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금강경의 서두
산스크리트 본 金剛經
金剛經의 經 이름에 대하여
金剛經의 경 이름이 산스크리트어로는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로서 cchedika는 cched에서 온 말로서 to cut 또는 chepper라는 뜻으로서 “끊어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vajracchedika라는 뜻은 난도질하는 뜻으로서 ‘여러 번에 걸쳐 끊어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金剛이란 가장 强한 物質로서 무엇이든지 끊어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金剛經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래 vajra는 벼락을 뜻하는 단어로서 어떻게 벼락이 여러 번 끊어낸다는 의미에 부합하는가? 이것을 理解하기 위해서는 印度의 벼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印度는 平野가 넓은 지역으로서 우리나라와 같이 山脈으로 막힌 좁은 지역에서 일어나는 천둥번개 즉 벼락의 규모는 기단이 작아서 單發性이나 간헐적인 천둥번개일 수밖에 없지만 印度와 같은 넓은 平野地帶의 氣團은 大 氣團과 大 氣團의 만남에 의해서 일어나는 벼락이므로 連續性을 가진 그 규모가 아주 큰 벼락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번이 아닌 여러 번의 큰 벼락이 連續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상상해야하며 또 벼락 앞에는 그 무엇도 모두 부서지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이것은 인드라神이 가지고 다니는 武器가 금강저라는 武器인데 이 금강저로 벼락을 만들어 모든 사물을 부수듯이 般若의 智慧를 武器로 모든 煩惱를 부수고 또 부수어서 남김없이 除去한다는 뜻을 살려 Vajracchedika- Prajnaparamita-Sutra라고 이름붙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본래의 표현하고자 하는 근본 뜻은 반야바라밀다의 智慧(진리의 벼락)에 의해서 부서지지 않는 煩惱나 좋지 못한 資質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vajracchedika란 벼락으로 모든 煩惱를 착착 끊어내고 잘라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이름은 Tro-satika-Prajnaparamita로서 三百 誦 般若라는 이름을 가진 經典이었다.(십육 음절(四句 偈)로 이루어진 偈頌이 三百 개라는 뜻)
예를 든다면 8000頌 般若(소품반야경)와 25000頌 般若(대품반야경)와 10만頌 般若(대반야경)가 있다. 이처럼 초기에는 삼백 般若라고 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金剛經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으로 보아 後代에 만들어졌을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經典 내용에 이 法門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를 까요 라고 묻고 있으며 經典이라고 하지 않고 그저 法門이라고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묻는 대목이 나오며 부처님은 이를 반야바라밀다법문이라고 해라. 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 후 구마라집 스님이 번역할 때는 金剛 반야바라밀다라고 해라. 라고 번역하는데 비하여 현장스님이 번역할 때는 能斷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해라.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能斷이란 말은 cchedika를 번역한 말로서 모든 煩惱를 능히 끊어낼 수 있다는 意味로 지은 이름이다.
따라서 구마라집 스님 당시에는 cchedika라는 말이 없는 제목으로 말하자면 vajra parajnaparamita로 유통되다가 현장스님 때에는 그 앞에 cchedika라는 말이 들어간 제목으로 유통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金剛經의 이름이 한 가지 뿐으로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유래된 것 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제 그 이름이 어떠하든 이제 남는 것은 오직 하나 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이 남게 된다. 무엇을 반야바라밀다라고 하는가?
반야바라밀다란 결국 眞理라는 말이 될 것이다. 實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眞理 그 자체가 반야바라밀다 인 것이다. 여기서의 眞理란 宗敎學的인 眞理를 말하며 宗敎學的인 眞理란 人間의 窮極的인 質問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眞理인 것이다.
佛敎學을 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佛敎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問題意識(眞理)에 대한 渴求이며 “절실함”이 있어야 可能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般若心經의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에서 諸法(순야타)은 空相이니 즉 諸法은 빈 것을 나타내나니 라고 번역해야 하며 그래서 諸法은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라고 하는 것처럼 諸法은 이미 眞理를 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時題가 現在이므로 現在 막 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能力에 問題가 있다는 것이다. 人間은 源泉的으로 받아들이는 能力이 있다는 것이다.
