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성철스님의 불교세계관

동산/혜산방 2017. 12. 15. 10:53

법문듣기

불교인은 늘 법문을 들어 마음속에 자라는 삼 독심을 잠재워야한다. 나는 그동안 인연이 없어 성철큰스님의 법문을 들을 기회가 없었으며 그분의 깨달음의 세계를 들여다볼 기회도 없었다. 그러다가 수미산에서 온 메일을 통해 서철스님의 법문을 접할 기회가 생겨서 그분의 깨달음의 세계를 문밖에서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들여다 본 결과 그 깊이가 매우 깊어 느낀바가 많기에 내 불로그에 실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싶어 여기에 정리해서 싣고자 한다. 그분은 열반하셨지만 법문은 세상에 남아 많은 중생을 불도로 구제하시기 바라는 마음이다.

 

혜산 합장

 

성철스님의 불교세계관

 

1.성철큰스님 법문--종교의 목표

1.성철큰스님 법문--종교의 목표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삼대 종교의 하나로 일컬어집니다. 이들 종교는 저마다 내세우는 교조가 다르므로 그 내용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조와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종교가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서울로 간다고 할 때에 북쪽에서 가든 남쪽에서 가든 바다에서 가든 육지에서 가든 비록 그 방법과 수단은 제각기 다르지만 서울에 간다고 하는 근본 목표는 다 같듯이,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어느 종교에서나 다 같습니다.

그러면 그 공통되는 종교의 목표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서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같이, 태어남과 죽음이 있어 고통과 번뇌가 가득 찬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오히려 괴로움만 더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는 이 고통의 현실을 벗어난 자유의 세계로서 영원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세계 곧 생멸의 차안(此岸)에서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한 저 세계, 곧 해탈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야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표인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의 근본 목표인 영원한 행복은 바로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욕망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은 이 유한한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 종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에 들어가도록 그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불교에서는 그 궁극의 목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여러 경전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특히 [기신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괴로움을 버리고

구경의 즐거움을 얻는다.

離一切苦

得究竟樂

 

이 말씀은 모든 괴로움을 다 버리고 구경의 즐거움, 곧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곧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멸세계를 떠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해탈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반의 종교가 갖는 목표와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유한'의 생명세계를 버리고, '절대''무한'의 자유세계에 들어가고자 노력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에 누가 서울에 간다고 한다면 왜 가는지 까닭부터 알고 가야지 무조건 서울만 가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행동일 터이요, 그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터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이고 무한한 자유세계로 가려고 한다면 왜 가려고 하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부터 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세상에는 천지만물이 있고, 인간은 그 모든 생물과 무생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라 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인간은 대체로 삶을 값어치 있게 만들기 위하여 저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더러 목표가 뚜렷하지 못함 사람도 있고 또 사람마다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도 하지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을 말론하고 뭇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현실적 삶의 모습이 얼마나 행복과 가까운지는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심지어 산다는 것조차도 짐스러울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괴로움의 바다이다.

三界火宅

四生苦海

 

라고 표현합니다. 삼계란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를 일컫는 말인데 이것을 불타는 집이라고 하고, 사생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일컫는 말인데 그 전체가 괴로움의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이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고생만 하다가 끝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살다가 때에 따라서는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것일 뿐, 인생을 전체로서 볼 때는 괴로움의 연속이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 그토록 괴로운 삶이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하여 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덜 고생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이 고생스러운 삶 가운데서 좀 더 행복하게 살 길을 찾아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고 유한하여서 모순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모순의 세계란 곧 투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고 하여도 곧 종말이 오고 맙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영원한 행복을 생각하게 되고, 그 영원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하는 데에서부터 인간의 종교가 성립된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안의 세계 곧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를 구상하여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노력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 취지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저 먼 피안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행복을 추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빌어먹는 거지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때가 되어 밥 한 끼 잘 얻어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지로서는 밥 한 끼 잘 얻어먹으면 그것으로 다른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만족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때와 장소와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른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대개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거지가 밥 한 끼 잘 얻어먹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2. 성철큰스님 법문--영원한 행복-록펠러

2. 성철큰스님 법문--영원한 행복-록펠러

 

영원한 행복-록펠러

록펠러(1839 - 1937)의 경우를 봅시다. 미국이 록펠러 1세는 당대에 자수성가하여 세계적인갑부가 되어 아흔 아홉 살까지 산 사람입니다.

그만하면 누가 보든지 참으로 행복하게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아 세계적인재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더러 나이 아흔 아홉 살이 되도록 장수하였으니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욕심이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록펠러는 만년에 이르러 위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암이란 지금의 발달된 현대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못 고치는 병인데 오십년 전인 그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갑부로서 온갖 부를 누렸고 또 아흔 아홉 살의 천수를 누렸으니 그만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싶은데 도, 그는 자기가 암에 걸려 곧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자 도저히 그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명을 일 년 더 연장시켜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온 세상에 광고를 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 광고비만도 이백만 불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이백만 불이면 엄청난 돈입니다. 아마 이백만 불이 아니라 이백억 불을 들인다 해도 목숨을 연장하는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을 겁니다.

록펠러가 낸 광고를 보고 의학 분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이 록펠러를 한 해라도 더 살려놓으면 자기가 세계적인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욕심에서 각양각색의 방법을 다 동원하고 제시하였습니다만, 결국 록펠러는 더 살지 못하고 아흔아홉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좀 더 살고 싶은 것,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닙니다. 저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개미나 벌레까지도 죽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좀 더 편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욕망은 생명을 가진 생명체의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본능적인 욕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고 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산다 해도,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이면 끝나고 맙니다. 이 유한한 생멸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사람의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성철큰스님 법문--영원한 행복-맹상군

3. 성철큰스님 법문--영원한 행복-맹상군

 

영원한 행복-맹상군

호화 코 부귀 코 야만 하련만은

백년이 못다 하여 무덤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 하리요.

 

맹상군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람인데, 왕자(王者)로서 정승을 지낸 이로, 천하의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녔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호화롭게 산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맹상군이라고 말할 만큼 참으로 세상의 행복을 누리며 산 사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상군도 백 년을 못 살고 일흔이 가까워서 죽고 말았습니다. 살았을 때의 그의 공명에 따라 장례를 후히 지내고 그 무덤도 산과 같이 거창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것이 덧없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 이제는 무덤 옆에 밭을 갈던 농부가 제 땅을 넓히려고 맹상군 무덤 위에다 밭을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것인지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온갖 영화를 다 누리며 호화롭게 살던 맹상군도 그러한데 하물며 특별히 두드러진 것 없이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큰 스님 말씀

 

 

4. 성철큰스님 법문--영원한 행복-진시황

4. 성철큰스님 법문--영원한 행복-진시황

 

