgrahitavyah tenocyate parigrahitavya iti.

 

pragrahitavya(잡아냄)parigrahitavya(완전히 잡음)udgrahitavya(잡아올림)

 

여기서

잡아냄(pragrahitavya): 안 좋은 것은 누르고 좋은 것은 선양한다는 의미.

완전히 잡음(parivrahitavya. 붙잡다.): 목적에 대해서 알고 대처한다는 뜻으로서 온전히 잡는다는 의미.

잡아 올림(udgrahitavya): “뻐기다.”의 의미. 잡아서 소유함으로서 뻐기게 되는 것. 원문에서는 붙잡다. 라고 번역된 부분임. 가능하면 잡지 말아야하며 어쩔 수 없어서 잡더라도 잡아 올림 즉 뻐기지는 마라는 뜻임.

따라서 pragrah는 안 좋은 것은 누르고 좋은 것은 선양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말이다.

 

그 외 grah의 용례

*yavantah subhute sattvah sattvadhatau sattvasamgrahena samgrhita “함께 잡다.”“(범주) 포섭<3 대승정종분>

*dasasu diksu sukaram akasasya pramanam udgrahitum? “잡아 올리다.”헤아리다”<4 묘행무주분>

*sarve te subhute prameyam asamkhyeyam punyaskandham prasavisyanti (쌓고) pratigrahisyanti(감쌀 것이다).<6 정신회유분>

*ascaryam Bhagavan parama-ascaryam sugata, yavad eva tathagatena arhata samyaksambuddhena bodhisattva mahasattv anuparigrhitah(완전히 따라잡음) paramena anugrahena.“따라잡음보살핌<2 선현기청분>

 

위와 같이 마음을 잡아냄이라는 말에서 잡아냄은 이렇게 설명됨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떤 것이기에 잡아냄이라고 해야 옳은 것인가? 먼저 마음에 대하여 깊이 공부를 하고 들어가는 것으로 해보자.

 

(citta)語源的 分析 語彙的 用法

1. (citta)cit를 동사어근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manas)man을 동사어근으로 삼는다. 그런데 citman은 둘 다 생각하다(to think)” “고려하다(to be of opinion)등의 相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상사한 意味를 지닌 두 語根으로부터 형성된 는 모두 생각(하는 자)”정도의 기본적인 뜻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두 술어의 변형들이 구별 없이 서로 어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로서 見類들을 생각하는 자는”(manasa ditthigatane cintayanto)의 예는 citman고려하다(to be of opinion)”의 뜻에서 매우 친근한 관계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citta)의 동사어근을 ci로 보고 있는 俱舍論 등의 論述을 만날 수 있다. ci“cinoti”라는 현재형을 지니는 동사어로서 우선 積集하다(to collect, to gather)”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러한 ci에서 나온 (citta)적집(하는 자)”의 뜻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積集意味과 잘 相應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러 譯書들은 “cinoti”意味를 분명 積集으로 보고 있다.

 

玄奘譯俱舍論"cinotiti cittam"集起故名心(집기 하므로 마음이라 이름 한다)이라고 적고 있으며 眞諦舊譯心以增長爲義(마음은 증장으로서 뜻을 삼는다)라고 적고 있다.

특히 玄奘은 그의 解深密經의 번역에서조차 此識···亦名爲心 何以故 由此識 色聲香味觸等 積集滋長故(이라는 것은 역시 마음이라고도 이름 하니 왜냐하면 이 으로 말미암아 색 성 향 미 촉 등이 쌓이고 모이고 영양분을 얻어 늘어나기 때문이다.) 라는 譯文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의 “cinoti”供犧祭壇쌓아올릴 때 고유하게 쓰이는 단어로서 정신적인 면모를 보여주기에는 미흡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더욱이 “cinoti”하는 까닭에 마음이라고 한다는 語源的 주석을 베푼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관견으로는 動詞語根으로 가장 무난한 cit動詞語根 man과 의미상 용이하게 구별되지 않으므로 일단 cit語根으로 채용하는 것은 피한 것 같다.

