梵本 般若心經을 싣게 된 동기
우리 佛子들이 늘 念誦하며 쉽게 접할 수 있는 經典은 般若心經으로서 어느 법회에서나 항상 염송하는 가장 친숙한 經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모른 채 그냥 염송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 法會에서 염송할 때는 법당 좌측 벽에 있는 108신장 탱화를 향하여 염송한다. 또 일반적으로는 고사를 지낼 때 토지신이나 산신 또는 해신 등 우리나라 토속신앙의 대상을 향하여 염송한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염송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어차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니 그냥 외우면 된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말을 할 때 내용을 모르고 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이 모르면 설명을 하면서 까지 말을 하며 그래야 의사소통이 된다. 그렇다면 모르는 말을 하면서 상대방이 알아들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般若心經을 염송한다면 그 뜻을 어느 정도는 알고 해야 듣는 상대도 알아듣고자 할 것이며 그 내용을 알고 그에 따르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佛子들은 그 내용을 알고 염송하는 상태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漢譯 般若心經은 漢文으로 되어있으면서 생략된 부분이 많아서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한글 般若心經은 漢譯般若心經을 직접 번역하였기 때문에 비록 생략된 부분이 없어도 이미 왜곡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梵本 般若心經 直譯本을 싣고 그 내용을 분석한 해설 본을 佛子여러분에게 회향하고자한다. 혜산 합장.
梵本 般若心經
Maha prajna paramita hrdaya sutram(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께 절하옵니다. <한역경전에는 누락된 부분>
거룩한 관자재(관세음)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알아냄이 건너편에 이른 것)에 행하실 때(를 향하여 가실 때)살펴보시니 다섯 가지 근간(蘊;온)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성품이 모두 비었음을 보셨느니라.
여기에서 사리불아 색은 빈 것(空)이고 빈 것은 또한 색이니
(왜냐하면) 색을 떠나 빈 것이 없고 빈 것을 떠나 색이 없어(없으며)
색이 바로 빈 것 이오 빈 것이 바로 색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색의 본질이 빈 것 이오. 빈 것의 표상이 색이기 때문이다. 라는 내용)
느낌과 생각과 결합(작용)과 식별 또한 이와 같다.
여기에서 사리불아 모든 법은 빈 것을 나타내나니
생하거나 멸한 일이 없었고 더럽거나 깨끗한 일이 없었고 모자라거나 가득 찬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리불아 빈 것에는 색이 없고 느낌 생각 결합 식별이 없다.
눈 귀 코 혀 몸 의지가 없고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 없다.
눈의 계층이 없고 이어 의지 식별의 계층에 이르기까지 없다.
밝힘과 밝힘 아닌 것이 없고 밝힘의 멸진과 밝힘 아닌 것의 멸진이 없으며 이어 늙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없고 늙고 죽음의 멸진에 이르기까지 없다.
괴로움 집기 멸함 길이 없다. 알음이 없고 얻음[과 얻음 아닌 것]도 없다. <적색부분은 대품반야경에만 있는 내용임>
따라서 얻음이 없는 까닭에 보살에게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다.
마음에 가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열반을 다하였다.
삼세의 모든 부처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다시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반야바라밀다의 큰 진언 큰 밝힘의 진언 다시없는 진언 동등함이 없는 진언은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는 진실로 반야바라밀다에서 설한 진언이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가니, 가니 건너가니 건너편에 닿으니 깨달음이 있네 사바하.
파란색부분은 漢譯經典에는 누락된 부분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분석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Maha prajna paramita hrdaya sutram)에서 마하란 산스크리트 語의 Maha로서 Magna에서 온 말이며 크다(big)보다는 Great(위대한. 수승한)의 뜻이 강하다. 印度의 言語는 내용적 의미와 문법적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서 Prajna는 Pra와 jna로 분리할 수 있는데 우리말에도 “돌을” 할 때 돌은 內容的 의미의 말이며 을은 文法的 의미의 말이다.
印度語는 접두사 + 동사어근 + 접미사 + 엔딩처리의 단계인데 여기서 接頭辭와 動詞語根은 內容的 의미이고 接尾辭와 엔딩처리는 文法的 의미이다.
文學的 해석이나 文法的 해석에서는 접두사가 큰 의미가 없으나 哲學的 의미에서의 해석에는 接頭辭가 아주 중요하다.
jna 즉 (알다)라는 단어의 앞에 어떤 接頭辭가 오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게 표현된다.
예를 들면
abhi- jna 는 수승한 앎을 말하며 通을 뜻한다.
vi- jna 는 다르게 앎을 말하며 識을 뜻한다.
sam- jna 는 하나로 앎을 말하며 想을 뜻한다.
pari- jna 는 完全한 앎을 말하며 緣起에 대한 完全한 앎을 뜻한다.
따라서 Prajna는 進行的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데 머물지 않고 아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뉘앙스를 漢譯에서는 한마디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음사해서 般若라고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大乘의 앎을 말하는데 이를 理解하기 위하여 金剛經에 나오는 Pra- stha를 理解할 필요가 있다. Pra는 “앞지르는 것. 앞에” 등의 뜻이 있는 말로서 결과적으로는 “진행적으로 머물지 않은 채”라는 뜻이 된다. stha는 “멈춤”을 뜻하므로 “진행적으로 멈춤”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Prastha는 “進行的으로 머물음”을 말하는데 이는 움직이면서 머물음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이것은 균형을 잡은 채 탈것을 타고 달리는 뉘앙스를 주는데 이는 바로 “大乘을 타고 머물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大乘에 대한 哲學的인 의미가 아주 강한 용어인 것이다.
따라서 Prajna도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가는 앎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으므로 般若部 經典에서 말하는 “머물지 말고 계속 가라는 뜻을 품고 있는 앎”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時代는 베다의 언어 문법의 말기 시대로서 접두사의 역할이 매우 강한 時代이며 그 이후 유명한 言語學者 파리니가 탄생하여 산스크리트語를 文法的으로 정리한 이후의 文法은 接頭辭의 역할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經典은 베다말기의 부처님 시대에 이야기되어진 것이므로 接頭辭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Prajna는 不住智라고 할 수 있다. 즉 진행적인 智慧이다. 그러므로 般若란 進行的인 智慧요 머물지 않는 智慧인 進行의 智慧이며 바로 涅槃에 머물지 말고 彼岸(究竟涅槃)으로 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Para는 彼岸 또는 건너편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로서 彼岸이나 건너편이란 中間에 물이 흐르는 것을 전재로 한 건너편이라는 뉘앙스의 용어이다.
실제로 아함부 경전의 주된 意味는 “벗어남”이며 반야부경전의 주된 意味는 “감(가다)”이다. 따라서 아함부 경전이 길(陸上)을 따라서 涅槃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반야부경전은 다시 海路를 따라 Para즉 彼岸에 도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Para-m-i-ta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i-ta에 있다. 여기서 mi는 to go 의 意味로서 간다라는 뜻이 되는 데 para와 ita 사이의 m은 아무 뜻도 없지만 이는 vowel bridge(母音다리)로서 뒤에 있는 i(가다)라는 母音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다.
따라서 i는 가다라는 말을 한 번 더 강조하므로 서 “가야한다”라는 흐름 속에서 理解되어야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araya-avalokitesvara에서 avalokite에서 끊으면 觀이라는 뜻이 되고 svara는 音의 뜻이므로 衆生들의 소리인 世音일 것이니 觀世音이 된다.
그러나 문법구조상 이 문장은 avalokita-isvara로서 a와 i가 모음변화를 일으켜서 e가 된 것으로 a와 i사이를 끊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avalokita의 觀이라는 뜻과isvara의 主人 또는 王의 뜻으로서 自在하는 存在의 뜻이 되므로 觀自在의 뜻이 된다.
그러나 구마라집 스님의 觀世音菩薩은 번역이며 현장스님의 觀自在菩薩은 해석이다.
Paramita(波羅密多)에서 중요한 것은 Pareta라고 하지 않고 m이라는 뜻이 없는 단어를 넣어서 모음충돌을 막으면서 i(가다)의 뜻을 최대한 살리려고 한 점이다.
이처럼 母音變化를 하지 않게끔 mi라고 m을 넣어서 가다라는 i의 뜻을 최대한 살려서 한 번 더 강조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마지막 자는 ta라는 접미사 부분인데 이는 동사를 추상명사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접미사인데 동사는 어떤 사건을 나타낸다면 명사는 存在를 뜻한다.
따라서 ta가 붙음으로 해서 “…하는 것”이라는 存在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알아냄이 건너편에 가는 것.” 또는 “간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간 것”이라면 이미 사건이 完了된 것을 뜻하고 “가는 것”이라고 하면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을 말하므로 그 뜻이 애매하게 된다.
그래서 고 익진 박사는 “알아냄이 건너편에 이른 것”이라고 아주 세밀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는 완성의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간 것”은 출발점에 그 시각이 있는 것이고 “이른 것” 은 도착점에 그 시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알아냄이 건너편에 이른 것” 이라는 번역이 된다.
經典에서 ta는 어떤 경지를 나타내는 용어에 주로 쓰인다.
dharmata -아함부를 대표하는 窮極的인 境地.
sunyata - 반야부의 窮極的인 境地인 空을 나타내는 말.
tatata- 법화부의 窮極的인 境地를 들어내는 용어.
이처럼 ta를 붙임으로 해서 어떤 境地를 나타내고 있다.
다음 hrdaya는 heart즉 심장. 염통이라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마음이라는 뜻의 心이 아니라 심장 즉 염통이라는 뜻으로 바꾸어 말하면 核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hrdaya는 sutram을 수식하는 말이며 maha역시 sturam을 수식하는 단어이다. prajna-para-m-i-ta역시 sutram을 수식하므로 종합하여 해석하면 반야부 경전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위대한 經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를 설하는 경중에서 핵심이 되는 위대한 경”이라는 해석이 된다.
실제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 반야부 경전 중에서도 가장 뒤에 번역되어진 經典으로서 그 내용이나 크기로 보아 가장 작으면서도 衆生들과 만남이 빈번하고 깊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많이 쓰이므로 가장 위대하다고 말 할 수 있다.
8000송 반야부 경전이나 10만송 반야부 경전은 아마 佛敎 學者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읽어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처럼 宗敎나 經典은 衆生들과 만남에 의해서 生命이 存續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般若心經이 위대한 經이라고 할 수 있다.
범본 반야심경의 첫 구절인 Nam-ah-sarva-jnaya (나맛 사르와즌냐여)에서 nam은 구부리다 의뜻으로서 “절 한다”라고 번역되어 진다. “귀의 한다”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
귀의 한다는 말은 Buddhan sarnam gacchami 라는 말로서 sarnam은 “피난처” 라는 뜻이고 gacchami 는 “나아간다.”는 뜻이므로 부처님이라는 피난처로 나아간다는 뜻이므로 귀의 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nam은 “… 에게 절 한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nam의 뒤에는 반드시 격변화가 되어야 하는데 남성인 경우는 sarva-jna이고 여성명사인 경우는 sarva-jnai가 되어야 “모든 것에 대한 앎”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sarva-jna로 되어 있으니 이는 남성명사임으로 이 뒤에 Buddhaya(부처님)라는 명칭이 생략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般若心經에 보면 부처님에 대한 수식어와 觀自在菩薩에 대한 수식어와 반야바라밀다에 대한 수식어가 각기 다르다.
부처님에 대한 수식어: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
觀自在菩薩에 대한수식어: 거룩한 觀自在菩薩
반야바라밀다에 대한 수식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Sarva-jnaya (Buddhaya)에서 sarva-jna에서 sarva는 모든 것에 대한 jnai라고하면 여성명사어미가 되므로 앎을 뜻하게 되고 따라서 一切知를 말한다. 그러나 jnaya 라고 하면 남성명사의 어미로서 뒤에 부처님이라는 단어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般若部 經典은 實存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해서 實存人物에게 가르침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實存하지 않으니 가설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현실이라고 할 수도 없으므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이 대승의 三昧이다.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현실로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般若部 經典에서는 大乘의 三昧를 사용하고 있다.
法華部 經典에서는 塔이라는 假想現實 속으로 끌어들여서 해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渴愛에는 3가지가 있는데 愛慾의 渴愛와 存在의 渴愛와 無明의 渴愛가 있다. 이것을 알려면 3漏 즉慾漏와 有漏와 無明漏를 알아야 한다.
慾漏: 存在가 안정된 상태에서는 慾漏가 발생한다.