영원한 행복-진시황

그 유명한 진시황(기원전 259 - 210)의 경우는 또 어떠한지 봅시다.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맹상군보다 후대의 사람으로 6국을 정벌하고 중국 천하를 통일하여 진나라 대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영웅 가운데 영웅입니다.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모든 것이 자기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좋은 물건, 좋은 음식, 좋은 옷, 미인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자기가 거처하는 궁궐을 지어 아방궁이라 불렀는데 집의 길이가 무려 칠 백리에 뻗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한양의 궁궐 둘레가 사십 리라고 하니 진시황의 궁궐 둘레는 천리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 됩니다. 뒷날 항우라는 장사가 나타나서 진나라를 패망시키고 아방궁을 불태우는데 석 달 동안이나 탔다고 합니다. 집이 다 타는 데에 석 달이나 걸렸으니 아방궁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이 그렇듯 천하를 자기 것으로 하여 호사스럽게 살면서도 딱 한 가지 자기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자기 목숨이지만 이것만큼은 자신의 권세로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기운은 자꾸 쇠약해져서 마침내는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에 영()을 내려 죽지 않는 불사약을 구해 오는 사람에게는 수만금의 상금을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얼마 뒤에 서 씨라는 사람이 나타나 진시황에게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여기서 동 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가면 바다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불사 초라고 하는 약초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 약초를 캐오는 데에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서 씨가 대답하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삼천 명과 그들을 싣고 갈 배만 준비해 주시면 가서 불사 초를 구해 오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곧 영을 내려, 서 씨의 요구대로 동남동녀 각 삼천 명과 그들이 먹을 식량과 의복 따위를 수십 척의 배에 실어 보내어 삼신산의 불사 초를 캐오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 씨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진시황이 호사가 넘치다 보니 사람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라의 팽조가 팔백년을 살았지만 끝내 죽고 말았는데 자기가 살면 얼마나 살 것인가 하고 생각한 그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진시황의 약점을 이용하여,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데리고 저 바다 가운데 좋은 섬에 가서 자기의 왕국을 하나 만들어 잘 살아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리하여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남쪽, 남해 금산 밑에 가면 바위에 '서 씨 각(徐氏刻)'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 씨가 중국을 출발해서 남해 앞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어찌하였던 서 씨는 그렇게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배에 싣고 제 갈 길로 가버렸고, 이를 알리가 없는 진시황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불사 초를 구해오기만 기다렸습니다. 결국 진시황은 자기가 서 씨에게 속은 것을 알고 원통해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제 아무리 진시황이라도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죽어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서, 죽고 난 뒤에 자기의 무덤을 생전의 아방궁처럼 꾸미도록 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여산에 터널을 뚫고 산 밑의 흙을 다 파내고 지하 궁궐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죽은 뒤에도 음식을 차려놓고, 궁녀 가운데서 아름답게 생긴 궁녀 삼천 명을 뽑아 언제든지 자기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자기의 무덤에 있는 방을 지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에 신하들은 그의 명령대로 궁녀 삼천 명을 뽑아 묘를 지키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봉해버렸습니다.

 

얼마 뒤에 유방과 항우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항우가 먼저 함양에 들어가 아방궁을 불태우고, 여산의 묘를 파헤쳐서 그 속에 갇혀 있는 삼천 명의 궁녀들을 살려주어 제 갈 길로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우도 그 삼천 명의 궁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궁녀는 놔 주기가 싫어서 자기가 차지했으니, 그 미인이 천하에 유명한 우미인입니다. 나중에 항우가 유방과 싸우다가 해하에서 대패하고 오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하늘을 덮어도

때가 이롭지 못하니 천리마도 앞을 달리지 않는구나.

천리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

 

항우가 당장 망해서 죽게 되었는데 천리마는 버려도 우미인은 버리기 싫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둘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마침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같이 허무할 뿐만 아니라 그 욕심으로 인해 자기와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진시황의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무덤을 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눈물 위에서 진시황은 일시적인 행복을 누렸을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삼천 궁녀를 그 속에 가둬 춤추게 하는 등 별별 짓을 다 했어도, 결국 영원한 행복은 성취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어떠한 한계도 없는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자 했으면서도 그 행복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이런 일들이 앞에서 본 록펠러나 맹상군이나 진시황에게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그런 처지에 놓이면 그와 같은 욕망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곧 죽게 된 사람도 죽음을 피하고 좀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 아무리 강한 권력이나 명예나 금력을 가졌다고 해도 실제로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나가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종교가 인간이 원하는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만 남습니다.

 

 

5. 성철큰스님 법문천당 설

5. 성철큰스님 법문천당 설

 

천당 설

역사에서 위인, 걸사로 꼽히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현실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이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하여 다른 세계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에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천당설입니다.

 

현실 세계는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어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하지 못하고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서는 제 아무리 뛰고 구르며 재주를 넘어 보았자 영원한 행복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현실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바깥 세계에 가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 가야만 우리가 찾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하고 모색하던 끝에 천당 곧 하늘나라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저 푸른 허공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천당이 있다. 그 천당에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다. 그는 전지전능하여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다. 그 하늘나라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일체 받지 않으므로 하늘나라에 한 번 들어가면 누구든지 영원토록 생명을 누려 영생한다.

그 곳에서는 괴로움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즐거움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든지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는 천당, ,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의 세계가 저 하늘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괴로움 많은 인간들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괴로운 현실을 떠나 저 높고 높은 하늘 위에 있는 천당이라는 좋은 세계를 발견하여 그곳에 가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선언하니,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는 것과 같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게 만든 사실입니다.

참으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누구든지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다 내버리고서라도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6. 성철큰스님 법문--절대적인 믿음

6. 성철큰스님 법문--절대적인 믿음

 

절대적인 믿음

과연 천당설이 사람들이 바라는 영원한 행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단조롭고 지혜가 크게 발달하기 전에는 훌륭한 사람이 나와서 천당 설을 이야기하면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차츰 인간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지혜가 늘고 또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면서, 그러한 일방적인 가르침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믿음을 잃게 되니 사람들은 자연히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천당이 어디에 있어. 무슨 하나님이 있다는 거야. 인간들이 현실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 위안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지."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정해 버리면 종교의 기반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절대세계의 영원한 행복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신학자들은 합리, 불합리를 논하지 말고 이것이 예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신학자가 성 어거스틴 입니다.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바로 절대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믿음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초등학생에게는 고등수학이 믿기 힘든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한 천당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자들의 그 뛰어난 영혼과 깊은 지혜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 다만 소견이 좁아서 그 존재를 의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소견으로 합리, 불합리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절대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며 그 생명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와서는 사회적 상황이 예전과 같지가 않게 되었습니다. 인지(人智)가 자꾸 발달되자 절대 세계에 대해서, 또 신의 존재 여부를 비롯한 신의 문제에 대해서 자꾸 회의적인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이리저리 펼쳐보아도 하나님이나 천당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회의적인 생각이 점점 크게 일자 그것이 마침내는 종교의 근본을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과학의 발달로 그 전에는 신비롭게만 여기던 자연현상이나 우주의 모습이 신의 신비로운 조화가 아닌,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인간이 갖게 된 당연한 변화입니다.