그런 뒤 가장 語形近接하는 ci動詞語根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ci의 의미가 積集인 이상 앞서 보았던 지나친 意味상의 괴리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필자는 “cinoti”라는 현재형을 지니는 語根 ci의 또 다른 사전적 意味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cinoti지각하다(to perceive)” “인식하다(to observe)” 구하다(to look for)” 찾다(to search for)”등의 意味로서도 사용되는 것이다.(마음이란 무엇을 구하는 놈. 찾는 놈. 추구하는 놈이라는 뜻을 나타내려고 한 부처님의 뜻을 반영한 用語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意味는 다분히 有情精神的인 면모를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바로 이 意味cinoti를 역대의 論師들이 택하였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구하다” “찾다등의 의미가 보다 적합한 것으로 고려된다.

왜냐하면 지각하다” “인식하다意味를 채용하려 했다면 (citta)語根cit로 삼아 “cetetiti cittam”이라고 주석을 베푸는 것이 무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하다. 찾다등의 cinoti(citta)語根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citta)의 어휘적 용법을 살필 때에 역시 느껴지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 (citta)라는 말은 부처님이 최초에 만든 말이 아니라 印度사람들이 전부터 써오던 말이다.

부처님은 이 말을 이용하여 자신이 마음이라는 말에서 자신이 전하려고 하는 뜻을 별도로 생각하고 쓴 것이다. 고대 印度인들은 그냥 마음은 생각하는 놈으로 써왔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중에서 마음을 생각하는 놈이 아니라 더 정확한 뜻을 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찾는 놈. 구하는 놈이라는 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無生物은 찾지 않는다. 그러나 生命體는 무엇인가를 부단히 찾고 구한다.

이는 산다는 것과 동격이다. 산다는 것도 부단히 무엇인가를 찾고 갈구한다. 그 뜻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印度論師들은 cittaci가 다른 줄 알지만 부처님이 전하려는 뜻이 그 안에 있으므로 ci語根으로 잡은 cinoti라고 잡은 것이다. -@

 

(citta)結合하는 動詞들은 대략 11종인데 주로 認識論的이지 않은 動詞들과 結合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달리다(pakkhandati)· 즐거워하다(pasidati)· 머물다(santitthati)· 앉다(sannisidati)· 하나가 되다(ekodihoti)· 집중하다(samadhiyati)· 노력하다(padahati)· 잡다(paggaanhati)· 목표하다(namati)· 의도하다(pa-ni-dahati)· 志向하다(adhimuccati)등으로 쓰이고 있다.

 

이중에서 은 무엇인가를 積集하다라는 意味動詞와는 분명히 結合하지 않는다. 오히려 달리다. 앉다처럼 一般的生活을 묘사하는 動詞結合하거나 하나가 되다 · 집중하다처럼 三昧와 관련된 動詞結合하거나 노력하다 · 잡다처럼 修行을 뜻하는 動詞結合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目標하다 · 의도하다 · 志向하다등의 動詞와 가장 많이 結合하고 있거니와 여기에 이 글은 큰 중요성을 두고 싶다.

그것은 목표하다 · 의도하다 · 지향하다 등의 동사는 앞서 살핀 cinoti의 의미 중 찾다 · 하다 등과 매우 類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cinoti의 한 의미와 과 결합하는 한 부류의 動詞들의 意味가 서로 相應한다고 볼 수 있다면 바로 歷代 論師들이 語源的 주석으로 들었던 cinoti의 의미내용을 積集으로 볼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무언가를 구하고 志向한다는 데서 의 고유한 意味를 새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citta)에 대한 어원적 분석과 어휘적 용법을 살핌으로써 이 지닌 협의의 뜻을 무언가에 대한 志求· 志向에서 무언가는 앞으로 자세히 살피게 되거니와 일단 語源的 意味를 간략히 志向으로 두고자 한다.

 

2. 初期佛敎는 곳곳에서 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를 바탕으로 하여 머물고 志向한다(chatu- arammanam- eva cittam santitthati adhimuccati)라는 經說을 통해서 存在 근거가 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eva:오직

經說志向하다(adhimucyate, Tib. mos-par-byed-pa, dbari-du-byas -nas)”라는 동사는 앞서도 주목되었거니와 이 動詞가 단독으로 역시 와 어울리어 使用되는 經說도 있다.