그 源泉的인 能力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것의 存在여부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나니 源泉的인 能力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에 의해서 막혀 있으니 그 通路를 막고 있는 것을 어떻게 녹여 없앨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眞理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渴求하는 “절실함”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시었다. 진정 長壽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최소 20,000년은 살아야 長壽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이하는 다 命濁이라고. 그런데 기껏해야 100년도 못사는 이생에 무슨 그리 愛着이 있는 것인지. 무엇이 그리 바쁜지. 眞理에의 목마름이 더 급하고도 급한 것임을 왜 느끼지 못할까 ⋯
金剛經의 이름이 최초에는 300송 般若 이었는데 반야바라밀다경이 되었다가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 되었다가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으로 점차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인쇄된 것이 아니라 필사본이므로 時代에 따라서 地域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수 있고 그래서 金剛經이 동일한 한 가지 經典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이 金剛經은 조금 後代에 번역된 經典으로 보인다.
이제 산스크리트 본 金剛經의 한글 번역본으로 들어가 보자.
(한글) 金剛經14)
“모든 부처님과 菩薩들에게 절합니다.”15)
14) 구마라집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경명은 범본과 티베트 본에 입각할 경우 반드시 “단절하는” “쳐부수는”이라는 형용사를 반드시 지니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15) 금강경 티베트 본은 [북경 영인판. 제21권의 p.250-5-2]부터 실려 있다. 이 번역은 바로 티베트 본에 입각한 번역이며 에드워드 콘즈의 산스크리트 본에 의하면 “거룩한 반야바라밀다님에게 절합니다.”로 되어 있다.
에드워드 콘즈 譯本의 金剛經에서 경전의 初頭에 namo Bhagavatyai Arya-Prajnaparamitayai(모든 반야바라밀다님에게 절합니다)라고 하고 있다.
bhagavata라는 말은 世尊이라고 번역되는 말이지만 특수 人을 표현한 말이 아니라 우리말의 “어른”이나 접미사로 처리하면 “님” 정도로 표현될 수 있는 말이다.
arya-parajnaparamitayai라고 하여 arya는 모든 이라는 뜻이며 paurjna- paramitayai라는 말은 般若波羅蜜多를 의인화하여 女性名詞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般若바라밀다님” 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般若바라밀다를 의인화하였다함은 그래서 漢譯에서는 佛母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서 반야바라밀다를 거치지 않고는 부처를 이룰 수 없으니 바로 부처를 낳는 智慧라 하여 佛母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과 菩薩들에게 절합니다.” 라고 표현하였으며 이는 티벳트 經典의 내용을 참조한 것이다.
佛經에서는 初頭에 인사하는 經口가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般若心經에서는 namah sarvajnaya로서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께 절합니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sarvajnaya는 sarvajna는 一切智를 뜻하지만 ya가 붙으므로 서 一切智를 갖춘 분이란 뜻의 본래 女性名詞인 單語를 男性名詞로 처리하였으므로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이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prajnaparamitayai는 般若智를 가진 님 이라는 표현으로서 佛母를 뜻하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初期佛敎에서부터 이미 佛母라는 女性名詞를 쓰고 있으며 부처님은 男性名詞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一切智를 가진 분은 부처님을 의미하고 般若智를 가진 임은 佛母를 의미한다고 알면 된다.
그리고 法華經에 가면 부처님은 모든 衆生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공공연하게 사용함으로서 阿含과 般若와 法華가 한줄기 연장선상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金剛經에서는 般若바라밀다를 强調한 만큼 같은 强度로 菩薩을 强調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예를 들어
“世尊이시여 良家의 아들딸로서 菩薩乘으로 나아가 서 있는 者는 어떻게 서 내어야 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라고 하는 문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菩薩이 되려는 자나 菩薩인 자를 强調함으로서 그렇지 않은 자는 菩薩이 아니라고까지 하면서 菩薩을 强調하고 있다.
이 문장이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본 金剛經에는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이라고 표기되어 있지 菩薩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원래 原典에 發아뇩다라삼약삼보리心이라고 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구마라집 스님의 恣意的인 解釋으로 菩薩乘을 발아뇩다라삼약삼보리심 즉 아뇩다라삼약삼보리심을 낸 者라고 하였는지 確認할 수 없는 경우이다.
그러나 추정컨대 구마라집 스님의 恣意的인 해석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阿含에서는 菩薩이라는 用語가 잘 쓰이지 않지만 大乘으로 連結되는 線上에 있는 반야부 경전에서는 반야바라밀다를 강조하는 정도로 菩薩이라는 用語가 强調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기 때문이고 또 티베트 본에는 菩薩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阿羅漢으로는 끝이 아니며 더 나아가 菩薩이 되어야 한다는 强調로서 보아야 하며 이제부터 菩薩 乘을 强調하고 있다. 法華經의 化城喩처럼 이제 初期解脫즉 阿羅漢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갈 것을 强調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