 

우주의 모습까지 밝혀낸 현대에 와서 맹목적으로 하나님이나 천당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통하지 않는, 설득력 없는 강요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냥 믿으라고만 강요하기에 앞서 무엇인가 객관적인 사실을 증명해야만 비로소 믿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종교가 그 생명을 유지하려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는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객관성이 없는 이론은 그야말로 아무 근거도 없는 공론이라 하여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7. 성철큰스님 법문 -- 세계 과학자 대회

7. 성철큰스님 법문 -- 세계 과학자 대회

 

세계 과학자 대회

최근의 동향을 보면, 과학계에서 내세우는 것이 모두 다 옳고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차츰차츰 생명의 정체를 비롯하여 자연의 법칙이며 우주의 모습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일찍이 세워놓은 가설들이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에 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런던에서 '세계 과학자 대회'가 열렸습니다. 19세기에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자, 세상은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그 때에 진화론을 앞장서서 소개하였던 사람이 헉슬리 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손자 되는 사람이 또한 영국의 과학계를 주도하는 유명한 과학자가 되어 이 회의를 주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명칭은 '세계 과학자 대회'이지만 다른 모든 분야에 대해서도 토의를 해보자는 의도가 있어서 종교 문제까지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 문제를 토의하는 데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신부, 목사, 심리학자들도 그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과학자 대회에서 토의된 종교 문제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우주과학 시대에는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허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종교가 앞으로 존속할 수 있는가? 불교와 같이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성직자와 신학자들을 앞에 두고 세계 과학자 대회는 이렇게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다는 중대 선언을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도 획기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서양에서의 기독교 신의 존재는 다만 종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으니, 이천여 년을 내려오면 그들을 지배해 온 전통이요, 사상이며,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일대 혁명이랄 수 있는 이 선언은 결국 믿음이라는 근본 문제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 때에 캐토릭이나 기독교의 대 신학자들이 많이 참석을 하였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불교와 같은 종교만이 존속할 것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를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정작 불교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과학자들이 이런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반가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록 불교가 신을 전제로 한 종교와는 달리 이 우주과학 시대에 존속할 수 있다고는 하였지만, 그것은 불교의 이론체계 역시 객관성을 가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공리공론에만 그치고 만다면 불교도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에 대한 문제, 종교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 현대의 과학자들이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들이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라 하여 그런 말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고 일축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직 과학이 규명하지 못한 신비의 세계가 많이 남아 있듯이 과학에도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 사실, 가장 차원 높은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에 대하여 과학자들이 성명서를 냈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따라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종교의 존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나 기독교의 종교인 및 신학자들은 과연 이 문제에 대해여, 오늘날, 어떻게 생각하며 대처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8.성철큰스님 법문--천주교의 교리문답

8.성철큰스님 법문--천주교의 교리문답

 

천주교의 교리문답

천주교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교리문답]이라는 책을 최근에 재편집 하였습니다. [교리문답]은 천주교의 모든 교리의 기초가 되는 입문서로서, 처음에 천주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하는 책입니다. 곧 이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익혀야만 신자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중요한 책이 재편집되어 나왔는데, 그 첫머리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오래고도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천지만물이 생겼고, 인류가 탄생하여 겨레와 나라를 이루었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나 당연하여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구약성경에 적힌 바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이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태초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이 하늘이 있으라 하니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라 하니 땅이 있고.............사람을 만드셨다."

 

이와 같이 천지 만물은 다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저절로 생기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 구약성서의 출발점이요 근본을 이루는 사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약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예수교는 형성되었고,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기반이 되어 온 그 근본 사상을 어느 날 갑자기 저들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그 대신 진화론의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로서는 실로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까닭에서 갑자기 그들이 절대시하고 가장 신성시해 온 성경과 상충되는 내용의 말로써 [교리문답]의 첫머리를 삼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거의 같은 까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혜가 향상됨에 따라 논리적으로 허술한 점이 많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설이나 인간 창조설이 현대인에게는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닌 허구를 갖고서, 더구나 우주 과학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 될 턱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강요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인들은 이 신화를 완전히 포기하고 논리적인 사실에 입각한, 일대 전환을 선언한 것입니다. 원죄설이라든가 창조설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논리적인 근거 아래 재해석하여 [교리문답]을 재편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96732일자 조선일보는 '현대의 옷을 입은 천주교'라는 제목으로 이를 보도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한국의 천주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3년에 걸쳐 논쟁을 거듭하여 내린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서의 창조론에서부터 태도를 전환해야 현대인에게 믿음과 신뢰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인만이 변화한 것은 아닙니다.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천주교보다 보수적이라는 기독교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9. 성철큰스님 법문--기독교 무신론

9. 성철큰스님 법문--기독교 무신론

 

기독교 무신론

다음의 경우를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신관의 변화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연세대학교의 신학대학이 주최가 되어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신부, 목사, 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기독교의 신관 연구'라는 제목으로 토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토의 된 내용이 1966111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되었는데, 그 기사 첫머리가 "오늘날 신은 새로운 도전과 시련 속에서 재창조 내지 재발견을 강요당하고 있다"로 시작하는, 당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장인 서 남동 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신은 죽지 않고 변모한다. - 거듭나지 않으면 매몰운명-'이라는 표제가 붙여져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기독교는 갱신이냐, 혁명이냐의 기로에 섰다...... 기독교 무신론의 급진적 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이천 년 동안의 기독교 초월신은 사라졌다. 신화적인 사고방식이나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떠나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실재라고 하는 현대의 존재론이 발전함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기독교 무신론의 신학자들은 성부가 죽고 성자로 나타났고, 다시 성자는 죽고 성령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이 새로운 양태(樣態)로서 나타났다. 역사적 예수가 또 형태 변화를 해서 만인의 얼굴과 손으로 분신 화신하는 성령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의 시대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시대가 된다. 현대는 우주시대다. 기독교는 과학 및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해 온 현대에 적응하기 위해 형태 변화를 해야 한다. 이 새 환경에서 기독교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역사적 기록보관소의 종교목록대장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오늘의 급진적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신약성경 약속이 카톨릭, 프로테스탄트에 다음 가는 제3의 기독교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한 번의 출애굽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에 따르면 그들의 하나님 곧 신은 절대자이며 전지전능한 분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은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관된다고 믿어 왔습니다. 이 믿음이 지금까지 기독교를 지탱해 온 기반입니다.

 

그러나 우주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신화적 신은 더 이상 절대자나 전지전능자로 용납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론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은 신은 결코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에 기독교가 옛날처럼 계속해서 신화적인 신만을 고집한다면 기독교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한갓 기록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신화적 신이 아닌 새로운 신을 재발견하거나 재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성령론 입니다. 성령론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죽어서 없고 예수도 죽어서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죽고 없지만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형태 변화를 해서 성령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분신화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 사람마다 다 성령이 있으니 이 성령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부르짖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에 대해서는 기독교 내에서도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여기서는 절대적인 하나님 곧 초월신이 아닌, 인간에 내재한 내재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하나님이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절대성이 들어 있음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불성이 있다 하는 것과 통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기독교 무신론을 주장하는 진보적, 급진적 신학자들에 대해 보수 교단의 목사들은 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만을 계속 주장한다면 기독교는 언젠가는 이 현실 사회에서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대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출애굽을 해야 한다고 서 남동 교수는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애급에서 압박받던 유대민족이 모세의 지도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으로 탈출하였듯이, 오늘의 기독교도 새롭게 해석된 신을 재발견하고 기독교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원룡 목사라고 하면 종교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권위 있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분이 어느 잡지에서 '과학 앞에 사라진 신()'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그 글에서 그는 "저 푸른 하늘을 아무리 쳐다보고 쳐다보아도 거기에는 천당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노인'이라고 표현하면서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을 보려고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눈을 닦고 보아도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여러