 

물론 마음은 먼저 志向하고 그다음에 머문다. 란 반드시 짝을 이루어 存在한다. 그리고 그 짝은 반대되는 것일 확률이 크다. 그러므로 반대되는 것은 同時存在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므로 志向한다는 동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만약 하나뿐이라면 선택할 필요가 없이 그냥 머무르면 되는 것이다.

 

또 마음이란 홀로 존재할 수가 없고 반드시 라는 토대와 함께 머무는데 물론 어느 에나 머물 수 있지만 머물기 전에 먼저 반드시 志向하는 즉 일종의 선택하는 행동을 한 후에 그 를 토대로 머문다.

그러므로 수보리의 질문에 어떻게 서내어야 하며 어떻게 잡아내어야 하며라는 질문 속에는 어느 를 선택하여야하며 어떻게 확정하여야 하며 라는 질문이 포함된 것이다.

 

"kaluanadhimuttika kalyanadhimuttikehi sadhirn sarnsandanti samenti ···akalyanadhimuttika akalyanadhimuttikehi sadhirn sarnsandanti samenti."

(“한 것을 志向하는 한 것을 志向하는 와 어울리고 不善한 것을 志向하는 不善한 것을 志向하는 와 어울린다.”)[類類相從과 같음]

 

여기서는 이라는 술어가 나타나지 않지만 志向이라는 술어가 을 대신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經說漢譯文

衆生常與界俱 與界和合 云何衆生常與界俱 謂衆生 行不善心時 與不善界俱 善心時 與善界俱로 되어 있어 志向(adhimukti, Tib, mos-pa, bdod-pa)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原文에는 이라는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고 단지 志向한다는 말만 사용하였는데도 漢譯에서는 이를 로서 정확히 表現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당시의 발전된 불교문화와 수준 높은 번역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adhimukti(志向하다)가 법화경 信解品에 가면 信解라는 말로 번역되어 마치 믿고 이해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처럼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되어 혼란을 초래 한다. 信解는 믿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adhimukti(志向하다) 이므로 마음과 를 연상해야 정확한 뜻이 전달된다.

 

이 외에도 가 연결되는 經說들이 더 있거니와 은 분명히 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經論으로부터 眞如 門뿐만 아니라 生滅 流轉門에도 능히 志向함을 볼 수 있다.

 

行不善心時 與不善界俱 善心時 與善界俱.” · 不淨와 함께 하므로 이다.(citarn subhasubair-dhatubhir- iti cittarn) 등의 진술로부터 善界 또는 淨界뿐만 아니라 동등이 不善 界 또는 不淨 界에도 志向하는 것임을 대할 수 있어 眞如 門生滅 門自由自在선택 志向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음이라는 것은 그 정체를 포착하려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 기능을 중심으로 포착하여야 한다. 기능이란 선택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志向하는 것이고 志向하는 것이 마음이지 마음이 따로 있어 志向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마음은 志向하는 놈이고 그 志向되는 곳은 반드시 짝을 이루어 存在한다. 그러나 서로 반대되는 짝일 확률이 높다. 반대되는 짝이란 共存하지 못한다는 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無爲이면서 有爲일 수가 없다. 그 어느 쪽이든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어떻게 잡아내어야 합니까? 는 마음은 어느는 눌러버리고 어느는 끄집어내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마음은 無爲界를 버리고 有爲界를 선택함으로 問題가 생기고 자꾸 선택하다보면 버릇이 생겨서 有爲界를 선택하여 苦痛을 당했으면서도 다시 有爲界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修行이라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그리고 增支尼柯耶 禪經은 다음의 經說을 전한다. “第一禪具足하여 지낸다. 그곳에 있는 · · · · · 無常· · 無我로 본다. 들에서 을 돌린다. 을 돌리어 不死(amata-dhatu)을 기울인다(그것과 하나 되고 그것을 선택하기 위하여 애쓴다. 의 뜻).