有漏: 存在가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存在에 대한 渴愛가 발생한다.
無明漏: 存在가 무너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無明(#)의 渴愛가 발생한다.>
**** 이것을 이해한 상태에서 반야심경을 공부해야 정상적인 단계가 된다.
般若部 經典의 歷史的 배경.
광본 반야부 경전에는 觀世音菩薩이 사리불에게 설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약본 반야부경전은 석가모니불이 사리불에게 설법한 것으로 해석되어 진다. 그러나 소본 반야부 경전이 광본의 一部라면 觀世音菩薩이 사리불에게 설법한 것으로 되어야 한다.
그런데 광본 반야부 經典의 서분에서는 그 설법의 장소가 빔비사라 왕이 통치하든 마가다국의 왕사성의 영취산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영산회상에서 설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때 세존은 gambhira-avas-samboda(밑으로 들어간 바른 깨달음: 심오하게 깨달아 앎)이라는 三昧에 들어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사리불이 觀世音菩薩에게 설법을 듣도록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 유통분에는 부처님이 觀世音菩薩을 칭찬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三昧 속에서 두 사람의 說法내용을 들었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三昧라는 것으로 볼 때 좀 이상한 부분이다. 이것은 추리하여보면 부처님은 “밑으로 들어간 바른 깨달음”이란 三昧에 들어서 사리불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삼매 속으로 끌어들여서 觀自在菩薩에게 설명을 듣도록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설명 내용으로 볼 때는 부처님의 설법내용인 것 같은데 이를 觀自在菩薩이 설명한 것으로 처리한 것은 부처님의 설법이라고 할 수가 없었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였다고 세상에 알려진 내용은 阿含經이다. 그러나 涅槃에 다다른 제자는 涅槃으로부터 다시 般若에 의해서 彼岸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므로 아함경에서의 涅槃에 집착한 가르침과 이율배반의 관계가 되며 이를 부처님의 설법내용으로 할 경우 본말이 전도될 우려가 있다.
즉 내용보다는 실제 부처님이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부각될 염려가 있다. 이런 당시 시대적 상황을 참작하여야 大乘經典이 非佛說이라는 문제가 해결된다.
大乘經典에 들어오면 부처님이 직접 說한 경우가 없으며 내용은 부처님의 설법내용이지만 說한사람은 菩薩을 내세워 說한 것으로 되어 있다.
般若部 經典이 그렇고 法華部 經典이 그러하며 華嚴經의 내용이 그렇다. 부처님은 三昧에 들어 계시고 다른 菩薩이 說한 것으로 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本文
1.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照見
거룩한 觀自在(世音)菩薩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알아냄이 건너편에 이른 것)에 행하실 때(를 향하여 가실 때) 살펴보시니
범본 반야심경의 첫머리에는 먼저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께 절하옵니다.” 라고 되어 있으며 이어서 거룩한 관자재보살이 라고 하면서 반드시 앞에 “거룩한”이란 수식어가 붙어있다.
본문에서 觀自在菩薩은 avalokita-isvara인데 앞에 arya(거룩한)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하는데도 漢譯經典에는 이것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히 arya가 있어야 하며 이것이 본래 있었는데 생략한 것인지 漢譯당시의 범본원전에 없어서 넣지 않은 것인지 가 불분명하다.
“거룩한” 이란 극히 宗敎的인 용어로서 죽음이 극복된 存在이거나 죽음이 극복될 것이 확실시 된 存在에게만 붙는 수식어 이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觀自在菩薩은 죽음이 극복되었거나 극복될 것이 확실한 存在여야만하기 때문에 arya(거룩한)라는 수식어가 있어야 한다. 즉 최소한 6地菩薩의 단계는 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觀自在菩薩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行하실 때 살펴보시니”를 “향하여 가실 때 살펴보시니”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렇게 번역해야 부처님이 三昧 속에서 觀自在菩薩이 七地菩薩에서 般若를 향하여 행하다가 八地菩薩 즉彼岸에 도달한 후에 사리불을 三昧 속으로 들어오게 하여 觀自在菩薩에게 설명을 듣도록 한 것이 된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반야바라밀다로 향하여 가실 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반야바라밀다에 도달 하여 이야기 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반부와 후반부 즉 “사리불아” 하고 설명한 내용과는 時間的으로 차이가 있는 분분이다.
그래서 梵本에있는 “여기에서 사리불아” 라고 표현된 부분이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라는 말은 觀自在菩薩이 반야바라밀다에 도달하고 나서라는 뜻이 되며 또 彼岸에 도달한 후라야 彼岸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五蘊皆空(度一切苦厄)
다섯 가지 根幹(蘊)이 있는데 그들은 自己 性品이 모두 비었음을 보셨느니라.
위 번역에서 경어법에 대하여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살펴보시니 라고 했을 때 살펴보시는 분은 觀自在菩薩이며 지금 이 般若經을 설명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 位相이 높은 분이며 “다섯 가지 根幹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性品이 모두 비었음을 보셨느니라.”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 비하여 그 位相이 높음을 알 수가 있다.
본래 인도 말이나 漢文에는 존칭어가 없다. 산스크리트語로는 evam maya srutam . 팔리語로는 evam me sutam. 漢文으로는 如是我聞 이라는 말로서 이 말 속에는 相對的 位相 關係가 없다. 그러나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相對的 位相關係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關係가 항상 存續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經典이며 오랜 역사동안 이루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이루어져 存續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를 심층 분석해 보면 이는 七地菩薩이 六地菩薩에게 설법하는 것이며 이때의 觀自在菩薩은 八地菩薩의 位置이다. 왜 觀自在菩薩이 八地菩薩이냐하는 것은 이것이 반야부 經典이기 때문에 아직은 九地나 十地에 오르기 前의 境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七地와 六地의 구분은 무엇인가?
五地菩薩이 공부하는 것은 四聖諦이며 이것이 완료되지 못하면 12緣起를 가르치지 않는다. 따라서 12緣起를 공부한 六地菩薩에게만 즉 涅槃의 境地를 이룩한 六地菩薩에게만 비로서 반야부 경전을 설명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六地菩薩일 개연성이 아주 높다.
따라서 六地菩薩에게 설명을 하려면 그 과정을 지난 七地菩薩일 수밖에 없다. 물론 八地菩薩이 설명할 수도 있지만 八地인 觀世音菩薩을 존칭하여 부른다면 七地菩薩이 될 수밖에 없음으로 七地菩薩이 되는 것이다.
또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께 절하옵니다.”라고 하면서 부처님에게는 그 位相이 아주 높으므로 절하고 觀自在菩薩에게는 거룩한 이란 尊稱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七地菩薩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觀自在菩薩 앞에는 arya(거룩한)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하며 따라서 설법하는 자와 듣는 자의 위상이 자연스럽게 결정되며 또 經典의 깊이와 내용으로 보아 涅槃을 證得한 六地菩薩에게 비로서 설명되는 내용이 般若部 經典인 것이다.
經典에서는 이러한 내부적인 經典의 내용적 位相을 발견해 냄으로서 설법 자와 듣는 자의 身分關係를 정립할 수 있다.
般若部 經典에서 이를 설명한 菩薩은 반드시 觀自在菩薩로 되어있다. 따라서 法華部經典이나 華嚴部經典이나 涅槃經 등은 般若部 經典이 根幹이 되어 정립된 經典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觀自在菩薩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最初 經典이 觀自在菩薩을 택하였기 때문에 그 근간위에 정립된 後期 大乘經典은 어떠한 형태로든 觀自在菩薩이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般若部 經典에서는 왜 꼭 觀自在菩薩이어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남게 된다. 般若部 經典이 성립된 시기에는 많은 菩薩이 이미 등장한 後이기 때문에 다른 菩薩이 등장할 수도 있는데 왜 꼭 觀自在菩薩인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서는 산스크리트 原語에서 觀自在菩薩의 이름과 照見이라는 原語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觀自在菩薩은 avalokita-isvara 이며 照見이라는 말의 산스크리트어는 vi-ava-lokayati 이다.
이는 “비추어보다” 또는 “살펴보다”라고 번역되는 단어로서 즉 “살펴보다.” 라는 이 단어와 가장 걸 맞는 즉 八地菩薩의 행동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단어는 vi-ava-lokayati 밖에 없으며 이 단어와 가장 걸 맞는 이름의 菩薩은 avalokita-isvara 즉 觀自在菩薩 밖에 없다.
따라서 觀自在菩薩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大乘佛敎는 比丘의 佛敎가 아니라 佛菩薩의 佛敎로 변환된다. 이러한 大乘佛敎의 初期經典인 般若部 經典에 觀自在菩薩이 채택된다는 것은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만들어지는 經典에 채택된 菩薩은 다음에 나오는 經典에서 이를 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大乘 經典 초기의 經典을 써낸 菩薩은 미세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점검하고 완성한 天才들인 것이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 關係에 단 한 점의 허점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완벽한 내용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부분이다.
이번에는 구마라집 스님의 觀世音菩薩로의 번역과 현장스님의 觀自在菩薩의 번역을 比較하여 보자.
본래 원어는 avalokitesvara bodhisattvo 을 번역한 말로서 이는 합성어이며 avalokita-isvara 가 합쳐지면서 avalokitesvara가 된 것이다.
avalokita는 觀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로서 “볼 관”이지만 여기서는 수동태로서 “보일 관”이라고 보아야 한다.
isvara는 自在 즉 主를 뜻하며 이는 세상의 주인 을 말하는데 이는 世上을 創造하고 마음대로 하는 能力을 가진 자의 뜻을 가지고 있는 單語이다.
avalokita는 ava라는 接頭辭와 lok라는 語根과 ita라는 接尾辭로 구성된 單語로서 ava는 아래로 라는 뜻으로 lok 즉 “보다”라는 單語와 합하여 “아래로 보다”라는 뜻으로 따라서 “내려다보다” 또는 “굽어보다”의 뜻이 된다.
따라서 受動態의 單語이므로 “내려다보인 세계” 라는 뜻이 되며 世間主의 뜻이 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마라집 스님은 觀자를 “보다”라고 번역하지 수동태 즉 “보이다”로 번역되지 못할 바에는 아예 본래의 뜻을 의미할 수 있는 觀世音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소리를 觀하는 菩薩이라는 뜻을 색 여서 觀世音菩薩이라고 명명한 것은 아주 탁월한 번역인 셈이다. 觀自在라고 했을 때는 원어의 본래의 뜻을 살리지 못하는 평범한 번역이 되는 셈이다.
菩薩이라는 bodhisattvo는 bodhi(깨달음)라는 단어와 sattvo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sattvo는 sattva에서 온 말로서 이는 sat와 tva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sat는 as의 현재분사 형(지금 있는) 으로서 “有”라는 뜻이며 tva는 “…인 것” 의뜻을 가진 말이며 “有”란 精神. 마음. 生命作用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sattva는 衆生이라는 말이며 정확히 표현하면 “有情”으로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다.(묘법연화경할 때의 妙法도 sat인데 이때는 참으로 있는. 실존하는. 의 뜻 으로 참으로 있는 蓮花經. 실존하는 蓮花經이 된다.)
bodhi는 깨달음 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의 깨달음은 samyak- sambodhi(正等覺)을 의미하며 따라서 bodhisattvo즉 菩薩이란 말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이 결정된 자”를 뜻하므로 阿含經이나 般若部 經典 次元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前生 菩薩時의 有情을 말하는 것이 된다.
깨달음의 衆生하면 이 衆生은 깨달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되므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이 결정된 者를 뜻한다.
法華經 次元에 가면 모두가 菩薩이지만 般若部 經典에서는 아직 菩薩이라는 次元은 아주 높은 次元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도 小乘의 깨달음과 大乘의 깨달음과 부처의 깨달음이 구분된다. 南方 상좌부에서는 聲聞의 깨달음(sama-bodhi) 緣覺의 깨달음(sam- bodhi) 부처의 깨달음(samyac-sam-bodhi)의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經典에서는 緣覺의 깨달음과 정등각자의 깨달음은 구분한다. 여기서의 깨달음은 samyacsambodhi를 뜻한다.
1. (1)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2) 照見
(3) 五蘊 ??? 皆空(度一切苦厄)
(1) 거룩한 관자재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행하실 때(를 향하여 가실 때)
(2) 살펴보시니
(3) 다섯 가지 근간(온)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성품이 모두 비었음을 보셨느니라.