가지 면에서 검토해 본 결과 신이 저 허공에는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니 거기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또 죽은 송장에게 매달리듯 사라진 신에 연연해하지 말고 예수교의 나아갈 길을 달리 모색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말하기를, 미국에서 신부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조사해 보니 90퍼센트 이상이 신에 대해 회의를 느껴 많은 이가 성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들은 그 전에는 하나님이 천당에 계시는 줄 알고 자신 있게 '하나님은 천당에 계시니 믿으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신자들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원룡 목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았듯이 남을 위하여 사는 정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을 위하여 노력하고 살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천당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변화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에서는 더욱 심각하여 현대가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비슷한 문제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일이 또 있습니다. 타임지가 '신은 죽었는가' 하는 표제로 실은 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글은 '신은 없다' 하여 무신론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타임지는 이 글을 발표하기 위하여 3년 동안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곧 그동안 세계의 유명한 신학자들을 방문하여 많은 의견을 듣고 종합한 결과 신은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 기사는 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도 함께 실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신이 있고 없음은 인간의 차원을 떠난 문제인 만큼, 과학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공연히 무신론을 주장하지 말라. 우리들 인간은 무조건 신을 믿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찌되었든 그때에 타임지가 낸 그 특집기사의 지배적인 주장은 "하나님은 없다"는 내용이어서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각 신문에도 그 내용이 소개되었고, 기독교 내에서도 '기독교 무신론'이라는 부제를 붙여서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실을 떠난 절대 세계나 현실을 떠난 초월신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떠난 절대 세계라든지 현실을 떠난 초월 신을 주장하던 종교 사상은 점차로 그러한 논리를 버리고 교리를 다른 방향에서 새롭게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철학자인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여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기독교 사회에서는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신이 완전히 죽어서 없어졌다는 그의 선언은 퍽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본디부터 없던 신을 있는 것으로 잘못 믿어 오다가 뒤늦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뿐인데, 마치 신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듯 한 그런 말은 사실 우스운 이야기 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 전에는 살아 있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뒤늦게나마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그 전까지의 잘못된 믿음을 버리기만 하면 될 터인데 말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서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하였으며 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새삼 "신은 죽었다"는 선언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그러한 사실을 꿰뚫어볼 만큼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해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신을 그릴 때 사람 모양을 그린다고 합니다.

만약 개나 소에게 신을 그리라고 한다면 개나 소 모양을 그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깁니다. 결국 신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쓸데없는 환상을 일으켜서 관념 속에서 신을 만들어 놓고 이런 저런 식으로 해석해서 혼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제 처음부터 없는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인 줄 알면서 거짓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실지로 파멸과 자살로 이끄는 행동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든지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그 사상을 포기하고 다시 전환하여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 할 것입니다.

 

 

10. 성철큰스님 법문 -- 불교의 극락 설

10. 성철큰스님 법문 -- 불교의 극락 설

 

불교의 극락 설

그렇다면 불교도 역시 종교인데,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행복을 얻는 방법에는 불합리한 점이 없는지, 그래서 요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납득이 안 되는 믿음을 강요하는 점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리 우주과학 시대라고 하더라도, 또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가더라도 불교 자체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구애받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다른 종교는 그릇되었다 말하면서 자신의 종교인 불교만 옳다 한다고 반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불교가 펼쳐 온 사상이 허위에 차고 거짓투성이라면, 기독교가 절대 신을 부정하였듯이, 불교도 마땅히 팔만대장경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터를 닦아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라고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불교의 경전에도 거짓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라 하여 무지한 중생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방편으로 '극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 쪽으로 서쪽으로 자꾸 가면 그곳에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을 서방정토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하늘위에 있다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서쪽으로 가면 있다는 극락세계는 진짜인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극락세계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망원경을 이용하여 찾아보든지 어떻게 하든지 먼저 살펴보고 나서 옳지 않으면 믿지 않아야 할 터이고, 만일에 옳다면 누구든지 그곳으로 가서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극락세계를 자세하게 설명한 불교 경전으로 '정토삼부경' 중에 무량수경과 관 무량수경이 있으며 또 무량수의궤경이라는 것이 있읍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저 서방세계를 지나 끝없이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 삼계화택(三界火宅), 사생고해(四生苦海)의 사바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부지런히 염불을 하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극락세계의 장엄은 참으로 대단하여 천당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런 극락세계에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만 지극하게 부르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5역죄를 지은 사람, , 부모를 죽이거나 대성인을 죽인 사람 또는 교단 화합을 파괴하거나 바른 불법을 비방한 사람 등은 아무리 아미타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 무량수경'에서는, 그와 달리, 극락세계를 아홉 등급으로 나누고서 5역죄를 지은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한 사람이라도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가장 낮은 등급인 하품하생에 간다고 말합니다.

'무량수의궤 경'에서는 5역죄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한 죄를 지었다 해도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상품상생의 가장 좋은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서방정토라고 하는 극락세계에 가는 자격에 대해서 제각기 말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5역죄를 지은 사람은 극락세계에 못 간다고 해놓았는데, '관 무량수경'에서는 하품하생에는 갈 수 있다고 하다 '무량수의궤 경'에서는 상품상생에까지도 갈 수 있다고 해놓았으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 무량수경'의 끝부분을 보면 "서쪽으로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부처님은 법계장신(法界藏身)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계란 시방의 법계이니, 곧 부처님 몸이 시방에 가득차서 그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극락세계가 서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방에도 있고, 북방에도 있고, 남방에도 있고, 땅 밑이나 하늘 위나 없는 곳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 시방세계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고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마음이 부처가 되는 것(是心是佛, 是心作佛)'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이 아미타불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부처님인 것이지 마음을 내놓고 달리 부처를 구하려는 것은 마치 불 속에서 얼음을 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부처인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육단심(肉團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방에 가득 차 있어 유정, 무정이 똑같이 갖고 있는 그 마음을 말합니다. 곧 유정도 부처님 마음을 가지고 있고 무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것이 곧 법계장신이며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어서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고 피하려야 피할 수 없다고 밝히지 않고, 왜 서방에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 갈 수 있느니 없느니 하고 빙빙 돌려서 말씀했는가?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방편설입니다.