 

實相界가 전재될 때는 色 受 想 行 識라는 말을 쓸 수가 있다. 涅槃이라는 말이 별도로 떨어져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無餘涅槃界라는 말이 그런 말이다. 無餘涅槃 아닌 놈과 구조적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는 말인 것이다.

과 결합한 것은 이라하고 와 결합한 것은 라하고 와 결합한 것을 이라한다. 그러므로 蘊 處 界心 意 識이라고 하는 말이 성립한다.

 

經說에서 보듯이 내지 志向하기도 하고 또한 不死志向하기도 한다. 여기서 등과 不死 界는 상호 반대되는 世界이다. 그것은 善界不善界가 서로 반대되는 世界인 것과 같다.

 

대개 라는 술어는 구조적 특징으로 인하여 無漏實相으로 理解되듯이 生滅流轉門에 속하는 들과는 本質的으로 결합할 수 없다. 그러나 단 眞如門에 속하는 들과 짝을 이룰 때에는 流轉門들에도 가 붙는 것으로 보인다.

不善. 不淨. 有漏 또는 有爲등에도 의 술어가 결합한 것은 · · 無漏 또는 無爲와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사실 生滅門에 속하는 · · · · 등에 術語結合經說이 있어 우리는 당황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도 바로 앞서 본 經說에서 등의 (流轉門)不死(眞如門)와 짝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므로 그런 關係 아래에서 나온 표현임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상의 經說들은 음미해 볼 때 十八界에 전적으로 배속시키기 보다는 十八界와 그 반대의 짝인 十二處· 六識 사이의 分岐點에 두는 것이 타당함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앞의 圖式으로 치환하고 의 위치까지 부가하여 그려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意界 - 識界(十八界) …… 眞如 實相門

|

|(十二處) (六識) …… 生滅 流轉門

 

그러므로 프라그라흐(pragrah)는 어떻게 惡心에서 나와 善心을 잡아낼까요. 또는 어떻게 惡心을 누르고 善心을 일으킬까요. 또는 어떻게 惡心을 항복받고 善心을 잡아낼까요. 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항복기심속에는 필히 짝을 이루어 작용하는 것을 연상해야 한다.

 

따라서 佛敎

먼저 惡心을 항복받고 善心을 잡아내는 단계: 因果論. 五蘊 四諦法說.

邪心을 항복받고 正心을 일으키는 단계: 십이연기. 구차제정(涅槃)

俗心을 항복받고 眞心을 일으키는 단계: 육바라밀(究竟涅槃)

迷惑心을 항복받고 覺知心을 일으키는 단계: 법화경(10바라밀)(佛陀)

의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惡心을 항복받고 善心을 일으키는 데는 行動에 의해서 해결됨.

邪心을 항복받고 正心을 일으키는 데는 三昧에 의해서 해결됨.

俗心을 항복받고 眞心을 일으키는 데는 바라밀에 의해서 해결됨.

迷惑心을 항복받고 覺知心을 일으키는 데는 무엇일까? 바라밀. 方便바라밀. 바라밀. 바라밀 까지를 행하여야 함.

 

그러므로 프라그라흐(Pragrah)는 하나는 누르고 하나는 잡아내는 것으로 해석함이 맞는 것이다. 惡心은 누르고 善心은 잡아내고 邪心을 항복받고 正心을 잡아내고 俗心은 항복받고 眞心을 잡아내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善心이란 마음이 善界를 선택한 것을 말하며 惡心은 마음이 惡界를 선택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어떻게 惡心을 누르고 善心을 잡아내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金剛經에서의 질문은 어떻게 俗心을 누르고 眞心을 잡아내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왜냐하면 金剛經惡心邪心을 모두 다 누른 涅槃證得阿羅漢의 단계에서 공부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보리의 質問(세존이시여 양가의 아들딸로서 보살승으로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어떻게 서야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阿含涅槃證得한 단계에서 부처님에게 俗心을 항복받고 眞心을 일으키는 方法을 묻고 있는 수준 높은 질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