(1)번 문장에서 時 즉 때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원어에는 없으며 단지 그냥 행하시다 라고만 되어 있는데 “때”라는 말을 넣은 것은 “형용사 + 명사”를 句라고 하고 “주어 +동사” 라야 節이 되는데 산스크리트어에서도 句인데도 그대로 節로 바뀔 수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며(소유격과 처격에서만 사용됨) 팔리어에서는 절대주격에서도 사용된다.
이러한 절대주격에서 句가 節로 사용 되는 경우는 고대 팔리어에서 뿐이며 이는 베다어에 육박하는 문장이라는 이야기가 되며 따라서 이 설명문은 부처님 당시의 문장으로 보아야 한다.(반야심경은 4세기경에 쓰여 졌지만 문장구조는 거의 부처님 시대에 육박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大乘經典 非佛說은 맞지 않는 이야기 즉 小乘이 大乘을 폄하하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이 문장은 반야바라밀다로 향하여 行하시는 과정에서의 뜻이 되는 셈이다.
위 문장에서 “五蘊이 空함을 보셨느니라.” 라는 사건은 반야바라밀다로 향하여 갈 때 일어나는 사건이며 반야바라밀다에 도달하고 나면 변화될 수 있는 개연성이 상존하는 설명이 된다.
따라서 五蘊이 空함을 본 것은 七地菩薩의 위치에서의 이야기이며 色不異空 空不異色 하는 이야기는 八地菩薩의 위치에서의 이야기 인 것이다.
또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라는 번역에서 gambhirayam 에서의 “감비라”는 그냥 깊다는 뜻이며 한없이 깊은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라고 한 것은 涅槃도 깊은 境地이지만 반야바라밀다는 더 깊은 境地로서 이보다 더 깊은 境地는 없다는 뜻이 내포 된 것이다.
물론 正等覺(삼먁삼보리)이 있지만 이는 다시 위로 올라가서 위없이 높은 境地이지 더 깊은 境地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반야바라밀다에 行하실 때의 “…에” 라는 단어이다. 이 “…에” 라는 말은 처격으로서 장소와 목적을 나타내는데 이 문장에서는 목적으로 잡아야 정확한 해석이 된다.(예: 학교에 간다)
이를 장소로 잡으면 반야바라밀다 속에서 行하는 뜻이 되며 다시 왜곡되면 반야바라밀다라는 修行 방법이라고 잘못 번역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 로 향하여 가실 때 로 번역되어야 한다.
또 行하실 때의 行은 “가다”라는 단어보다는 行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포괄적인 내용을 가진 용어가 된다.
行에는 “가다”라는 뜻도 있지만 修行하다는 뜻도 있으므로 “행하다”라고 번역되었지만 般若波羅蜜多를 향하여 즉 목표점으로 하여 간다는 뜻을 갖추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2) 照見(vi-ava-lokayati) 살펴보다.
(2) 에서 살펴보다는 그냥 보다와 다르다. 여기서 살펴보는 것을 풀어보면 五蘊皆空이라는 말이 되는 셈이다. 이는 觀과 見의 차이만 큼 큰 차이이다.
ava는 내려다. 또는 굽어 의뜻이다. loka는 “보다”의 뜻이다.
따라서 “내려다 보다”의 뜻이 되는데 이는 觀世音菩薩이라는 뜻의 avalokitesvara에서의 avalok 즉 내려다보다. 굽어보다 와는 같은 말이지만 뉘앙스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서는 뒤에 isvara라는 내려다보는 주인이 없으니 그냥 “내려다보는 것” 이라는 뜻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앞에 vi가 붙는 것이다.
여기서 vi의 뜻은 갈라서(가르다)의 뜻인데 한 번에 보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vi라는 語頭를 붙였다.
따라서 이것은 分析해서 보는 것을 뜻한다.
(3) 다섯 가지 근간(온)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성품이 모두 비었음을 보셨느니라.
에서 다섯 가지 근간이 있는데 라고 하면서 五蘊은 있는데 그 성품이 空하다 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五蘊을 껍데기로 보고 自性을 알맹이로 본다면 껍데기는 있는데 그 알맹이가 비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漢譯 般若心經에는 그냥 “五蘊皆空”이라고 하였으나 梵本 般若經에는 panca skandhah 로서 panca는 다섯 skandhah는 根幹이라는 단어로서 “있다.”라는 말은 santi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梵語에서는 당연히 생략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五蘊이 있기는 있는데 그 自性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본래 般若部 經典은 自性의 부정에 목적이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五蘊이란 단순히 色 受 想 行 識의 五蘊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五蘊 等 이라고 表現해야한다.
즉 五蘊. 사성제. 12처. 18계. 六界. 등등. 有爲法과 無爲法(아함경차원의 涅槃의 단계는 無爲法이므로)이 모두 空하다는 설명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自性이라는 말은 주의해서 해석하여야 한다.
自性의 原語는 sva-bhava로서 sva는 스스로라는 뜻이며 bhava는 bhu 즉 “이다” 또는 “되다”의 의사 선택형으로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되게 하는 것” 즉 “자기 스스로가 자기 스스로를 있게 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어떤 능력을 표현한 말이며 일본학자의 용어를 빌리면 獨自的 存在性 이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獨自的 存在性이란 스스로가 다른 것의 도움 없이 스스로 存在하게 하는 能力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여기서 “공하다” 또는 “비었다”는 말의 원어는 sunya 인데 이 말의 원 뜻은 “없다”라는 말인데 이때의 “없다”는 있었다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없었던 것을 말하며 그냥 있다(ast)가 지금은 없는 것은 “nasti”로 표기되며 sunya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수학적인 zero의 의미이다. 즉 껍데기는 있는데 알맹이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五蘊은 있는데 그 자기 성품은 처음부터 없었음을 보셨느니라.” 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 까지는 七地菩薩 단계의 이야기 이며 다음 항에서는 그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다. 슌야(sunya)에서 슌야타(sunyata)라고 하면서 부정에서 다시 부정함으로서 긍정으로 바뀐다.
불교에서의 “없다”는 “있다”라고하기 위한 “없다”이며 불교에서의 부정은 긍정을 위한 부정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지금까지는 과거형의 이야기이었으며 다음구절부터 현재형으로 바뀌고 있다. 이는 八地菩薩단계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있다”라는 것은 常住性과 一者性이 있는 것을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있다”라고 표현된다면 다른 것은 “있다”라고 할 수가 없게 된다. 부처님은 항상 하는 것은 발견하였는데 한가지로 항상 하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眞我 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이처럼 부처님의 語法은 언어의 잘못을 교묘하게 잘 피해가고 있다.
2. [가]
(1) 여기에서 사리불아 색은 빈 것(공)이고 빈 것은 또한 색이니
? 舍利子 ???
(2) [왜냐하면]색을 떠나 빈 것이 없고 빈 것을 떠나 색이 없어[없으며]
色不異空 空不異色
(3) 색이 바로 빈 것이요 빈 것이 바로 색이다.[색의 본질이 빈 것이오. 빈 것의 표상이 색이기 때문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4) 느낌과 생각과 결합(작용)과 식별 또한 이와 같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1)번 문장에서 漢譯 般若心經에는 없는 부분이 “여기에서”라는 단어이다. 또 舍利子 뒤에 색은 빈 것(공)이고 빈 것은 또한 색이니 라는 구절도 漢譯 般若心經에는 빠져있다.
(1)번 문장에 들어오면 “여기에서”라고 말하는 순간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라고 하는 뜻으로 이 이후의 문장은 모두 현재형으로 바뀌면서 觀自在菩薩이 舍利弗에게 직접 이야기 하는 現在形 대사체로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부터 나오는 空은 모두 슌야타의 空이다.
즉 現在란 觀自在菩薩 즉 八地菩薩 단계의 이야기로서 此岸에서 건너오는 도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彼岸에 도달한 후의 이야기로서 이제부터는 sunya가 아니라 강한 부정의 부정인 sunyata라고 하면서 강한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으로서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 처음부터 存在한 한 개밖에 없는 그 어떤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을 뜻하는 單語이다.
이제까지는 “본래부터 없었던 것” 즉 “절대적으로 없었던 놈”에서 “절대적으로 있는 놈”의 차원에서 반야바라밀다를 재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슌야타는 비워버릴 것을 다 비워버린 것 즉 부정해야할 것은 다 부정해 버린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슌야타”를 그대로 法華經次元으로 가지고 올라가면 如가 되는 것이다. 물론 “슌야타”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슌야타”를 質料 로 한 그 어떤 것이 法華經 차원의 如인 셈이다.
본래 광본 般若部 經典에서는 사리불이 묻고 觀自在菩薩이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소본 반야심경에서는 觀自在菩薩의 답만을 모아놓은 것이다.
(가)의 (1)번 문장에서 “여기에서 사리불아 색은 빈 것(공)이고 빈 것은 또한 색이니”라는 문장이 漢譯 반야심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먼저 “여기에서”라는 말은 이 이야기를 하는 조건이 八地菩薩 즉 彼岸의 단계에서의 이야기이며 뒤의 문장은 절대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문장이니 왜냐하면 印度의 3단 論法 중에서 結論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부분은 이 부분의 結論을 이끌어 내기 위한 條件들인데 漢譯에서는 結論부분을 생략하므로 해서 結論을 이끌어 내기 위한 條件들 중의 하나가 結論으로 되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된 이유는 漢文에는 關係代名詞로 처리할 수 없으므로 처음의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이 直譯하면 동일한 말이 되기 때문에 생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진정한 뜻이 잠식되어 버린다.
여기에서의 이야기 들은 슌야타(sunyata) 즉 슌야(sunya: 처음부터 없었던)에서 강한 부정에서 다시 부정한 것 즉 처음부터 없었다고 부정하고 부정한 끝에 얻은 結論이 슌야타 이므로 모두 부정하고 난 것이라는 結論에 到達하므로 긍정적인 그 무엇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부분의 이야기 들은 이제 슌야타(sunyata)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들인 것이다. 이 부분의 문장을 보면
“여기에서 사라불아 색은 빈 것(공)이고 빈 것은 또한 색이니”
라고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2)항에 들어가서의 번역은
“[왜냐하면] 색을 떠나 빈 것이 없고 빈 것을 떠나 색이 없어[없으며]”
라고 하였는데 이 중에서 특히 중요시 할 것은 “떠나”라는 단어이다.
이 “떠나”라는 단어는 “다르다”라는 단어와는 뉘앙스가 많이 다른 용어이다.
따라서 色不異空 空不異色이 아니라 色不離空 空不離色이라고 하여야 진정한 의미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2)항은 첫 번째 항 즉 結論항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다음 (3)항은 漢譯에서는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고 되어있으나 이를 우리말로 번역해도 우리말 역시 關係代名詞를 번역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色이 바로 빈 것 이오 빈 것이 바로 色이다.”
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하면 “바로”라는 말이 들어간 것 외에는 (1)항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梵語로 되어있는 부분을 관계대명사를 분석하여서 말한다면
“[色의 本質이 빈 것 이오. 빈 것의 表象이 色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항에서 “느낌과 생각과 결합(작용)과 식별 또한 이와 같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처님은 이 부분을 關係代名詞를 써서 不確實하게 이야기 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이것이 말의 한계이다. 왜냐하면 本質과 表象은 항상 함께 있어 하나인 것이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이를 말로 하자면 本質을 이야기 하고 表象을 이야기해야 하므로 本質과 表象이 각기 다른 두 개로 착각하게 한다.
따라서 말하는 순간 바로 相에 걸리기 때문에 직접 언급할 수 없고 따라서 關係代名詞로 처리하면서 이를 추정해 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묘한 뜻이 담긴 말을 關係代名詞가 없는 漢文이나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 진정한 뜻이 숨어버린 것이다. 물론 선대 祖師들은 윗대의 祖師로부터 그 숨은 뜻을 별도로 설명 들음으로 해서 진정한 뜻을 理解하면서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文字化 되서 後代에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그 진정한 뜻을 알기가 매우 어렵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진정한 뜻을 알게 된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무한히 감사하는 바이다.
또 한 가지 六道輪回에서 나는 이제까지 地獄 餓鬼 畜生 修羅 人間 天神의 순서로 餓鬼가 畜生보다 더 나쁜 곳으로 알고 있었으며 대다수 불자가 그렇게 배우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漢譯과정에서 잘못 기재된 것이 계속해서 그렇게 된 것일 수 있다.