사람들이 지혜가 발달하기 전에는 그 지혜의 정도에 맞추어서, 그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또 그 사람의 지혜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부득이 사실과 꼭 같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서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 가면서 지혜를 자꾸자꾸 향상시켜 가면 마침내 참말을 이해할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지금까지 한 말은 참말을 알게 허기 위한 거짓말임을 일깨워 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방편 설 또는 방편가설이라고 합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이대로가 극락이라고 하면, 그는 미친 소리라고 비웃거나 아니면 화를 낼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고생하며 살고 있는데 여기가 극락이라니 마치 사람을 놀리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것은 거짓된 말이라고 부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저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으니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외고 수행하면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열심히 아미타불을 부르며 수행에 열중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지식이 늘고 지혜가 향상되면서 부처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힘이 차츰차츰 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얼마 뒤에 부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때에 이르면, 앞에서 일러 준 말은 방편일 따름이요, 사실은 시방세계 이대로가 극락이며 모든 중생이 부처이니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비로소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11. 성철큰스님 법문 -- 방편설과 일승법

11. 성철큰스님 법문 -- 방편설과 일승법

 

방편설과 일승법

그 방편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이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법한 말씀의 총 결산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가장 골자가 되는 것이 바로 '방편 품'입니다. 거기에 보면 "시방세계 국토 중에 오직 일승법만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승법이란 이 세상에 부처님 아닌 것이 없고,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교화하고 구원하기 위해 2, 3승의 방편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방편 설은 사실 그대로의 참말은 아니지만 수단으로서 인정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일승을 말씀하시기 위해 2승과 3승을 설하신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육조스님도 극락세계에 대해 "부처님이 극락세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일에 사실이라면, 동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서방의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서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아직 지혜가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하였기 때문에 방편 설을 쓰셨지만, 나는 지혜가 발달한 사람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방편을 쓰지 않는다."고도 하였습니다.

결국 육조 스님의 뜻은 서방 극락세계는 실재하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 그대로가 극락세계이며, 자성 그대로가 아미타불이라는 뜻입니다.

극락세계도 내 마음 속에 있고 아미타불도 내 마음 속에 있으니, 서방이든 동방이든 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속에 있는 극락세계를, 마음속에 있는 아미타불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행복을 달성할 수가 없기 때문에 종교는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는 방편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방편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옆으로 가는 극락은 참말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요즘에는 아이들도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면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는 교리를 바꾼다느니 새 시대에 맞게 그 뜻을 재해석한다하지만, 불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써 왔던 방편가설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방편가설을 버리면 남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일승인데 그곳으로 바로 들어가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이대로가 절대이고 극락세계이고 천당이며, 중생 모두가 하나님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음을 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 불교의 기본 태도는 일승법인데, 현실이대로가 절대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증명 되면 우리는 불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바로 부처님 법 위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2. 성철큰스님 법문 -- 불생불멸

12. 성철큰스님 법문 -- 불생불멸

 

불생불멸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일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리라.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으로 불교의 골수를 드러내 보이는 말입니다. 결국 팔만대장경 안에 부처님 말씀이 그렇듯 많고 많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불생불멸을 깨치셨으니, 불생불멸은 불교의 근본 원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의 만물은 모두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원리를 따릅니다. ,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세상에 한번 태어난 것은 결국 없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불생불멸이라 하여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 아닙니까? 거짓이 아니라면,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그 까닭을 분명히 제시해야 되지 않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생각입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도를 확철히 깨쳐야만 합니다.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일체 만법, , 모든 것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상주불멸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의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라고 하는데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여기에서 말하는 '이 법'불생불멸을 말합니다. , 삼라, 만상이 모두가 불생불멸의 자리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늘 머물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나고 없어지지만, 그것은 다만 겉보기일 뿐이고, 실제의 내용에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이니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을 또 화엄경에서는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 한 없이 한없이 연기할 뿐 그 본디의 모습은 모두가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체가 다 융화하여 온 우주를 아무리 천만번 변화를 거듭하더라도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며 아울러 불교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불교에 대해서 영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산중에 들어와 눈감고 앉아서 참선을 하거나 도를 닦아야 하는데, 그것이 또한 문제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도를 깨치기 전에는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요즘은 과학만능시대이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의 도리를 과학적으로 근사하게 풀이해 보일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이 과학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고로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하여서 요새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해 버린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입니다.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는데, 이즈음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사실 그 하나밖에 없습니다. 곧 질량이라는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입니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어떻게 서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상상도 못하던 일입니다.

50여 년 전 아인슈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우리가 다 아는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켜보면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원자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거꾸로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 전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완전하게 분리하여 별개의 것으로 보았지만, 과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질량이 에너지로 완전히 전환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나오고 수소탄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앤더슨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 세그레라는, 무쏘리니에게 쫓겨서 미국에 간 유명한 이탈리아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이것은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은 없어진 것입니까?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얼음은 없어진 것입니까?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얼음인 것입니다. 에너지와 질량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상대성이론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에너지가 완전히 질량으로 전환하고 질량이 완전히 에너지로 전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쌍생쌍멸 이라고 합니다. 모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환 할 때 언제든지 쌍()으로 변화하는 현상을 쌍생성이라고 합니다. 앤더슨 실험에서도 광()에너지를 물질로 전환시킬 때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양전자와 음전자를 합하니까 완전히 쌍으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할 때는 쌍생(雙生)이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할 때는 쌍멸(雙滅)이 됩니다. 이것은 중도의 공식, , 쌍으로 없어지고 쌍으로 생기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 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할 때 음전자와 양전자가 쌍으로 나타나니까 쌍생이 되고, 이것은 곧 쌍조에 해당합니다. 또 유형의 질량 곧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없어지면서 무형의 에너지로 전환하니까 쌍멸이 되고, 이것이 곧 쌍차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쌍으로 없어지면서 한 쪽이 생기고, 또 쌍으로 생기면서 한 쪽이 없어집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쌍차쌍조의 공식이 에너지와 질량이 전환하는 이론으로 완전히 증명이 됩니다.

 

동양사상을 잘 아는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 그대로라고 아주 공공연히 말합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나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에, 이런 표현을 그대로 나타내지는 못해도, 그 내용은 꼭 같은 말로서 에너지와 질량 관계가 보존된다고 합니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 법계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이며 상주법계입니다. 그래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연계 곧 우주법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여도 증감이 없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주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불멸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불생불멸은 거짓말로 남아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를 깨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다 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 전체가 그대로 불생불멸임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3,000여 년 동안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인 동시에 서로 전환하면서 증감이 없음을 마침내 알아냄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기에 이른 것일 따름입니다.

 

지금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 원리인 불생불멸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것입니다. 이것만을 보아도 이 볼교 원리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과학이 불교 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고 허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 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 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13. 성철큰스님 법문--색즉공(色卽空)

13. 성철큰스님 법문--색즉공(色卽空)

 

색즉공(色卽空)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니라.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란 유형을 말하고 공이란 무형을 말합니다.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다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로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입니다. 그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의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14. 성철큰스님 법문--4차원의 세계

14. 성철큰스님 법문--4차원의 세계

 

4차원의 세계

또 요즘 흔히 4차원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4차원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의 공간세계는 3차원의 세계인데 여기에 시간의 차원을 더하면 4차원이 됩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 볼 때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존재하지만,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4차원의 세계에서는, 보기를 들어 금고 속의 돈을 금고 문을 열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으며, 또한 문을 닫아 둔 채로 문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해인사에 앉아서 천리만리 밖에까지도 갈 수 있는 자유자재한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4차원의 세계를 신통 자재한 홍길동의 이름을 따서 '홍길동의 세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4차원의 세계가 처음 제창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이지만 이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완전한 체계를 세워 공식화한 사람은 소련의 민코프스키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보기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라고 할 때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은 각각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이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 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 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5. 성철큰스님 법문--초심리학& 무한한 정신력

15. 성철큰스님 법문--초심리학& 무한한 정신력

 

초심리학& 무한한 정신력

 

초심리학

시간과 공간이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이른바 4차원의 세계인데, 이것은 결코 가공의 상상 속의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을 자꾸 개발하여 가면 실제로 그런 세계에 들어갈 수 있고 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이 방면에 대해 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심리학에서는 초심리학(Parapsychology)이라는 분야에서 이것을 연구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한 많은 실증적 연구 보고도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타임지에서 이에 관한 특집기사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는 100여 개 대학에서 초심리학에 대한 정식 강좌를 열어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 소련은 유물론의 나라에도 불구하고 16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여 4차원의 과학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군사 방면에서 잠수함이 바다 깊은 곳에 잠수했을 때 정신력으로 그 잠수함에 어떤 지시를 보내면 70%는 성공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정신력으로 무슨 지시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70%의 성공률 이라면 대단한 것입니다.

 

한편, 소련 땅의 서쪽 끄트머리인 모스크바와 동쪽 끄트머리인 불라디보스독 사이에서 정신력에 의한 통신을 시도하였더니 서로 통하였다는 실험 결과도 나왔습니다. 더욱이 정신력에 의한 통신이 오히려 무선통신보다 훨씬 더 힘이 강하고 전달이 빠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실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능력이 있어서 이를 자꾸 개발하면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한한 정신력

무한한 정신력을 이용한 초능력의 보기는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영국의 캐논 경의 캐논보고서에서 그런 보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디 정신과 의사인데 영국 국가에서 주는 최고의 명예인 나이트(Knight) 작위까지 받은 대학자로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미국의 다섯 나라 학술원의 지도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잠재력 The Power Withine'이란 제목의 캐논보고서에서 소개한 몇 가지 시험에 대하여 여기에서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이런 실험을,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서, 때로는 커다란 홀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거나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은 눈을 감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눈알이 빠져버린 사람은 더더구나 볼 수가 없습니다. 눈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볼 수 있으며, 눈 감고 무엇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 지닌 본디의 능력, 본디의 시력은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눈을 떠야만 볼 수 있고 감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은 의식 세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면 눈을 뜨거나 감거나, 눈이 있거나 없거나에 관계가 없습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두 눈이 빠져버린 사람도 무엇이든 다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본래의 시력이라고 캐논 경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험을 해 보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두 눈에 철판을 대고 수건으로 겹겹이 둘러 싸맵니다. 그런데도 무엇이든 다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모두 알아보는 것입니다. 철판을 눈에 대고 보는데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천안통이라고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 보면 천안이 가장 뛰어난 아나율 존자라는 스님이 계시는데 그는 수행할 때에 너무 졸음이 많이 와서 그것을 없애려고 전혀 잠을 안자고 공부를 계속하다가 결국 두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눈 곧 육안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에 마음의 눈인 심안이 열려 삼천대천세계, 백억세계를 손바닥의 구슬처럼 환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아나율 존자의 천안에 견주면 요즈음의 200인치 망원경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서 아나율 존자는 육신의 눈은 없지만 천안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캐논 경은 눈이 없거나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되어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결코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고 오직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면 눈이 있고 없는 것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힘을 사용하면 남의 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타심통이라고 합니다.

 

캐논 경은 이것에 대해서도 실험 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말이나 글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속으로 생각으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캐논 경이 말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마음속에서 자기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으면 캐논 경은 그 사람의 직업을 말하고 또 나아가서 현재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일까지도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어김없이 다 맞는다고 합니다.

결국 이로 미루어 볼 때 남의 마음뿐만 아니라 미래도 알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능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달을 향하여 쏜 로켓이나 우주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고 개척한 결과 우주선을 개발하여 이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달나라에까지 간 것이지, 미국 사람만 타고 오라고, 소련 사람만 타고 오라고 하나님이 보내준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있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더 큰 능력을 개발하게 될지 우리 인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또 다른 실험으로 육체적으로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사체를 넣는 곽처럼 생긴 나무상자를 준비하고 상자의 앞, , , 아래의 사방으로 구멍을 뚫어 놓고 이 상자 속에 피 실험자가 누우면 뚜껑을 덮고 뚫어 놓은 구멍 속으로 칼을 찌릅니다. 그 상자는 보통 사람의 크기보다 약간 작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그 속에 들어가 있는 한, 결코 칼날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 오장육부가 모두 칼날에 구멍이 생길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심지어 심장에 꽂힌 칼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 칼이 오르락내리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칼을 빼고 상자를 열어보면 그 안의 사람에게는 아무 상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칼 상자보다 더 놀랍고 사람의 초능력의 깊이를 깨우쳐줄 수 있는 실험으로 생매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실험에서는 피 실험자가 죽은 듯이 삼매에 들어갑니다. 의사가 검진하여 맥박도 끊어지고 호흡도 끊어지고 뇌파 검사에서 뇌 활동도 완전히 정지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을 단단히 밀랍 포장하여 땅을 파서 묻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아둘 것은 설사 죽지 않았다고 하여도 사람은 서너 시간만 땅에 묻어 두면 누구나 죽게 마련입니다. 한 시간이 아니라 불과 수분이 지나도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 시체를 묻어 놓고는 며칠, 몇 달 또는 일 년 동안이나 계속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 년이 지난 뒤에 미리 정해놓은 시간에 파 보면 일 년 전에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받은 그 사람이 옷을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이 생매장 실험을 사람이 많이 모인 홀에서 실시하였습니다. 무대 위에 모래를 수십 짐을 져다놓고, 그 속에 사람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기다렸습니다. 과연 미리 지정한 대로 15분이 지나자 모래더미에 묻어둔 사람이 툴툴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귀신이 탄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험들을 통하여 볼 때 인간의 근본정신은 육체를 떠나 활동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호흡이 끊어지고 맥박도 뇌 활동도 완전히 정지되었는데 어떻게 시간을 알고 깨어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근본적인 정신 작용은 뇌신경 세포의 활동에 관계없이 독립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언제나 깨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본디 무의식 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죽지 않습니다. 설사 몸뚱이가 죽어 화장을 한다 하더라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없어져도 영혼은 독립해 있어서 윤회를 하고 환생을 하는 것입니다.

 

 

16. 성철큰스님 법문--정신감응& 분신

16. 성철큰스님 법문 정신감응& 분신

 

정신감응& 분신

정신감응

인간의 정신 능력은 한 개인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브로체프스키라는 소련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정신과 정신 간에 서로 통할 수도 있다는 데에 착상하여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피 실험자가 있는 곳에서 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람이 피 실험자가 자기 집으로 오도록 허기 위하여 그것만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브로체프스키의 실험에서 피 실험자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제 집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가 뭔가 이상한 듯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피아노 치던 것을 멈추고 밖으로 몇 법 들락날락하더니 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감시하던 사람들이 따라가 보니 과연 그 여자는 자기를 오도록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막상 와서 보니 그 사람은 그 여자를 오게 하는 생각을 얼마나 간절히 했던지 그만 정신을 잃고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맑은 날에 우산을 들고 나오라고 상대방에게 정신반응을 보내면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우산을 갖고 나오는 실험까지도 하였습니다. 결국 이 실험으로 한쪽에서 어떤 생각을 강하고 간절하게 하면 그 정신의 반응이 상대방에게까지 도달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을 텔레파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정신감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신감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일본에서 의사들이 실험한 것입니다.