잡 아함경 790장과 791장에는 地獄 畜生 餓鬼 人間 天神 涅槃으로 적고 있다. 물론 地獄 畜生 餓鬼 修羅 人間 天神으로 될 수도 있지만 修羅는 들어 있는 경우도 있고 빠지는 경우도 있어서 왜냐하면 佛에 귀의 하였는가 아닌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阿含經이 가장 기본인데 여기에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은 餓鬼가 畜生보다는 좀 더 좋은 쪽이라고 볼 수 있게 한다. 餓鬼란 원어로는 “프레타”라고 하여 그냥 죽은 조상의 뜻이다. 餓鬼란 단지 배 곱음의 果報를 받는 것뿐이지 畜生보다는 나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 배 곱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몰라서 그런다. 차라리 畜生이 났다라고 해서 中國 사람들이 번역과정에서 畜生을 餓鬼의 위에다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보면 모든 能力이나 생각 등을 갖춘 存在로서 단지 배 곱음의 業報만을 받는 것이 畜生보다는 나을 것이다. 대부분의 衆生이 받는 業報이기가 쉬운 부분이 餓鬼의 業報일 것이다. 크게 惡業을 짓지도 않았고 善業도 없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1)번 문장에서 “색은 빈 것(空)이고 빈 것은 또한 색 이니” 에서 “이다”와 “아니다” 의 설명
色은 空이다. 라고 했을 때 오로지 이것만이 성립할 때만 “이다.”라고 해야 한다. A = A와 같이 A가 아니면 절대 A가 될 수 없다. 그러나 A = Q 에서는 A도 Q가 될 수 있고 B도 Q가 될 수 있다.
슌야타가 色이라는 이야기이지 色이 受라는가 想이라든가 行이라든가 識이라든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따라서 受도 空이고 想도 空이며 行도 空이고 識도 空이라는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空을 전제로 한 슌야타(sunyata)가 色이라는 이야기이다. 즉 A = Q라는 의미에서의 “이다”인 것이다.
여기에서의 條件은 色이 空으로부터 떠날 수 있다면 色이 空이 아닌데 色이 空으로부터 떠날 수 없으니 이는 空이라는 이야기 이다.
그러므로 “色不異空 空不異色”에서 色이 空으로부터 떠나지 못하고 空도 色의 입장에서 떠나지 못하니 色이 곧 空이고 空이 곧 色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色不離空 空不離色”이라야 맞다.
그러면 왜 色은 空에서 떠나지 못하고 空은 色에서 떠나지 못 합니까?라고 하니까 그 답이 (3)항의 대답인 것이다. 즉 “空은 色의 本質이고 色은 空의 表象이다.”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은 어떠한 모양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 물은 항상 어떤 형상을 띠고 있는 것처럼 空은 色이라는 表象을 가지고 存在한다.
이것이 실체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이야기를 (3)항에 넣지 않았을까? 우회적으로 관계대명사를 써서 우회적으로 표현하였을까?
이는 本質이나 表象이라는 말을 써버리면 떨어져 버린다. 本質과 表象이 결합해서 하나가 아니고 그냥 하나인데 本質과 表象이라는 말을 써버리면 두 개가 되므로 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대답은 해야 하고 말은 못하고 라는 특수 상황에서 이를 聽覺的 思惟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처리를 한 것이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만의 특유한 언어구사법이다.
(4)번 문장은 위와 같은 3단 논법으로 受. 想. 行. 識을 각각 모두 이야기 해주어야 하지만 이를 간략하게 “느낌과 생각과 결합(작용)과 식별 또한 이와 같다.” 라고 생략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12처. 18계. 육육법. 오온. 육계. 열반까지도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기에서 五蘊은 凡夫나 聖者가 경험하는 一切의 精神的 物質的인 存在나 事件을 모두 포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般若部 經典은 色을 설명하는 經典이 아니라 色이 空임을 가르치는 經典이다. 이점을 인식해야 한다.
2. (나)
(1). 여기에서 사리불아 모든 법은 빈 것을 나타내나니
舍利子 是諸法空相
이제부터는 모든 法(諸法)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여기서 모든 法이란 苦海로부터 피안에 이르기 직전까지의 凡夫나 聖者가 경험하는 一切의 精神的 物質的인 存在나 事件을 모두 包含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五蘊이라는 말이 한 번 더 설명되고 있다.
sarvadharmah sunyatalaksana(諸法空相)에서 sarva는 “모든” 이라는 뜻이고 dharmah는 “法(들)은” 이라는 뜻이며 sunyata는 “空”이라는 뜻이며 laksana는 “특징. 표상”이라는 뜻으로서 “特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表象이나 모습이라는 말이 다른 말도 있다. 즉 nimitta라는 말로서 이것이 一般的인 表象이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laksana라는 말은 nimitta보다도 더 정확하게 어떤 특징적 表象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laksana라는 용어는 부처님의 32상80종 호 라고 할 때의 相을 말하며 이 경우도 부처님에게만 있는 特別한 相을 말할 때 쓰는 것처럼 空性(sunyata)만의 特別한 表象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글번역에서 “모든 法은 空의 표상이다.” 라고 하여도 되는 것이나 그렇게 하면 本質과 表象이라는 二元相으로 생각할 염려가 있으므로 이를 “모든 법은 빈 것을 나타내나니”라고 名詞가 아닌 서술형의 사건으로 표기함으로서 二元相으로 생각 할 수 있는 可能性을 없애버리면서 처리하는 정확한 번역을 하고 있다.
이는 文法的으로도 sunyatalaksana는 명사가 아닌 소유복합어의 범주에 들므로 서 이러한 서술형의 번역이 가능한 것이다.
(2). 생하거나 멸한 일이 없었고 더럽거나 깨끗한 일이 없었고 모자라거나 가득 찬 일이 없었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 文章은 梵本에는 과거형의 문장으로 되어 있으므로 위의 한글번역처럼 번역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한글번역본에서 이처럼 과거형으로 번역된 것이 별로 많지 않다.
이를 不定生 不定滅(일찍이 생한 일이 없었고 일찍이 멸한 일이 없었다.)이라고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 쓰고 있다. 梵本經典을 보지 않고도 이렇게 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깨달음의 선지식이다.
漢文으로는 과거형으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지만 그러한 漢譯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는데 있어서는 확실한 梵本의 단계에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과거에 이렇다는 설명이 되는 셈이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라는 뉘앙스를 주고 있다. 여기서 過去란 太初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太初란 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인가? 이것은 時間的인 事件을 空間的인 事件으로 바꾸어서 생각해야한다. 본래 佛敎는 無始無終을 주장하므로 太初란 말을 다른 뜻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生도 없었고 滅도 없었으니 당연히 太初일 것이며 生도 없고 滅도 없으니 그것은 당연히 本質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太初란 本質을 이야기 하고 그 후 즉 지금은 表象을 이야기 하는 것일 뿐이며 그렇다고 本質이니 表象이니 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다시 한 번 諸法과 空의 關係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本究竟 미래는 末究竟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本究竟이란 本質 또는 알맹이로서 空性이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모든 法이 本質의 表象이라면 本質의 입장에서 보면 生하거나 滅한 일이 없었고 더럽거나 깨끗한 일이 없었고 모자라거나 가득 찬 일이 없었다. 라는 의미는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생하거나 멸한 일이 없었고 더럽거나 깨끗한 일이 없었고 모자라거나 가득 찬 일이 없었다.”에서 梵本은 과연 과거형이 맞는가?
anutpanna에서 an은 不을 의미하고 ut는 上을 의미하며 pan은 pad의 변형으로서 to go를 의미하며 na는 과거분사 접미사로서 pad가 접미사 때문에 격변화를 하여 pan이 된 것으로 과거형이 맞다.
不生不滅과 不增不減에 대하여는 컵이나 그릇에 담겨진 물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이 적당하다.
空性의 설명에서 컵의 물과 그릇의 물에 비유한 것 중 컵 모양은 法이고 물은 空에 비유할 수 있다. 즉 그릇의 모양은 변하나 물이라는 本質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껍데기의 차원에서는 生滅도 있고 增減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라고 보지 말고 그곳에는 반드시 生滅도 없고 增減도 없는 알맹이 즉 本質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더럽거나 깨끗한 일이 없었고(不垢不淨)”에서 더러운 것은 무엇이고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러운 것은 凡夫를 깨끗한 것은 부처를 말하며 또 더러운 것은 煩惱. 妄想을 의미하며 깨끗한 것은 부처의 境地를 이른 말이다.
따라서 本質의 입장에서 보면 凡夫나 부처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小乘에서는 부처의 물 다르고 阿羅漢 물 다르고 凡夫의 물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大乘과 다른 점이다.
大乘佛敎는 물 自體는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단지 그릇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大乘佛敎의 小乘에 대한 敎理的인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은 不增不減이라는 항목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한 번 더 빈 것에 대한 언급을 해주고 있는 것이 다음 항목이다.
2.(다)
(1). 그러므로 사리불아 빈 것에는 색이 없고
是故 ?? 空中無色
여기서 다시 “사리불아”하고 듣는 사람을 지칭해 준 것은 이 단락에서 다시 다른 설명을 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印度 말은 듣는 사람을 반드시 지칭해주며 묻고자 할 때도 반드시 상대방을 지칭하는 呼格이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梵語 經典은 直接話法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 呼稱이 나올 때를 한 단락으로 잡아주고 있다. 漢譯 經典에는 이 호칭이 생략되어 있다.
2(가)의 色卽是空과 2(다)의 空中無色이 대립되는 話頭로 잡을 수 있다. 色이 바로 空이면서 空中에는 色이 없는 경우를 생각해 내야한다.
色이 바로 空이고 空이 바로 色이다. 라고 하면서 “이다”라는 표현에서 2(다)항으로 오면 空中에는 色이 없다. 라고 하면서 “이다”에서 “없다”로 변형되어 표현되고 있다. 이는 A = B인데 A에는 B가 없다는 論理이다. 과연 이 論理가 成立하는 곳이 있는가?
모든 사항은 經驗치를 바탕으로 思考하게 된다. 經驗이 많은 사람일수록 論理的으로 해답이 깊다. 그렇다면 色卽是空이면서 空中無色이라는 위의 論理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는가? 오직 한곳에만 있는 것 같다. 오직 本質에만 있을 수 있다고 본다.
2(다)에서부터 나오는 내용이 般若心經의 核心的이며 백미의 설명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이항 이하에 나오는 모든 항목은 반드시 空中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
따라서 空中 無受想行識. 空中 無眼耳鼻舌身意 空中 無色聲香味觸法 空中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空中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空中 無苦集滅道 空中 無智 亦無得 이라고 보아야 한다.
밝힘이나 앎이나 얻음과 같은 대단한 경지도 반딧불에 비유될 정도로 빈 것(슌야타)이라는 태양빛아래서는 반딧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空中無色에서는 2가지 의미를 느껴야 한다. 먼저 2가의 (1)에서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고나서 이곳에서는 空中無色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色은 空의 表象이기 때문에 空과 色이 다르지 않다는 뜻이지 그 存在性의 强度的인 측면에서 보면 空性(슌야타)이라는 存在性 앞에서는 그 어떤 存在도 存在라고 부를 수 없다는 입장에서 보면 色도 거의 存在가 아니라는 뜻이다.
마치 태양 앞에서 반딧불을 빛이라고 할 수 없듯이 存在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色은 存在라고 할 수도 없다는 뜻이 된다.
또 하나는 次元的 비교이다. 즉 空은 本質的 차원의 이야기이고 色은 現象的 차원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空은 알맹이고 色은 껍데기이다. 따라서 本質的 次元에서 보면 色이란 存在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범어부분을 보면 “없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있는 “nasta"가 아니라 "na"로 표기하고 있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空中無色은 空中無定色 즉 空中에는 정해진 色이 없다는 해석을 할 수가 있고 또 하나는 그 순간의 色은 空의 정해진 相이 아니라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空中無色은 空中非定色으로 볼 수도 있게 한다. 또 이는 空性中無色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空性中無定相으로 볼 수도 있으니 이는 空性에는 어떤 정해진 相이 없다는 뜻이 된다.
또 하나는 비록 “슌야타” 에서는 無色임을 알았다고 하여도 現在의 色만을 “슌야타”의 表象이라고 잘못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제거해야할 대상이 된다는 뜻도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알맹이가 껍데기가 없이 存在할 수 없으므로 어떤 조건에서 그 相을 띠기는 하지만 그 相이 고정된 相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자리는 永遠하지만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영원하지 않듯이 어떤 相도 정해진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맹이를 알맹이로 보고 껍데기를 껍데기로 보았는데도 현재 보고 있는 껍데기가 알맹이의 영원한 껍데기라고 잘못 보는 견해도 제거해야할 대상이라는 이야기 이다.
(2) 느낌 생각 결합 식별이 없다.
無受想行識
(3) 눈 귀 코 혀 몸 의지가 없고
無眼耳鼻舌身意
(4)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 없다.
無色聲香味觸法
(5) 눈의 계층이 없고 이어 의지 식별의 계층에 이르기 까지 없다.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따라서 느낌. 생각. 결합. 식별. 眼. 耳. 鼻. 舌. 身. 意. 色. 聲. 香. 味. 觸. 法 그리고 眼識界 내지 意識界가 모두 이와 같다는 입장을 느껴야 한다.
그다음 (2)항부터 五蘊이 나오고 다음에 12處가 나오고 그 다음에 18界가 나옴은 먼저 “슌야타”의 대상을 五蘊으로 잡았기 때문에 色과 그리고 이어서 느낌. 생각. 결합. 식별 로 五蘊을 취급한 것이며 그다음부터는 阿含經의 순서대로 12處 그리고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라고 하면서 18界의 순서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18界는 界라는 次元이 阿含經에서는 절대로 無我라고 한 적이 없는 것을 여기서는 과감히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聽覺的인 思惟와 視覺的인 思惟(聽覺的으로 思惟된 것의 이미지를 보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 感覺的인 思惟(視覺的인 思惟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그 質感을 느끼는 것)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슌야타”의 質感을 느낄 수 있게 된다.
* 眞空妙有의 참뜻을 알겠다.*
(6) 밝힘과 밝힘 아닌 것이 없고 밝힘의 멸진과 밝힘 아닌 것의 멸진이 없으며
?? 無無明 ?? 亦無無明盡
(7) 이어 늙고 죽음에 이르기 까지 없고 늙고 죽음의 멸진에 이르기까지 없다.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6)번에서는 無明 즉 明이 없고 無明盡 즉 明의 滅盡이 없다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를 모두 한문의 문장으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無明無無明無明盡亦無無明盡
이렇게 써놓으면 해석이 힘들게 된다. 그래서 현장스님은 明에 관한 부분은 생략한 것이다. 無明이 다한 것이 明이기 때문에 明이 없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漢譯에는 “明의 滅盡이 없다”는 말이 없으며 이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여기서는 어찌 보면 12緣起의 부정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明과 明의 滅盡에 기본 뜻이 있는 것이다.
(6)번과 (7)번에 걸쳐서 12緣起의 전 항목이 들어간 것인데 12緣起란 곧 衆生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無明 行 識 名色 六處 觸 受 愛 取 有 生 이 없고(無)와 無明의 滅盡부터 行 識 名色 六處 觸 受 愛 取 有 生 의 滅盡과 그리고 (7)번의 老死와 老死의 滅盡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 衆生의 生滅을 의미하며 이것이 다 사라진 것은 明이라는 이야기와 같다.
따라서 無明이 없고 無明의 滅盡이 없으며 老死와 老死의 滅盡이 없다는 말은 이는 12處가 없다는 말이며 이는 곧 明이 “없다”라는 이야기에 해당한다. 또 無明의 滅盡을 明이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明의 滅盡이라고 하면 阿含經 차원에서는 實相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여기서는 과감히 없다고 하고 있다.
즉 정당한 修行을 거쳐서 얻은 결과라고 할 수 있는 明의滅盡이라는 결과도 空의 입장에서 보면 本質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이것도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한 修行을 거쳐서 얻은 明의滅盡이라는 결과도 空性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空中 無 Q 라고 하고서 Q에 해당하는 것을 아함경 차원에서부터 정확히 순서대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空性에서는 그 어떤 Q라고 하여도 진정으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없다고 하고 있는데 그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대표적으로 五蘊을 예로 들었으므로 Q에다 五蘊을 넣고 부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五蘊이 가장 교리적으로 단순하기 때문에(18界를 地水火風의 四大로 대체한 것) 이를 대표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阿含 敎理의 순서에 따라서 <1> 12處를 부정하고 <2>18界를 부정하고 물론 다음에는 六界라는 차원이 있지만 이는 18界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며 그다음이 五蘊이지만 五蘊은 앞에서 대표적으로 부정하였으므로 다음에 阿含에서 금기시 하던 <3> 明을 부정하고 있으며 <4> 明의 滅盡을 부정하고 있으며 <5> 苦集滅道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8) 괴로움 집기 멸함 길이 없다.
無苦集滅道
여기서 苦集滅道는 明의 앞에 부분임에도 明의 滅盡 다음에 오는 것은 道 때문이다. 어떤 境地는 다음의 境地가 오면 부서져야 하지만 그 境地에 가는 길만은 다시 다음 境地로 가기 위해서는 남아 있어야하기 때문에 明의 滅盡보다도 위의 境地인 것이다.
어떤 境地보다 더 위의 것은 그 境地로 가기 위한 道이다. 그러나 이 道도 앎(智)이라는 境地가 오면 부서져야하기 때문에 부정된 것이며 이 앎(智)도 얻음(得)이라는 境地가 오면 부서져야하기 때문에 부정된다.
그러므로 <6> 智(앎)가 부정되고 <7> 得(얻음)이 부정되었으며 <8> 無得(얻음 아닌 것. 非得으로 보아야 함)이 부정된 것이다.
이제 明과 明의 滅盡이 부정되므로 서 般若部로 넘어온 것임을 알아보아야 한다.
(9) 알음이 없고 얻음(과 얻음 아닌 것)도 없다.
無智 亦無得
먼저 (6)번에서 明을 밝힘으로 번역한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原始佛敎에서 볼 수 있는 窮極的 境地는 바로 修行을 통하여 窮極的 참 存在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 境地를 특히 涅槃(明)이라고 부른다. 涅槃이란 어떤 곳인가? 경전(제일 열반 상응경)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곳에는 옴이 없다. 감도 머물음도 죽음도 재생도 없다. 나루터도 없고 윤회도 없고 의지 처도 없다. … 그러나 진실한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라고 표현되듯이 그곳은 틀림없이 不生不滅이 참 存在인 것이다.
여기에서의 vidya(明)은 明(밝을 명)이 아니라 眀(밝힐 명)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明과 眀의 차이는 明은 기다리면 언제인가는 저절로 밝아지는 것을 의미하고 眀은 어떤 노력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저절로 밝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즉 어떤 修行이라는 能動的인 行動을 통하여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절대로 밝아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며 이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阿含部 경전에서는 모든 敎理가 일방통행으로 한쪽으로 進行하며 逆의 論理가 성립하지 않는다. 즉 凡夫가 修行을 통하여 자신을 聖者的인 人格 體로 바꾸어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般若部 경전에 오면 역의 論理가 성립하는 論理가 제시 된다.
그 예로서 범본금강경 P95의 註 30을 보면 “無數한 有情을 無如涅槃界로 滅度 시켰다 해도 실은 그 어떠한 有情도 般涅槃한 者는 없다.”는 原語에는 般涅槃한 者가 없다가 아니라 “실은 그 어떠한 有情도 般涅槃한 者로 되지 못한다.”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凡夫가 般涅槃 한 者로 바뀌었다고 보지 말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凡夫가 이미 처음부터 涅槃이었다는 이야기 인 것이다.
“衆生卽佛” 이라는 論理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는 凡夫가 聖者이고 聖者가 凡夫라는 이야기 인데 이것은 衆生과 聖者가 같은 것이라는 論理가 아니다.
이를 般若部의 論理로 해석하면 이것은 凡夫가 있음으로 聖者가 있고 聖者가 있음으로 凡夫가 있다는 역의 論理가 成立하는 敎理인 것이다.
이것은 곧 涅槃(明)이 곧 生死라는 論理이다. 이는 生死가 있음으로 涅槃(明)이 있다는 論理가 성립하며 涅槃(明)은 生死가 있기 때문에 성립함으로 涅槃(明)이 곧 生死라는 論理이다.
말하자면 涅槃과 生死를 分別해서 보지 않고 평등한 것이라는 智慧로서 平等智를 말하는 것이며 無分別智를 말하는 것이다. 生死와 涅槃은 서로 緣生의 關係가 된다는 설명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生死와 涅槃을 分別해서 보지 않는 智慧가 般若智인 것이다.
실제로 生死 - 苦 - 修行 - 涅槃 의 순서에서 苦와 修行을 생략하면 生死 - 涅槃 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며 生死란 無明에서 시작되어 12緣起의 과정을 거쳐서 나타난 현상인데 無明의 반대현상이 明 즉 涅槃이므로 결국 涅槃(明)과 生死는 相依相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生死와 涅槃을 分別해서 어느 것이 더 높거나 좋고 어느 것은 낮거나 나뿐 것이 아니라 그 둘이 느껴지는 質感이 平等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전의 양면을 한쪽은 동전이고 다른 쪽은 동전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없듯이 生死와 涅槃을 하나로 보는 智慧를 말하며 이를 無分別智 또는 平等智라고 하는 것이다.
般若部에서는 原始佛敎의 窮極的인 境地인 涅槃을 더 이상 절대시 하지 않고 오히려 生死와 平等한 것으로 보는 智慧를 般若라고 한다.
(*註의 반야부경전의 사상 참조*)
따라서 般若部 경전에서 나타내는 순서를 보면 苦海로부터 修行을 통해서 涅槃(明)을 득한 다음 - 明의 滅盡 - 道 - 알음 - 얻음 의 순서로 진행되면서 부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道에 입각한 실천을 통하여 다음단계를 얻은 다음에 그곳에도 머물지 않고 부정하고 다음단계를 道에 입각한 실천(修行)을 통하여 얻은 다음에 다시 부정하고 다음 단계의 修行(실천)을 통하여 얻고 나서야 다시 부정하고 다시 修行(실천)을 통하여 다음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록 버려야할 얻음일지라도 반드시 그 앞에 실천이라는 범주를 거쳐서 얻어야 하고 그 얻음을 부정하고 다시 실천을 거쳐서 어떤 얻음의 境地를 얻어야 하며 그것은 다시 空性에 비견하여 부정된 후에 다시 道에 입각한 실천을 통하여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혀 얻을 가치가 없는 것이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한 가치를 지닌 것을 얻은 것을 의미하지만 그곳에 머물지 말라는 것이며 다시 깊은 修行(실천)을 통하여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明 다음에 오는 것들 중에서 道와 앎은 실천 즉 修行으로 보아야 한다.
또 하나는 비록 버려야 할 어떤 결과라도 일단 얻고 나면 어떤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즐거움의 결과를 얻게 되므로 힘든 道에 입각한 실천의 대가를 이미 받게 되며 다음단계는 더욱 그 즐거움이 깊어지는 結果를 얻음으로 佛敎의 修行이라는 것이 계속적인 고통스러운 修行 끝에 最終에 가서야 涅槃樂을 즐기는 것이고 그 中間에는 전혀 즐거움이 없고 고통스러운 修行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마다 어떤 즐거움의 보상을 받는 것이다.
境地만 깊어지는 게 아니고 그 진실한 즐거움도 점점 깊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般若部 경전이 끝이 없는 修行과 얻음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窮極에는 어떤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니 그것이 究竟涅槃이라는 最終涅槃이 있다는 명칭의 암시이다.
즉 涅槃을 계속 부정하지만 究竟에 가서 얻는 究竟涅槃이 있음을 암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계속적인 부정과 계속적인 修行을 통하여 究竟涅槃에 들어갈 수 있음을 설명한 부분이 (6)번부터 (9)번까지의 과정에서 나타내려고 하는 또 다른 뜻임을 알아야 하며 이곳이 般若經에서 論하는 가장 核心이 되는 부분임도 알아야 한다.
이제까지의 五蘊이나 12處라든가 18界라든가 明과 無明 그리고 道까지도 아함 部에서 이미 나왔던 용어들이며 이는 空을 설명하고 있는 항목들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전혀 다른 次元의 알음이라든가 얻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이제부터 般若 部의 또 다른 次元이 있다는 설명이 시작된 것이다.