 

흰쥐 스무 마리에게 장질부사균을 치사량으로 주사해 놓고, 그 가운데 열 마리는 약으로 치료하고 나머지 열 마리는 정신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약으로 치료한 흰쥐는 모두 죽었는데 정신요법으로 치료한 열 마리 중에는 세 마리가 죽고 일곱 마리가 살았다고 합니다. 또 죽은 세 마리를 해부를 해보니 회복기에 들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사람의 정신 작용이 동물에게도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동물에게 최면술을 거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의 정신 작용이 동물에게는 작용하지 않는다면 최면술이 통할리가 없습니다.

악어나 사자, 호랑이 따위의 동물에게 최면술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은 서커스나 묘기시범에서 쉽사리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정신적으로 동물에게 반응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면 옛날 우리나라의 도인들이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것이 전혀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정신반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릴 때 많이 해보던 실험이기도 합니다. 실 끝에 돌이나 쇳덩어리를 매달고서 그것에 한참 동안 집중시키고 나서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움직이라 하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앞으로, 뒤로, 원형으로 모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이것을 관념운동이라고 합니다. 또 유리겔라라고 하는 사람이 정신반응으로 숟가락을 휘게 하고 시계를 정지시키는 실험을 하는 것이 보도된 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정신반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한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분신

이 밖에도 가장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분신(分身)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백, 수천의 장소에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합니다. 지구에 계시면서 저 세계에도 가고 이 세계에도 옵니다. 또 신라시대의 원효스님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6처 열반을 하였습니다. 곧 여섯 곳에서 똑같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분신'이라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해인사에 있는 사람이 분신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진주에도 한 사람, 부산에도 한 사람, 서울에도 한 사람씩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한 날, 한 시에 열 명도 되었다가 백 명도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실험에 의해 그런 분신에 성공한 예 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요가 하는 요기들이 분신을 해 보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17. 성철큰스님 법문--육근호용(六根互用)

17. 성철큰스님 법문--육근호용(六根互用)

 

육근호용(六根互用)

불교에 육근호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을 서로 바꾸어가며 쓴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귀는 듣는 것인데 귀로 보고 또 눈은 보는 것인데 눈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육근호용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어떤 신문에는 중국 사천에 사는 열한 살 된 어린아이가 모든 것을 귀로 본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눈을 아무리 가려놓아도 무엇이든지 다 보며, 또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아이는 귀로써 모든 것을 보는데, 이것은 밝고 어두운 것도 사실은 없음을 말해 줍니다. 눈으로 보든 귀로 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눈으로 본다고 해도 되고, 귀로 본다고 해도 됩니다. 오장육부가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그 아픈 데가 어디고 빛깔이 어떤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위의 한두 사람만이 본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마다 보도된 것입니다.

 

귀로써 보고 눈으로 듣는다는 이 말은 본래 불교에 있는 말입니다. 오조 법연 선사도 이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지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번뇌 망상으로 육근이 서로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경계에 도달할 수 없을 뿐이지, 실제로 부사의(不思義)한 해탈경계를 성취하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그런 경계가 나타나 육근이 서로서로 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육근호용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근호용이 되어 모든 것에 무애 자재한 경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18. 성철큰스님 법문--삼천대천세계

18. 성철큰스님 법문--삼천대천세계

 

삼천대천세계

이제는 이 불생불멸의 공간적 범위는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봅시다. 몇 해 전에 어느 대학의 총장으로 있는 분이 와서 묻기를, "불교를 여러 해 동안 믿어왔는데 부처님이 이 우주를 어느 정도 크게 보셨는지 좀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그것도 모르느냐"고 웃으면서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는 일월(日月)이 비치는 우주를 한 세계라고 합니다. 흔히 한 일월이 비치는 우주가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가 천()이 모여서 소천세계가 되고, 그 소천세계가 모여서 중천세계가 되고, 중천세계가 다시 천이 모여서 대천세계가 되며, 대천세계를 세 번 곱한 것이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일종의 표현방식일 뿐이고 실지 내용은 백억세계 혹은 백억 일월인 것입니다. 또 이 백억세계, 백억 일월을 한 불찰(佛刹)이라고 하고 이런 불찰이 미진수로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크기입니다. 이런 크기는 혜안이 열리지 않고는 누구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요즘 천문학에서 이 사실이 실증되고 있습니다. 1955년 미국에서 파르마 산에 200인치나 되는 굉장히 큰 망원경을 처음으로 완성하여 설치하였습니다. 200인치라고 하며 직경이 5미터나 됩니다. 그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면 10억 광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망원경을 통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주라는 것 밖에도 무한한 우주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단순히 별 하나뿐인 단일체가 아니라 수천, 수만 개의 별이 모인 집단 우주가 무한히 많은 숫자로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사진에도 나타나고 신문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무한한 우주 집단이 대략 40억 개 내지 50억 개쯤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백억세계라는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과학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직 과학 기술이 부족해서 10억 광년밖에 볼 수 없지만 더 발달하면 100억 광년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무한한 우주 집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부처님께서 가장 작게 보신 것으로는 '일적 수 구억 충(一適水九億蟲)'이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물방울 한 개에 9억 개나 되는 많은 벌레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신의 현미경으로도 아직 물방울 한 개에서 벌레를 9억 개까지는 볼 수 없지만, 그토록 조그만 세계에 그렇게 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는 것도 이즈음에 와서 점차 증명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혜안을 가지고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우주 공간을 보셨습니다. 흔히 말하는 삼주법계, 진여법계라고 하는 것도 중생들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불생불멸을 내용으로 하는 그 법계라는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한에서 무한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무한한 세계입니다.

 

 

19. 성철큰스님 법문--물심불이(物心不二)의 세계

19. 성철큰스님 법문 -- 물심불이(物心不二)의 세계

 

물심불이(物心不二)의 세계

그러면 너르디너르고 변함이 없는 광대무변한 우주가 있으며 그 내용은 불생불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물질로 된 것 인지 정신으로 된 것인지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불교에서 '알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여 불교가 유심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을 떠난, 곧 양변-정신과 물질-을 떠나서 양변이 융합한 중도적인 유심을 말합니다. 한 쪽으로 치우친 유물론이나 유심론이 결코 아닙니다. '일체유심조'라고 하지만, 그것은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유심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은 변견(邊見)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는 변견으로는 설 수가 없습니다. 완전한 중도적 입장에서라야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보면 유심(唯心)도 아니고 유물(唯物)도 아닙니다. 유심도 유물도 아니어서 유심과 유물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동시에 유심과 유물이 통하는 세계입니다. 곧 물심불이인 것입니다.