(9)번 문장에서 “알음과 얻음과 얻음 아닌 것”이라는 표현은 반야부에서나 비로소 나오는 用語들이며 이것은 阿含部의 實相인 明을 부정하고 나오는 어떤 境地가 있음을 강하게 暗示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얻었다”는 표현은 무엇인가 즐겁고 좋은 것을 얻었다는 것이지 괴롭고 나쁜 것은 얻었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알음이나 얻음이나 얻음이 아닌 어떤 境地라고 하더라도 空에 비하면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주장하고 있으므로 해서 비록 다른 것을 설명하지만 결과적으로는 空을 설명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 (9)번 문장에서 (얻음 아닌 것도) 없다. 라는 문장은 小品般若經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廣本 般若經에는 나와 있는 문장이다. 略本 般若經에 나와 있지 않은 이유는 다음문장과의 연결을 위해서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얻음 아닌 것도 없다. 라고 한 후에 3.가의 (1)의 문장으로 넘어가려면 3.가의(1)의 문장은
“따라서 얻음 아닌 것도 없는 까닭에 보살에게는”
이라고 해야 하고 이를 漢譯하면 以無無所得故 菩提薩埵 이라고 해야 하는데 이는 無所得이 없는 것이라는 부정의 부정이 되어서 얻는 것이 있는 것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으므로 생략된 것으로 추정된다.
般若部에서는 涅槃이라는 世界도 여러 단계가 있어서 한 층 한층 깊어져간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菩薩4位說을 說하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1. 初發心 菩薩.
2. 行 六波羅密 菩薩.
3. 不退轉 菩薩.
4. 一生補處 菩薩
이라는 基礎的인 分類를 보면 菩薩의 계위를 나누었다기보다는 般若의 世界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緣起門을 說해야 하는데 實相만을 說하고 만다면 마치 實相을 보고나면 緣起의 世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으로 誤解할 여지가 있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實相은 衆生의 緣起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實相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實相을 망집함으로 해서 다시 緣起로 다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緣起가 衆生界에 엉켜서 작용하므로 實相을 보았다고 하여도 아직은 다시 緣起의세계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法華部의 緣起門은 知見門에 포함되어있고 方便門은 일종의 修行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며 그래서 方便에 의해서 衆生제도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如의 단계는 자신이 緣起의세계로는 들어가지 않지만 衆生이 緣起의세계에 들어감을 보는 것이므로 衆生을 修行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자신의 緣起에는 별영향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까지가 般若部에서의 實相에 관하여 모든 설명을 끝낸 것이다. 그렇다면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緣起門을 설명해야 할 차례가 남아 있다.
佛敎는 3층 건물로 볼 수 있는데 아함경은 實相門과 緣起門과 修行門으로 1층을 형성하고 2층은 般若部 經典으로 역시 實相門과 緣起門과 修行門으로 분류되나 阿含部 경전의 實相이나 緣起나 修行과 같은 것은 아니다.
3층을 형성하고 있는 法華部(화엄경과 정토경도 여기에 해당)經典은 知見門과 方便門으로만 나누어진다.
그림으로 표기하면
3층: 法華部: 지견문. 방편문. … 如
2층: 般若部: 실상문. 연기문. 수행문. … 空
1층: 阿含部: 실상문. 연기문. 수행문. … 無我
으로 표기 할 수 있다.
물론 法華部도 如라는 實相門을 나타내지만 이때는 眞理와 완전히 합치된 것이므로 다른 衆生을 위한 實相이요 다른 衆生의 緣起를 보는 것으로 般若部와는 次元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2의 가항에서부터 2의 다항 까지는 반야부의 實相을 나타낸 즉 空을 설명하는 부분이라면 3의 가항은 般若部의 緣起門이 설명된 것이다.
實相을 보았다고 하여도 그냥 본 것에 지나지 않을 경우도 있을 수 있으므로 그리되면 다시 망집에 의해서 緣起의세계로 輪回되니 부처님은 緣起 부분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明에 대한 망집과 空에 대한 망집을 같은 차원에 놓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實相門인 空의 이야기이며 3의 가항이 緣起門이지만 還滅門的인 緣起만 설명되어 있다. 이제까지 實相을 설명하였으므로 緣起門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법문이 달라졌으므로 阿含部의 緣起門과는 次元이 다른 것이다. (般若部의 緣起는 五蘊 緣起的 緣起이고 法華部의 緣起는 12緣起的 緣起이다.)
3. 가
(1). 따라서 얻음이 없는 까닭에 보살에게는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2).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다.
依般若波羅蜜多 心無罣礙
(3). 마음에 가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無罣礙故 無有恐怖
(4).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열반을 다하였다.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3. 나
(1). 삼세의 모든 부처는
三世諸佛
(2).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依般若波羅蜜多故
(3). 다시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셨다.
得 阿褥多羅三藐三菩提
우선 3번 단락은 가와 나로 菩薩과 부처의 경우로 나뉜다.
3번의 가 단락은 般若部 經典의 緣起가 설해지는데 緣起가 說해지기 전에 반드시 實相論이 나온다. 實相이 없는 緣起는 의미가 없다.
實相 緣起
明 無明 12緣起
六界 五蘊 四諦說 緣起
18界 六六法說 緣起
般若部는 實相과 緣起 중에서 實相論에 초점을 두고 첫 支分을 삼고 있다. 緣起論이란 좋지 않은 사항들이고 實相論은 좋은 面을 주제로 한 표현들이다. 따라서 般若部는 緣起論的인 부분이 있음에도 가능하면 이것을 숨기려는 의도가 아주 많다.
그러므로 緣起論的인 表現을 하면서도 實相論的인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의도로 緣起論的인 부분은 還滅門을 중심으로 說하였으며 流轉門的인 것은 생략되어 있다.
般若心經의 끝부분에 “보디 스와아” 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이 있네. 좋구나.” 라는 말이 된다. 아직 般若部인데도 “깨달음이 있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깨달음” 즉 究竟涅槃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어떤 관계냐가 문제이다.
사실은 여기서 부터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시작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부터 얻은 結果 즉 究竟涅槃의 結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구성물 중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구성물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까?
이것은 緣起論的인 차원에서 설명된 부분보다는 實相論的인 부분인 空이라는 부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구성물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空이라는 實相을 말하며 法華部에서 說해지는 如에도 空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얻음이 없는 까닭에” 라고 하면서 實相論的인 좋은 이야기만 나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涅槃을 계속 부정한 끝에 얻은 究竟涅槃이란 말은 空이라는 境地를 다른 말로 表現한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般若部 經典에는 緣起論的인 요소가 存在한다. 그냥 보면 설명 같은 “얻음이 없는 까닭에”라는 부분이 뒤집어봄에 의해서 還滅門的인 요소가 발견된다.
그러나 緣起論的인 요소가 存在하는데도 流轉門的인 緣起는 말하지 않고 還滅門的인 緣起만 설명한 것은 般若部에서는 流轉門的인 緣起는 成立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實相論的인 분위기를 維持하려고 하는 부처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緣起 부분에서는 첫 번째 支分이 중요한데 어느 것이 첫 번째 支分일까?
<1>. 얻음이 있음(얻음이 없는 까닭에)
<2>. 마음에 가림이 있음(마음에 가림이 없으므로) - 最初 支分.
<3>. 두려움 - 두려움이란 느낌 이므로 - (受에 해당.)
<4>. 뒤바뀐 생각 - 생각은 그자체가 想 - (想에 해당.)
<5>. 대승의 죽음 - 行과 識은 연속된 것으로 잘 분리되지 않는 성질이 있음 -(行. 識에 해당.)
위에서 般若部의 緣起는 五蘊緣起를 大乘的 緣起로 가지고 간 것이고 法華의 緣起는 12緣起를 大乘的 緣起로 가지고 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緣起部分은 五蘊緣起 즉 色 受 想 行 識 인데 위와 같이 놓는다면 <1>번의 支分은 어디에 해당할까?
<2>번이 最初支分이라면 最初支分의 앞에는 어느 것도 올수가 없고 단지 實相만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1>번 항은 무엇인가?
마음의 가림이 最初支分이 될 것은 阿含部의 경우로 보아서 당연한데 그렇다면 그 앞의 부분이 問題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이란 선택의 技能이며 잘 보면 깨달음으로 진행하는 반면에 잘못 보면 緣起의 支分이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가림이 있다는 것은 잘못 봄을 뜻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緣起가 발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얻음이 없다는 支分은 무엇을 意味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위의 般若의緣起를 支分들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還滅門(현재의 설명)을 流轉門으로 바꾸면
<1>.얻음이 없음 얻음이 있음.
<2>.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묾. 의지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음.
<3>.마음에 가림이 없음. 마음에 가림이 있음.(最初 支分) <4>.두려움이 없음. 두려움이 있음. 受
<5>.뒤바뀐 생각이 없음. 뒤바뀐 생각이 있음. 想
<6>.열반을 다함. 대승의 죽음이 있음. 行과 識
모든 緣起說에서 잘못 보는 것을 항상 最初支分으로 취급하였으며 이렇게 잘못 보는 것을 無明 또는 妄念 또는 邪見이라고 하였다. 항상 잘못 보는 곳에서 作用하는 것이 마음이었으며 이 마음은 선택의 能力이므로 마음에 가림이 없음을 最初支分으로 삼아야 한다.
위의 支分들에서 마음에 가림이 없음이 최초 支分이라고 할 때 <1>번과 <2>번의 支分들은 <3>번의 마음에 가림이 없다는 말을 說明하는 내용으로서 <1>과 <2>번과 <3>번은 앞뒤가 있는 것이 아니고 時間的으로 同時에 具足되는 事件이다.
이는 마치 無明에는 일정지분의 漏가 포함되어 있듯이 또 想受滅과 漏盡通과 不動阿羅漢이 同時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앞에 것이 일어나고 난 다음 뒤에 것이 일어나는 관계가 아니라 同時에 이루어지는 結果이다.
얻음이 없는 境地가 바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境地이며 그 자리가 바로 마음에 가림이 없는 境地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別途의 支分이 될 수 없다.
般若部의 緣起는 五蘊緣起와 밀접한 關係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부터 五蘊을 기준으로 설명을 하였으며 따라서 그 緣起도 五蘊緣起와 관련이 깊다.
12緣起는 無明다음에 바로 行이 나오지만 五蘊緣起는 色 다음에 바로 行이 오지 못하고 受와 想이 온 다음에 行이 나온다.
佛敎는 어떤 사실(實相 門)을 보는데 있어서 잘 본 쪽과 잘못 본 쪽으로 나누어서 區別하는데 잘 본 쪽은 正見 - 正行 - 幸福 = 修行 門이고 잘못 본 쪽은 邪見 - 邪行 - 不幸 = 緣起 門 으로 분류되는데 邪見을 妄念이라고도 하고 無明 또는 無知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實相 門을 잘 보고 잘못 보는 作用을 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存在가 아니라 선택의 能力이다.”
따라서 <1>번과 <2>번은 <3>번의 설명이라는 結論이다.
<1>번에서 얻음이 없다는 것은 각 단계의 어느 涅槃에도 머물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음으로 해서 최종의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물다.” 라는 설명은 각 涅槃에 머물지 않음으로 해서 반야바라밀다에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음에 가림이 없는 반야바라밀다의 智慧를 無生法忍이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忍자는 참을 忍자를 쓰는데 참을 忍자와 智慧가 어떤 관계일까?
물론 이보다 먼저 이야기 된 음향인(상수멸을 얻은 단계) 와 유순인(四諦法을 완전히 알아낸 단계)이 있다. 따라서 여러 개가 있으므로 이름이 필요한 것이며 그래서 이 단계를 無生法忍 이라고 命名해 준 것이다.
原語는 ksanti로서 참다 의뜻이며 완전한 앎을 jnana라고 하며 이 완전한 앎이 있기 직전의 마치 해뜨기 직전의 여명의 단계처럼 완전한 앎이 있기 직전의 단계의 앎을 ksanti라고 한다.
이는 완전한 앎이 있기까지 끝까지 참아야 한다는 암시가 된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佛之知見)에 이르기 전의 智慧는 모두 忍(ksanti)의 단계로 보아야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華嚴에서는 知바라밀다라하고 法華에서는 知見바라밀다라고 한다.
<3>번의 마음에 가림이 없는 단계는 無生法忍을 얻기 위한 最初支分의 단계를 말한다.
<4>번의 두려움이 없는 단계는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原語로는 trasta로서 떨림으로 表現되는 말이다.
떨림은 물론 두려움으로부터 오니까 떨림을 표현하기 위해서 恐怖라는 표현을 동원 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떨림이란 어떤 진동을 나타낸 말인데 이는 界의 次元을 聯想시키는 單語이다. 界라는 것은 上 法과 下 法의 關係의 構造이다. 이는 두 法 사이를 진동 즉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곧 輪回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슌야타”의 構造를 암묵적으로 나타내는 秘密한 이야기인 것이다. 잘 보면 떨림이 없지만 잘못 보면 떨림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려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암시에서 우리는 空의 구조를 깊이 생각해 내야 할 것이다.
각 緣起들의 支分을 살펴보면
實相 緣起부분
十八界 = 六 觸 - 六 受 - 六 想 - 六 思(行에 해당함)
六界 = 色 - 受 - 想 - 行 - 識
明 = 無明- 行- 識- 名色 -六處 -觸 -受 -愛 -聚 -有 -生 -老死
의 형태를 보이는데 般若部의 構造는 단일 構造를 가진 明의 構造보다는 가장 긴 형태로 늘어진 界의 構造로서 잘 보면 괜찮지만 잘못 보면 떨 수 있는 構造로서 上 法(苦海)에서부터 下 法(彼岸)이라는 構造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떨림이라는 것은 上 法과 下 法 사이에서 진동하는 즉 왔다 갔다 하는 형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般若心經에서는 두려움(恐怖)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空이라고 하는 窮極的인 境地의 構造를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秘密한 이야기 일수가 있다.
<5>번의 “顚倒夢想(뒤바뀐 생각)”이라는 문장에서 想(생각)이라는 말은 그 원어가 samjna는 아니지만 jna는 판단이라는 말이며 이를 통합적 판단이라면 너무 점잖은 표현이며 여기서는 생각이란 짓뭉개어 섞어서 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짓뭉개어 섞는 것은 그 대상이 複數일 때 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뒤바뀐 생각”이라는 용어도 생각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자체가 그 대상이 複數인 것을 표현한 것이며 진자운동이 가능한 重層的인 構造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까지의 설명도 緣起의 형태를 빌려서 空의 構造를 形態的으로 나타낸 說明들임을 포착해야 한다.
위의 3의 가항에서 우리가 분류해 낼 수 있는 것은 般若部에서 보고 있는 衆生과 菩薩의 구분이며 3의 나 항은 부처와의 구분이다.
먼저 菩薩이란
얻음이 없는 까닭에 -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고 머무나니 - 마음에 가림이 없고 - 두려움이 없고 - 뒤바뀐 생각을 넘어서 - 究竟涅槃을 得한 者 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衆生이란
무엇인가를 얻어버리고 -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도 못하고 머물지도 못하며 - 마음에 가림이 있어서(無明. 妄念 = 無智 쪽에 가까움) - 두려움이 있고 - 뒤바뀐 생각이 있어서 - (뒤바뀐 행동에 의해서<行>) - 大乘의 죽음에 떨어진 者 하고 할 수 있다.
(菩薩의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衆生은 뒤바뀐 생각에 의해서 뒤바뀐 行動을 함에 따라서 大乘의 죽음에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즉 行이라는 支分이 있은 후에 識이라는 支分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뒤바뀐 생각에 의해서 大乘의 죽음에 떨어진 者는 一般的인 衆生의 죽음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좀 다른 것인가? 이제까지의 최초의 涅槃도 지난 상태인데 究竟涅槃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동안의 修行은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인가?
<본인 생각>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예류과 에만 들어도 3惡趣에는 떨어지지 않는 다고 부처님이 단언 하셨다. 하물며 阿羅漢의 境地를 이루었고 그이상의 어느 한 단계에서 얻음이 있다는 것은 그 단계에 머물러버린 것을 말하는데 그곳까지의 修行은 인정되어야 한다.
또 大乘의 죽음이라고 표현된 것은 一般的인 죽음과 달리 大乘이란 부처가 되기 위한 길인데 그 菩薩이나 부처가 되지 못했으니 大乘의 죽음이라고 表現된 것이라고 본다. 또한 이러한 論理에 입각하여 極樂世界라는 인시설이 논리상 필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극락정토가 시설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般若라는 용어가 너무 확대 해석된 부분이 많다. 이 般若란 실제로는 智慧는 과정이요 수단일 뿐인데도 般若를 마치 智慧의 結論이나 完成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戒 精 慧 三學이라는 말처럼 慧도 깨달음을 위한 手段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이 그러한 데도 般若가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반야바라밀다라는 말 중에서 바라밀다에 그 무게 중심이 있는 까닭이다.
般若란 그냥 진행하는 智慧일뿐이고 바라밀다란 끝장을 본 것 즉 究竟이라는 말처럼 드디어 그 끝에 도달한 것을 말하므로 둘이 합쳐져서 아주 훌륭한 술어가 되는 것이다.
般若가 그렇게 비쳐진 이유는 영어권에서 般若를 번역할 때 wisdom으로 번역함으로서 그렇게 된 것 같다. wisdom은 철학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종교적인 술어로서 智慧의 實體 또는 슬기로움의 根源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般若(prajna)란 본래 knowledge정도의 뜻이 너무 확대된 것이다. 본래 knowledge는 客觀的으로 증명된 知識을 말하며 客觀的으로 증명되지 않은 知識은 opinion(見解)이라고 한다.
따라서 pra-jna의 앞의 접두사를 번역할 때 우리는 접두사라고 하지만 서구사람은 “앞의 것” 즉 “知識을 先行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
그러므로 “知識(knowledge)보다도 앞에 있는”이라고 번역하면 知識에 先行하는 根源的인 知識이 되기 때문에 wisdom이 된다. 그러나 “前進하는 知識” 이라고 번역하면 “머물지 않고 進行하는 知識”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般若란 머물지 않고 進行하는 知識이며 知識이라는 名詞보다는 動詞인 “아는 것”이라고 해야 보다 가까운 뜻이 되며 반야바라밀다가 머물지 않고 진행하여 드디어 그 최종의 “아는 것”에 도달한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라밀다 쪽에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본인생각*
涅槃도 아트만(atman)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아트만이란 常一性과 常住性을 만족하여야 하는데 涅槃은 常住性은 있으나 常一性은 없다. 따라서 一般的으로 이야기 하면 常樂我淨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常一性이 없기 때문에 아트만(atman)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生死와 涅槃이 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究竟涅槃이라도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니 다시 차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안으로 돌아왔다면 옛날의 차안에 있었던 나와 동일한 것인가? 아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지가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法語나 “井中之蝸”라는 정호선생의 이야기가 해당된다.
衆生과 菩薩의 差異에 이어서 이제 부처와 菩薩의 差異를 살펴보아야 한다.
3. (나)
<1>. 삼세의 모든 부처는(三世諸佛)
<2>.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依般若波羅蜜多故)
<3>. 다시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셨다.
(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와 菩薩은 原因과 結果에서도 차이가 나고 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를 경우는 菩薩이라고 하고 반야바라밀다에 의지는 하지만 머물지는 않는 存在를 부처라고 하는 현격한 差異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머무른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머물다(住) - 漢文에서는 머물 住자가 해당하며 우리말로는 “머물다”라는 말 뿐이지만 산스크리트어에는 2가지가 있다.
<1> pratisthana: 定着 해버리는 것. 주저앉는 것. 더 이상 進行의 意志나 힘이 없는 경우를 말하며 金剛經의 “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字句에서의 住가 여기에 해당한다.
<2>. viharati: 한때 머물다. 즉 移動을 전제로 한 머물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한때 기수國 고독원에 머무셨다. 라고 할 때의 머물음을 viharati로 표기한다.
당시 부처님이 머무시던 정사를 vihara라고 한다. 乘園(가람)에서 작은 집단으로 나뉜 스승과 제자가 修行을 위해서 잠시 머물던 작은 집들을 vihara라고 한다. 이는 修行過程에서 잠시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般若心經에서 菩薩의 머물음을 viharati라고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머물음이란 一時的인 머물음을 나타내며 이는 잠시이고 다음단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머물음이란 菩薩과 부처의 延長線上에서 잠시 멈추다가 다시 부처로 進行함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또 菩薩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잠시 머무른 存在이며 “삼세부처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다시없는 원만한 깨달음(阿耨多羅三邈三菩提)을 얻는다.” 라는 말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고 부처가 되는 일은 결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三世諸佛이 모두 반야바라밀다를 경유하여 부처가 되었다는 설명인 것이다. 또한 이는 반야바라밀다에는 잠시 머물 뿐이지 다시 修行을 통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부처라는 뜻이니 이것이 大乘經典도 佛說이라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또 菩薩은 結論的으로 究竟涅槃(nistha<궁극적인>- nirvanah<열반>)을 얻은 者를 말하며 空(슌야타)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요 이것이 究竟涅槃의 世界라는 또 다른 설명이기도 하다.
漢譯 반야심경에서는 머문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왜 그럴까?
*본인생각*
머문다는 말이 viharati로서 한때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漢字에서는 이를 표시할 방법이 없고 그냥 住라고 하면 영원히 정착해버리는 경우와 구별할 수 없고 또 그렇게 되면 菩薩은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는 存在로 오인할 수 있으므로 빼버린 것으로 보인다.
般若部經典의 목적은 究竟涅槃이며 다음에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음을 암시해 줄 뿐 그 과정을 설명하는 經典은 아니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法華部 經典의 몫인 셈이다. 여기서는 단지 다음에 있을 것을 알려줄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4.(가)
<1>.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반야바라밀다의 큰 진언.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2>. 큰 밝힘의 진언. 다시없는 진언. 동등함이 없는 진언은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3>.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는
能除一切苦
<4>. 진실로 반야바라밀다에서 설한 진언이니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4번 단락은 만트라(mantra)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만트라 중에서 是大明呪라는 대목은 좀 더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是大明呪의 原語는 maha-vidya-mantro 이며 여기서 maha는 “크다”라는 해석보다는 그리스어의 macro와 語原이 같으며 이것과 닮은 말은 라틴어의 magna와 같다.
英語권에서는 magnificent와 같은 말로서 웅장한. 莊嚴한 의뜻이며 이 종교적인 뉘앙스를 가진 이 단어가 maha의 뜻에 가깝다.
따라서 大明呪란 maha-vidya mantro로서 웅장하고 장엄한 明이란 뜻이며 이것은 바로 nirvanah 즉 涅槃 중에서도 窮極의 涅槃인 究竟涅槃(nistha-nirvanah)를 말하는 것이다.
아함부 경전에서 말하는 明보다 한 단계 진행한 웅장한 또는 장엄한 明이라는 말로서 바로 究竟涅槃이 한 단계 진행한 明이라는 말도 되는 것이다.
佛敎라는 것은 먼저 vidya나 nirvanah라는 앞에 형용사가 붙지 않는 明이나 涅槃을 제공하고 나중에 maha-vidya나 nistha-nirvanah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가 설해지기 전에 원초적인 明과 涅槃이 설명되었고 이어서 般若部 經典에서 웅장한 明이니 究竟涅槃이니 하는 형용사가 붙은 明과 涅槃이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阿含部 經典에 이어서 般若部 經典이 부처님에 의해서 說해졌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는 설명은 다음단계가 있다는 暗示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여기는 잠시 머무는 곳일 뿐 그다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般若心經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涅槃이란 根本的으로 무엇인가? 生死를 解脫한 境地를 涅槃이라고 한다. 生死의 불길을 修行의 바람으로 꺼버린 곳 즉 生死가 사라진 곳 그곳이 涅槃인 것이다.
그냥 보통 涅槃에 비해서 究竟涅槃은 어떤 곳인가? 生死를 窮極的으로 解脫한 境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生死와 涅槃은 다른 것인가? 아니다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生死와 涅槃은 다른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래서 大乘佛敎에서 不住涅槃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이 단계에서의 이야기 인지도 모른다.
阿含의 涅槃은 生死를 두려워하는 涅槃인 반면에 般若의 究竟涅槃은 生死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두를 포용하는 涅槃인 것이다.
生死와 涅槃을 구별하지 않는 境地 즉 生死에 있으나 涅槃에 있으나 다름이 없는 그 어떤 가림도 없는 그런 境地를 究竟涅槃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大乘佛敎의 究竟涅槃이란 어떠한 것인가? 大乘佛敎에서의 修行의 마무리 즉 結末은 回向이다. 그렇다면 回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回向인가? 修行者의 경우에는 善根功德의 回向이라는 말이 있고 부처의 경우는 收支功德의 回向이라는 말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功德을 어떻게 回向한다는 말인가?
진정한 功德의 回向이란 대수고(代受苦)를 말한다. 다른 衆生을 대신하여 苦痛을 대신 받는 것을 의미한다. 代受苦하는 곳에 苦痛이 있는 것은 아니고 10종 眞實樂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곳에 진정한 즐거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곳에 두려움은 있는가? 生死輪回도 두려워하지 않고 生死를 품을 줄 알고 涅槃에도 머물지 않는데 그 어떤 것이 두렵겠는가?