 

유심도 아니고 유물도 아니면, 결국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서로서로 융합해서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심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야 하고, 유물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로 증명이 안 되면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육체나 또는 동물, 실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습니다. 이들은 아주 미세한 세포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학계에서 이들 세포를 연구한 결과, 동물의 세포나 식물의 세포가 똑같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또 근래에 와서 어느 세포나 각 세포 가운데에는 핵산이라는 것이 들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영문 약자로 흔히 'DNA'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핵산은 순전히 정신적인 역할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기억해서 서로서로 연락하고 명령을 전달하고 신경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핵산은 결코 신경계통의 기관은 아닙니다. 각 세포 가운데에는 세포핵이 있는데, 핵산은 그 세포핵 가운데에 존재하며 기억력과 활동력을 가진 정신 체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조금 더 연구를 깊이 한 생물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세포는 모두 정신 작용을 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 활동을 떠난 물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물학 연구도 물질과 정신이 실지로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나마 생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진 광물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광물이 동물, 식물처럼 성장하지도 않으니 아예 죽어 있는 무생물로 취급한다든지 운동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인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물질의 근본 질량으로 소립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늘 스핀 Spin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스핀 운동이란 모든 소립자가 일정하게 타원형을 그리며 활동하고 있는 성질을 말합니다.

 

어떤 소립자든지 늘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으므로 운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지, 이 세상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어떤 광물이든지 또는 무생물이라든지 그것들은 모두 활동을 하고 있으며 살아 있습니다. 어떤 물체든지 죽어 있거나 활동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물리학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어떤 입자든지 스핀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지 정신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이론물리학에서는 "소립자도 자유의사를 갖고 있다"고들 많이 주장합니다.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결국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식물을 이루고 있는 세포마다 그 속의 세포핵에 핵산이 있어서 정신활동을 하고 있듯이, 광물이나 무생물도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각 입자 안에서는 스핀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불생불멸을 말하면서 이렇게 현대물리학을 도입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가 아니라 시간을 백억 분의 일 초로 나누고 공간을 다시 백억 분의 일 밀리미터로 나누어서 극 미세한 상황까지 설정하여 이야기를 펼친 것은, 결국 동물이든 식물이든 광물이든 그 모든 것은 물질이라고도 할 수 없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와 동시에 그것은 또 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양변을 떠나고 또 양변을 포함하는 불교의 중도공식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은 발달을 거듭하면서 자꾸 불교 쪽으로 가깝게 오고 있습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불교는 과학이 발달될수록 그 내세우는 바가 좀 더 확실히 증명이 되고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높이 찬탄합니다.

 

이렇게 해서 3,000년 전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현대과학의 이론으로 입증됨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부처님 말씀은 누구든지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이기에 영원불멸하는 것입니다. 설령 원자탄이 천 개, 만 개의 우주를 다 부순다 하더라도 불교의 중도사상, 연기사상의 원리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20. 성철큰스님 법문--영원한 자유 맺는말

20. 성철큰스님 법문--영원한 자유 맺는말

 

영원한 자유 맺는 말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결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종교의 목표는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절대, 무한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고(一切苦)에서 벗어나 구경락(究境樂)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개의 종교는 초월 신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상세계에 둡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우주과학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초월신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초월 신을 전제로 한 종교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만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불교는 본래부터 초월 신을 부정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현실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 따로 절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불교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것을[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일진법계(一塵法界)'라고 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不生 不滅)이며, 중도세계(中道世界)인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나 물질과학에서도 현실이대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현실의 차별만 보고 한계만 보려고 합니다. 한계 없는 절대의 세계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에 대한 한계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해도 눈 감은 봉사는 이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주 전체, 삼천 대천세계, 미진 수 법계 이대로가 불 국토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번뇌 망상의 구름에 가려서 눈뜬 봉사가 되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그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모두 광명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볼 때는 암흑이고, 눈을 뜬 사람이 볼 때는 광명인 것처럼, 눈만 뜨면 이 처소(處所) 이대로가 모두 절대입니다. 또 동시에 사람사람이 부처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함은 중생이 진리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눈만 뜨면 내가 바로 진금 체(眞金 體)이고, 내가 사는 곳 전체가 진금체이며 극락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본래 정신 자체가 영원불멸이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불멸은 그대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공부를 하든 않든 간에 정신의 불멸은 그대로이나 그 쓰는 작용은 다르니, 공부를 않는 사람은 진흙 속에 싸인 옥()과 같아서 그 옥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항상 생전에 지은 선악(善惡)의 업력(業力)에 따라 생사로 상(生死路上)에 돌아다니며 무한한 윤회를 거듭하는 업보를 받게 되어, 조금도 자유가 없는, ()가 연속하는 생사의 불멸(不滅)입니다.

 

공부를 성취한 사람은 진흙을 다 씻어 버린 깨끗한 옥과 같아서 업력(業力)에 끄달리지 않아 생사로 상(生死路上)에서 헤매지 아니하고 모든 고()를 벗어나 영원히 자유자재한 대 활동을 하게 되는 해탈의 불멸(不滅)입니다. 비유하면 공부를 성취하기 전에는 눈 감은 장님의 생활과 같고 공부를 성취한 후에는 눈 뜬 사람의 생활과 같으니, 사람의생활은 같으나 눈 뜨고 안 뜬 생활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리의 눈을 뜰 수 있는가? 생각을 한곳에 집중해서 삼매(三昧)를 얻으면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이 현실 또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현실 자체가 틀린 것이라면 이 현실을 떠나야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바세계라고 하지만, 현실을 바로 보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결국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바세계를 극락세계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원래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현실이 곧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중도(中道)에 두고 있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또 양변이 서로 합해서 원융 무애한 원리가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인 중도를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무애 자재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일체 중생에게 '각자가 본래 지닌 부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 품팔이하고 마는 정신으로는 대법(大法)을 절대 성취할 수 없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지속되고, 공간적으로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큰 세계를 바로 보려는 큰 결심을 가지고 생활 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자체가 절대적인 자유세계임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밖으로 찾아 헤매 다닌다면 끝내 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황금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돈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눈만 뜨면 영원토록 무한으로 쓸 수 있는 보물입니다. 자기 속이 광산이요, 자기 자신이 순금덩어리요, 자기가 앉은 자리, 선 자리가 전부 순금 덩어리입니다.

 

이 광산을 개발하는 도구가 바로 화두(話頭)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성취해서 화두를 깨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화두를 깨칠 것 같으면 본래의 광산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고 미래 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이 절대세계, 진금세계, 제법실상의 세계를 중생에게 소개하려면 여러 억천만 부처님이 출세하시어 미래 겁이 다하도록 말해도 터럭만큼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결국 금덩어리에 똥칠하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금덩어리를 가진 모든 사람 가운데에 눈 뜬 사람은 적고, 눈 감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금덩어리를 던져주면 눈 감은 사람은 흙덩어리라고 하며, 오히려 그 사람을 때리고 주먹질을 합니다.

 

만일 어느 집에 가서 마당에 금덩어리가 있으니 파서 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믿는다면 아무리 땅이 깊어도 그것을 파서 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래 지닌 무한하고 절대적인 보배는 마당 안의 금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보배입니다. 이 처럼 우리는 보배 산에서 살고 있음을 바로 알아 보배를 바로 찾아 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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