이것이 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다.
4번 단락은 mantra(만트라)를 제공하는 것이 目的인데 광본 般若經에는 이 mantra는 觀自在菩薩이 說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4>번 항에서 漢譯經典에는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라고 되어있다.
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진실로 허망하지 않은 반야바라밀다주”로 번역 하므로 써 마치 반야바라밀다가 mantra인 것처럼 오해의 소지를 남겨놓고 있다.
mantra(만트라)는 man-생각하다. tra- 꺼리로서 생각꺼리. 즉 생각의 主題라고 할 수 있으며 이와 닮은 말이 話頭이다.
참고로 다라니(dharani)는 摠持(총지)로 번역되는 말로서 dhar에서 온 말이며 dhar이란 무엇인가를 지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dharma란 法則性을 지니는 것. 줄여서 法性을 지니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dharani(다라니)는 mantra(만트라)를 지니는 것을 말하며 그 결과 dharani는 항상 mantra 보다는 길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mantra가 아니고 그다음 구절인 “아제 아제바라아제 보디 스바하”가 mantra인 것이다.
따라서 <4>항은 “진실로 반야바라밀다에서 설한 진언이니”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mantra가 설해지는 배경이요 환경이요 설명인 셈이다.
4.(나)
<1> 그것은 다음과 같다.
卽說呪曰
<2> 가니. 가니 건너가니 건너편에 닿으니 깨달음이 있네 사바하.
揭提 揭提 波羅揭提 波羅僧揭提 菩提 娑婆訶.
gate gate paragate parasangate bodhi svaha.
gate는 호격과 처소격으로 쓰이는데 gam(to go)에서 온 말로서 과거(수동)분사이다.
pra는 前進. 進行의 분위기이다. paramita에서 (i)도 to go의 의미이다.
예를 들면 六道衆生 중 餓鬼라고 번역된 pra-ita에서 pra는 앞에. 미리. 이미. 의뜻이며 (i)는 가다의 뜻이니 ta가 붙어서 “가버린”의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이미 간자”의 뜻으로 祖上이란 의미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처소격에는 절대처격(absolutive)이 있으며 절대처격에서는 절(clause) 즉 종속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e가 붙어있는 단어로 연속된 것은 주절로 유도하기 위한 종속절로서 절대처격에 의한 종속절로 보아야 한다.
종속절은 주격이 나타내려고 하는 이유와 장소와 때와 조건이나 근거를 모두 만족시키는 구절로서 “가니”를 선택함으로서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니. 가니 건너가니 건너편에 닿으니 깨달음이 있네. 좋구나.”
에서 “가니. 가니 건너가니 건너편에 닿으니” 는 空觀에 의한 거듭 부정의 끝에 바라밀다가 있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para는 paradice(파라다이스)의 개념이 아니다. paradice에서의 para는 “둥글게 경계를 짓는” 의뜻이며 dice는 장소의 의미로서 “둥글게 담이 처져있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佛敎에서의 極樂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paragate의 para는 건너편이라는 개념으로서 어떤 흐름의 건너편이라는 개념이다. 輪回란 말이 원어로 sam(끊임없는)sara(흐름)인 것으로 보아서 輪回의 흐름 건너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바하는 su-aha 로서 su는 “좋다”의 뜻이며 aha는 “말했다”의 뜻이니 “좋구나.” 라고 말한 것이 된다.
註
* 반야부경전의 사상*
원시불교의 궁극적인 경지인 열반을 더 이상 절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生死와 평등한 것으로 보는 지혜를 般若라고 한다. 그리고 열반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般若로부터 반야부 경전의 사상은 출발한다. 般若는 ‘pra-’라는 접두사와 ‘jna’라는 어근으로 구성된 말이다.
이 접두사는 ‘진행적으로. 능동적으로. 머묾이 없이’라고 하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이 어근을 ‘알다’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반야는 ‘어떤 앎의 境地에 머물지 않고 진행적으로 알아 나가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의미의 구체적인 뜻은 여러 가지로 분석 가능하지만 그 핵심적인 뜻은 이렇게 볼 수 있다.
곧 “어떤 법 A는 어떤 법 B와 <1> 緣生關係를 맺으므로 <2> 自性이 空하다라고 아는 것”이 般若이다. 여기서 涅槃을 A로 두고 生死를 B로 두면서 반야는 출발하거니와 “涅槃은 生死와 <1>緣生關係를 맺으므로 <2>自性이 空하다고 아는 것”이 앞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般若인 것이다.
이것이 大乘般若의 시작이거니와 이러한 般若가 있고나면 어떻게 되는가. 더 이상 涅槃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더 이상 涅槃에 머물지 않으면 生死의 세계로 되돌아 갈 것인가. 그렇지 않다. 涅槃의 自性마저 부정함으로서 涅槃에 머물지 않는 것과 똑같이 生死의 世界도 自性이 부정되므로 生死에 머물지 않을 것도 당연한 것이다.
나아가 涅槃에도 머물지 않는데 하물며 生死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뜻을 금강경의 뗏목의 비유를 통해서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열반에 조차 머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그것은 머묾이요 망념일 뿐이다. 따라서 涅槃을 벗어나기 위한 실천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涅槃을 벗어나기 위한 실천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涅槃을 벗어날 것이다. 涅槃을 벗어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境地를 얻은 것(得)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경지는 生死로 되돌아 간 상황이 아니고 涅槃에서 더 진행한 상황이므로 生死보다는 涅槃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단계 진전한 涅槃’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 ‘한 단계 진전한 涅槃’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한 단계 진전한 涅槃’을 A로 두고 ‘최초의 涅槃’을 B로 두면 다시 반야의 판단이 내려지거니와 ‘한 단계 진전한 涅槃’은 ‘최초의 涅槃’과 <1>緣生關係를 맺으므로 <2>自性이 空하다고 아는 것이 또한 般若인 것이다.
이것은 大乘의 般若가 진전되는 것으로 이처럼 머물지 않고 진행하는 앎이 般若라는 뜻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般若가 있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한 단계 진전한 涅槃’에 더 이상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한 단계 진전한 涅槃’에 더 이상 머물지 않으면 ‘최초의 涅槃’의 세계로 되돌아 갈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 단계 진전한 涅槃’의 自性마저 부정함으로서 ‘한 단계 진전한 涅槃’에 머물지 않는 것과 똑같이 ‘최초의 涅槃’의 세계도 自性이 부전되므로 ‘최초의 涅槃’에 머물지 않을 것도 당연한 것이다. 나아가 ‘한 단계 진전한 涅槃’에도 머물지 않는데 하물며 ‘최초의 涅槃’에 머물 이유는 없다.
그러면 이 ‘한 단계 진행한 涅槃’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 이후의 과정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곧 “妄念의 부정이 行을 일으키고 行은 境界를 얻는다. 그러나 그러한 境界에 집착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分別妄念이다. 다시 妄念의 부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行을 일으키고 行은 境界를 얻는다. 그리하여 무한한 자기 부정적 실천이 계속된다.”
여기서 “망념의 부정”이란 涅槃 등을 그 自性이 空하다고 아는 般若를 뜻하고 “行을 일으킴”이란 기존의 경지를 부정하고 벗어나려는 실천을 뜻하고 “境界를 얻음”이란 그로부터 한 단계 진행한 경지를 얻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1)반야→ 실천→ 얻음→(2)반야→ 실천→ 얻음→(3)반야→ 실천→ 얻음 →→→(∞)로 전개되니 이것은 대승적 解(반야)→ 行(실천)→ 證(얻음)이 무한히 전개됨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부정이 般若에 의해 계속되면 그 끝은 어디일까. 무한부정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결코 긍정할 만한 것이 없다는 표현인데 놀랍게도 반야부 경전들은 한결같이 般若(prajna)에 의해 彼岸(para-m)으로 가는(i) 것(ta)이라는 긍정적인 표현을 내놓고 있다. 이것은 무한부정의 진행에 어떤 목표가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彼岸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후의 접미사 ta는 그곳에 窮極的으로 안착함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반야바라밀다는 어떤 境地인가. 반야바라밀다를 설명하는 진술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18空으로 규정하는 것이 주목된다. 곧 “반야바라밀다란 곧 열여덟 가지 空이나니라.”라는 진술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空性의 원어는 sunyata인데 이는 ‘비었다(sunya)’라는 형용사와 달리 무언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사실 “모든 법은 ‘빈 것’의 표상이다.”라는 진술은 빈 것이 단순한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틀림없이 긍정할만한 어떤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빈 것’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긍정할만한 무언가를 암시하여 반야바라밀다와 잘 상응하고 있지만 여전히 소극적인 표현이다. 이에 반야바라밀다와 관련하여 보다 적극적인 표현을 찾는다면 究竟涅槃이라는 표현을 들 수 있다. “보살에게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궁극적인 涅槃이 있다.”라고 설해진다. 최종적으로 究竟의 涅槃을 얻는 다는 것이다. 반야부 경전이 시종일관 涅槃등을 부정하면서 般若에 의한 空觀을 실행해온 것에 비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야부 경전의 사상이란 般若空觀에 의한 무한부정의 과정과 결국 반야바라밀다 ‧ 공성 ‧ 구경열반이라고 표현되는 어떤 결과를 성취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볼만하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끝.
참고로 산스크리트 경전의 般若心經 직역본과 漢譯 般若心經의 차이를 함께 표기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梵語 直譯本 般若心經과 漢譯般若心經의 비교
Maha prajna paramita hrdaya sutram
마하 프라즌야 파라미타 흐르다야 수트람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께 절하옵니다.<한역경전에는 누락된 부분>
거룩한 관자재(관세음)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알아냄이 건너편에 이른 것)에 행하실 때(를 향하여 가실 때)
<?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살펴보시니
<照見>
다섯 가지 근간(蘊)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성품이 모두 비었음을 보셨느니라.
<五蘊 ???皆空(度一切苦厄)> (범본에는 度一切苦厄 이라는 말은 없음)
여기에서 사리불아 색은 빈 것(空)이고 빈 것은 또한 색이니
<? 舍利子 ???>
(왜냐하면) 색을 떠나 빈 것이 없고 빈 것을 떠나 색이 없어(없으며)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이 바로 빈 것 이오 빈 것이 바로 색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색의 본질이 빈 것 이오. 빈 것의 표상이 색이기 때문이다. 라는 내용)
<色卽是空 空卽是色>
느낌과 생각과 결합(작용)과 식별 또한 이와 같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여기에서 사리불아 모든 법은 빈 것을 나타내나니
<舍利子 是諸法空相>
생하거나 멸한 일이 없었고 더럽거나 깨끗한 일이 없었고 모자라거나 가득 찬 일이 없었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그러므로 사리불아 빈 것에는 색이 없고
<是故 ?? 空中無色>
느낌 생각 결합 식별이 없다.
<無受想行識>
눈 귀 코 혀 몸 의지가 없고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 없다.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눈의 계층이 없고 이어 의지 식별의 계층에 이르기까지 없다.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밝힘과 밝힘 아닌 것이 없고 밝힘의 멸진과 밝힘 아닌 것의 멸진이 없으며
<?? 無無明 ?? 亦無無明盡>
이어 늙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없고 늙고 죽음의 멸진에 이르기까지 없다.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괴로움 집기 멸함 길이 없다.
<無苦集滅道>
알음이 없고 얻음[과 얻음 아닌 것]도 없다. <적색부분은 대품반야경에만 있는 내용임>
<無智 亦無得>
따라서 얻음이 없는 까닭에 보살에게는
<以無所得故 菩堤薩埵>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다.
<依般若波羅蜜多 心無罣碍> 礙
마음에 가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無罣碍故 無有恐怖>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열반을 다하였다.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삼세의 모든 부처는
<三世諸佛>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依 般若波羅蜜多故>
다시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셨다.
<得 阿耨多羅三邈三菩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반야바라밀다의 큰 진언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큰 밝힘의 진언 다시없는 진언 동등함이 없는 진언은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는
<能除一切苦>
진실로 반야바라밀다에서 설한 진언이니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그것은 다음과 같다.
<卽說呪曰>
가니, 가니 건너가니 건너편에 닿으니 깨달음이 있네 사바하.
<揭提 揭提 波羅揭提 波羅僧揭提 菩提 娑婆訶>